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Lv12

  • 고독의 필요성

    고독의 필요성

    고독만이, 우리를 우리자신과 만나게 한다

    인간은 늘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친다.
    그건 진화적 본능이기도 하고,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자연스러운 몸부림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독으로부터 끝없이 도망다녀서는,
    진짜 자기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선택하고 있고 무엇을 숭상하는지,
    어떤 것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지,
    어떤 것을 위해 삶을 매진해야 하는 것인지
    죽을 때까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Lv18에서 알게 되겠지만,
    진짜 나다운 나자신,
    내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내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오롯이 혼자일 때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남들이 걷는 길이 아니라,
    누군가가 걸었던 길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길’은
    철저히 고독 속에서
    차분히 나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과정에서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정신분석의 대가인 프로이트나 융이
    오랜시간 혼자 틀어박혀 자기분석에 빠져있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진짜 우리자신과의 조우를 위해
    고독을 기꺼이 환영해야만 한다.
    수많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이
    고독을
    우리 자신의 진짜 내면과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찬양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내 자신의 본질과 마주할 수 있는 이유

    세상이 근본적으로 지옥같은 이유는,
    어떻게든 우리를 세뇌시켜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우리를 이용해먹는 구조로 만들어져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모든 인간은 부지불식 간에
    어떻게든 타인이 날 위해서 행동하고 살아가길 바란다.
    그건 동물로서 생존하기 위한 진화적 본능이기도 하고,
    온갖 욕구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몸부림의 일환이기도 하다.

    이런 세상 속에서
    외부와의 접촉, 타인과의 관계는
    거의 대부분
    우리가 진짜 우리자신을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고독이 자기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조우할 기회를 준다고 말했고,
    사르트르는 심지어
    고독을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진짜 자유를 얻는다고 말했다.

    모든 억압과 속박은,
    사실 외부와의 연결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 억압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우리 내면에 있는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과 소질, 개성과 예술성 같은 것들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인간이 진짜 자신을 발견하고 그를 위해 매진하면,
    그 인간에겐 더이상
    세뇌나 통제가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다.

    더이상 타인이 요구하는 대로 살지 않고,
    그 대신 자기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 시작하는 인간이 탄생하는 사건은
    오직 ‘고독’을 통해서만 벌어지는 일이다.

  • 받아들여라

    받아들여라

    통제영역 밖에 있는 문제는 방도가 없다

    고독은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태어나,
    삶이 끝나는 날까지 함께 한다.
    우리가
    우리의 통제영역 하에 두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고독에 대해서 가질 마음가짐은
    단 하나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
    받아들여라.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다.

    인간이 자주 하는 실수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며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첫번째 글에서 말했듯이
    온갖 관계를 만들며
    그 관계의 대상을 내 고독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그런 게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하겠지만,
    인간은 애초부터
    자신의 치부와 더러운 모습을
    스스로에게조차 숨기는 일에
    매우 능하다.

    결국 상대방은
    ‘이 관계가 어쩌면 나를 사랑해서 아닐 수도 있겠구나’
    라는 느낌을 어느 순간 가지게 된다.
    이는 오랜 고민과 망설임을 거쳐,
    결국에는
    실망과 배신, 분노와 냉대로 이어진다.
    그럼 인간은
    그 관계에서 배신당했다며
    자신이 저지른 짓은 알지도 못한 채
    다시 또다른 관계를 찾아헤맨다.
    하지만 그건 부질없는 짓이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일의 대가

    내 고독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
    기적같은 진정한 관계를 지향하는 건
    매우 가치있는 일이다.

    그런데 고독은 종종,
    애초에 그런 기적이 일어날 여지 자체를 없애버린다.
    왜냐하면 인간이
    고독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자꾸 도구적인 관계를 맺고 다니기 때문이다.
    나의 외로움과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이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런 저런 관계를 맺고
    그 관계의 상대방을 도구로 이용하려는 행동은,
    도덕적으로 나쁘고 미성숙한 문제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일어날수도 있는
    가장 가치있는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짓이라서
    결코 그런 행동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 외롭고 고독하다고
    이런 저런 무리나 집단에 기웃거리거나,
    그리 기쁘고 즐겁지도 않은 관계유지를 위해
    시간과 체력을 쓰지 마라.
    그건 단순히 시간낭비 체력낭비가 아니라,
    진짜 소중한 가능성을 말살시키는 희대의 삽질이다.
    그냥 혼자 고독과 어울리는 게
    백배는 낫다.

    거기에 더해,
    사실 우리가 원하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독이 필요하다.

  • 인간의 근본, 고독

    인간의 근본, 고독

    인간은 고독하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인간이 지닌 실존적인 문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죽음,
    고독,
    부자유,
    무의미.
    (이 네 가지는
    실존주의 심리치료에서 말하는
    인간의 4대 실존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나,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죽는다.
    그리고 그 사이 잠시 존재하는
    80년 남짓의 시간 동안,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지닌 채
    살아가게 된다.
    그 중에서도
    외로움, 즉 고독은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된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니는 한계

    인간이 고독하다는 건,
    사실 그 누구도
    나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의미한다.
    인간은 절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건 신체적인 측면에서든,
    정신적인 측면에서든,
    모든 측면에서 그렇다.
    영화 아바타처럼
    모든 신체감각과 생각과 정서를 연결시켜
    공유하는 마법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관계로의 도피

    하지만 인간은
    외로움이 가져다주는 끔찍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나를 이해하고
    내 마음을 공감해줄 수 있고
    나와 뜻이 같은 사람을
    찾아헤맨다.

    수많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건 부모자식 간의 관계일수도 있고,
    피를 나눈 형제자매의 관계일수도 있다.
    사랑하는 배우자, 연인과의 관계일수도 있고,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의형제나
    친우와의 관계일수도 있다.
    그 외에도
    동료, 선후배, 동창, 지인 등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인간은 어떻게든
    애초부터 주어진 형벌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느껴지는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친다.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해주고,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위해주고,
    나의 아픔에 나만큼 고통스러워해주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찾아
    끝도없이 헤맨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소중한 관계를 통해
    우리의 본질적 문제인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하늘 아래 그 누구도
    나의 심정과 외로움, 나의 이 고통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것 같아
    느끼게 되는 극도의 고독함.
    이 외로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그런 어떤 사람과의 관계.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겠으나,
    그런 건 없다.

    칸트는
    ‘비사교적 사교성(ungesellige Geselligkeit)’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 개념은,
    인간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스럽게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만,
    그 관계의 근본적인 목적은
    상대와의 진정한 연결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그게 뭐 어쨌냐고?
    지금껏 이 글에서 한참을 내가 써내려간 게,
    바로 저 이야기다.
    인간은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개인적인 목적 추구의 수단으로,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를 찾아나서는 존재라는 걸
    말하는거다.

    만약 개개인 모두가 그런 마음이라면,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저 자신의 고독을 해소시켜주기 위한 수단으로서
    향유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관계를 아무리 찾아헤매봤자,
    그런 목적으로 맺는 관계가 과연
    진짜 인간의 고독을 해소해줄 수 있겠는가.
    당신이라면,
    당신의 사랑하는 배우자가, 절친이, 가족이,
    당신이 좋고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실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당신과 관계를 맺는거라는 걸 알면
    어떤 마음이 들 거 같은가.

    인간이 극도의 고독함을 달래기 위해
    타인과 어울려 지내려고 하고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어하는 한,
    애초에 그 관계가 인간의 고독을 해소해주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는거다.
    이 역설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 Lv12. 고독과 나란히 걷는 시인

    Lv12. 고독과 나란히 걷는 시인

    우리가 Lv1에서 Lv8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일,
    즉 우리 자신만의 이야기를 했다면.

    Lv9에서 Lv11까지 우리는
    돈을 버는 일이
    우리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남도록
    그들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이야기했다.
    타인을 설득해야 하는 최초의 이유인
    돈을 버는 일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딱 우리자신만의 생존을 이야기하던
    Lv8까지의 이야기를 넘어
    이제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해야할 주제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있는 중이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관계 자체에 대한 욕구를 가진 존재다.
    우리는 누구나
    진정한 관계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외롭고,
    그 무엇보다 고독을 두려워한다.
    실제로,
    삶에서 진정한 관계를 경험한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이번 레벨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될 이야기는,
    바로 인간의 고독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인 고독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고독을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고독을 이해하고 고독한 인간의 한계를 이해해야만,
    우리가 삶에서 진정한 관계를 만드는 기적을
    마주하게 될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반대로 말하면,
    고독을 모르는 이에게 진정한 관계같은 건
    있을 수 없다.

  • 깻잎논쟁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_2편

    깻잎논쟁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_2편

    자, 지난 글에 이어 계속 이야기해보자.
    (지난글을 못 읽었거나 기억이 안 난다면, 읽고 오길 추천한다.)

    깻잎논쟁과 같은 문제가 불거졌을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삶의 영역과 우리의 영역이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상대방이 타인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그 타인들이 이성이라 할지라도 결국 상대방의 영역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역 안에서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가령, 내 지금 느끼는 감정과 떠오르는 생각을 상대방에게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상대방이 이렇게 해줬으면 하는 걸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까지가 우리의 영역’임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상대방이 이랬으면, 하고 바라는 건 우리의 영역이다.
    그 바램대로 자신의 행동을 바꿀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상대방의 영역이다.
    이 냉혹한 진실을 가급적이면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마음을 진지하게 전달한다면, 상대방이 의외로 쉽게 앞으로는 다른 오빠, 다른 여사친의 깻잎을 떼어주지 않겠노라 말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상대방도 나를 아끼고 좋아한다면, 굳이 내가 싫다는 일을 감수하면서 할만한 행동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할지 저렇게 할지 결정은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몫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결정하는 데 참고하고 고려할 수 있도록, 나의 마음과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럼에도 계속 떼주면? ㅋㅋ
    자, 여기서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해하려고 노력을 ‘진지하게’ 해봐야 한다 ㅋㅋ
    이건 기본적으로 타인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게임이다.
    무슨 이야긴지 아는가.
    내가 지금 보수적인 측에서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 말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는 상대방의 영역에 내가 들어가려는 행위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만을 통제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거꾸로 보면, 타인이 자신이 자연스럽게 하고싶은 걸 하는 일을 막아서 상대방이 좀 갑갑하더라도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여라는 것 아닌가.
    상대방이 나의 마음을 듣고도 그게 잘 안되고 어렵다고 하면, 이젠 나도 다시 내 생각과 판단을 재고해봐야 한다.
    진지하게 말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도록 애써봐야 한다.
    여기서 지난 글의 논의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어차피 내 연인이 다른 이성과 가지는 모든 관계에 대해 모니터링할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내가 싫어하는 부분과 내 가치관을 전달했으니, 그가 살면서 나를 배려해주고 고려해주길 바라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건 그것대로 내비두고, 우리는 이제 우리가 가급적 사랑하는 상대방의 스타일을 수용할 수 있게 진지하게 내 생각을 좀 바꿔보려는 노력을 해야 할 때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과 깻잎을 떼주는 행위에 대해 서로 그 일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해석이나 관점도 나누고 이런 과정이 매우 가치있고 중요하다는 걸 언급해두고 싶다.)

    아무리 재고해도 나도 그게 납득이 안 되고, 상대방도 도저히 그걸 안 하고는 안 되겠다면?
    자, 이제 남은 건 하나다.
    이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
    (이게 그냥 무작정 때려치울지 고민하라는 단순한 표현은 아니다.
    관계의 양상에 대해서, 그리고 이 관계 자체에 대해서 다시 되짚어봐야한다는 이야기다.)
    이 결론이 나오면 충격을 먹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안다.
    나도 이미 가정을 이루고 아내와 함께 미래를 약속하고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오는 입장에서, 그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누구보다 크게 느낀다.
    하지만, 이제 남은 건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일이다.
    아니, 그렇게 가벼워도 되는가? 라고 말할수도 있지만, 원래 관계라는 게 그런거다.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다.
    그게 연인관계든 부모자식관계든 매한가지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끊임없이 변한다.
    여사친이라고는 없던 내 남편이 10년 뒤에는 성향이 바뀌어서 매 주말만 되면 친한 여동생과 누나들을 태우고 캠핑을 가자고 당신을 조를지도 모른다.
    싫으면, 자기 혼자 다녀오겠다고 ㅋㅋ 트렁크에는 와인을 잔뜩 싣고서 말이다.
    운동에 취미가 생긴 당신의 아내가 생전 안 입던 레깅스를 입고 주말마다 등산을 나가고 동호회 친한 오빠, 남동생들과 자전거를 타고 전국일주를 다닐지도 모를 일이다.
    이 문제가 지금 당장 우리에게 벌어지지 않더라도(연애 중이 아니면 더욱이 나한테는 안 올 일 같아도), 언제든지 충분히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사실, 연인보다 보수적이던 당신이 10년 후에는 오히려 상대방의 기준에 갑갑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ㅋㅋ
    뭐, 그 때 당신의 자유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지금 좀 개방적이다 싶은 걸 넘어가주고 보험으로 들어놓으면…
    나중에 당신도 한 번…? ㅋㅋ
    농담이지만, 정말 그런 변화가 생기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걸 마지막으로 적어둔다.

    사랑하는 관계는, 결국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나 끊임없이 배려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의 시간들로 점점 더 견고하게 완성되어간다.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진솔하게 서로에게 전달하고 알아가는 과정만이, (너무 교과서 같아서 마음에는 안 들지만) 오래 서로 사랑하며 삶을 채워나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정리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걸(마음표현, 요구사항 전달) 하고, 상대가 안 되겠다고 하면 내가 다시 마음을 바꾸려 해보고, 둘 다 서로 안 되면 관계 다시 생각해라.

  • 깻잎논쟁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_1편

    깻잎논쟁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_1편

    깻잎논쟁.
    2000년대가 들어선 이래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한반도에서 일어난 그 누구도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못한 희대의 논제.
    이성인 친구가 깻잎을 한장만 가져가려 할 때 내 연인이 그 이성의 깻잎을 떼어줘도 되느냐.
    떼어줘도 된다.
    아니, 그걸 굳이 왜 떼어주는거냐.

    내가 사랑하는 연인이 다른 이성과 어떤 것까지 교류하고 공유해도 되는지는 언제나 희대의 논제였다.
    이 화두는, 비단 깻잎을 떼어주는 것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연인이나 배우자가, 다른 이성과 얼마나 친밀하게 지내며 그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을 자신의 연인에 대한 미안함이나 죄책감없이 만끽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고민거리가 있을 때 몇시간이고 통화를 하는 건?
    둘 다 영화를 좋아해서 같이 영화를 보는 건?
    1년에 몇번 안 되더라도 둘이 맛있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는 건?
    술집에서 술을 한잔 하는 건?
    동선이 같을 때 차를 태워주는 건?
    스터디카페 비용을 아끼기 위해 둘이서 스터디 카페 룸을 대여해서 공부를 하는 건?
    같은 헬스장에 다니는 건?
    이건 사실, 끝도 없는 수만가지 상황에 대한 문제이며, 동시에 결국 한가지 문제다.

    필연적으로 나와 내 연인, 둘 중 한명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고 한 명은 상대적으로 더 개방적이다.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개방적인 상대방 기준대로 가자니 이건 아닌 거 같아 화가 나고, 또 내 기준대로 상대방을 강제하자니 상대는 답답해하고 다툼만 생기니 어렵다.
    개방적인 입장에서는 보수적인 상대방 기준대로 참고 살자니 숨 막히고, 내 기준대로 하면 안 되냐고 말하니 상대방은 그건 너무 선넘는 거 같다고 화를 낸다.
    (흥미로운 건, 개방적인 측에서 막상 자기처럼 상대방이 다른 이성과 그런 관계를 가지며 지내면 화내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ㅋㅋ)
    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자, 일단 가장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기본적으로 각자의 행동은 각자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건 결혼을 한 연인 사이든, 피가 섞인 부모자식 사이든 모든 관계에서 동일하다.
    상대방이 다른 이성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든 그건 근본적으로 상대방의 삶의 영역이다.
    내 통제가능영역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니 그러면 뭔짓을 하든 다 냅두란 이야기냐! 라고 분노할 모습들이 눈에 선한데, 그런 방향성을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다.
    (참고로 난 어릴 때부터 그런 사안들에 좀 과도하게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며 살아오고 있다만 그건 내 개인적 취향일 뿐이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다.
    왕의 용안을 보면 즉결처형 당하기도 하던 조선시대에도, 백성들은 언제나 왕을 다같이 씹어대고 희화화해서 공연도 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도 결국 타인의 행동은 통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거다.
    우리가 연인인 상대방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하지 않는 이상, 어차피 상대방이 다른 이성과 그저 자판기 앞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만족감까지 통제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핵심은 깻잎을 떼주느냐, 같이 영화를 보느냐가 아니라 결국 나와 나누기로 한 ‘이성 간의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과 행복감’을 다른 이성과도 나누면 안 되는 것 아니냐, 가 아니던가.

    악! 내 연인은 그렇게 나 몰래 뒤에서 내가 싫어할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거든요?
    나랑 의견차가 있는거지 내 말을 들어주기로 했으면 들어주거든요!!

    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존재 자체부터 자각하지도 못하고 자각하더라도 정확히 자각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건 각 개인이 아둔해서가 아니라, 태초부터 모든 사람은 어떤 영역에서는 적어도 분명히 그렇다.
    (이건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 번 썰을 풀어보자.)

    이쯤에서 이 이야기로 넘어가자.
    이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사안별로 볼 문제가 아니라 큰 하나의 문제로 환원해서 봐야 한다.
    밤에 두시간 통화하는 건 안 되고, 낮에 잠깐 15분 통화하는 건 되는 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밤에 저녁 먹고 와인한잔은 안 되지만 잠시 낮에 지나가는 길에 카페에서 커피 한잔은 되는 식으로, 이렇게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이건 명백히 내 연인과 서로 독점적으로 지배하기로 한 ‘이성과의 교감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감’을 다른 이성과도 아주 작고 사소하게라도,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안 보이는 애매한 상황을 통해서도 만끽하면 안 되는거 아니냐, 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면 지금 하려는 주제가 튀어나오게 된다.
    “아니, 난 그럴 음흉한 목적으로 얘랑 둘이 영화보러 간 게 아닌데…???”

    자, 한 번 생각해보자.
    이 논의는 애초에 이성이지만 이성이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긴장감이나 즐거움, 설렘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시각차이로 시작된다.
    추운 겨울날, 그저 친한 여자사람친구가 가방을 들고 있어서 손이 없으니까 열려있던 점퍼 지퍼를 대신 올려줬을 뿐인데, 이 행동을 여자친구가 듣고서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사람친구가 떼려는 깻잎을 그저 젓가락으로 잡아 도와줬을 뿐인데, 이 행동을 남자친구인 내가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충 생각해도, 여기서 음흉한 목적을 가지고 지퍼를 올려주고 깻잎을 떼준 게 아닐텐데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는 존재다.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하이힐이나 물건을 보고도 섹슈얼한 욕구를 느끼기도, 충족시키기도 할 수 있는 존재다.
    무의식과 달리, 우리가 자각하는 ‘의식’은 엄청나게 큰 빙산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프로이트의 삼원구조모형을 나타낸 그림을 보면, 물 밑에 어마무시하게 큰 빙산의 대부분이 가라앉아있다.)
    이성과 그저 같이 키득거리며 둘이 대낮에 커피만 마시고 있어도, 어쩌면 그게 이성과 함께 있어서 느껴지는 즐거움이 크든 작든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아, 나는 그거 그 친구가 여자라서 그런 게 아닌데?
    라고 모든 개방적인 입장의 사람들은 이야기하겠지만, 자신이 자각하는 의도가 그렇지 않더라도 그럴 수도 있다.

    그런 게 존재한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아직도 긴가민가하면 직장을 떠올려보라.
    왜 신입직원이 들어오면, 여자신입직원, 특히 외모가 출중한 여자신입직원일수록 남자 상사들이 끝도 없이 밥약속을 잡는지 생각을 해보면 답이 나온다.
    요즘은 예전과 달라서 술약속을 잡고 회식자리에 막 부르기도 쉽지 않은 시대인데, 그런 행태는 여전하다.
    왜 그런가.
    대낮에 그것도 단 둘이도 아니고 세넷 이상 모여서 밥먹는 걸 왜 그리 편향되게 여자직원에게 많이 요구하는가.
    그냥 단둘이 아니더라도, 그저 낮에 바쁘게 점심 한 끼 먹는거라도, 그냥 앞에 어린 여자직원과 같이 밥을 먹으면 그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거다!

    사실 모두가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말을 하면 괜히 더 고상한 척, 자기는 아닌 척, 어우 그런 놈들은 변태새끼들이지, 이러는데.
    항상 말하는건데, 그렇게 고상한 척 점잖은 척 하는 놈들이 제일 위험하다.
    오히려 이 ‘불편한’ 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애새끼 상태를 벗어나는 성장의 시작이다 ㅋㅋ
    예전에 최화정 씨가 어떤 방송에서 그런 말을 한 걸 본적이 있다.
    자기가 예전에 대기실에 친한 동료들하고 앉아있었는데 다 여자만 있었단다.
    그래서 다들 피곤하기도 하고 축 쳐져 있다가, 남자 동료가 한 명 딱 들어오니까 다들 톤이 한 옥타브는 올라가서 텐션이 확 살더라, 고 말하며 막 웃는 이야기였다.
    저게 뭐가 이상한가.
    저게 자연스러운거다.
    인간은,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었다.
    이성에게 기쁨을 느껴야 번식을 하고 자손을 낳아왔을 거 아닌가.
    인간도 동물이다.

    이 이야기를 정리하면, 인간은 애초에 이성을 보며 설렘과 즐거움을 느끼게 만들어졌고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정말 별 것 아닌 이성 간의 상황에서도 크든 작든 상대방이 이성이기 때문에 느낄만한 기쁨을 느낄 수도 있다.
    이 전제를 깔고 보면, 글 서두에서 말한 게 좀 더 이해가 갈 것이다.
    이걸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뭐 남자친구나 남편을 남자나라에 쳐박아두던가, 여자친구나 아내를 여자나라에 쳐박아두지 않는 이상 그건 통제불가능하다.

    사실 이런 논쟁에서 더 큰 문제는, 내 연인이 싫어하는 걸 감수하면서도 다른 이성과 그 행동을 하고 싶다는 마음 그 자체가 문제인건데… ㅋㅋ
    사실 다른 동성친구와 해도 되고, 연인이 싫으면 사실 그 행동까지는 안 하면 그만일 문제이기도 한 건데 그걸로 언쟁이 생긴다는 건 많은 함의를 담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각자의 행동은 각자의 삶의 영역이라는 것.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모든 영역에서의 모든 행동의 의미와 기저에 깔린 욕망을 다 자각하진 못한다는 것.

    (글이 너무 길어져서, 다음 편으로 나눠서 글을 계속 써야겠다.)

  • 부모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마라.

    부모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마라.

    부모가 힘들게 살면, 자식은 일찍 철이 든다.
    ‘사춘기가 없이 지나간다’는 아이들은 대개 그런 환경에서 자란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가 너무 힘들고 괴로워하며 인생을 어떻게든 견뎌나가는 걸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나까지 엄마아빠를 힘들게 하면 안 되겠구나.”
    “내가 꼭 저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줘야지.”

    투정부리고 떼 쓸 여유같은 건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애초부터 없다.
    어린 아이에겐 세상 전부인 ‘부모라는 세상’이 천둥번개가 치고 쓰나미가 일어나 끝없이 위태위태하면, 아이들은 편하게 누워 투정이나 부릴 생각은 감히 꿈꾸지도 못한다.

    이런 척박한 환경을 대물림하는 부모들을 탓하거나 비난할 건 아니다.
    누구나 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몇이나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장악하고서 아이를 낳을까.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애초에 준비가 다 된 후에 일어나는 중요한 일 따위,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아이를 낳는 일은 누군가를 적어도 성인이 될때까지는 일정 강도 이상의 울타리를 만들어 보호해줘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일이지만, 그게 완벽한 준비 이후에나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엄청난 비밀을 하나 누설하자면, 부모가 자식이 자라기도 전에 자식을 망쳐버리는 일은 사실 여유롭지 못한 현실보다는 전혀 수습하지 않고 살아왔던 부모의 망가진 정신세계 때문에 벌어지는 경우가 절대다수다.

    그럼, 충분히 준비하고 아이를 가지지 않은 대다수의 부모들을 비난할 것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반대로 자식들을 비난하거나, 자식들이 그런 상황에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걸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부모가 사는 게 힘들면, 그건 냉정하게 말해서 부모 각자가 살아온 그들의 삶인건데, 자식들은 그런 부모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부모는 자식을 키우고, 자식은 그런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부모가 괴로우면, 자식은 자신 때문에 부모가 괴롭다고 느낀다고 쉽게 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나 또한 가족에 대한 애착과 엄마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에 유독 컸던 탓에, 성인이 되고 나서도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죄책감이 마음을 짓누르곤 했다.
    그런 죄책감을 덜어내는 모든 변화나 행동이 전부 다 비겁한 자기합리화고 배신이라고 철썩같이 확신했던 시기가 꽤 길었다.

    하지만, 아주 오랜시간 곱씹고 곱씹으면서 조금씩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내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었다.
    주위 많은 사람들이 부모가 되고, 나 또한 내가 모르던 나의 모습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며 나와 타인의 마음 속 서사들을 끝없이 공부해가면서 알게 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누구나 다, 자기 손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간다.

    엄마 아빠가, 어릴 때부터 엄마아빠 생각, 엄마아빠 걱정을 자주 하던 내게 해준 이야기가 있었다.

    “느그 태어나서 한 3,4년동안 한창 이쁠 때 엄마 아빠 행복하게 해준것만으로 느그는 엄마아빠한테 평생 해줄 효도는 다한기다. 나머지 시간은 엄마 아빠 생각하지 말고 느그 행복하게 살면 그게 엄마아빠한테는 최고 효도다. 항상 느그 마음 가는대로 살아라. 엄마아빠 생각하지 말고.”

    이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지만, 나는 그럼에도 죄책감이 있었다.
    부채감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런 마음이. 미안함이.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황당하게도 엄마아빠의 그 말을 100% 믿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저, 자식 마음 편해라고 해주는 이야기일 뿐 어쩌면 거짓말 아닐까, 라는 궁예(?!)가 쓰는 관심법을 시전하기도 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한 데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결국 피해자였던 걸 하도 많이 목격한 탓도 있었다.
    억울하고 자기만 희생하고 양보하고 참고 포기했다는 걸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는 너무 많은 사람들.
    현실에서도 매체에서도 모두가 다 ‘나는 피해자’라면서 비명을 지르는 탓에, 나는 혹시라도 엄마 아빠가 언젠가 (누구나 다 가지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될까봐 두려웠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나도 이제 중년이 되어가는 지금 시점에서 본다면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어디 아픈 데 없이 건강해서 그저 고맙다’는 말을 달고 살고, 아빠는 그저 ‘어디 다치거나 감기 걸리지 않게, 밥 거르지 않게 잘 챙겨’라는 게 가장 관심사인 사람이다.

    만약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듯이 우리 엄마아빠가 나에게 ‘널 키우느라 희생하고 젊음을 바쳤다’며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면, 그 때는 어땠을까.
    아마 그랬어도, 지금의 내가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협박과 위협으로 상처 받고 피흘리는 사람들이 정말 셀 수도 없이 너무나 많다는 걸 나는 몸소 체험했다.
    개인상담을 하고 사적인 관계로 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런 이야기는 주위에 산재해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살면서 절절하게 깨달은 사실은, ‘누구나 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인생을 선택하고 산다.’는 것이다.

    누구나 매순간 그 상황에서 가장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선택을 하고 산다.
    이 세상 많은 부모들에게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그들이 해야할 도리를 일정기간 다 하는 것은 자식이 죄스러워할 일이 아니다.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기꺼이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이야기다.
    부모가 혹시 ‘널 키우느라 내 인생은 하나도 없었다’며 얼토당토 않은 위협을 하거든 죄책감을 느끼지는 마라.
    그저 슬퍼해라.
    깊게 오롯이 다 슬퍼하고,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삶을 조각하면 된다.

    도저히 그렇게 마음을 먹을 수 없거들랑, 그럼에도 당신의 삶을 조각하는 데 집중해라.
    그들에게 현실적으로라도 보답하고 도움을 주고 싶다면, 그들을 지키고 싶다면, 결국 당신이 해야할 일은 주저앉는 게 아니라 당신의 삶을 완벽하게 조각하는 일이니까.

    결국, 부모가 피해자인듯이 하든 그렇게 행동하지 않든, 우리는 우리자신의 삶을 조각하는 데 집중하면 된다.
    당신들이 희생했다는 말에 선을 긋든 긋지 못하든, 우리는 우리의 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하는 데 몰입하면 된다.
    지나간 시간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라도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면 그리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죄책감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있다.
    자식이 부모 슬하에서 보살핌을 받은 건, 절대 죄스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들도 그들 입장에서 가장 행복할 것 같은 선택을 했을 뿐.
    사랑한다면, 그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힘을 기르고 그들을 지켜주면 된다.
    죄책감은, 미안하지만 우리가 부모에게 가져야 할 감정은 아니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절대, 희생하지 마라.

    절대, 희생하지 마라.

    “삼촌(니 남편)이 얼마나 어머님을 아끼는데, 니가 안 오고 배길 수 있나 보자.”

    오늘 엄마는, 큰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아빠가 할머니를 모시는 큰아빠 큰엄마가 하는 식당일을 돕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빠는 엄마에게 직접적으로 식당일을 도우라 요청하진 않았지만, 엄마만 희생해주면 모두가 만족스러운 상황이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빠도, 할머니도, 큰아빠도, 큰엄마도, 엄마의 희생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나 미안함을 굳이 느끼지는 않았다.
    아빠는 속정이 많고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가족일에 있어서는 자기처럼 언제나 엄마에게 양보와 희생을 바랐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당하는 사람은, 타인들의 눈에도 얼마든지 희생해라고 요구해도 되는 사람처럼 보이는 법이다.
    그렇게 엄마는 바보같이 10년을 넘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남의 식당일을 돈도 받지 않고 매일같이 해주다가, 오늘 급기야 그런 모욕을 당한 것이다.

    엄마는 힘들었다.
    매일 같이 새벽부터 버스를 두번이나 갈아타고 그 힘들다는 식당 일을 하러 시골까지 들어가는 게.
    큰엄마는 머리가 나쁘고 아둔한 사람이어서, 식당은 만년 적자였다.
    주방일이든 홀을 보는 일이든 같이 일을 해도 엄마가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다보니, 엄마가 지친다는 이야기가 큰엄마의 불안과 걱정을 일으켰으리라.
    그렇게 엄마는 남편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희생한 10년의 대가로 그런 모욕을 당했다.

    큰아빠는 집안의 장손이라는 이유로 문중의 모든 재산을 이미 다 혼자 물려받은 상황이었다.
    그는 폐인이었다.
    큰엄마가 자기 몰래 도장을 훔쳐 온갖 빚을 낸 걸 알게된 사건이 있은 후, 그는 마치 자신이 세상 모든 보상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듯한 태도로 거의 3,40년을 매일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하며 생계활동은 하지 않은 채 지냈다.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큰아빠가 가진 재산으로 술도 사주고 여자가 나오는 술집도 데려가주는 것에 군침이 질질 흐르는 동네 청년들이 큰아빠 주위에 득실득실거렸다.
    큰아빠는 점점 바다 앞에 있던 땅도 팔고 자그마한 건물도 팔고 논도 팔고 물려받은 집안의 거의 모든 걸 팔아치우고 있었지만, 여전히 재산은 많았으니 걱정은 없었다.
    매일같이 술에 취해 사는 큰아빠는, 사람들이 자신 주위에 항상 많은 게 자신의 인덕이 아닌가 하는 상당히 흥미로운 생각에 젖어 살고 있었다.
    온갖 감투를 썼다.
    있는대로 물려받은 재산을 동네 사람들에게 다 뿌리면서, 이런저런 자리에 앉았다.
    그는 행복했다.
    자신의 감춰져있던 인덕과 영향력, 큰 그릇이 세상에서 드디어 인정을 받는 것만 같았다.
    현실은, 거의 매년 적자인 식당의 늘어가는 빚을 물려받은 재산으로 메우고 거의 365일 내내 술에 절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술값을 대주며 떠받들어지는 쓰레기들의 쩐주, 뭐 그런거였지만.

    이 짧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피해자’로 살아가는 일의 위험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누가 피해자일까?
    엄마? 엄마를 바라보는 아들?
    물론 그 두 사람이 가장 큰 피해자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모두가 피해자다.
    저 이야기에서 자신이 희생했기 때문에, 자신은 보상받아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을까?
    없다.
    참고 견디며 애써 못본 척하고 그러면서 억울한, 즉 내가 희생하고 있다고 조금이라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은 시기가 다를 뿐 언젠가 결국 피해자가 된다.
    저 이야기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피해자다.

    자신이 ‘희생’이라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자신의 모든 행동은 결국 그 사람을 피해자로 만드는 일이다.
    저 이야기에서 자신이 희생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
    그러면 모든 사람은 피해자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우리는 하나 발견할 수 있다.
    “희생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희생을 숭고한 단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희생은 반드시 피해자를 양산한다.
    앞서 이야기한 문장을 찬찬히 읽어보라.
    ‘자신이’라는 주어가 붙어있다.
    남이 누군가의 행동이나 삶을 보고 ‘희생’이라고 느끼든 연민을 하든 말든 그건 아무 쓰잘데기 없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다르다.
    우리가 우리자신이 ‘희생’한다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결국 억울함과 슬픔과 분노와 당위를 낳는다.
    좋은 마음으로 희생하다가도 상대의 태도나 내 심경의 변화로 억울해진다.
    슬퍼지거나 화가 나기도 한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하는데 최소한 다른 사람은, 상대방은, 이렇게는 하는 게 ‘옳지.’라는 당위가 아주 강력한 힘으로 마음을 지배한다.

    온전히 상대방을 위한 진심만으로 누군가에게 베푸는 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희생’이라고 생각할 상상을 잘 하지 못한다.
    그건 자신의 삶이 가지는 가치이자 의미이니까.
    옆에서 사람들이 희생정신이 대단하다며 자신들의 관점에서 평가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좋은 마음만 가지고 자발적으로 희생한다고 생각을 하던 누군가는, 먼훗날 억울함에 오랜시간을 아파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희생하지 마라.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지 마라.
    우리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의 희생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가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삶에서 공허를 걷어내고 우리가 인생을 후회없이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최고의 나를 조각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하고, 그걸 발견하기 위해서는 살아남아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결국 ‘피해자’가 되길 거부한다는 이야기다.
    피해자가 되지 말자.
    주위를 둘러보면,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우리는 누구나 억울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억울하더라도, 우리는 이제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하루를 조각하고, 자유를 되찾고, 최고의 우리자신을 조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하지 말자.
    피해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분명, 삶을 완벽하게 조각할 수 있다.

    오늘 하루도 완벽하게 조각할 수 있기를.

  • 아프지 않아야 한다.

    아프지 않아야 한다.

    건강 잃으면 다 잃는거다.
    라는 말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마치 건강은 한 번 잃으면 절대 다시 회복할 수 없는듯한 뉘앙스를 주기 때문이다.
    쉽진 않겠지만, 혹시 한동안 잃게 되더라도 다시 되찾으면 된다.

    하지만, 건강이 그만큼 우리 인생에서 중요하다는 데는 동의한다.
    건강하지 못해서 우리가 삶을 조각하는 데 지장을 주는 상태에서는, 모든 일들이 녹록치 않게 된다.
    예를 들어, 나는 10살 때부터 안경을 쓰고 있는데 사실 이 또한 건강하지 못해 장애가 있는 것이다.
    그건 실수로 안경이 부서졌을 때 내가 얼마나 발을 헛디디고 아무것도 알아보지도 읽지도 못하는지 보면 어렵지않게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사실 내가 내 삶을 조각하는 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시각능력이 아니라 청각능력이 떨어져 보청기를 끼거나, 다른 장애가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만약 이게 우리가 삶을 조각하는 일에 치명적인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그건 그저 불편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건강하지 못한 상태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하루를 조각하는 데 지장을 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극심한 통증으로 원하는 일을 하다가 계속 머리를 두드리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뒤로 젖혀 쉬어야만 한다면 이건 실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사는 것이 된다.
    육체적 건강만이 건강은 아니다.
    정신적 건강도 마찬가지다.
    내가 회사에서,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주위 상급자나 동료의 눈치를 보고 긴장을 하느라 내가 하는 일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이렇게 건강을 잃은 상태에서, 우리는 진정한 삶을 조각하는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건강, 건강 거리니 좀 영 딱딱하니 이제 이 ‘건강’을 ‘아프지 않는 일’로 적겠다.

    아프지 않아야 하는 첫번째 이유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프게 되면 우리가 진정한 삶을 살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공허함’을 날려버리고 자유롭고 의미있는 시간으로 충만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조각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게 방해를 받게 되니, 실로 치명적인 일이다.

    그리고 또다른 하나의 이유는, 만약 당신에게 모든 걸 내어줄만큼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소중한 사람도 같이 아프게 된다는 데 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크게 아프면, 우리도 크게 아프다.
    그건 사랑하는 사람들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게 부모든, 배우자든, 자식이든, 연인이든, 은인이든 매한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과 안전을 생각할 때 반드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한 사람, 혹은 몇 사람도 같이 고려해서 삶을 조각해나가야 한다.

    그건 사랑하는 이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반대로, 우리는 아프지 않아야 한다.
    그건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우리의 몸은 알아서 외부의 침입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회복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움직이면 우리는 아프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자고 먹고 움직인다는 말은 일상적인 의미에 더해 좀 더 추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자는 건 잘 이완하고 잠재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먹는 건 영양소를 흡수하는 일 외에도 독소를 흡수하지 않는 일을 포함한다.
    움직인다는 것은 신체를 단련하고 강건한 몸을 만들어나가는 성장을 포함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아프지 않기 위해 필요한 건 잘 자고 먹고 움직이는 일이 전부다.

    몸에 대해서만 아프지 않는 일이 중요한 건 아니다.
    우리의 마음도 아프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마음이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무얼 해야 할까.
    사실 마음 또한 스스로 방어하고 생존하기 위한 나름의 자구책들을 이미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방어작용 자체가 우리가 삶을 조각해나가는 일에 큰 걸림돌이 된다.
    아주 어린 나이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자기 욕망을 따라 어떤 행동을 했다가 크게 엄마에게 꾸지람을 듣고 나면 그 행동을 안했던것처럼 되돌리고, 싫어하게 된다.
    그래야 내게 중요한 존재인 엄마에게 수용받고 이쁨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성인과 달리 아주 어린 아이들은 진짜로 자기가 좋아하던 행동을 진심으로 싫어하게 순식간에 자신의 선호를 바꾼다.
    (물론 좀 더 크면 개기기 시작하지만 ㅋㅋ 이건,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다.)
    혹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스트레스를 무의식에 억압하기도 한다.
    가령, 우리 팀의 팀장이 나만 너무 싫어하고 자꾸 쪽을 주고 괴롭히면, 그 팀장에게 극심한 분노와 무력감을 느끼지만 무력감을 감당하기 힘들어 무의식에 억압한다.
    그래서 그냥저냥 괜찮고 견딜만하다고 느끼게 된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런 마음의 방어책들을 방어기제라고 부른다.

    문제는 이런 방어기제들이 당장의 정신적 고통이나 긴장은 줄여주지만, 크게 놓고 보면 삶을 조각하는 우리의 작업에 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가령, 괴롭히는 팀장의 패악질에도 괜찮다고 여기던 팀원은 어느날부턴가 컨디션이 나빠지고 일에 더욱 집중이 안 되고 자꾸 저녁 먹을 때마다 소주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내 삶을 위해 계획한대로 삶을 조각하는 일을 자꾸 미루거나, 작업을 할 때도 온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자꾸 잡생각이 많아지게 된다.

    마음이 아프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그게 전부다.
    읭, 이라고 갸우뚱하기 쉽지만 사실이다.
    이 자유에는 우리가 우리의 신체적 자유와 시간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굴레를 끊어내는 일과 정신적으로 남에게 지배당하지 않는 정신적 자유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신체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를 얻는 구체적인 방법은 이 글에서 풀기 시작해서는 끝이 없겠지만, 한가지 명확한 것은 마음이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적자유 뿐만 아니라 금전적인 속박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금전’ 이야기가 불편한 이야기인 걸 잘 안다.
    많은 자기계발서나 인문학 서적들은, ‘돈이 전부가 아니다.’ , ‘돈은 행복과 무관하다.’, ‘돈은 많이 벌어보니 부질없더라.’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돈이 충분하지 않은 우리가,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우리가 ‘듣고싶어 할만한 말’일 뿐이다.
    회사 연말회식에서 부장님에게 ‘부장님 진짜 나이보다 한 10살은 더 어려보이세요.’ 라고 그냥 듣고싶은 말을 던지는 것이란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중에 돈에 진짜 쪼들리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최소한 ‘돈이 중요하지 않다’ 부르짖는 그 책이나 강연을 열심히 팔아서 돈을 엄청 벌어들이고 있을텐데.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돈은 행복과 직결되는 문제다.
    신체적 자유를 돈과 바꾸는 계약을 맺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진실이 불편하다고 외면하면, 나중에 더 큰 낭떠러지에 서있게 된다.

    핵심은, 경제적 자유든 정신적 자유든 마음이 아프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일이다.

    아프지 않는 사람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걸 해내고 사는 사람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자이언티의 노래 가사처럼,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아주 긴 이야기들을 통해 내가 들려줄 것이니 걱정마라.

    당신의 오늘 하루도 완벽하게 조각할 수 있기를.

  • 비난하는 사람의 마음속 비밀

    비난하는 사람의 마음속 비밀

    한 10년도 더 전인가.
    한동안 경계선 성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적이 있었다.
    경계선 성격장애에 대해서 많은 걸 설명할 수는 없으나, BPD의 경우 타인이 나를 나쁘게 보거나 적대하는 것에 굉장히 민감하다.
    사실 ‘민감하다’는 표현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듯하다.
    BPD 환자는 타인이 내게 보이는 적대감이나 공격적인 태도를 엄청나게 극단적인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굳이 BPD를 언급했지만, 사실 성격장애라는 것이 일정 수준 이상의 진단기준을 만족할 때 진단되는 것이므로 누구나 성격장애를 진단하는 기준 중 몇개는 충족시키기 마련이다.
    그리고 BPD 환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대다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타인이 내게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을 꺼리고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문제는, 비난이나 적대의 화살이 내게 돌아오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로운 고통일 때다.
    도저히 화살이 내게 오는 걸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민감한 사람은 어떻게 이 고통에 대응할까.

    화살이 내게 돌아오지 않는 것이 내가 생존하는 데 너무 중요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여기서 남을 까내리고 폄하하고 뒤에서 욕을하고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비난하는 행동의 역학이 드러난다.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지목되어 공격을 당하거나 비난을 당하는 일이 죽을 것같이 고통스럽고 힘든 사람일수록 그는 그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남을 욕한다는 이야기다.

    비난을 해서 상대방이 충분히 비난받을만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 되면, 화살이 내가 아닌 그 상대방에게 갈 것이기 때문이다.
    화살이 나를 향하는 걸 도저히 견디며 살아있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은, 필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상대방을 까내린다.

    결국 누군가에 대한 비난은, 상대방이 도덕적으로나 어떤 관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이어서일 때도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내가 비난을 받는 게 너무 두려워서 누군가를 미리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상황일 때도 많다.
    그가 정말 비난받을만한 행동을 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비난의 수위 = f(화살이 내게 돌아오는 것이 두려운 정도)

    이러한 역학을 잘 이해한다면, 우리가 비난을 만났을 때 좀 더 깊이있게 꿰뚫어보고 대처할 수 있다.

    누군가가 우리 앞에서 다른 사람을 험담한다면, 그 때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그 사람의 두려움을 살펴보고 그 두려움의 크기를 읽어낼 필요가 있다.
    상대방이 우리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상대방이 뭔가 큰 잘못을 해서 화살이 자신에게 올까봐 두려워하고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나쁜 사람으로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이 내면에서 자꾸 올라온다면, 어쩌면 화살이 나 자신에게 돌아올까봐 어떻게든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할 수도 있다는 걸 반드시 고민해봐야 한다.

    타인을 향한 비난은, 곧 나의 두려움이기도 하니까.

  •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는 법(ft.대상관계이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는 법(ft.대상관계이론)

    사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대부분의 경우, 자기자신을 이해하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물론 그건 자기자신을 이해하는 일이 결코 타인을 이래하는 일보다 쉽지는 않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에게,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 과연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일이다.

    다만, 우리가 삶에서 아주 소중하고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실현가능성을 떠나서 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때는 나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 못지 않게(어쩌면 더 많이) 타인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해진다.
    그래서 이 글은 ‘집단관계’ 카테고리가 아닌 ‘개인관계’ 카테고리에 넣었다.
    지금 이미 그럴지도 모르고,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올 것이다.
    그 때, 이 글을 읽기로 한 오늘의 선택은 분명 당신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어릴 때부터 내면에 자리잡아가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관계상이 존재한다.
    이 관계상들은 각 개인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던 누군가와의 관계상도, 나와 서로 피터지게 다투고 공격하던 누군가와의 관계상도, 서로 무관심하게 지내는 누군가와의 관계상도, 많은 관계상들은 우리 무의식에 천천히 자리잡는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재연된다.
    이 관계상들은 각자의 마음에 자리잡은 채로, 현실 속에서 생기고 사라지는 무수히 많은 관계에서 다시 재현된다.
    그래서 상담현장에서 내담자의 어릴 적 중요했던 사람과의 관계, 대개는 가장 중요하기 마련인 가족들과의 관계를 자세히 확인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관계상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정말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는 상대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침묵을 지키는 일은, 누군가에겐 평소에는 날 아끼고 사랑하던 부모가 내게 내리는 일종의 처벌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침묵은, 누군가에게는 언제나 힘겹고 고통의 연속이었던 내 아버지가 자식인 나를 그런 참혹한 현실에서 지키기 위한 사랑과 보살핌이었을 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당신 앞에서 침묵을 지킨다면, 그게 무엇인지 잘 헤아리기 위해 당신은 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관계상을 헤아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관계상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 그의 중요한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가늠해볼 수 있다.
    그의 이야기와 생각, 삶의 스타일을 보고 짐작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정보가 없더라도, 만약 당신이 그 사람과 마주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신과의 관계에서도 그의 내면에 자리잡은 관계상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반드시 재연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그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그의 내면에 자리한 그의 관계상을 이해함으로써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관계상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걸까.

    마음 깊이 느끼고 겪었던 관계가 마음에 자리 잡고 나면 어떤 특정한 형태의 관계이미지가 내면에 새겨진다.
    그 관계상은 크게 ‘나’와 ‘상대방’, 그리고 둘 사이의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관계의 두 주체인 ‘나’와 ‘상대방’은 이 관계와 관련해서 어떠한 감정을 지닌다.
    이 감정은 크게 ‘욕망’과 ‘두려움’, 두 가지로 크게 나뉠 수 있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 두 주체가 관계 앞에서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받는 감정은 욕망보다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욕망보다 우리를 더욱 강하게 휘두르기 때문이다.

    이는 다분히 진화적으로 유리한 경향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바라는 것을 향하라는 말은 하지만, 바라는 걸 이겨내고 두려움에 매진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내면에 자리하는 관계상에서 ‘나’와 ‘상대방’, 두 주체의 내면에 근본적으로 자리하는 욕망이 존재한다.
    그 욕망은 대개 무의식 깊숙이 자리잡고 있고,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거나 직접적으로 발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욕망은 그 사람이 살면서 말하고 행동하고 반응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 된다.
    두려움은 이 욕망에서 파생된다.
    근원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내면의 욕망은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비례해서 두려움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관계상에서 두 주체인 ‘나’와 ‘상대방’이 각각 지니고 있는 욕망과 두려움은 각 주체의 행동을 이끌어낸다.
    물론 대다수의 경우, 욕망과 두려움 중 더욱 강력하게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소는 두려움이다.
    정리하면, 관계상은 두 주체와 각 주체가 가지는 욕망과 두려움, 그리고 그로 인해 발현되는 각 주체의 행동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누군가의 관계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타인의 행동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내면에 있는 관계상을 짐작해보아야 한다.

    이 짐작에 정답은 없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는 특정 관계의 반복양상에 주목한다.
    과거의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와 지금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 지금 이 자리에서의 관계 등에서 반복되는 양상들을 비교대조하면서 좀 더 정교하게 짐작을 해나간다.

    가령, 그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일부 행동이나 말을 보고 대화를 하는 대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아예 끊어버리는 행동을 보였는데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의 내면에는 그러한 관계상이 존재할 것이다.
    마음은 상대방을 사랑하지만, 내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행동이나 말을 하는 상대방에게 대화를 할 수 없는, 혹은 해도 소용없는 관계상 말이다.
    대화를 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으나 비난과 상처만 돌아오게 될 것이 두렵거나 혹은 아무리 수차례 설득과 대화를 해도 어차피 소용없는 결과에 느끼게 될 무기력감이 두려울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 대화와 협의는 선택지가 아닌, 그래서 그저 일부 행동이 기대에서 크게 벗어나면 끊어내버리는 것이 최선인 관계상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

    조금 복잡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내면에 자리잡은 관계상은 실제 현재에서 크든 작든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고 이를 짐작함으로써 관계 속에서의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면, 상대방이 맺어온 중요한 관계에 대해 많이 살펴보고 들어라.
    (물론 지금의 마음에 대해 경청하고 공감하는 건 기본이다.)

    그렇게 한다면, 누구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를 위한 준비물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를 위한 준비물

    • 함께 보낼 시간
    • 같이 있을 공간
    • 사랑하는 마음
    • 배려
    • 예의
    • 공감
    • 상대를 지켜줄 힘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