[카테고리:] Lv15

  • 정신적 자유를 얻는 일

    정신적 자유를 얻는 일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한 사람들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수많은 위인들은
    대개 주위 사람들이 가진 삶에 대한 믿음대로
    그런 모습의 삶을 살았던걸까.
    아니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절대 그게 가능할 리 없다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
    오롯이 혼자의 믿음으로,
    세상 모두의 반대와 상반된 믿음을 부숴버리면서
    무언가를 창조해낸걸까.

    어쩌면 그렇게
    세상 모두의 확신을 깨부숴버리고 나서,
    뒤늦게 세상 사람들이
    ‘아, 저게 되는 일이었구나.’라며,
    사후적으로 위인들을
    위대한 사람이라 믿기 시작한건 아닐까.

    타인의 믿음과 나의 믿음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어떠한 상황을 판단하면,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 믿음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그 믿음에 영향을 받기로
    스스로 결정했을 때다.

    그래서
    우리자신의 믿음이 중요하다.
    타인의 믿음은
    그 타인의 수가 많을수록
    마치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 우리를 바꿔버리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1912년 국제육상경기연맹이 세계기록을 관리하기 시작한 이후,
    육상 100m 달리기의 마의벽은 언제나 10초였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선수들이
    10초 초반대까지 밀어붙였으나
    인간이 100m를 10초 전에 주파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모두가 믿었다.
    하지만 56년이 지난 후,
    짐 하인즈 선수가 9초대로 100m를 주파해버렸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한계라 믿었지만,
    그는 타인들의 믿음 대신 자신을 믿었다.
    재밌는 건,
    그 일이 있고 나서 우후죽순
    다른 선수들도 10초라는 마의 벽을
    넘어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타인의 믿음은 강력하지만,
    그 믿음은 오직
    남의 눈치를 보고 순종적인 자에게만 유효하다.
    그래서
    우리가 타인의 믿음에 따라
    우리의 믿음을 바꾸기로 결정하지 않으면,
    타인의 믿음은
    사실 아무런 힘이 없다.

    이제 믿음을 깨부술 차례다

    당신은 이 레벨에서 알게 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한가지 믿음을 깨부숴야 한다.
    그건 바로,
    ‘남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신념이다.
    진화적으로 우리 뼛속 깊숙이 새겨진
    이 잘못된 믿음은,
    먹는 족족 지방을 늘리고
    매일 단 음식만 찾아다니는
    인간의 진화적 본능보다
    100배는 더 해롭다.

    이미 우리는
    인간이 어떤 마음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하는지 알고 있다.
    인간은
    전혀 합리적이거나
    타당하거나
    현명한 방식으로 상대를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사실 타인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
    한없이 편협하고 속물적인 관점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저 두려움과 시기심이 전부다.
    쇼펜하우어의 말마따나,
    속물들은 탁월한 정신적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애써 감추던 열등감과 은밀한 시기심이 새어나와
    고요한 원망감과 혐오감을 느낄 뿐이다.

    타인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정말이지
    우리 인생에 하등 무의미하다.

    정신적 자유와 해방의 놀라운 경지

    타인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전긍긍하는
    ‘인간적인 굴레’에서 자유로워지면,
    인간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억지스럽지 않은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으로
    늘 존재하게 될 것이고,
    인간이 집착하는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
    전혀 지배당하거나 휘둘리지 않는
    의연하고 당당한 존재가 되어갈 것이다.

    물론, 마음의 각오는 단단히 해둬라.
    세스고딘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이단자를 어떻게든 화형시키려고 하니까.
    당신을 어떻게든
    흠집내고 끌어내리고 싶어할 것이다.
    아마 타인의 평판에 매달리고
    절절 매는 습관을 끊는 건,
    탄수화물 중독이나 라면 중독을 끊는 것보다
    10배는 어려울수도 있다.

    하지만 그 중독성이 아편수준이라한들,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끊어야하듯이
    결국에는 끊어내야 하는 일이다.
    적어도 지옥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아
    최고의 자신을 조각해
    원하는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 집단이 개인을 세뇌시키는 메커니즘

    집단이 개인을 세뇌시키는 메커니즘

    타인이 우리에게 가지는 기대와 믿음

    타인이
    우리에 대해 가지는 믿음은
    무엇일까.

    내 입장을 대변해주고
    나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해주면,
    인간은
    그 주장이 옳은 것이며
    그 사람이 현명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믿음이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기보다는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경향이
    매우 강하다.
    결국 우리에 대한 타인의 믿음이란,
    지 맘에 들게 행동하고
    지한테 유리하게 말하면
    좋은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이라는
    정해진 결론 위에
    세워진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의 믿음과 기대를 배신하지 않으며 살수록,
    자연스럽게
    타인들로부터 이쁨받고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의 모습이
    그들의 인생이나 가치관을
    늘 지지하는 일종의 증거로서
    그들 눈에 비춰질테니까.

    권력을 부여하다

    집단은 깨달았다.
    인간의 이런 특성을
    잘 활용하면 되겠다는 사실을.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들을
    예측가능하고 통제가능하도록
    내 입맛에 맞게 길들이기 위한 방법을.

    집단은,
    정해진 룰대로,
    이미 잘 길들여진 기존의 구성원들이 하는 대로,
    명령과 규칙에 잘 순종하는 개인들에게
    지위와 권력을 부여했다.

    이는 곧
    순종적으로 굴며 고분고분하게 살면
    남들보다 높은 위상을
    보상으로 얻게된다는 걸 의미했다.
    착실한 모범수가 되면,
    그 집단 안에서
    더 높은 지위와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잘 길들여진 모범수들이
    힘을 가지게 되면서,
    그들은
    집단의 규율대로 움직이지 않는 이단아들을
    좀 더 위력적으로 처단할 수 있게 되었다.
    힘을 가진 모범수들은
    자신들과 다른 각양각색의 개성 강한 이단아들에게
    효과적으로 모욕과 수치를 주고
    그들이 손가락질 당하고 비웃음을 사게 만들었다.

    이는 실제로
    처벌받는 자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진화적인 이유로
    남들 사이에서 무시당하고 낮은 위상을 가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위상을 곤두박질치게 만들고 나면,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은
    큰 고민없이 그가 낮은 위상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하고
    마음껏 조롱하고 멸시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며 생각했다.
    ‘시키는대로 순종하며 눈에 띄지 않아야지.’

    왜 힘을 얻은 모범수들은 이단아를 미워했을까

    권력을 부여받은 모범수들이
    자신의 개성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단아를
    그렇게까지 미워하지 않았다면,
    혹은 그를 처벌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면,
    집단이 개인을 세뇌시키는 메커니즘은
    지금처럼 효과적으로 작동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집단의 세뇌 메커니즘은
    매우 잘 작동했다.
    모범수들은
    집단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단아들을 증오했기 때문이다.

    왜 그리 미워했을까.
    타인이
    자기처럼 집단의 룰을 따르든
    자신의 개성을 따라 마음대로 살든,
    그게 그들과 사실 무슨 상관일까.

    상관이 매우 많다.
    비루한 자일수록
    탁월한 자와 함께 있으면
    자신의 비루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불만없이 남들이 하는대로,
    집단이 시키는대로 따르면서
    만족스럽게 잘 지내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런 삶이 비루하고 슬프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처럼 남들이 기대하고 원하는대로,
    집단이 정해놓은 규율대로 살지 않고
    자신만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불편해하고
    어떻게든 짓밟고 싶어한다.
    심지어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함을 느낀다.

    모범수들에게 가장 끔찍한 존재는,
    자신들에게 굴종을 종용하는 ‘집단’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 다르게
    진정한 삶을 살아가려는 이단아다.

    평범한 자들의 시기와 질투

    앞서 말한 이유로,
    평범하게 고분고분 룰을 잘 따르는 사람들에게
    탁월한 자들은
    가장 악랄한 적이었다.
    끝없이
    자신의 비루함과 고루함을 깨닫게 만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괴테의 말처럼,
    내 옆에 있는 누군가의 고결함은
    나의 품위를 땅에 떨어뜨린다.

    이와 관련한 절박함은
    생각보다 너무 강력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눈앞에 나타난 탁월한 자는
    말 그대로 ‘미친XX’여야만 했다.
    어떻게든 그 자는
    탁월한 게 아니라
    부적응적이고
    멍청하고
    아둔하며
    최악인 인간이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 자와 대비되는 내가,
    실은 그저 초라하고 비참한
    꼭두각시처럼 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의구심을
    떨쳐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세뇌당했다

    그들의 절박한 몸부림을 보며,
    집단은 깨달았다.
    순종적인 모범수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까스로 자신만의 길을 걸으려는 못된 자들을
    척결할 수 있구나.

    게다가 인간은
    타인의 믿음에 쉽게 흔들리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누구나 삶의 의미나 목적을 찾지 못한 채
    공허함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모로 인간은,
    아주 효과적으로
    집단에 세뇌당했다.

  • 세상은 당신의 두려움을 이용한다

    세상은 당신의 두려움을 이용한다

    위상은 진화적으로 중요했다

    ‘위상’이란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사회 내에서,
    자신이 자리한 지위, 위치를 말한다.
    얼마나 우월하고
    영향력이 있는 위치에 있는지,
    다른 이들의 위협이나 배신으로부터
    얼마나 안전한지,
    무리 내에서 얼마나 힘이 있는지
    같은 것 말이다.

    이게 인간에게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소외되고 버려져서
    혼자가 되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와 같다.
    인류가 지구에 존재했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간은
    부족사회나 무리집단 내에서
    낮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어선 안 됐다.
    그래서는
    내가 먹을 음식과 내 아이가 먹을 음식을
    충분히 얻을 수가 없었다.
    위상이 낮으면,
    발언권도 영향력도 힘도 없으니까.
    아프거나 다쳐도
    한정된 자원인 약초나 치료제를 얻기 어려웠다.
    혼자 버림받을 가능성도 늘 높았다.
    예를 들어
    부족원 중 일부를 포기해야 하거나 떼놓아야만 한다면
    낮은 위상에 있는 부족원을 가장 먼저 포기할테니까.

    이러한 진화적 이유로
    인간은 집단에서 낮은 위상을 가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한다.

    정말 혼자 버려지는 것만큼 생존에 위협적일까

    인간은
    그 어떤 동물들보다 높은 사회적 연대를 통해
    종의 생존을 얻어낸 동물이다.
    각 개체 하나하나가 가지는 생존력이나 전투력으로만 보면,
    인간은 그 어떤 동물보다도 취약한 편에 속한다.
    그러니 아마 그 집단에서
    약간만 변두리에 위치하는 것만으로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낮은 위상이 충분히
    생존에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동물 중에는
    자신의 집단 내 사회적 지위나 위상이 낮아서
    제대로 새끼를 기르고 자신이 살아남는 게 어렵다고 판단하면,
    임신상태에서 태아를 다시 흡수해버리거나
    태어난 새끼를 다시 잡아먹어버리는 동물도 있다.
    이는,
    위상이 개체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두려움을 이용하는 세상

    세상은
    그 두려움을 이용해
    인간을 길들인다.
    학교에서는
    고분고분하게 순종하는 일을
    미덕이라 가르치고,
    어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정답에 의문을 가지는 걸
    비정상이라 세뇌시킨다.
    남들이 하는 대로,
    남들이 따르는 대로
    복종하고 따르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것이라 가르친다.

    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얼 위해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의 방식과 마음가짐을 택해야 하는지는
    이미 다
    ‘올바른 모범답안’이 정해져있다.

    시키는 대로 잘 해내고
    정해놓은 규칙대로 잘 지키면,
    충분히 이쁨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무시당하지 않게해주겠노라
    약속한다.

    하지만 만약
    집단의 규율과 절차를 무시하면,
    낮은 위상을 가지게 함으로써
    개인이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끼게 만든다.
    각자가
    자신의 개성과 고유한 정체성을 반영해
    독자적인 삶의 노선을 걷는 건,
    비도덕적이고 부적응적인 것이므로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사람들은
    그런 이단아에 대해
    비웃고,
    조롱하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고,
    업신여기며,
    무시한다.

    이건
    남이 정해놓은 대로 살지 않으면,
    영원히 지속될 고통이자 협박이다.

    모나지 않은 평균적인 삶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리 목놓아 외치는
    ‘모나지 않은’,
    ‘평범한’,
    ‘남부럽지 않은’ 삶이란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이미 하도 들어서
    삶의 정답을 다 알고 있다.

    어른 말씀 잘 듣고,
    남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이기적으로 굴지 말고,
    늘 상대에게 양보하고,
    학교 가서 열심히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아무리 좀이 쑤셔도
    자리에 앉아 수업 잘 듣고,
    과제 착실히 잘 제출하고,
    시험 열심히 보고,
    좋은 대학 가서 남들에게 인정받고,
    학점 열심히 따고,
    스펙 쌓아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군말없이 힘든일 척척 잘 해내서,
    회사에서 인정받고,
    남들에게 미움받거나 찍힐 일 하지 말고,

    적당히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집도 사고,
    대출 갚아가며 성실히 저축하고,
    퇴직 후에는
    이제 모아둔 돈으로 자식 결혼시키고,
    나나 배우자가 아플 때는
    모아둔 돈으로 병원다니며 치료받고,
    그렇게 시간이 다 되면
    미련없이 눈을 감는 삶.

    이런 일련의 모습들을 합친 게,
    바로 우리나라가 숭배하는
    ‘남들 눈에 튀지 않는 삶’이다.
    아니, 정확히는
    시키는대로 살아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삶.
    사회, 국가, 조직, 집단은
    모든 개개인이 딱 저렇게만 살다 가길 바란다.
    우리 입장에선
    그저 사회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완벽하게 같진 않아도
    의외로 엇비슷하게 살아진다.

    그런데,
    대충 읽어보면 사실 꽤 그럴싸한데
    왜 이리 자살률과 출산률은
    미쳐날뛰는걸까.

    아, 물론 그런 건 있다.
    저걸 지키지 않으면,
    개인은
    그 무리에 있는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거친 비난과 조롱, 모욕을 얻게 될 것이다.
    자발적으로 저런 삶을 산다기보다,
    그저 두려움에 굴종한 결과일 수 있다는 말이다.

  • Lv15. 비웃음을 견뎌낸 왕

    Lv15. 비웃음을 견뎌낸 왕

    이제 우리는
    인간이 극도로 혼자 소외되고 버려지는 걸 두려워하는 본능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가 되어 버려지는 것 외에도
    타인에게 지배당할만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건 바로,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낮은 위상을 가질까봐
    두려움에 떠는 습성이다.
    이건 인간의 유기불안과 함께,
    세상이 인간을 농락하는 데 쓰이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이번 레벨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위상에 집착하는 존재인지,
    그리고 세상은 그걸 어떻게 이용하는지,
    그 조종과 세뇌에 정말 당해주며 살 이유가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이 레벨까지 렙업을 마치고 나면,
    이제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속박당하는 삶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정신적인 자유를 얻은 존재의 관점에서
    삶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할 것이다.

  • 저항하지 마라

    저항하지 마라

    샤먼킹

    예전에 샤먼킹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타케이 히로유키 작가의 대표작으로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만화였다.
    샤먼들이 등장해서 서로 전투를 하는 내용인데,
    주인공인 아사쿠라 요우가 만화의 어느 지점에선가
    한참 성장을 한 후 상대의 공격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열몇살이 채 되지 않던 당시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항상 힘을 막아내고 물리치고 되받아치고 공격하는
    전투만화들을 사랑해왔던터라 ㅋㅋ
    공격을 해도 죄다 흘려버리는 컨셉에
    적잖이 당황하며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런 류의 아이디어들은 사실
    다분히 불교적이다.
    개인적인 흥미로 동국대에서 명상지도자과정을 들을 때,
    대학 시절 불교철학 교양수업을 들었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불교에서는 굳이 저항하고 받아치지 않는다는 걸.
    그저 흘려보낸다는 걸.
    그들은 그저 알아차리고 오히려 마음을 내려놓은 채
    그저 바라보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고요함을 얻고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사실 불교가 아니라도 오랜시간 검증되어온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세계 3대 영적지도자로 꼽히는 에크하르트 톨레도
    종교는 없지만 ‘저항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걸 보면.
    내 마음에도, 나의 상황에도,
    우리는 굳이 저항할 필요가 없다.

    순종하란 건 아니다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 순종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당연히 굴종적으로 굴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일에
    에너지를 소진하며 우리 삶을 낭비할 이유는 없다.

    피로감의 원천

    피로감의 원천은,
    받아들이기 힘들어서다.
    우리가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용납하기 힘들어서다.

    그러나 사실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 자체는
    그리 피로감이 쌓이는 일이 아니다.
    피로한 건,
    저항하느라 버티느라 걱정하느라
    힘을 쓰고 경계하고 긴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항하고 힘을 겨루는 대신,
    그저 흘려보낼 수도 있다.
    그저 계곡물이 온갖 바위모퉁이를 부드럽게 지나가듯.
    바닷물이 그 어떤 기후변화에도 의연하듯.
    우리가 종종 쓰는 표현처럼 ‘물 흐르듯’.

    버틸 이유는 없다

    우리는 대개 소신과 신념을 위해 ‘버티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굳이 버틸 이유는 없다.
    그건 마치,
    어린어이가
    친척어른이 말을 시킬 때
    대화하는 게 갑갑하고 싫어서
    어떻게든 입을 꾹 닫고 아무말도 안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거나
    가만히 째려보는 것과 비슷한 것인데,
    이건 비단 사춘기 꼬마아이들에게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우리는 명절날
    공부는 반에서 몇등이나 하냐,
    대학 어디 다니냐,
    취직 안 하냐,
    결혼 안 하냐,
    집은 샀냐,
    애는 안 낳냐,
    와 같은 질문을 친척어르신들이 던질 때
    애써 웃어주며
    적당히 둘러대곤 하는데,
    사실 아이들의 입꾹닫은 이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ㅋㅋ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기서 ‘저항’하는 일은,
    심히 무의미한 일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뺏기는 일이다.
    물론 웃어넘기며 아무 감정적 소모가 없다면 괜찮지만,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긴 그렇다지만)
    묘하게 나의 감정적 고요함에 잔물결이 일어난다 ㅋㅋ

    경계를 세우고, 이해해줘라

    자, 그럼 이런 숱한 문제들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라는거냐.
    일단 인지적으로.
    경계를 떠올려라.
    우리의 통제영역이 어디까지인지 경계선을 다시 한 번 떠올려라.
    그리고 통제영역 바깥이면 이해해줘라 ㅋㅋ

    응..?!
    뭘 이해해줘.
    저 눈치없는 친척이 맨날 나한테
    결혼 안하냐, 집장만 안 하냐, 애 안낳냐고 난리인데
    내가 뭘 이해해줘 저런 사람을.

    ㅋㅋ 아니다, 그래도 이해해줘라.
    뭐 그만의 세계와 합당한 이유와 상식과 의무가 있겠지.
    사실 우리에겐 그를 이해해주고 말고 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이해해줘라.
    어차피 그건 그의 자유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 우리의 통제권을 되찾아오도록 한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든 우리의 자유고
    그 누구도 감놔라 배놔라 할 수 없다는 걸
    가슴에 콱 새겨라.
    그러면 저항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은, 전적으로 우리꺼다.
    우리가 판돈을 건 게 아닌데,
    우리 돈으로 남과 저항하고 씨름할 이유가 있나.

    (만약 여기까지 읽고, 현실은 판돈을 걸고 돈을 따고 잃는 게임이 아니라, 이 돈이 우리꺼지만 우리손에서 돈을 강탈해가려는 무자비한 자들과의 관계인 거 아니냐!! 라고 말한다면,
    캬. 당신은 놀라운 통찰력의 소유자다.
    당신이 깨달은 그게 바로, 세상이 좀 댕같은 이유다.
    자, 이제 다시 하려던 이야기로 돌아가자.)

    흘려보내고 반응을 지켜보자

    근데 그렇게, 내 반응은 내 꺼라면서 상대방을 고려 안해버리면… 사이가 나빠질텐데 친척들하고?!!

    그럼 계속 맞춰주든 저항하든 에너지 쓰며 살면 된다.
    하지만 각자의 자유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눈치없는 친척 어르신들이
    적어도 상대가 불편한 질문을 설령 본의아니게 던졌더라도
    상대가 그에 대해 호의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아 내가 그의 불편함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잽싸게 물러선다.
    그가 최소한의 배려심과 사고력을 갖춘 분이라면.

    그런데 만약 그가 그렇게도 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이어가야할 관계인자 고민해봐야 한다.

    혈연의 저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글을 마치자.
    우리는 보통 혈연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혈연만큼 사람들이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게 하는 것도 없다 ㅋㅋ
    나의 길지 않은 개인상담 경험 속에는
    가족관계 문제로 상처받고 피흘리는 내담자의 비율이
    절반이 넘었다.

    언젠가 따로 글을 쓰겠지만,
    혈연이라는 사실이
    반드시 그 사람과 관계를 이어가야하는
    신성불가침의 이유가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혈연관계인 사람이
    무례하고 저급하고 속물적인 사람으로 당첨되느니,
    차라리 가족이 없는 게 나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내 가족을 끔찍하게도 사랑하지만,
    그들이 나와 가족이라는 건 그들과 끈끈해질 계기였지
    그들과 내가 서로 평생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내 부모가 날 아끼고 보살펴주어 그들과 깊은 관계를 이어가는거지,
    그냥 날 낳아줬다고 해서 그런 관계를 이어가는 게 아니란 이야기다.
    형제자매도 매한가지다.
    사는 내내 서로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고 받았기에 지금 우애가 좋은 것이지,
    피가 섞인 게 솔까말 그냥 우연인거지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다만 여기서 우리는 저항하게 된다.
    어차피 이 사람은 가족이고 나와 뗄 수 없는 사이니,
    이렇게 하지 마라, 저렇게 살지 마라,
    최소한 이건 해야지, 하면서.
    그럴 필요 없다.
    그건 상대의 자유다.
    대신 이 관계를 이어갈지도, 내가 어찌 반응할지도
    철저하게 나의 자유다.
    그냥 내버려두고 흘려보내라.
    각자의 자유를 존중하고.
    저항하지 말자.

    혈연관계야말로, 관계를 끊을 자유가 없어서
    우리가 흘려보내지 못하고 저항하게 되는 강력한 관계다.
    그런데 생각을 바꿔야 한다.
    패륜? 뭔 패륜.
    부모가 자식에게,
    배우자가 서로,
    형자자매가 서로,
    그것만 유독 뭐 엄청난 것처럼 잡아놓은 건
    그저 사회와 문화에서 그러기로 정한 약속일 뿐이다.
    거기에 무슨 엄청난 영혼이 깃든 게 아니라고.

    사회구성원이 그런 삼강오륜에 얽매이는 게 좋지.
    지배하고 관리하는 입장에서야.
    그런데 정작 왕족이었던 킬방원은
    형제 다 쳐죽이고도 잘만 왕으로 살았는데,
    일개 시민인 우리는 왜 거기에 아직까지 얽매여야 하나.

    우리나라 민법이 5개의 ‘편’으로 구성되는데, 그 중 두 개가 친족편, 상속편인 이유가 뭘까.
    가족 그게 그리 학교에서 가르치는만큼
    영원불변하고 강력한 그런 게 아니다.

    마치며

    이제 우리는 안다.
    저항하는 대신 흘려보내는 일이 퍽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케이스스터디도 했다.
    무례하고 눈치 밥말아쳐먹은 친척어른 이야기도,
    혈연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경계를 세우고 이해해주라는 이야기도.

    이 정도만 알게 되었어도, 필요한 건 다 안 셈이다.
    이제 우리는 시도해볼 수 있다.
    마음도 몸과 같아서,
    갑자기 250kg 스쿼트를 할 수 없듯이
    늘 눈치보고 참던 사람이 갑자기 강해지는 건 불가능하다.
    일상 속에는 다행히도 우리가 저항해야 할 크고작은 것들이 무수히 많으니,
    1kg핑크덤벨부터 무게를 늘려가듯이,
    하나씩 저항하는 대신 흘려보내는 일을 연습해보자.

    삶이 아주, 쾌청해지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ㅋㅋ
    꾸준함이 답이다.
    원석을 내리쳐라,
    신이 인사를 건넬 때까지.

  • 중2병이 가진 비범함

    중2병이 가진 비범함

    중2병

    그런 말 들어봤을지도 모르겠다.
    중학생 때.

    ‘쟤 요새 중2병 걸렸잖아.’
    ‘사춘기라 그래 쟤가 요새.’
    ‘한창 외모 신경쓰고 머리 피부 신경쓸 때지.’
    ‘자의식 과잉일 나이지. 다 자기 쳐다보는 거 같고 남들이.’

    어른들은 예나 지금이나
    고만한 나이쯤 되는 아이에게
    그렇게 말하곤 한다.

    … 근데 형님들.
    진짜야..?
    진짜 사춘기라 그런거고,
    이제 니들은 안 그런 게 맞아..?

    혹시 나이 60 넘어서도 여전히 그러면서,
    체면 때문에 안 그런 척 하는 거..
    아니겠지…?
    에이… 아닐꺼야…? 설마..

    위선

    늘 이야기하지만,
    어른들에게 속지 마라.
    살만큼 살고 나이를 먹으면
    자동으로 성숙해지고 현명해진다는 말은,
    당신이 변기에 오래 앉아있었으니
    더 매끈한 똥이 나올거라고 외치는 것만큼이나
    어이없는 소리다.

    이 말이 자기한테 내세울 게 나이밖에 없다고 착각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심기를 긁을 걸 알지만,
    내가 보기에는 더 살았다고 해서
    덜 산 사람보다 현명하고 지혜로울 이유는 거의 없다.
    더 오래 산 누군가가 더 현명하고 성숙한 건,
    결코 그가 단지 몇천번의 밥을 더 먹고 더 잠들어서가 아니다.
    그는 자각하든 하지못했든 스스로를 조각해왔던거다.
    깎고 가다듬고 가끔은 생채기도 내고 실수도 해가면서.
    그러니 어리다고 함부로 들이대는 어른놈들은
    말하는 것 중 태반이 구라라고 봐도 무방하다 ㅋ

    그렇게 어른이 된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내가 소위 말하는 ‘중2병’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하지만 체면이 있으니 이제 중2병이 지나간 것처럼
    그렇게 평생을 연기하며 살고 나면.
    그렇게 어른이 된다.

    어른은,
    망신당하고 조롱당할 게 무서워서
    더이상 중2들처럼 함부로 도전하지 않는다.
    상처받고 주저앉을 게 두려워서
    더이상 온마음을 열고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남들을 의식하며 살아온 게 통째로 부정당할까봐
    사회가 시키는대로 하지 않는 놈들을 미리 화형시킨다.
    부러우면 지는거라서, 그런 모습은 비웃음을 살거라서,
    부러워도 아닌 척, 원해도 안 원하는 척을 열심히 한다.
    남들이 날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무시하고 배척할까봐,
    나를 배신하고 타인의 기준에 맞는 사람으로 살기로 한다.

    결국에는

    결국에 이 ‘어른’이라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것인가.
    글에 굳이 하나하나 쓰진 않겠다.

    확실한 건,
    그들은 살던대로, 익숙한대로 가다간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자신은 잘못한 것도 없고
    남들 다하는대로 할 거 해내며 살았고
    착실하게 성실하게 바쁘게 살아왔는데,
    오지게 억울하게도 남은 것도 없고
    공허하고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나이가 먹어간다.
    이런 내 삶이 가엾고 괜히 짜증이 치밀어오르기도 한다.

    변화

    달라질 수 있다.
    움켜쥔 걸 내려놓을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중2때처럼
    진심을 다해 용기를 내볼 수 있다면.

    고로,
    중2병은
    병이 아니라,
    위대함이다.

    적어도 중2는 좀 솔직하잖아.
    자기가 남의식하는 거 인정도 좀 하고.
    젠 체 안하고 대놓고 좀 예민하기도 하고 ㅋㅋ
    우리 어른들하곤 다르게.

  • 직장인이 회사에서 느끼는 극도의 피로감

    직장인이 회사에서 느끼는 극도의 피로감

    사회화

    모든 인간은 연기를 한다.
    그게 사회가 원하는거니까.

    사회는 그래서
    ‘교육’이라는 제도적 통과의례를
    만들었다.
    사회의 일원인 구성원들을
    진정한 일원이 되게 하는 것.
    그걸 세상은 ‘사회화’라고 불렀다.

    사회는 흡족했다.
    내 이름을 따서 ‘사회화’라니.
    그럴싸하지 않나.
    당신의 이름이 철수인데,
    세상 사람들이 다들
    ‘철수화’를 거친 후 뿌듯해한다면
    당신도 분명 흡족해하리라.

    문제

    문제는 각 인간이 지니는
    개성과 예술성이었다.
    그냥 매드맥스에 나오는
    회색빛의 펩시맨들처럼
    전부 다 똑같으면 딱인데.
    그게 사회화의 이상형인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렇질 않았다.
    그들은 진짜 자신이길 바랐다.
    성공적인 ‘사회화’를 마친
    인간들조차,
    30년을 구른 후에는
    어느 순간엔가
    후회하고
    눈물짓고
    분노하고
    폭발했다.

    아, 딱 영화 매드맥스에 나오는
    그 회색 펩시맨들처럼만 해주면
    더 바랄 게 없는데.
    죽을 때나 그냥 아쉬움에
    ‘기억할께.’ 이러고 가면 되는데.
    사회는 아마 이런식으로
    신세를 한탄했겠지.

    고통은 누구의 몫인가

    평생 만족스럽게
    사회화된 채 살아가는 사람도 많고,
    그 시기가 20대든, 40대든, 60대든
    어느 순간엔가
    너무 오래 부여된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온 것에 깊은 회한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고통은 늘 후자의 몫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빨간약을
    가까스로 삶의 어느 국면에서 찾아낸
    후자의 사람들은
    극도의 고통과 우울과 불안을 겪었다.

    전자는,
    만족스럽고 행복하고 기뻤다.

    이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가.

    연기

    차이는 바로,
    ‘사회가 요구하는 ‘온당한 것’을
    연기하느냐 아니냐’

    에서 비롯되었다.

    전자는 연기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팀장이 남아있으면 나도 남고,
    주말에 부르면 등산을 하고
    회식 가면 숙취해소제 먹으며 술상무하고,
    힘들고 슬퍼도 앞에선 광대처럼 웃고,
    그게 훌륭한 사회일원, 조직구성원으로서
    온당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진짜 인간의 올바른 처사가 그런거니까.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겉과 다르게 저 자는 날 위하지 않는다.
    인간은 연약하고,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런 것들을 알아채고
    스스로의 독자적인 삶을 살아보려는 자들을
    거칠고 교묘하게 찌르고 학대해야했다.
    그래야만 내가 붕괴되는 위험을 막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덕에
    인간은 원시사회를 한참 지나고도
    지금까지도 다같이 큰 무리를 지어 살아야만 한다고
    세뇌된 채 살아왔다.
    (코로나가 여기에 균열을 만든 거 같긴 하지만.)

    그래서 후자인 사람들은 ‘연기’를 해야 했다.
    사회화가 뼛속 깊이 잘 된 사람인 양.
    사회가 제시하는 가장 올바르고 모범적인 삶을
    나도 진심으로 살고 싶은 양.
    내 생각도 당신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양.
    그렇게 웃고 끄덕이고 입을 닫고 순종하며,
    연기를 했다.

    배우 ‘허성태’가 언젠가 TV방송에서
    게릴라토크콘서트처럼 이야기하는 걸
    유튜브에서 몬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자신은 배우일 때보다
    직장을 다닐 때 더 연기를 많이 하며 살았던 것 같다고.

    그는 후자였지만 좋은 직원이어야 했던거다.
    배우인 지금보다 더 연기를 많이 해야할만큼.
    과연 이게 그만의 문제일까.

    현실

    나는 직장생활을 오래도 했다.
    먹고 살아야 했으니, 크게 후회하진 않는다.
    삶의 모든 순간을 실로 꿰는 것은 나의 몫이고,
    나는 노예처럼 ‘사무실 자리’라는 감옥에 갇혀
    꾸역꾸역 참고 버티던 시절을
    그저 불행이라는 이름의 허비로 쳐박을 생각이 없다.
    나는 그 시절을, 내 자양분으로 삼으며 산다.

    나는 월급을 얻어
    밥도 먹고 옷도 사고 병원도 가는
    직장인의 삶을 겪은 덕분에,
    상담심리대학원에서 그저 책으로 읽는 것들과
    전혀 궤를 달리하는 진짜 현실을
    피부로 오랜시간 경험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된 친절을 두르고 산다.
    과도하게 친절하고 다소곳하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분노와 적대감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다.
    나와 피부를 맞대고 지내는 누군가가
    꾸역꾸역 어디가 고장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그렇게 연기를 하며 사는 걸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보다보면,
    왜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게 지쳐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두들 눈물을 머금고,
    속에 있지도 않은 미소와 친절과 배려를 베푼다.
    보고 있으면 ‘이 정도면, 진심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철저하고 완벽하게 연기하며 산다.
    그러다가 간혹 진심을 내보이는 걸 볼 때면,
    그가 얼마나 속으로 분노하고 혐오하고 격분하는지
    깨닫게 된다.
    저렇게 불평, 불만, 시기, 분노가 많은데
    저렇게 하루종일 친절하고 상냥하게 굴 수 있다니.
    혀를 내두르게 된다.

    피로

    결국 그렇게
    피로감은,
    인간의 온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결국 그렇게 된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모든 시간들은,
    내면에 울분과 환멸이 쌓이게 만든다.

    그리고 그 피로감은 사라지지 않은 채
    켜켜이 쌓여서
    언젠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다.

    이유없는 수많은 감정과 기분들에 대해
    의아해할 수 있다.
    그런데 어쩌면,
    그건 우리가 이유를 모를 뿐
    이유가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