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Lv14

  • 혼자 남겨지고 나서야, 삶이 시작된다

    혼자 남겨지고 나서야, 삶이 시작된다

    학교를 관두는 일

    우리가 이름을 아는 사람들,
    지금 현 시대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러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 중에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대학중퇴’다.
    스티브 잡스는 대학교를 중퇴했고,
    델 컴퓨터로 유명한 마이클 델은
    의대를 중퇴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하버드 중퇴,
    빌게이츠도 하버드 중퇴,
    조르지오 아르마니 의대 중퇴,
    심지어 그 바른생활 사나이 같은 유재석도
    서울예대 중퇴,
    뭐 사실 조금만 검색해보면
    이런 사람들은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 힘들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를 중퇴해야 크게 성공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사실,
    이건 단순히 농담거리로 치부하고 말 사안이 아니다.

    중퇴가 가지는 의미는 ‘거절’이다

    중퇴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내가 보기에 중퇴는
    성공한 사람들의 엄청나게 큰 용기와 안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다.
    이건 우리가
    혼자 무리에서 튕겨나와
    소외되는 일에 가지는 두려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학교를 중퇴한다는 건,
    내가 내 인생을 위해 해야할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학교 커리큘럼을 따르는 데 드는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대단히 대담하고 용기있는 행동이다.
    그런데
    이 용기있는 행동의 이면에는,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중퇴는,
    주위 사람들과 내가 속한 문화,
    사회에서 내게 보내는 기대와 요구를
    정면으로 거절한다는 걸 의미한다.
    사회에서 짜놓은 보편적인,
    하지만 크게 나에게 해가 되지도 않을 루트를
    굳이 걷어차버릴 정도의 소신과 신념을 가지는 건
    단언컨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보편적 루트’를 지켜내고 유지시키는 건
    비단 큰 규모의 국가, 사회만이 아니다.
    당장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지내는
    친구, 동료, 가족들도 그에 포함된다.
    다시 말해,
    그 일반적인 삶의 궤도를 끊어버리려면,
    내 주위의 기대와 압박,
    나아가 비난과 적대, 손가락질을
    기꺼이 감내하고 이겨내야 한다.
    철저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소외당해야 하고
    외톨이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자기자신과 삶을 원하는 모습으로 조각해
    세상에 구현해낸 거의 모든 인물들은
    상당기간 동안 주위의 기대를 저버린 채
    비웃음과 동정, 냉소 등을 견뎌가며
    가시적인 결과없이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구간을 거친다.

    ‘거절’에 대한 주위의 반응

    이러한 것들,
    즉 학교를 중퇴하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 비웃든
    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일들은
    앞서 말했듯이 사실상 ‘거절’이다.
    주위 사람들, 사회와 관습이 요구하는 역할과 기대에
    ‘거절’을 시전하는 일이다.
    그러면 그 때부터 난리가 난다.
    온갖 조언과 걱정,
    비난,
    조소와 멸시,
    설득과 타이름이
    미친듯이 일어난다.

    그런데,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조각해내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럼 이제,
    우리 차례다.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를 거절할 용기를 내고,
    남이 짜놓은 판에서
    남이 짜놓은 규칙대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걸
    단호하게 거부하는 일은,
    우리가 비로소
    진짜 우리자신만의 길을 걷기 시작할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는 걸
    상징한다.

    끝도 없는 눈치보기와
    남들이 날 어떻게 바라볼까 걱정하고 전전긍긍하는 삶을
    벗어던져버리고,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위장해야할
    말과 행동과 표정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우리의 내면에 깃든
    고유한 잠재력과 예술성을 따라 걷는
    최고의 삶을 시작하는 용기를
    이제 내야 한다.
    그 용기를 내고
    기꺼이 소외되어
    혼자 나의 길을 걷는 결정을
    당당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진짜 삶을 시작하는
    출발신호다.

  • 혼자 버려져도, 죽지 않는다

    혼자 버려져도, 죽지 않는다

    세상의 겁박

    모든 사회와 문화는
    절대 혼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구성원들을 겁박한다.
    지시한 규칙과 룰을 따르고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큰 일이 날 거라 호언장담한다.

    이렇게 인간을 길들인다.
    모나면 안 되고
    튀어서도 안 되고
    니 생각을 남들 앞에서 말하지 말고
    그저 조용히 숨죽인 채
    남들이 하는 걸 비슷하게 따라 하면서
    나도 마치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려했고
    같은 행동을 하려했던 것처럼 미소지으며
    그렇게 순종적으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만약 니 마음대로 하다간,
    혼자 버려져서
    비참한 처지에 놓일 거라고 말한다.

    그건 지배하는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대처다.
    구성원들이 그렇게 순종적이고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서로가 서로를 속박하는 게
    가장 통제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자신의 삶이 소중한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그게 무서워 눈치보며 순종하는 삶이
    그리 합리적인 선택이 되지 못한다.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으면,
    인간은 안정감을 느낀다.
    정확히는
    혼자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로부터
    벗어나있다는 안도감을 얻는다.

    하지만 더이상 그 두려움은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가 그 공포 때문에
    우리자신의 삶을 사는 대신
    남의 눈치를 보고
    사람들의 시선에 쩔쩔매는 꼭두각시 인형이 되는 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위해
    우리의 심장을 내어주는 꼴이다.

    혼자여도 죽지 않는다

    이미 세상은 더이상
    소속된 집단이나 무리가 없이 혼자 지낸다고 해서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그런 환경이 아니다.
    몸이 건강하면
    당장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혼자가 되는 걸 두려워할 이유는
    더이상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이 그리 두려워
    주인이 아닌 노예가 되길
    자처하는 삶을 살고 있는걸까.

    인간은 그저
    내 몸과 마음에 각인된 진화적 본능에
    휘둘리고 있을 뿐이다.
    이걸 노골적으로 이용하려는 집단에게
    세뇌당했을 뿐이고,
    통제가능한 구성원을 길러내려는 학교에게
    속았을 뿐이다.
    일론머스크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처럼,
    학교는 그저
    누가 더 성가신 지시들을 잘 참아내고 순종하는지를
    가려내는 곳일 뿐이다.

    우리는 더이상
    진화의 결과물 중 하나일 뿐인 미련한 공포에
    끌려다니며 살 이유가 없다.
    굶어죽기 딱 좋은 환경에서 진화해온 인간이
    아직까지도 단 걸 먹으며 쾌감을 느끼고
    잉여에너지를 지방으로 축적하는 것처럼,
    혼자 남겨지는 걸 상상만 해도 두렵고
    머리가 새하얘지는 건
    더이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맞지 않는
    느릿느릿한 진화의 함정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남들의 요구와 지시 대신에
    당신의 삶과 당신 내면의 소리를 따라 살았을 때
    당신이 처하게 될 곤경이라고는,
    당신 인생에 전혀 관심도 없고
    당신을 알지도 못하며
    당신 삶에 하등 가치도 없는
    멍청한 자들의 삐죽거림밖에 없다.

    그게 두려워
    평생을 남들의 노예로 전락해서 살 순 없지 않나.
    우리의 소신을 지키고
    원하는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혼자가 된다고 해도,
    우리의 진화적 각인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사회와 세상이 우리를 겁박하는 것처럼,
    죽지 않는다.
    걱정마라.

  • 소외되는 것에 대한 진화적 공포

    소외되는 것에 대한 진화적 공포

    얼마 안 됐다

    인간이
    주위 사람들의 비위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부족의 우두머리 눈밖에 나도,
    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게된 건,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류가 출현한 이래
    거의 모든 시간동안,
    개인은 절대
    자기가 속한 부족의 룰이나
    기득권층의 심기를 거슬러선 안 됐다.

    부족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행동하면
    결말은 뻔했다.
    어디 짱박혀서 자다가
    산짐승을 만나 물려 죽거나,
    어디 잘못된 곳에 빠져서
    못나와서 굶어 죽거나.
    이래나 저래나 혼자 살아남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부족장이나 부족원들의 미움을 사면,
    부족에서 쫓겨나 죽게 되는 게
    너무나 자명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모양이다

    지금 이 시대에 생존해있는
    우리들의 조상 중에,
    쿨하게 부족장 말을 어기고
    혼자 산딸기 따러 무리에서 벗어났거나
    남이 날 싫어하든 말든
    개무시했던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던 애들은
    자손을 못 남겨서
    우리 조상이 되지 못한 채,
    어느 시기엔가 결국엔
    죽어 사라졌을테니까.

    진화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남 눈치를 보고
    남이 날 보고 뭐라고 하는지에
    극도로 예민한 건,
    사실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죄다 그런 애들만 살아남아
    자손을 낳고 길러온 기간이
    어마무시하게 길고,
    우리는 그런 애들의 후손이니까.

    진화는 더디다

    진화는 매우 더디고,
    큼직한 단위로 일어난다.
    빠르고 디테일한 인간문명의 발전과
    현대사회 환경을 정확히 반영할만큼
    신속하고 섬세하지는 못하다는 의미다.

    인간은
    잉여에너지를 어떻게든 지방으로 축적해
    늘 도사리는 굶어죽을 위험에
    대처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지만,
    지금 모든 병의 근원이 비만인 걸 보면
    진화가 실제로 디테일한 환경변화에 잘 적응하기에는
    너무 많이 더디다는걸 알 수 있다.

    소속안정감을 느끼는 일의 대가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무리나 집단에
    어떻게든 붙어있으려고 하다보면,
    그 집단의 지배를 받게 된다.
    내 생각이 그들과 달라도
    그들과 생각이 같은 척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고,
    내게 더 큰 기쁨을 주는 일이 있지만
    그 일 대신 집단이 내게 강요하는 일을 하고,
    내 마음이 원하는 행동 대신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고 바라는 행동을 하며
    살게 된다.

    어느 순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결정되고,
    나의 자존감은
    타인의 기분에 따라 뒤바뀌고,
    나의 존재가치는
    타인의 평판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사는 존재를
    ‘노예’라고 부른다.
    계급제도가 사라진 지금,
    실제로는 여전히 계급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이제 더이상 과거처럼
    목이 잘리거나 굶어죽고
    맞아 죽게 되진 않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고,
    다른 누군가는
    타인이 원하는대로 복종하고
    그들의 눈치를 보며
    내 자유를 헌납한 채 살아간다.

  • Lv14. 소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

    Lv14. 소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

    우리는 Lv13에서
    진정한 관계, 사랑하는 관계에 대해 배웠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간의 삶은
    그렇게 1:1로 맺어지는 관계가 아닌,
    무리와 집단에 속해서 맺어지는 집단관계로
    점철된 경우가 더 많다.
    앞으로 이번 레벨부터 Lv16까지
    우리는 그렇게 집단으로 맺어지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무리에 소속되어 있고 싶어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집단에 속해있지 않은 채 혼자 남겨지는 걸
    극도로 무서워한다.

    이번 레벨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 혼자 버려져서 소외되는 일에 대한 진실이다.

  • 차단이 필요한 시대

    차단이 필요한 시대

    아무리 생각해도 차단이 필요한 시대다.

    은둔 청년이 5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대서특필하고, 전문가들이 앞다투어 걱정을 한다.

    인간이 친구없이 외롭게 지내면,
    빨리 늙고 빨리 병들고 우울하고 뭐 그렇단다.
    무수히 많은 논문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리 생각해도 차단이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늘 불안에 떠는 삶

    어떤가.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00이는 나중에 커서 어떤 삶을 살고 싶어요?”
    라고 물었을 때 그리 답했던가.
    “저는 나중에 커서 불안에 떠는 삶을 살고 싶어요!”

    아침에 오늘 하루가 설레서 가슴이 뛰는 눈빛을 한 사람을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기억이 나는가.
    가슴 뛰는 일은 이제 없다.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감우성이 괜히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출근길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는,
    세상 모두가 이미 조금 지치고 피곤하다.
    약이 든 주사라도 맞듯이
    허겁지겁 유튜브나 게임을 먹어치우지만,
    그런다고 삶에 깊게 밴 공허함이 숨겨지진 않는다.

    사무실에 앉은 번듯한 직장인도,
    미래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취준생도,
    은퇴하고 노후를 그리는 중년들도,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어린 아이들도,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들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도,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나는 아이들도,
    왠지 모르게 지친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 여자주인공이 말한다.
    이유도 잘 모르겠는데, 왜이리 답답하고 힘든지 모르겠다고.
    … 불안해서 그렇다.

    인간은 소외되고 혼자 버려지는 걸 두려워한다.

    무엇이 그리 불안하고 두려울까.
    명백하다.
    그건 바로, 사람들에게서 내가 소외되어 버려지는 것.
    나만 혼자 덩그러니 고독사하게 될까봐 두려운거다.
    그러니 늘 불안하다.
    남들의 눈에 들어야 한다.
    최소한 밉보이지 않아야 한다.
    저사람이 날 싫어하거나 탐탁치 않게 생각하면 어쩌지.
    뒤에서 날 욕하고 비웃으며 조롱하면 어쩌지.
    사람들과 날 모함하고 비난하며 손가락질하면 어쩌지.

    내 상사가 내가 부적응자라는듯이 나무라면,
    그 불안은 커다란 천둥번개가 되어 날 내리찍는다.
    친구들이 입을 모아 날 비난하고 욕하면,
    난 누구에게도 수용받지 못하는 별종이 된 것 같다.
    동료들이, 가족들이, 선생님이 날 손가락질하면대체
    난 정말 그들의 말처럼 쓸모없는 짐덩어리가 아닌가 싶다.

    그러면 그들은 날 거부하고 쳐내고 내다버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게 너무 두렵고 걱정된다.

    그러니 여전히 그렇게 이용당할 수밖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남들의 시선에 매달리지만,
    이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를 꼽는다면 단연 우리나라다.
    그리고 여기서 나고자란 우리는,
    지구별에서도 유독 더 불안에 떨고 남눈치를 본다.
    남들에게 찍히고 거부당하고 버림받을까봐.
    그렇게 혼자가 될까봐.

    그리고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적당히 똑똑하고 악랄한 수많은 사람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당신의 그 불안함을 이용한다.
    그러니 인간은, 늘 이용당할 수밖에 없다.

    자유로워지면 고통은 사라진다.

    그럼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뭘 어쩌긴.
    내가 글 맨 앞에 써놨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차단이 필요한 시대다.

    아니, 가뜩이나 혼자 소외되고 차단당할까봐
    이렇게 고통받는데 차단을 해라니.

    그러니 차단해야 하는거다.
    50만명이 은둔하는 시대라고?
    그 청년들이 왜 은둔하는거라고 생각하는건가.
    말도 안 되는 인구가 취직해서 사회활동을 시작하지 않는다고?
    왜 그런다고 생각하는가.
    늘 남눈치를 보고 남들에게 비웃음 사는 XX같은 사람으로 비쳐질까봐
    일상이 항상 불안하고 전전긍긍하다고?
    왜 당신이 그걸 불안해한다고 생각하는가.
    혼자 버려질까봐? 소외될까봐?
    왜 혼자가 되면 그리 낭떠러지 바닥끝으로 추락할거라 생각하는가.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정말 많은 걸 이야기해야하지만,
    한마디로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고통받는 건, 자유롭지 못해서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자유로워지면 자연스레 저 고통들은 사라진다.

    자유는, 혼자여도 괜찮아야 내게 온다.

    자유로워지려면,
    가장 먼저 우리가 혼자여도 괜찮아야 한다는 걸 이해해야만 한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람들이 죄다 그러겠노라 할 때,
    시큰둥한 표정으로 난 안 그럴래,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아니, 그러면 큰일난다고?
    학교에서, 집에서, 친구들이, 사회가, 직장에서
    당신에게 그렇게 가르친거겠지.

    … XX,
    큰 일 안 난다.
    이게 큰 일 안 난다는 것에 대해
    혼자 오랜시간 고민하다가
    ‘진짜 그렇구나’ 라고 이해한 것만으로
    끔찍한 심리적 고통들이 다 사라졌다는 내담자도 있었다.

    책에도 써두었지만,
    우리는 진즉에 혼자여도 괜찮았다.
    속은거다.
    혼자가 되면, 진짜 당신 인생은 나락이라고.
    끝장이라고.
    진짜 큰일 난거라고.

    혼자여도 괜찮다. 미안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차단이 필요한 시대다.
    쇼펜하우어 말처럼,
    관계는 최소한으로 남겨야 오히려 삶이 고요하고 행복해진다.
    차단해라.
    세상에 당신 혼자만 덩그러니 넘겨놓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도 된다.
    어떻게 시작해나가면 될 지는,
    내가 찬찬히 여기에 계속 써나갈 생각이니 걱정마라.

  • 결정장애와 자유의 역설

    결정장애와 자유의 역설

    결정장애로 메뉴 못고르는 우리

    어린 시절, 친구들이 항상 고민하던 연애고민 중 하나는 바로 메뉴선정이었다.
    주말에 데이트가 있다.
    연인(혹은 썸녀)에게 물어본다.
    뭐먹고 싶냐고.
    그런데 자꾸 옆에서 여자선배나 여사친이 그러는거다.
    ‘야, 그거 좀 알아서 센스있게 예약해두거나 하면 좋잖아.’
    ???? 아니 뭘 먹을지 물어봐야 예약을 하지.
    그거 물어보면 나도 뭘 먹을지 결정해야 되는데 부담 돼 ~
    나더러 골라라고 하면 싫어 그거.

    뭐 이런 류의 대화.
    중국집 가서 뭐 먹을지 고민하느라 주방에 주문 안 들어가고 있는 상황을 보자면, 뭘 먹을지 고르는 게 쉽지 않은 사안 같기도 하다.
    메뉴를 줄이면 오히려 불만이 느는 게 아니라 만족도가 증가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고르기 어렵다는거다.
    경제학에서는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만족도도 증가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왜 그럴까.

    결정장애가 있는 이유

    인간은 기본적으로 위험을 싫어한다.
    진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위험을 극도로 기피하는 사람들만이 몇세대고 살아남아, 지금 이 시대에 사는 후손을 남길 수 있었을테니.
    위험이라는 건 굉장히 다양해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위험도 위험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위험을 극도로 싫어한다.
    사람들이 왜 로또를 맨날 ‘자동’으로 살까.
    분석해보니 자동이 더 확률이 높아서?
    아니다.
    내가 직접 손으로 고른 숫자가 자꾸 실패로 판명나는 게 싫어서다. 기분도 나쁘고.

    우리는 우리가 아둔하고 멍청한 선택을 해서 실패를 하게 될 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기가 너무 너무 싫다.

    자유가 싫은 이유

    문제는 자유다.
    자유는, 필연적으로 그런 실패의 위험들을, 그에 대한 모든 책임들을 내가 지게끔 만든다.
    자유라는 게 기본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직접 모두 선택하는 것이지 타인이 나 대신 결정해주고 선택해주는 게 아니니까.

    이쯤되면 자유라는 녀석이 싫을법도 하다.
    자유가 고통스럽다는 철학자들의 말은 그래서 나온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냥, 내가 직접 무언가를 결정했다가 실패할 위험없이, 전문가나 선구자가 딱 그 길을 알려주면 그대로 가고 싶어한다.
    아니면, 그냥 남들이 다들 하는대로 나도 똑같이 그대로 누구나 다 그렇게 사니까, 남들도 다 그러니까, 라는 허울 아래에서 남들 사는 그대로 살고 싶어한다.
    그래야 혹시 이게 대실패로 끝나더라도, 내 책임이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가 그랬던거라며 나를 보호할 수 있을테니까.

    결정장애와 판단의존

    이게 바로 우리가 속한 집단, 조직, 사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판단을 그대로 따르게 되는 ‘판단의존’이다.
    이 판단의존은 굉장히 아늑하고 편안하다.
    나와 같이 여기에 속해있는 사람들 모두가 다같이 그 무리의 판단과 같은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하니까, 실패해도 다같이 실패한거고 이 무리 전체가 실패한거지 나라는 개인이 실패한 게 아니다.
    나만 XX인 게 아니라는거다.
    내 책임도 아닌거고.
    잘못 결정해서 실패하게 되는 일의 책임이 나에게 올 위험이 애초에 차단되는거다.

    게다가 내가 더 고민하고 노력하고 스스로를 단련해서 좋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나는 내가 속한 이 무리가 결정하고 판단한대로 그대로 똑같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진짜 ‘개꿀’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조각가와 피해자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그게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만 보장되면, 그걸로 우리 삶은 충분한걸까.
    어쩌면 정말 중요한 결정이 그렇게 내가 아닌 외부의 선택에 의해 실패로 끝나버리고 나면, 우리는 억울함이나 원망을 가지는 건 아닐까.
    그렇게 판단을 의존해버린 나 자신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아니라, 왜 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그렇게 날 위한 결정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결정으로 내려버렸냐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억울해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둘로 나뉜다.
    자신의 삶을 원하는 모습으로 조각해나가는 ‘조각가’ 끝없이 외부로부터 휘둘리고 조종당하며 이용당하는 ‘피해자’.
    우리가 피해자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스스로 삶을 결정하는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자유를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책임이 전적으로 내게 올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판단을 의존하기로 한 선택도, 스스로 무언가를 판단내리고 결정하는 선택만큼이나 큰 의미를 가지는 엄청난 선택이다.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무언가를 하는 결정보다 더 엄청난 결정이 되곤 한다.
    내 삶의 결정권을 남에게 줘버리는 선택이, 과연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보다 덜 위험한 선택일지는 알 수 없다.

    피해자로 살아가기로 선택한 대가

    적어도 확실한 것은, 내 삶을 내가 선택하지 않는 대가는 혹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남들이 하는 선택, 내가 속한 집단이 하는 판단을 그저 따르게 되면,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무능하고 현명하지도 않고 우리보다 뛰어날 것도 하나 없는 멍청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대로, 그렇게 우리의 삶이 흘러가버릴수도 있게 된다.
    다들 자신이 직접 책임지고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한 탓에, 시덥잖은 소수가 지들 마음대로 세상을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대신 우리는 ‘피해자’가 되어 살아가고 말이다.

    스티브잡스가 했던 말을 끝으로 글을 마친다.
    “Everything around you that you call life was made up by people that were no smarter than you.”
    “(당신이 ‘세상’이라고 부르는) 당신 주위의 모든 것들, 즉 당신의 세상은, 실은 당신보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말 대신 행동을 믿어라.

    말 대신 행동을 믿어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

    2023년 한해동안 출생등록한 신생아 수가 23만명이다.
    이 숫자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보여주는 통계수치다.
    행동에 관한 한, 통계는 우리의 좌표를 꽤 정확히 나타낸다.

    이 나라의 미래와 앞으로 나아갈 저출산 대비 정책을 논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그저, 우리가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힐끔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반드시 숙고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싶을 뿐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의 단위가 개체가 아닌 유전자라는 사실을 주장해서 세계적인 스타학자가 되었지만, 과연 한국의 지금 상황을 보고 뭐라고 해석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번식이라는 모든 생명체 속 유전자들의 제1순위 목표를 자발적으로 다같이 저버리고 있는 이 나라의 상황을 과연 뭐라고 해석할까.

    행정안전부 통계자료를 보면, 2023년 기준 만35세 인구는 62만명이고, 만 55세 인구는 90만명이다.
    2023년 출생아 수가 23만명인 걸 추세를 고려해 생각해본다면, 한국은 정말 그리 머지 않은 시기 내에 전혀 다른 나라로 변화해갈 것이다.

    말 대신 행동을 측정한 통계를 믿어라

    나는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임상심리사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베이(설문) 형식의 연구방법 자체가 불가피하게 가지는 편향이나 오류가 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기보고식 심리검사나 설문조사는 필연적으로 작성하는 그 사람의 바람, 자기를 바라보는 관점과 왜곡 등 여러 가지 편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이건 ‘말’이지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 삶으로 실천하는 것들에 대한 통계는 다르다. 자살률이나 출산률은 그 자체로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그 통계들이 가지는 함의는, 단순히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자녀를 안 가진다는 수준의 한가지 행위에 대한 통계가 아니다.
    폭발적으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아기가 나오는 유튜브 영상만 봐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그건 조회수가 증명한다.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 믿을만하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는 가지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그 추세는 강해지고 있고, 이미 절대적인 출산률도 그 어느 나라도 넘볼 수 없는 수준이다.

    이게 무얼 의미할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지금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다.
    하나하나 파고들자면 끝이 없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행하다는 이야기다.
    버겁고 괴롭고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는 비관이 크다는 이야기다.

    8살도 맞출 수 있는 기묘한 문제

    그저 그냥 이렇게 생각해보자.
    새하얀 세상 위에 사람들이 1000만명이 서있다.
    그 1000만명 그룹이 새하얀 세상 곳곳에 그룹으로 모여서 서있다.
    그룹이 10개라고 해보자.
    한 그룹은 계속 오른발을 들고 총총 뛴다.
    한 그룹은 눈을 한쪽만 뜬 채 계속 좌우를 두리번거린다.
    한 그룹은 왼손으로 오른쪽 볼을 톡톡 두드린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들을 그 새하얀 세상에서 그룹마다 다르게 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한 그룹이 유독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고 스스로 목숨도 많이 끊는다.
    다른 그룹들에 비하면 너무 그 그룹만 과도하게.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우리가 어떤 행동 하나를 반드시 해야 한다면, 그 유독 눈에 띄는 그룹 구성원들이 하는 행동을 하는 게 현명한 선택일까 아닐까.
    아니겠지.
    초등학생도 맞출 난이도 하등급의 문제다.

    그러면 우리는 더이상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두리번거리며, 다른 사람들이 다들 사는대로 사는 걸 멈춰야 한다.
    최소한, 진짜 이게 현명한 선택인지 한번쯤 재고해봐야 한다.

    쉽지 않다는 건 안다

    알고 있다.
    힘들다는 걸.
    왜 힘든지 아나?
    아까 그 이상한 퀴즈랑 다르게 힘든 이유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서 알고 함께 지내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눈치를 보며 사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은 우리에게도 그들처럼 그렇게 남들이 하는대로, 사회와 학교와 직장이 시키는대로 따르며 살길 기대한다.
    그들도 불안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만의 삶을 살아보려고 한다면,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특히 어른들)은 어떻게든 만류하고 비난하고 마음을 되돌리라고 당신을 협박하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니 쉽지 않다는 건 안다.

    그래도, 남들이 시키는대로 살다 가는 게 인생의 목표는 아니지 않나.
    영화 매트릭스가 괜히 세계적으로 극찬받는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게 아니다.
    이런 상황을, 가장 이해하기 쉽고 와닿을 수 있게 빨간약 파란약으로 그려내는 워쇼스키의 위대함이 바로 이런 대목에서 드러난다.
    이미 옭아매어질대로 매어진 우리는, 차라리 남들이 하는대로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숨죽인 채 따라하는 게 더 편한 존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항상 듣는 말도 그런거다.
    너무 튀지 마라, 규칙대로 따라라, 웃어른을 공경해라, 상사의 지시를 어기지 마라, 눈치 없으면 사람도 아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등등 말하자면 끝도 없다.

    하지만, 명심하자.
    말보다 행동이다.
    말은 믿지 마라.
    행동을 믿어라.
    ‘나보다 남을 더 먼저 배려해라’는 도덕선생님의 ‘말’을 믿지 말고, 이 도덕선생님이 자기 손에 피가 날법한 위기에서 보이는 ‘행동’을 잘 살펴라.
    사회가, 어른들이 하는 말에 귀기울이지 마라.
    대신에, 그들이 실제로 하는 행동에 귀기울여라.

    예를 들면, 출산율 같은 거 말이다.
    그게 진실이다.

    진실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스스로 판단해라.
    그럼에도 남들 사는대로 살 것인지.
    어른들이 해라는대로 그대로 따르며 살 것인지.

    그렇다면, 나는 두 말 없이 각자의 선택을 존중할테니.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윤리와 도덕이라는 허상

    윤리와 도덕이라는 허상

    살인범의 살인 이유

    얼마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범죄자 프로파일러를 소재로 제작한 드라마를 리뷰한 영상을 봤다.
    현실고증이 잘 된 것인지를 판단할 지식이나 안목은 없지만, 그래도 감정선의 흐름이나 연출이 드라마덕후인 내 입맛에 맞아서 어쩌다보니 30분 남짓 되는 영상을 다 봤다.
    보다 보니, 중간에 잔혹하게 살인을 저지른 살인범이 형사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아니.. 걔가 괜히 거기 있었어가지고.”
    형사가 그 아이 잘못이라는거냐 되묻자, 범인은 당연하다는듯이 ‘걔가 괜히 거기 있는 바람에 상황이 재수가 없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태연하게 한다.

    모든 이들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한명도 빠짐없이 전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살인범조차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항상 항변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본 드라마에서 아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범이 말하는 걸 봐라.
    괜히 걔가 거기 있는 바람에, 라고 한탄하지 않나.
    그 어느 상황의 그 어느 누구도, 다 자기 입장에서는 자신의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드라마 속 살인범의 사례를 들어서, 윤리와 도덕이 허망하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도저히 ‘나는 정당하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자들도 언제나 자신에겐 자기 나름의 정당성과 정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거다.

    윤리와 도덕의 무력함

    여기에 윤리와 도덕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있다고 보는가.
    일단 이것부터 생각해보자는 이야기다.
    어떤 누구라도 충분히 납득할만한 윤리와 도덕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이 도덕과 윤리가 도대체 여기서 어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윤리와 도덕은 결정적인 순간에 힘이 없다.
    그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행동을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때 비로소 윤리와 도덕은 쓰임을 가지게 될 뿐이다.

    윤리와 도덕의 작용원리

    물론 윤리와 도덕은 사회구성원들을 예측가능하게 만들고 통제가능하게 길들이는 데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윤리와 도덕은 그 이름처럼 정의와 타당성, 올바른 이상 등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 사회적인 처형 등과 같이 인간이 진화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철퇴를 들고 사람들을 길들일 뿐이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상대방의 고통에 공명하며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도우려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게 윤리와 도덕 때문인 건 아니다.
    도덕은 인간의 그런 면모를 숭상하고 자신들의 깃발로 삼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규율하고 강제한다.
    윤리와 도덕은 누군가의 이해득실과 실용성을 근간으로 이용되어왔고, 모든 인간의 깊은 내면에는 윤리가 아니라 내 욕망과 두려움이 모든 행동의 뿌리로서 자리잡고 있다.

    윤리와 도덕의 타락

    처벌이 두려워 행하는 모든 도덕적인 행위들은 결국 사라지기 마련이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도덕을 어길 때 내가 겪게될 고통보다 더욱 큰 고통이 날 위협하기 때문이다.
    더 큰 고통을 피하고자 덜한 고통을 감수하는 건 인간의 본능적인 선택이다.
    사람들은 도덕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수긍과 공감, 헌신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도덕은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실패한다.

    결국, 도덕과 윤리는 언제나 도구로 이용되고, 설득이 아닌 협박으로 퍼져나가며,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
    그러다보니, 도덕은 그저 꼰머나 지배층이 타인을 원하는대로 움직이고 싶을 때 입맛대로 가져다쓰는 방패막이로 전락했다.

    윤리와 도덕의 허상을 깨달아야 하는 이유

    이것을 깊게 고민해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원하는대로 조종하려고 하는 많은 존재들이 도덕과 윤리를 ‘악용’하기 때문이다.
    윤리적이지 않는 XX라는 비난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로서는, 그 악용에 기민하게 대처하기가 어렵다.
    누누히 말하지만, 타인의 뜻대로 움직여서는 삶을 원하는 모습으로 조각하는 게 녹록치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꼭 찬찬히 숙고해보길 권한다.
    당신 삶에서 윤리와 도덕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영향력을 당신에게 발휘하고 있는지.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대화라는 이름의 허상

    대화라는 이름의 허상

    대화의 경험

    논산훈련소에 입소하고 난 첫주차의 일이다.
    분대 안에서 말다툼이 생겼다.
    무서울 게 없는 20대 초반 나이의 남자아이들을 모아뒀으니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둘은 처음엔 감정이 격해져서 험악한 표정으로 서로 주먹질이라도 할 것처럼 그랬지만, 이내 서로 대화를 하며 오해를 풀고 잘 화해했다.
    1번 훈련병이었던 동생이 말했다.
    “와, 역시 성인이니까 그래도 다르네요. 이성적으로 대화로 갈등을 해결하고 이런 거 보니까 진짜 신기하고 좋고 그러네요.”

    나도 그리 생각했다.
    나라고 해봤자 갓 스물두살이 되었을 뿐이었다.

    대화의 민낯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는 많은 걸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다.
    가장 큰 거짓말 중 하나가 나는 ‘대화’라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만, 대화로 갈등을 해결하거나 합의점을 찾는 일에 대해 나는 굉장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사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대화’는 이 세상에 없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다.
    결국 문제를 해결했다는 ‘대화’의 실체를 보면, 거의 다 그저 힘의 충돌일 뿐이다.

    우리가 책에서 배우고 학교에서 들어온 ‘대화’라는 건, 서로 자신의 의견과 그에 따른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상대방이 그 내용에 충분히 수긍하고 자신의 입장과의 차이를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조율하여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표상이자 지향해야 한다고 세뇌시키는 상상의 모습일 뿐, 실제는 이와는 다르다.
    갈등이 크고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일수록, 즉 중요한 사안일수록 거기에서 ‘우리가 배운 의미의’ 대화라는 건 일어나지 않는다.
    중요한 척 하지만 실은 중요하지 않은 사안 앞에서, 사람들은 그런 이상한 ‘대화 코스프레’를 많이들 한다.
    하지만 이건 사람들에게 ‘자신이 대화로 삶을 풀어나가는 멋진 사람’이라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일뿐이다.

    대화의 탈을 쓴 유혹과 위협, 사기

    국가차원이든 개인차원이든, ‘정말로 중요한 일’은 대화를 통해 해결하지 않는다.
    대화라는 외양을 가질 뿐, 실질은 회유와 협박, 유혹과 위협을 통한 충돌이다.
    대화라는 가면을 쓰고서 우리의 모든 대화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언제나 회유와 위협이다.

    물론 실제로 총과 칼을 들고, 물리적 폭력을 서로 행사하며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보다는, 약식으로 ‘대화’를 통해 온건한 방식으로 협상을 하는 게 가지는 이점은 매우 크다.
    다만 여기서 흥미로운 건, 실제 유혈사태와 생명에 지장을 주는 극단적인 전투를 대신해주는 ‘대화’가 성행한 덕에,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는 사기꾼들은 어느 시대에서나 번성했다는 사실이다.
    어떤 측면에서 대화는, 그저 사기꾼의 거짓과 날조에 날개를 달아주는 가면일 뿐일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대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키아밸리는 군주론에서 공포도 필요하다는 말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대화의 본질이 결국엔 두려움을 인질로 상대를 겁박하고 욕망을 자극해서 상대를 유혹하는 것들의 앙상블이라는 걸 알았기에.

  • 무리짓는 자들의 심리와 1인시대의 강림

    무리짓는 자들의 심리와 1인시대의 강림

    무리짓는 자였던 시절의 추억

    나는 혼자서는 화장실을 가지 못했다.
    이 증상이 생긴 건, 한 11살 무렵이었다.
    혼자서 화장실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내가 속한 무리가 다 모여야만 했다.
    최소한 그 중 두세명이라도 모여야 했다.
    혼자 가는 건, 왜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불가능한 일이었다.
    등교는? 하교는? 밥 먹는 건?
    당연히 그 무리가 다 모여야만 하는 일이었다.
    혼자 학교를 가다니? 혼자 밥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서 놀고 나면, 누굴 먼저 바래다주는지, 혹은 누구 집에 가까운 지점에서 헤어지는지가 엄청난 관건이었다.
    그걸로 은근히 서로 기싸움이 있기도 했다.
    왜냐하면, 우리집에 가까운 곳에서 해산하는 게 곧 나의 힘과 권력을 상징했고 그래야 혼자 길을 걸어다니는 끔찍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로 실제로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으니 말 다했지.

    그 때는 그게 정말 그렇게나 중요했다.
    그 무리가 내 삶의 중심에 있었다.
    내 삶의 목적이자, 내 삶의 이유였다.
    이 안정감을 주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집단이 내 삶의 전부인 거 같았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해줄 수 있을 거 같았다.
    이 집단은 평생 내 인생과 함께 갈 것이 틀림없었다.

    무리짓는 자들의 심리

    지금, 나는 혼자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엄마아빠, 동생이 있고 이들을 항상 사랑하고 아끼고 지키려 노력하지만, 이제 나는 혼자 화장실도 잘 가고 혼자 밥도 잘 먹는다.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시작된 이 무리생활은 한 4~5년 정도 바짝 꽃핀 후에 중학생 2학년을 넘어가면서 점차 그 빛을 잃어갔다.

    흥미로운 건, 대다수는 그들이 노인이든 중년이든 장년이든 청년이든 상관없이 여전히 무리집단에 목숨을 건다는 사실이다.
    아, 여기서 논의의 전제는 남자로 한정한다.
    (남녀갈등으로 항상 시끄럽지만, 내가 보기에 남녀는 많이 다르다.)
    많은 남자들은 환갑이 넘어서도 무리짓고 사는 걸 지향하고, 무리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다가 퇴직하고 자신의 무리가 조건부였다는 걸 깨닫고나면 고향친구와 동창들 모임을 전전하다가 결국 우울함에 빠진다.

    무리를 짓고 살면, 인간이 진화하면서 느껴온 근본적인 하나의 두려움을 없애고 아늑함을 준다.
    이를 ‘집단소속감‘이라고 한다.
    집단 소속감은, 집단에 속함으로써 얻는 (어딘가에 소속되어있다는)심리적인 안도감을 말한다.

    여기서 ‘안도감’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집단에 소속되어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은 혼자 외롭게 소속도 없이 살아갈지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해소됨으로써 생기는 감정이다.
    안도했다는 건,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상황이 벌어지지 않아서 얻게 되는 공포의 해소와 일맥상통하는 감정이다.
    혼자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자연스레 안도감을 위해 무리에 매달리는 일이 사라질거라는 말과도 맥을 같이 한다.

    지금 이 시대는 대다수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다.
    회사에서 가만히 사람들의 반응을 들여다보라.
    (아까도 말했지만 이거 남자 한정 이야기다.)
    40대 중반, 50대 이상인 사람들은 어떻게든 우르르 몰려다니는 자신의 무리에 속해있다는 사실에 큰 소속감을 느끼지만, 연령대가 내려갈수록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의 비율은 점차 낮아진다.
    물론 내가 그랬듯이 겁이 많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10대든 20대든 열심히 무리지어 우르르 다니지만, 결국 어느 시점에서 혼자여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갈수록 점차 무리생활에 굳이 헌신하지 않기 시작한다.

    무리짓지않는 시대의 강림, 도대체 왜?

    왜 이 시대는 혼자 지내고 혼자 사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아진 것일까.
    그 오랜시간 진화해온 인간의 무리로부터 소외되는 두려움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뉴스에서 자주 말했듯이, 코로나라서?
    그렇다!
    코로나 때문이다.

    다만 코로나 때문이라는 말의 의미는 좀 다르다.
    세상에서는 연신 사람들의 ‘홀로’생활의 증가에 대해 코로나 방역정책 때문에 혼자 지내는 게 익숙해진거라고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그게 그저 익숙해져서 그런걸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끝없이 남들의 눈치를 보고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살피고 남들이 날 어떻게 볼까 전전긍긍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었던 진화적 산물이 그리 쉽게 사라지진 않는다.

    경제학의 ‘게임이론’에서는 두 가지 균형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것도 게임이론이라는 모형 안에서 언급되는 이야기다.)
    어렵게 매트릭스를 그려 이야기하진 않겠지만, 결론적으로 코로나는 인간의 두려움과 그에 대한 반응을 그대로 둔 채 일시에 각자가 혼자 살게 만들어서 아예 균형점을 바꿔버렸다.

    인간의 행동전략은 언제나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도록,이다.
    그 무리라는 범위가 당장 나랑 같이 화장실가고 밥먹고 안부묻는 사람들일수도, 직장 내 부서사람들일수도, 직장 동료 전체일수도, 온 국민일수도 있다.
    인간은 자기가 속한 무리에서 소외될까봐 벌벌 떤다.
    그런데 내가 속한 무리가 일제히 각자 집에 틀어박힌 일이 생긴거다.
    나를 빼고 나머지가 전부 모여서 여전히 무리지어 다녔다면, 아마 개인들은 자기만 혼자 지내는 걸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무서워했던 ‘홀로’생활을 강제로 해보니, 생각보다 내 인생이 망가지지가 않는거다.
    아니 오히려 의외로 자유롭고 편하고 좋은거다.

    그렇게나 평생 두려워하던 일이 의외로 괜찮은데, ‘나홀로 상황으로의 진입’을 나혼자만 튕겨나와 해버린게 아니라 충분히 누구나 그럴만하다고 끄덕여줄만한 이유가 코로나 덕에 주어진거다.
    인간은 애초에 남들이 어떻게 날 생각할까, 가 두려운 존재인데 코로나 때문에 모두가 혼자 지내게 되니 이건 뭐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 말고가 없는거다.
    나홀로 지낼 당위가 ‘모두 다같이’ 생겨버린 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이건, 기존에 용기를 내어 홀로서기를 해왔던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좀 다르다.
    이 시대의(사실 어느 시대에나) 대다수 사람들은 나만 손가락질받고 비웃음받으면서도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는 도전을 감행한 전사의 심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제히 무리에 속한 다른 사람들에게 비웃음 살 이유도 없이 ‘홀로’생활로 강제진입하고 보니, 이게 두려워하던 것만큼 그리 지옥이 아닌거다.

    이는 사회 전체의 균형점을 바꾸었다.
    어떻게든 어떤 무리에라도 소속되어 홀로 소외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지내는 사람들이 많던 균형점에서, 각자 이젠 더이상 무리에 매달리느라 눈치보고 참고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게 지내는 걸 관두고 혼자 살아가는 균형점으로.

    물론 코로나 상황이 진정되자, 과거에 이미 너무 오랜시간 강하게 무리생활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다시 무리지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이제 깨달아버렸다.
    내가 또래집단에 속하지 않아도, 학교가 정한 규율에 따라 등하교를 하고 5교시까지 앉아있지 않아도, 할말 못하고 죄인처럼 굽신거리며 상사눈치 보지 않아도, 금요일 저녁이면 우르르 모여 회포를 푸는 무리에 소속되어있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아니, 오히려 더 행복하게 지낼수도 있겠구나, 라는 걸 말이다.
    단 일주일만에 그런 변화의 낌새를 눈치채기에 인간은 느리다.
    하지만 몇년은 말이 다르다.
    이건, 영화 매트릭스로 보면 단체로 그냥 빨간약 순한맛을 온국민 입에 쳐넣어버린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코로나는 명백히 인류에게 크나큰 재앙을 몰고온 끔찍한 재해였음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나는 아빠가 수술 중 심정지로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코로나에 감염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코로나 상황 때문에 하루에 30분을 멀리서 격리된 읍압치료실만 쳐다보다 나와서 눈물을 줄줄 흘리곤 했다.
    하지만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사건으로 인해 생각지도 않은 수천가지 변화를 동시에 겪는다.
    나비효과 이론 말마따나, 나비의 날갯짓이 엄청난 결과를 낳듯이.

    그럼에도 기억해야 할 한가지

    그래서 세상은 변했다.
    인간이 함께 무리지어 지내온 시기가 인류역사의 99.9%라면 거의 처음으로 인간은 혼자 지내기 시작한 시기를 맞이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럼에도 다른 형태로 또 남의 눈치를 보고 여전히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하며 조종당하는 일이 벌어지겠지만.

    하지만 기억하기 바란다.
    스스로의 힘으로 얻지 않은 것들은 쉽게 무너지고 금방 빼앗긴다.
    과거에 모든 인류의 습성과 거꾸로 걸어갔던, 모든 무리짓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위대한 자들은 코로나라는 희안한 격변이 없이 남들의 비난과 위협을 이악물고 극복해낸 사람들이다.

    우리는 결국 삶에서 공허함을 뜯어내버리고 죽음 앞에서 후회없다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리집단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정신적 자유를 쟁취하는 관점에서 볼 때는 분명 얻어걸린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니, 이를 잘 이용해서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하는 일을 해나가자고 말하고 싶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집단이 쓰는 언어가 가지는 힘

    집단이 쓰는 언어가 가지는 힘

    집단의 언어와 당신의 분위기

    언어다.
    사용하는 언어가, 그 사람의 색깔을 자아낸다.
    왜냐하면, 언어는 사고를 결정(최소한 지대한 영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집단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그래서 어떤 무리에 속한 사람이나 오랫동안 거기에 속해있었던 사람은, 그 무리의 색깔이 묻어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작은 시의 읍 밑에 있는 ‘리’에서, 즉 저기 시골 구석에서 자랐다.
    이제는 서울에서 산 지 어언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생각을 하는 언어는 경상도 사투리다.
    무슨 말이냐면, 마치 모국어로 생각하고 외국어로 내뱉는 것처럼 머릿속에서는 사투리가 흘러가고 이걸 도시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준어(비스무리한 걸로) 바꿔서 뱉어낸다는 이야기다.
    이러면, 생각도 표준어로 하는 사람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언어는 사고를 반영하고 사고는 곧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니까.

    기본적으로 경상도 사투리는 조금, 짧다.
    내가 머릿속으로 하는 문장들을 들여다보면 내가 ‘번역’해서 뱉어내는 문장들에 비해 확실히 그렇다.
    가령, 무언가를 보고 이상하다고 느끼거나 의문점이 들거나 그 상황이 바로 이해가 안 가서 들여다볼 때 나는 그에 대해 주위 사람에게 묻곤 한다.
    “아,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요? 지나가다보니 상황이 뭔가 사고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때 내 머릿속에 문장은 조금 더 단답식이다.
    ‘뭐고.’

    이게 별 의미의 차이도 없고 사소한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저걸 알잘딱으로 번역해서 뱉는거랑 처음부터 저렇게 생각하는거랑은 꽤 다른 분위기를 가지게 된다.

    사투리 뿐만이 아니다.
    각 나라의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은 당연히 모국어로 쓰는 언어마다 가지는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이는 각 나라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느낌을 가지게 되는 핵심적인 요인이 된다.
    군대라는 집단에서 살아온 군인들,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도하는 집단인 교사들, 창작을 하는 집단인 예술가들, 각 집단은 그들이 주로 쓰는 단어나 표현이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각 집단구성원들이 무리마다 가지는 색깔을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가정의 느낌을 분명히 가지고 간다.

    집단의 영향일까, 원래 내 모습일까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우리가 우리자신을 이해하는 데 이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환경의 영향에서 아무 노력없이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우리 자신의 잠재력과 소질을 발견할 때 내가 속한 집단의 영향을 잘 가려내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발견’을 자유 파트 직후 단계에 넣어놓은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가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고, 진짜 우리 것인지 주위로부터 받은 것인지를 구별할 줄 알아야만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진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쿨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냥 내가 속해있던 집단이 쿨한 걸 지향하고 높이 사서 나도 그런 줄 알고 살아왔을 수도 있는거다.
    사실은, 나는 섬세하고 작은 걸 배려할 줄 알고 디테일한 상대의 감정을 미묘한 수준까지 파악할 줄 아는 강점이 있는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중간정리

    중간정리, 같은 걸 한 번 해보자.
    삶에서 공허감을 흩날려버리고 후회없는 인생을 살아가려면, 우리는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해야 한다.
    그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고, 우리 자신의 삶이란 곧 우리가 발견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지향하고 실현시키는 삶이다.
    그런데 나만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게 쉽지가 않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로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자유란 신체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다.
    정신적 자유는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심리적 차원의 자유를 의미하고, 이는 곧 내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 것과 내 안에 원래 있던 내 고유의 것을 구분하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
    이 글은, 그러한 능력을 기르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썼음을 여기 간략히 밝혀둔다.
    헷갈리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길 권한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할 수 있기를.

  • 상대가 은근히 날 무시하거나 성가시게 할 때

    상대가 은근히 날 무시하거나 성가시게 할 때

    누군가가 우릴 성가시게 할 때가 있다.
    온갖 이상한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은근히 우리를 깔아뭉개거나 하는 일들이, 살다보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
    아주 간단하게 세가지 정도로 정리해서 이야기해보자.

    1. 그건 그의 자유다. 내비둬라.

    이게 무슨 해결책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게 첫번째 대책이다.
    그가 당신을 아니꼽게 볼지 말지는, 사실 그의 자유다.
    ‘아니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저러지?’
    라는 건 사실 우리의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잘못하는거라고 느끼는 중일것이다 아마 상대방은.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은, ‘저 XX 왜 이유도 없이 XX이야?’라는 생각을 하는 건 우리의 자유이고.
    우리를 아니꼽게 생각하고 눈흘기며 쳐다보는 건 사실 그의 자유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당신이 잘못했을수도 있다는 류의 말을 하려는 게 전혀 아니다.
    원래 잘못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단 하나의 진실을 제시하긴 어렵다.
    오후6시반에 집에서 치는 피아노 소리는 피아노 치는 사람에겐 이 정도는 양해해줄 수 있는 취미생활이고, 옆집 할머니에겐 한마디하기엔 좀 이른 시간이지만 개념밥말아쳐먹은 망나니의 잘못된 행동이다.
    그리고 아랫집 혼자 사는 덩치큰 고등학생에겐 언제 한 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일부러 시비걸어서라도 반쯤 죽여놔버리고 싶은 X같은 선전포고일지도 모른다.

    잘못인지 아닌지는 상대적인 거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사람이 누군가의 어떤 점을 보고 잘못이라고 말할 때 그 판단은 본질적으로 다분히 편향적이다.
    누구나 그렇다.
    인간이라는 게 다 그렇다.

    그러니 쟤는 저런 판단을 하다니 ‘틀렸어’!라고 열내지 말고 그냥 내비둬라.
    각자는 각자의 자유가 있는 법이다.

    2. 같이 XX해라.

    같이 XX하는 건,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선택지다.
    하지만 애초에 선택지는 이 두가지다.
    내비두는거, 혹은 같이 XX하는 거.
    같이 XX하는 게 어려운 이유는 대개 두가지다.
    상대방이 나보다 더 강하고 잔인할까봐 두려운 것 하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결국에는 ‘문제아’로 볼까봐 하나.
    이렇게 두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같이 XX하는 걸 두려워한다.
    하지만 사실 자꾸 성가시게 구는 놈들은 XX 안할수록 더욱 하이에나처럼 길길이 날뛴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가만히 있으면, 더 잔혹한 군주처럼 구는 게 인간의 특성이다.

    3. 할 일 해라.

    사실 나는 이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데, 성가시게 굴더라도 그냥 길가던 똥개가 짖는건가, 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사는 게 제일 베스트다.
    인간 중에는 자신의 시기와 질투, 공격성과 더러운 탐욕으로 누군가를 비난하고 물어뜯어야만, 적과 함께 투닥거려야만 그나마 삶이 채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극단적으로 공허한 자들이 상당히 많다.

    근데 여기에 참가해 같이 플레이어로 굳이 역할놀이를 해줄 이유는 사실 없다.
    그냥 이상한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해 늦은밤 길거리에서 날 툭 건드리면, 그저 가만히 내비두고 쳐다보거나 열받아서 패버리거나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냥 갈 길 가는 게 제일 좋다.

    문제는 사실 그런 하이에나들이라기보다는, 내 ‘갈 길’이 없는 공허한 우리 각자의 삶이 더 큰 문제다.
    자기 삶을 살기 바쁜 사람들은, 수십만명이 재잘거린다고 한들 사실 신경쓸 여유가 없다.
    (물론 대중의 평가와 호감이 생명줄인 연예인들은 조금 예외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을 살기에도 바쁜데, 맞는말을 하는 것도 아닌 세상 별의별 온갖 사람들이 지나가며 시비건 걸 언제 다 들어주고 상대해주고 있겠는가.

    자, 정리해보면.
    가령, 회사에서 똥꼬를 열심히 핥는 회사가 인생 전부인 동료가,
    아부라고는 못하는 당신을 자꾸 뒤에서 씹고 은근히 무시하는 말을 하고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오늘 당신이 할 일을 해라 ㅋㅋ
    오늘 당장 당신의 삶에 의미있는 할 일이 없으니, 그게 자꾸 크고 중요하게 마음에 들어오는거다.

    그건 그냥 도망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도망이나 회피와 내가 더 중요한 일에 삶을 써야해서 신경쓸 겨를이 없는 건 다르다.
    스님들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고안해낸 ‘명상’을 왜 호흡부터 하는지 아는가.
    호흡에 집중 안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온갖 번뇌가 올라와서 감당이 안 되거든.
    그 마음챙김과 명상의 대가인 스님들도, 당장 본인이 할 게 없으면 휘청거린다는 말이다 ㅋㅋ
    원래 사람이 해탈하기 전까진, 몰입할 게 있어야 다른 무가치한 잡념들이 가라앉고 그러는거다.
    그러니 이게 도망 아닌가, 이러면서 민망해하덜 말고, 그냥 내 갈 길 가면 된다.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라.
    좀비들 신경쓰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