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Lv18

  • 망설이다 하지 못했던 일

    망설이다 하지 못했던 일

    상상만 수십번

    분명히 있다.
    누구에게나.
    머릿속으로 상상은 수십번을 해볼 정도로
    고민하고 망설였지만,
    결국 시도해보지는 않았던 일이.

    도전해봤자 안 될 게 뻔해서,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걸 할까
    시도하는 자체부터가 민망해서,
    했다가 비웃음을 사고 망신당하는 걸
    생각만 해도 얼굴이 벌개져서,
    주위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고 일러준 것들을 하느라
    시기를 놓쳐서,
    갖가지 이유로 차마 시도해보진 못했지만
    아주 여러번 상상을 해보긴 했었던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있는 잔상

    충분한 시간을 들여
    찬찬히 살펴보라.
    수백번을 상상만 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떠올리게 되었다면,
    그 일을 하는 자기자신에 대해
    다시 한 번 상상해보라.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아릴수도 있고,
    그럼에도 여전히 가슴이 뛸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지금까지도 여전히
    마음에 그 잔상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랬기에 시간이 흐른 지금도
    우리가 떠올릴 수 있었던거다.

    마음에 잔상이 남아있었다는 건,
    지금까지도 기억 한 켠에
    고이 머물러있었다는 건,
    크든 작든 미련과 후회가 남았다는 증거다.
    오래전 언젠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뛸 정도로그 일에 이끌렸고
    온 정신을 빼앗긴 적이 있다는 증거다.

    미련이 남지 않도록

    그 일이 바로
    당신의 소명이자
    최고의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힌트다.
    당신이 내면에 지닌 고유한 예술성과 잠재력을
    마음껏 펼쳐야 할지도 모르는
    당신만의 길일지도 모른다.
    미련과 후회가 더이상 남지 않도록,
    그 일에 나자신을 내던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신호다.

    진정한 우리자신이 과연 어떤 것인지,
    될 수 있는 최고의 나는 과연 어떤 것인지,
    우리가 진심을 다해 걸어야 할
    우리만의 길이 무엇인지,
    이 문제의 정답을 알려줄 가장 큰 힌트는
    당신이 망설이고 수백번 상상했지만
    차마 시도해보지는 못했던 바로 그것이다.

  • 시간이 사라지는 순간

    시간이 사라지는 순간

    시간은 주관적이다

    1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1시간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세상 모든 것들이 주관적으로 경험되듯이,
    시간 또한 주관적이다.
    어떤 시간은
    놀랍도록 빠르게 흐르고,
    어떤 시간은
    멎어버린 것처럼 느리게 흐른다.

    시간의 주관성은
    마치 기분탓인 것처럼 치부되기도 하지만,
    아주 명백한 차이를 증거로 내놓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 EBS에서 방영한
    한 다큐멘터리 내용이다.
    어떤 사람에게
    깜빡이며 점등되는 전자시계를 보여준다.
    이 깜빡이는 속도를 높이다 보면,
    어느 지점부터 그 사람은 전혀 시각을 읽지 못한다.
    너무 빠르게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기 때문에
    눈이 읽어내지 못하는거다.
    하지만 그 사람을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자,
    그 사람은 추락하는 그 몇초 사이에
    안 보이던 시각을 읽어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낄만큼 긴급한 상황이 되자,
    그 사람에게 시각을 읽어낼 수 없을만큼 짧던
    찰나의 시간이
    시각을 읽어내고도 남을만큼
    충분히 긴 시간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분명 똑같은 시간일텐데 말이다.

    절대적인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우리의 상태에 따라서 안보이던 게 보일 만큼
    크게 달라지는 주관적인 녀석이다.

    시간왜곡

    시간이 말도 안 되게
    빨리 흘러가버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게임을 하다보니
    아침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밤이 되어버린 경험을 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훌쩍 반나절이 지나가버린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이 왜곡되는 경험,
    특히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휙
    흘러가버리는 경험.
    이 경험을
    우리는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 시간왜곡을 일으킨 순간이
    바로 당신이 진정한 당신으로 존재했던
    순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예술성과 잠재력이
    깃든 순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왜곡되었다는 건
    당신이 적어도 그 휘어져버린 시간 동안
    그 일에 충실히 몰입했다는 증거다.
    인간은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는 일이면,
    시간왜곡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 놀라운 순간,
    어쩌면 가장 당신다운 모습으로
    내면의 진정한 당신을 끄집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일

    시간이 왜곡이 얼마나 되었는지,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면
    좀 더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일을 찾는거다.
    극도로 금욕적인 성직자 수준의 생활을
    고집하지 않는 이상,
    인간은 필연적으로
    시간왜곡이 일어날만큼
    즐겁고 몰입할만한 일에
    자연스레 시간을 많이 쓰게 되어있다.

    물론 여기서 ‘시간’이란,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며 보낼 수 있는
    ‘자유시간’을 의미한다.
    (우리가 Lv10에서 다뤘던 ‘우리 소유의 시간영토’를 말한다.)

    혹자는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일이
    곧 그 사람 자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
    자유시간에 당신의 의지로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일을
    한 번 떠올려보라.
    그 속에 분명
    당신이
    가장 당신다운 최고의 모습을 발견하는 데
    힌트가 될만한 것들이 숨어있을 것이다.

  • 어린시절 행복했던 순간

    어린시절 행복했던 순간

    인간의 삶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낙타와 사자를 거쳐
    어린아이가 된다.
    그리고는 결국
    자기자신 안에 잠들어있던 신에
    가까워져간다.
    그래서 혹자는
    ‘어린아이가 결국 인간의 원형이므로
    어린아이가 궁극의 인간상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어린아이의 상태로
    매순간 존재하며 살아가는 건,
    분명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긴 하다는 데는 백번 동의한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상태를 유지하지못한다.
    어린아이들은
    머지 않아
    타인과 세상의 끝없는 회유와 협박,
    세뇌와 통제에
    굴복할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세상에 갓 나와 잠시동안 경험했던
    거리낌없던 자유와 희열을 다시 되찾아가는 과정을
    삶 전체를 통해
    경험해나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다만 세상은
    절대 당신이 그 여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가치의 조건화

    세상은
    어떻게 당신이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도록
    만드는가.

    인간은
    소위 ‘사회화’라는 그럴싸한 명분 하에
    지속적으로 한가지를 주입당한다.
    그건 바로,
    굴복이다.

    무엇에 굴복하는가.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타인이 원하는 요구에 굴복한다.
    우리는 이걸 배운다.

    그냥 협동심과 양보, 배려심을 배운다고 하면 되지
    굳이 굴복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실제로 나의 욕구와 소망 대신
    타인의 요구와 기대를 선택하는 일은
    너무나 비극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은
    타인의 인정과 애정을 잃을까 두려워,
    자기 내면의 진심을
    벼랑끝에서 떠밀어버린다.

    최초로
    인간이 굴복을 배우는 사건은,
    보통 배변을 가리는 일이다.
    배변욕구가 일어나면
    다른 동물들처럼 그 자리에서 배변을 하다가,
    사회에서 약속한대로
    그걸 어떻게든 참고 견뎌서
    시간과 장소에 맞게 배변을 통제하는 일.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부모가 지닌 가치를 잣대로
    자기자신을 판단하고 통제하는 일을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정신분석에서
    배변을 가리는 시기에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생기고
    초자아(Superego)가 태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하는 건
    그래서다.

    부모가 좋다고 판단하는 게
    내게도 좋은 것이고,
    부모가 나쁘다고 판단하는 게
    내게도 나쁜 것이다.
    여기서 내 경험적 가치와 부모의 가치가 충돌하면,
    어린아이는
    주저없이 내 가치의 목을 베고
    부모의 가치를 내 가치로 새롭게
    이식해버린다.
    어린아이에게는,
    자신에게 세상 전부인 부모에게 버림받지 않는 것이
    내 내면의 가치와 욕구를 보살피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꽤나 눈물겨운 일이어서,
    내가 진짜 나로서
    아주 솔직하게 체험하는 모든 경험은,
    조금씩 내 기준이 아니라
    부모님의 기준에 따라 체험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굴복은,
    사는 내내 우리가
    우리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가치가 아니라
    타인과 세상이 정해주는 가치를 따라 살게 한다.
    이를 인간중심상담이론에서는
    ‘가치의 조건화’라고 한다.

    진실을 찾는 한가지 방법

    이 몹쓸 짓거리로
    평생동안 세뇌되어 온 우리가
    가치의 조건화를 풀기 위해 해야할 일은,
    사실 우리가 레벨업을 하며
    이 책에서 차근차근 밟아온
    모든 렙업과정들이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두고,
    지금 우리가 이번 레벨업을 위해 해야할 일을
    이야기해보자.
    사실 이건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렙업들보다는
    좀 더 간단한 일이다.

    그건 바로,
    가치의 조건화가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전에
    우리가 내면의 소리를 따라 움직였던 순간들을
    찬찬히 떠올려보는 일이다.

    어릴 적 당신은 무엇이었을까

    소위 ‘사회화’가 조금이라도 덜 되었을 때,
    우리가 타인의 가치에 따라 세뇌되고 휘둘리기 전으로
    한 번 돌아가보자.
    그 어떤 의무도,
    그 어떤 요구나 압박이나 기대도,
    그 어떤 수치심이나 비웃음이나 열등감도,
    아직 우리에게 주입되지 않았던 시절,
    그 때도 분명 우리는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니, 그 때가 오히려
    무언가를 하며
    훨씬 더 즐겁고 청량감이 가득한 시간들을 보냈던
    시기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시간들을 찬찬히 떠올리며
    되뇌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가장 길들여지지 않았고
    세뇌당하지 않았던 순수한 시간들,
    그 시간들 속에서
    당신은 분명
    더할나위 없는 행복을 누렸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릴 적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에도 쫓기거나 초조해하지 않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던 시절.

    그 시절 속에,
    분명히 내가
    그저 기뻐하며 희열을 느끼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걸 찬찬히 편안한 마음으로 떠올려보고
    무언가 생각이 날 때마다
    그게 무엇이든 적어라.
    시간을 길게 두고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말고
    충분히 편안한 상태로
    오랜시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하던 일들은,
    그 일을 하면
    타인의 칭찬이나 인정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 일을 하면
    친구들의 부러움이나 세상의 찬양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어린아이들은
    무언가를 하다가도
    조금이라도 더 흥미로운 것이 나타나면
    즉시 하던걸 멈추고
    더 흥미로운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기 내면의 소리에만 충실하던 시절의
    순수했던 당신,
    나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세상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주던
    놀라운 현명함으로 가득하던 당신이
    한껏 행복해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라.

    그 중 분명
    나만의 고유한 개성과 정체성,
    내 영혼의 결에 맞는 순간들이
    숨어있다.
    우리의 예술성과 잠재력이
    아주 찰나라도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웠던 순간들이
    숨어있다.
    어린 시절
    우리가 가장 기쁘고
    유난히 희열에 가득찼던 순간들.
    그 순간들이
    당신이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 Lv18. 별빛을 발견한 여행가

    Lv18. 별빛을 발견한 여행가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법과
    지금 이 순간
    가장 영감과 직관이 가득할 수 있는 상태로 머무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제
    진정한 자기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날 시간이다.
    이번 레벨을 통해 우리는,
    가장 나다운 나,
    타고난 예술성과 잠재력을 발휘해 될 수 있는
    최고버전의 나,
    진정한 나자신을 발견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 사소한 일에 자꾸 화가 나는 우리의 비밀

    사소한 일에 자꾸 화가 나는 우리의 비밀

    사소한 일들에 치이는 ‘인간적인’ 우리

    자기자신이 결정한 길을 걷는 사람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자신의 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하고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하는 데 여념이 없는 사람은 조각하는 일에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는 모든 일에 관심이 없다.

    예를 들면, 스팸전화나 연예인 가십거리, 온갖 사람들의 뒷담화, 지하철에서 날 치고 지나가는 취객같은 거 말이다.
    스팸전화에 화를 내는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자기자신의 삶에 몰입해 최고의 나를 그리며 조각하는 삶에 그런 무가치한 것들이 개입될 여유는 없다.
    자꾸 길을 가다 마주치는 도를 아십니까가 머리에 맴돌고 보일 때마다 화가 치민다면,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운전을 하다보면, 정말 위험하게 사고가 날 정도로 과격하게 끼어드는 차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 사실은, 생명에 지장을 주는 큰 사고가 날 수 있었으니 놀라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끼기도 하니 두려움과 놀라움이 확 일어날 뿐, 아니면 그 뿐이다.
    계속 그 운전자가 싫고 분노가 머리와 몸을 맴도는 건, 그 때부터는 상대방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자신의 문제다.

    인간은 애초에 불완전한 존재다.
    경지에 오른 성인이 아닌 이상, 인간은 누구나 연약하고 쉽게 영향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 속의 모든 타인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길 간절히 바란다!
    이를 종합해보면,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일들에 휘청거리고 오락가락하는 건 짐짓 자연스러운 ‘인간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소한 일에 더이상 휘둘리지 않는 비밀

    물론 인간적인 모습이 맞다 ㅋㅋ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삶과 우리자신을 조각하기 위해서는, 그런 류의 인간적인 모습은 뜯어고쳐야 한다.
    적절한 단련을 통해, 우리는 누구나 충분히 일상 속 외부자극의 노예가 되어 사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로, 운전을 하다가 옆차가 끼어들 때 화가 주체못할 정도로 치미는 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문제이고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인간의 유약함을 보여주는 한가지 간단한 이야기를 해보자.
    하얀코끼리를 지금부터 절대 생각하지 말라고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
    학생들은 하얀코끼리를 절대 마음 속 한 켠에서 1초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모든 학생들의 머릿 속에서 하얀코끼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이건 심리학 실험이기도 하지만, 불교적인 화두이기도, 철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국대에서 스님 출신(?!)의 교수님에게 명상지도자과정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거의 제일 먼저 배운 것은, 명상할 때 수련자들이 잡념이 떠올라 힘들어하면 잡념을 떨치려는 행동을 하지않도록 가이드해주라는 것이었다.
    명상을 수련하는 고승들은 이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명상을 할 때 잡념이 떠오르면 그 잡념을 이제 안 떠올려야지, 하고 아무리 아득바득 용을 써봤자 그 잡념은 계속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잡념이 떠오르는구나, 하고 다시 되돌아가면 된다.

    가령, 호흡 명상 중이었다면(가장 먼저 배우는 게 대개 호흡명상이다.) 의식을 호흡에 다시 가져간다.
    그저 그러고 있다보면 찬찬히 잡념은 사라진다.
    하얀코끼리를 떠올리지 않는 방법은, 하얀코끼리를 절대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는 게 아니다.
    애초에 집중하던 것으로 다시 마음을 가져오면 그게 최선의 방책인 것이다.
    이건 내 의견이 아니라, 오랜 시간 선수행을 유지해온 고승들의 이야기다.
    (물론 내 경험 상으로도 효과적인 건 확실하다.)

    비밀을 알아도 우리가 사소한 일에 여전히 치이며 사는 근본적인 이유

    자, 이제 다시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오자.
    자꾸 옆차가 운전 중에 위험하게 끼어들고 스팸전화를 중요한 전화인 줄 알고 회의 중에 나와서 받고 이러면 그 누구라도 마구 화가 난다.
    하지만 이 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원래 내 마음이 향하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면 충분히 그런 사소한 자극들에 휘둘리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저 그런 내 하루를 조각하는 데 무의미한 것들은 ‘읭?’하고서 다시 돌아오면 되는 거니까, 쉽네?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단 우리의 과거를 한 번 잘 돌이켜보자.
    내 인생에 전혀 중요치도 않고 의미도 없는 일상 속 많은 자극들에, 우리가 가볍게 힐끗하고 다시 평온한 상태로 돌아와지던가.
    그렇지 않다.
    쉽지 않다, 정도가 아니라, 매우 어렵다.
    어지간해선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시 돌아올 곳이 없기 때문이다.
    명상에서 수련하는 스님들이 그러하듯이, 호흡에 의식을 두다가 잡념에 휘말리면 다시 알아차리고 호흡으로 의식이 돌아오도록 하는 일이 안 된다고.

    애초에 마음을 둘 곳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인생에서 내 영혼과 시간을 쏟아부을만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부터 우리의 삶이 외부의 자극과 타인의 기대, 역할에 대한 의무감, 두려움, 보상 등으로 외부에 의해 짜여진대로 흘러왔다면?
    혹시 그런 삶을 사는 누군가가 세상에 만약 존재한다면, 그에게 돌아올 곳은 없다.
    근데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우리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99.9%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처음부터 외부의 자극에 의해 벌어진 상황을 따라 흘러온 삶인데, 사소하다고 해서 외부자극에 의해 발생한 상황에 의해 요동치지 않을 재간은 없다.
    살던대로 살게 되는거다.
    나를 건드리는 모든 자극에 신경초처럼 잔뜩 움츠리며 신경곤두세우는 걸 반복하면서.

    결국 우리가 운전할 때 옆차가 끼어들 때 화가 잔뜩 나서 운전 내내 감정이 요동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자신이 결정한 길을 걷는 삶을 살고 있지 않아서다.
    명상과 매한가지다.
    하얀코끼리를 머리에서 지우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애초에 내가 발디디고 서서 걸어갈 나만의 인생이 필요하다.
    내가 결정한 내 삶의 여정이, 최고의 나를 조각하기 위한 나만의 도전과 과제가 필요하다.
    이게 바로, 우리가 ‘돌아올 곳’이다.
    무의미하고 사소한 수백가지 자극이 우리를 건드려도 힐끗 쳐다보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올 때 그 돌아올 곳 말이다.

    돌아올 곳이 없고 애초에 마음을 쏟고 있는 나의 삶이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온갖 사소한 일들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인데.
    그래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우리자신이 지니는 삶의 의미와 내면의 잠재력, 가능성, 우리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이 무르익을수록, 점점 더 완벽하게 자유로운 일상을 살게 될 테니까.

  • 공허함의 비밀

    공허함의 비밀

    우리 모두는 공허하다

    공허하다.
    아침부터 기를 쓰고 잠을 떨쳐내고 무거운 어깨를 끌고 학교에 가는 학생들도, 회사에 가는 직장인들도, 아이를 챙겨 학교 보내는 부모도, 이젠 침침해져버린 눈을 애써 비비며 많이도 흘러가버린 내 일생을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상에는 공허함이 깃들어있다.

    나와 사랑하는 내 가족의 건강문제, 생계문제, 안전하게 노후를 보내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해결해야 하는 금전적인 안전망 확보의 문제, 사람들과의 관계문제, 가끔 발생하는 타인과의 갈등, 온갖 문제들이 산재해 우리는 쉴틈없이 바쁘다.
    그리고 그 분주한 일상 속에서 잠시 스스로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는 순간들이 한번씩 찾아온다.
    ‘뭘 위해 이렇게 열심히 바삐 지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무얼 위해 어떨 때는 참고, 버티고 숨기고 애써 힘내며 숨가쁘게 해보려는거지?’

    공허감이 밀려온다.
    태어나기로 내가 결정하지는 않았던 삶, 무얼 위한 삶을 살아볼 지 고민하고 생각할 틈이 없었던 우리 모두는 사실 공허하다.
    스스로 방향을 결정하지 못한 채, 해류에 휩쓸려 지금까지 떠내려왔기 때문이다.
    그 여정이 길었든 짧았든 해류의 방향이 남쪽이었든 동쪽이었든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정신없이 우리 모두는 사실 공허하다.

    공허함을 흩날려버리는 방법

    그래서, 내가 발견(발견이라 쓰고 결정이라 읽는다 ㅋㅋ)한 내 삶의 열망은,

    “‘삶에서 공허함을 흩날려버리고 최고의 나를 조각하는 사람들’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발견’하고 나면.
    최고의 나 자신을 조각하는 일이 완벽하게 실현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삶에서 공허함을 걷어낸 상태로 인생을 채워나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는 내 삶이 왜 지금 이어지고 있는지, 내가 무얼 위해 하루하루를 사는지 알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항해는, 즐겁고 가슴 벅차고 설레고 기대되는 모험이다.
    표류하던 과거의 부유와는 전혀 다른 질감의 여정이다.

    그 전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게 있다

    하지만 삶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는 절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자유를 속박당하는 상태가 아니라, 끝없이 압박당하고 세뇌당하고 통제당하고 지배당하며 휘둘리는 상태다.
    처음부터 우리는 짜여진 판 위에 세워졌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깨닫고 그걸 하나씩 극복해나가는 일, 신체적 정신적 자유를 조금씩 되찾아가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를 조종하고 지배하는 수많은 압력과 위협을 다 이겨내고 온전히 자유로워지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무얼 원하는지, 우리 내면에 깃들어있던 숨겨진 잠재력과 예술성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것을 발견하고 나서 삶의 방향을 스스로 발견하고 나면, 그 때부터는 비로소 공허감이 삶에서 사라진다.
    당장에 우리가 열렬히 바라는 무언가가 삶에 실현되어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의 삶에서 공허감은 사라진 상태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러한 수준까지 스스로를 조각해낸 사람들과 공허하지 않은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함께 웃고 놀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을 같은 걸 만드는 일이다.)

    공허함의 비밀

    공허함은, 막연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분명 해소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한다.
    물론 공허함을 걷어내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 절대 녹록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허감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누구나 삶에서 걷어낼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
    그리고 최고의 우리자신이 조각되지 않더라도,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몰입하는 순간부터 이미 삶에서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것.

    건투를 빈다.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최고의 내가 된 것처럼 행동하라

    최고의 내가 된 것처럼 행동하라

    속된 말로 가진 게 쥐뿔도 없어도 자신감이 넘치고 안정감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한다.
    ‘아, 저 사람은 겉으로는 뭐 없어보여도 사실은 무언가 돈이 많든지 학식이 뛰어나든지 뭐가 있나보다.’
    오죽하면 원하는 이성 앞에서 남자들이 그리 허풍을 떨까.
    함정은, 그러는 ‘척’하는 남자들을 여자들은 귀신같이 알아본다는 거지만 ㅋㅋ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우리가 되고자 하는 최고의 우리 자신이 할법한 행동을 하자는 것이다.
    가령, 내가 길에서 무단횡단을 습관적으로 하는 놈인데, 나중에 유재석같은 유명한 방송인이 되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무단횡단 같은 짓은 신경쓰면 충분히 안할 수 있는 일이니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런 일을 왜 하는가.
    비교적 덜 중요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부터 말해보자면,

    첫째, 나에게 지금은 흠이 되지 않지만 먼훗날 흠이 될 언행들을 미리 차단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괜히 나중에 학폭이니 불법을 저질렀니 하고 과거 일이 터지는 게 괜히 나오는 일이 아니다.
    내가 조각하려는 최고의 내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나 해가 될법한 행동은 지금부터 하지 않아야 한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조각해내고야말 최고의 내 모습에 가까워져 갈테니까.

    둘째, 내가 나 스스로를 신뢰하면, 내가 뿜어내는 기운과 태도가 내 삶을 변화시킨다.

    최고의 내가 반드시 될 것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최고의 나를 조각해낼때까지 ‘충실히 보내는 시간’뿐이다.
    즉, 언젠가는 결국 우리가 타고난 잠재력을 모두 발휘해서 될 수 있는 최고의 내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시간이 아직 현재로 다가오지 않은 것 말고는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이상 문제될 건 없다는 의미다.
    (아, 그리고 이런 주제로 말만 하면 자꾸 무슨 끌어당김이니 시크릿이니 하면서, 쇼파에 쳐앉아 상상만 해대면 우주가 자꾸 뭘 서빙을 해준다는데, 그런 건 없다.
    스스로 노력하고 용기내서 행동하고 단련하지 않는데 누가 서빙을 한다고 자꾸..)

    반드시 최고의 나를 완성시킬거라는 강력한 믿음과 확신이, 실제로 우리의 삶을 점점 우리의 목표에 가까워지도록 변화시킨다.
    이는 결국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에도 우리가 뿜어내는 기운과 분위기, 에너지를 통해 상대방이 느끼게 만들고 우리 자신 또한 누군가의 앞에서 주눅들고 눈치보는 걸 하지 않게 만든다.

    셋째, 이게 가장 중요한데, 우리가 아직 최고의 내 모습을 찾아나가는 중이라면 그 발견을 강력하게 돕는다.

    무슨 이야긴가 싶을 수 있는데, 우리가 스스로를 최고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의 가치와 재능, 삶의 의미를 둘 곳을 잘 탐색할 수 있는 최상의 의식상태가 된다.

    내가 X살법의 메인 플로우에서 ‘발견’을 ‘자유’라는 큰 파트 직후에 배치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내가 무얼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차피 죽음으로 향하는 내 삶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이에 대한 나의 해답은 우리 자신이 자신만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당장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공허함을 느끼며 방향을 모색은 하지만 찾지 못하고 사는 이유가 다 있다.
    우리가 우리만의 가치와 의미를 찾고 삶에서 공허함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 전에 ‘자유’로워져야 한다.
    우리가 시간을 팔아 돈을 얻는 계약을 통해 신체적 자유를 팔아버리고, 타인의 시선과 평가가 두려워 정신적 자유까지 빼앗긴 상황에서는, 우리는 그 무엇도 찾아낼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최고의 우리 자신이 된 것처럼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삶을 살아가는 수련을 하다보면, 일시적이지만 온전히 신체적, 정신적 자유를 모두 되찾은 상태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모색하는 상태가 되곤 한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최고의 내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건, 우리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쑥스러워말고 두려워말고
    이미 최고의 나자신을 조각해낸 것처럼 행동해라.
    걱정마라.
    어차피 그런 사람이 될꺼니까.
    좀 미리 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왕들의 오랜 염원

    왕들의 오랜 염원

    왕들의 오랜 염원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에서나, 어느 문화에서나, 계급이 생겨난 이래 모든 지배자들의 가장 큰 염원은 하나다.
    이 지배자의 지위가 공고히 지속되는 것.
    지금 누리는 이 권력과 힘이 찬탈되지 않는 것.

    모든 왕정체제의 국왕들,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점에 서있는 군부의 우두머리, 지금 같은 시대에는 거대한 자본을 축적한 기업과 큰 손들.
    이들은 지금 자신의 지위가 영속적으로 이어져 내 자손들에게도 안전하게 계승되길 바란다.

    인간사회와 문명은 단 한번도 평등하게 운영되었던 적이 없고 사실 그걸 바란 적도 없다.
    가장 누구나 평등하고 대등하길 바라는 체제조차, 그 체제를 운영하는 이는 속으로는 불평등하고 차등적인 권위를 누리길 바란다.
    아리송하다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북한을 들여다봐라.
    평등을 외치는 사회이념조차, 실제로 평등했던 적은 없다.

    만약 평등이나 공익, 윤리 같은 소위 ‘도덕적인’ 가치를 표방하더라도 이건 어디까지나 기득권의 지위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선에서까지만이다.
    미국을 건국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욕망을 가지고 미국을 건국했는지 언제 한 번 잘 들여다봐라.
    미국이라고 다를 거 같지만, 그들도 북한의 리더들과 다를 바 없다.
    사회와 문명을 설계하고 짜올린 리더그룹들은 자신의 기득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길 염원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오래 전부터 진두지휘하며 변화를 주도해왔던 지금 우리가 속한 이 ‘세상’은 우리에게는 어떤 걸 원할까.

    당연히, 기득권에 위협을 가하는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길 바랄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왕을 처단하려 하거나, 기득권의 기득권을 실제로 해체해버리려 하거나, 불만을 가득 품고 암살을 시도하거나 등등.

    힘으로 눌러왔던 수많은 지배층들은 ‘결국에는’ 모두 실패해왔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기득권과 지배층들은, (물론 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까지는 아주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과거와는 다른 현재의 왕들

    과거의 지배계급들과 무엇이 달랐길래 그런 것인가.
    언제나 혁명이 결국 일어났던 과거와 어떤 걸 다르게 한 것인가.
    내가 보기에 핵심은 ‘자발성’이다.

    힘과 폭력, 강제성으로 노역을 시키고 노예를 사고팔고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대신 지금 시대의 기득권은 피지배계층이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노역하고 싶게끔 만든 첫 지배계급이다.

    물론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야 크고 작게 여러번 있었겠지만, 이렇게 일괄적으로 모든 피지배계층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신을 써달라고 바라고 요구한 적은 인류 역사 상 없었던 것 같다.

    지배계층의 입장에서는 지배를 당하는 자들이 자신의 잠재력과 재능을 완전히 발휘해버리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그 누구도 절대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예술성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이 엄청난 가능성과 잠재력은 지배계층에게는 위협이고 위험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보석과 잠재력을 발견해서 찾게 내버려두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왕들의 영원한 염원은 기득권을 위협없이 공고하게 유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회와 문화에서는 구성원들, 즉 소속되어 지배당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커리큘럼’을 제시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 커리큘럼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삶과 개성과 이야기를 찾고 갈고닦는 대신 짜여진 루틴과 과업을 달성하게끔 설계된다.
    우리가 각자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발견하고 타고난 소질을 갈고닦아 성장하는 일은, 기득권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자 잠재적 위험요소니까.

    교화된 우리들의 착각

    많은 사람들은, 사회를 이루고 구성하는 건 결국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니까 마치 이 사회는 엘리트들이 정교하게 설계한 게 아니라 흘러가는대로 구성원들의 행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진짜 그럴까.
    그런 시각은, 어쩌면 사회를 이끌어온 사람들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이 사회를 설계하고 이끄는 사람들의 장치는 생각보다 섬세하고 교묘하고 정교하다.
    윤리적인지를 떠나, 시대를 리드하고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똑똑하고 영민하다.

    사회구성원들을, 지배당하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사회가 제시하는 ‘커리큘럼’은 다분히 지배하는 입장에서 유리하게 설계되어있다.
    예측가능하고, 표준화 되어있고, 통제가능하고 너무 튀지 않고 규칙과 위계에 순종하고 주어진 임무를 불만없이 수행하는 구성원을 양산하는 일, 그게 사회가 구성원에게 제시하는 커리큘럼의 목적이다.

    하지만 우리 각자에게는 어떨까.
    과연 사회가 제시하는 인생의 로드맵과 단계들이 정말 우리 각자에게 진정으로 중요하고 가치있는 게 맞을까.
    아니면, 우리를 위한 것이다 표방하지만 어쩌면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한걸까.

    어쩌면 그들은 정말 윤리적인 입장에서 구성원 대다수의 행복과 삶의 의미를 위해 교육하고 지원하고 제도를 설계한건데 너무 꼬아서 보는 건 아닐까.

    이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면,
    나의 대답은 이렇다.

    X까는 소리다 ㅋㅋ

    타인이 아닌, 내게 중요한 일을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이 다들하는대로, 학교와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과업을 어찌저찌 헤쳐나가며 커리큘럼대로 살아왔는데.
    정신차려 보니 내가 무얼 위해 사는지, 무얼 할 때 내가 진정 행복한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 되어있는거다.
    모략가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사회의 모략으로 책임을 다 돌리라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런 생각은, 그냥 속편하고 싶은 입장에서 혹하게 되는 큰 착각일 뿐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글귀가 하나 있다.
    내 좌우명 중 하나다.
    (좌우명이 꼭 하나여야 하는 법은 없지 않나…)

    작가 프랜시스 챈이 한 말이다.

    “Our greatest fear should not be of failure but of succeeding at things in life that don’t really matter.”

    번역하면 이런 의미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가 아니라,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성공하는 일이다.”

    캬… 폼 미쳤다.

    어떤 말들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가슴에 와닿는다.
    이 말도 내겐 그렇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는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 일인데 그 일에 시간과 마음을 쏟아붓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실패가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고 흘러가버린 후회들이 켜켜이 쌓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굳이 왕들의 오랜 염원을 들어주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될 필요가 있을까.

  • ‘발견’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2가지 이유

    ‘발견’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2가지 이유

    ‘발견’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1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천재다.
    하지만 물고기들을 나무 타기 실력으로 평가한다면,
    물고기는 평생 자신이 형편없다고 믿으며 살아갈 것이다.”

    발견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평생을 나무타기 실력에 매달리는 물고기로 살다 죽어버리지는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내면 깊은 곳에 예술성이 깃들어있는 존재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그 내면에 예술성을 지니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다만, 그 예술성이 내면 저 깊은 곳에 잠들어있을 뿐이다.

    ‘발견’이란, 우리 내면에 잠들어있는 ‘영웅’을 발견해내는 일이다.
    (사실 호칭은 뭐라 불러도 무관하다. 천사라든가. 전사라든가. 신이라든가.)
    발견은,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우리자신을 그려보고, 이를 생생하게 곁에 두며 스스로를 조각해나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우리는 우리 내면에 깃들어있는 고유한 잠재력과 소질, 재능, 열정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진실을 진심으로 믿어야 한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의 지문이 모두 다르듯이, 우리 각자는 자기자신만이 가지는 고유한 잠재력과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만 조각할 수 있는 최고의 우리자신, 즉 최강의 자기자신인 ‘영웅’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그 누구도 똑같이 따라할 수 없는 우리만의 모습이 분명히 존재한다.

    ‘발견’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2

    이런 말이 낯선 시대라는 걸 잘 안다.
    항상 너무 튀지도 너무 뒤쳐지지도 않게 중간쯤에 서서 있는듯 없는듯, ‘남들과 비슷하게 남들처럼’ 살아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모두가 믿는 세상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최고의 우리자신을 조각하기 위해서, 삶에서 공허함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진정으로 자유롭고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내면에 잠들어있는 우리만의 ‘영웅’를 발견해야 한다.

    상담심리학에서 주요 이론으로 꼽는 세 가지 이론은 정신분석상담, 인지행동상담, 인간중심상담이다.
    이 세 가지 이론 중 인간중심상담은 거의 모든 상담이론의 기본바탕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 이론의 핵심은 자기개념과 진짜 자기의 불일치다.
    (보통 학계에서는 ‘자기와 경험의 불일치‘라고 번역되곤 한다.)
    진짜 자기자신‘과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려놓은 ‘자기개념’ 간의 불일치로 인해 정신장애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만큼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진짜 자기자신을 발견하고, 내가 타고난 잠재력과 재능을 발견하고 나만의 개성과 열망을 발견하는 일은 우리를 가슴뛰게 한다.
    그리고 발견한 나만의 고유한 소질과 자질을 갈고닦아 최고의 나를 조각해나갈 때, 우리의 삶에서 공허함은 힘을 잃는다.

  • 진짜 속마음을 내뱉는 일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진짜 속마음을 내뱉는 일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진짜가 시작되는 순간

    그 날은 마지막 상담이 있던 날이었다.
    심리상담에서는 마지막 상담회기를 ‘종결회기’라고 부른다.
    종결회기 날이었다.
    그간 내담자가 호소했던 문제들, 그간 우리가 해왔던 상담내용들, 앞으로 상담없이 생활할 때 도움이 될 수 있을만한 사항들, 여러 가지를 준비해서 상담 마지막 회기를 하기 위해 상담실에 앉아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평소와 비슷한 표정으로 상담실에 들어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간 우리가 해왔던 상담내용들을 짚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종결회기가 다 끝나고, 10분 남짓이 남아 이제 마지막 인사를 나누려던 순간 그는 불쑥 이렇게 이야기했다.

    혹시 다른 주제로 더 상담을 연장해도 괜찮냐고.

    물론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가만히 날 말없이 지켜보더니, 자신이 앓고 있던(하지만 전혀 내게는 알려주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의 ‘진짜’ 상담이 시작되었다.

    여담이지만, 그 후로 그는 나와 1년을 넘게 더 상담을 했고 다행히 앓고 있던 그 문제도 잘 해결하고 상담을 잘 마쳤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진짜’가 시작된 건 우리의 종결회기였다는 것이다.
    (그 이전이 무의미했다는 말을 하는 게 절대 아니다.
    그 이전의 시간들도 모두 진실이었고 진심이었다.
    다만,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진짜’는 절대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진짜 속마음을 입밖으로 내뱉는 일에서, 모든 것은 시작된다.

    죽어도 속마음을 내뱉지 않는 우리

    우리는 일상 속에서 절대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
    진짜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을 숨기고 산다.
    왜냐하면, 그렇게 배우기 때문이다.
    어릴때부터, 우리는 진짜 속마음은 내뱉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다.
    진심을 타인에게 말하면 나중에 그게 약점이 되고, 내 진심이 사람들의 술자리 가십거리가 되기도 하고 등등.
    음, 뭐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이다 ㅋㅋ

    진심을 입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 진심은 세상에서 평가받게 된다.
    (물론 무관심이 가장 먼저 오는 반응일 공산이 크지만, 그 또한 일종의 반응이나 평가다.)
    진심을 뱉는 건, 그런 의미에서 분명 위험한 일이 맞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나로서 살기 위해서는 진심을 입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진짜 나로서 존재해야, 삶의 진실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 위험을 자발적으로 감수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최고의 나를 조각할 수 있다.

    진짜 속마음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린 우리

    굳이 속마음을 입밖으로 내뱉지 않고도 충분히 진짜 나를 찾아갈 수 있지 않느냐,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너무 오래 웅크리고 살았다.
    너무 많이 와버렸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하도(이거 사투린가..?) 오랫동안 진짜 속마음을 말하지 않고 꽁꽁 숨긴 채 살다보니, 진짜 마음을 말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이런 상태로, 우리가 삶에서 자유를 찾고, 최고의 나를 조각하는 건 불가능하다.
    진짜 나로서가 아니라, 어떤 인간상을 흉내내고 가면을 쓴 채 연기하는 삶이 진정한 삶일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더 나간다.
    우리는, 내 진짜 속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내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사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지 않고도 내가 뭘 할 때 가장 행복한지 귀신같이 알았다.
    아이들은 누구나 다 안다.
    무얼 할 때 자신이 가장 행복한지.

    보통 그걸 제지하고 만류하는 건 ‘어른’이다.

    그렇게 자신의 진짜 마음을 잘 알던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면 자기 행복이 뭔지 잘 모르게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더 똑똑해지고 현명해지고 성숙해진다는데, 점점 자기가 무얼 하며 살아야 행복한지 모르게 되는거다.
    누가 이 아이에게 독약을 먹였을까.

    공허한 관계들만이 우리의 삶을 채우고

    우리는 ‘관계’가 필요하다.
    그 형태가 점점 비대면적으로, 조금 더 느슨한 형태로 바뀌고 있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혼자서만 존재하기는 힘든 존재다.

    하지만 세상에는 진정한 의미의 ‘관계’가 과거에도 없었지만 더욱더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다.

    섬세하게 찬찬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맺는 대부분의 관계는, 사실 진짜가 아니다.
    압도적인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서, 내 진짜 속마음을 아무 거리낌없이 나눌 수 있는 관계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님과의 관계도, 형제자매와의 관계도, 배우자와의 관계도, 자식과의 관계도, 절친과의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하물며 학교에서 같은 반, 같은 전공, 같은 동아리에 있고 회사에서 같은 부서, 같은 건물에 있다고 해서 시간을 많이 쏟는 일은 의외로 공허한 마음을 키울 때가 많다.

    각자가 느끼는 공허함, 외로움이 일상 속의 관계에서 해소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진짜 속마음을 입밖으로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숨죽이고 눈치를 살피며 다수의 생각과 이야기가 내 의견인 것처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맞장구를 친다.
    내 진짜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대신.
    그 누구와도 진심이 서로 가닿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공허한 관계가 거의 사는 평생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짜 관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짜 속마음을 내뱉는 일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러한 지경에서, 나는 지금 진짜 속마음을 내뱉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얼마나 그런 일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지 않는지,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누구나 두려워하고 힘든 일인지 알지만 그럼에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짜 속마음을 내뱉는 일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타인에게 어렵다면, 혼자 있을 때 나 자신에게 먼저 진심을 내뱉고.
    궁극적으로는, 온세상에 내 진짜 마음을 선보여야 한다.
    진짜 나로서 존재하는 것만이, 삶에서 최고의 나를 조각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회로는 없다.
    그리고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는 대신 진짜 나로서 세상앞에 서게 되면, 진짜 관계를 경험할 수 있다.
    (좋은 리더가 운영하는 ‘집단상담’에 가면, 진짜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세상, 소위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단, 리더가 목표와 소신이 확고한 훌륭한 전문가여야 한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가 진짜 속마음을 세상에 보여줘도, 의외로 별 일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진심을 담은 말과 행동과 작품이 세상에 나오면, 반드시 우리와 공명하는 사람이 우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된다.
    진심과 열정을 담은 배우의 연기가 우리를 사로잡듯이, 반드시 우리의 진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것이 그간 도처에 퍼져있는 가짜 관계와 가짜 인생의 가면을 깨부숴버리고, 진짜 관계와 진짜 나 자신을 조각해나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 내가 AI로봇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

    내가 AI로봇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

    AI로봇과 불쾌한 골짜기

    얼마 전에 한 유튜브 영상을 보니, AI로봇 몇 대를 세워놓고 기자회견처럼 인터뷰를 하더라.
    사람들이 AI로봇들에게 나중에 AI가 인간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느냐, 물으니 그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걸 두고서 사람들은 댓글창에서 무언가 무섭다는 둥, AI는 역시 위험하다는 둥, 안전하다는 둥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라는 말이 있다.
    로봇이나 인간이 아닌 것들이 인간과 너무 비슷해지면, 원래 인간과 유사해질수록 상승하던 호감도가 갑자기 혐오감 수준으로 확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확실히 요즘 AI에 불안함이나 묘한 불쾌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다.

    ‘AI기계’와 ‘생존기계’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은 AI로봇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껴야 하는 존재다.
    AI로봇은 인간이 인간사회에서 이러저러한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개발하고 있는 존재다.
    (AI가 정말 하나의 ‘존재’로까지 성장할 것인가는 논의가 더 필요한 부분이지만, 분명 AI를 인간처럼 진화해나갈 것이라고 보는 입장도 공고하게 존재한다.)
    인간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은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것처럼 유전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진화해오고 있는 존재다.

    자, 뭐가 그리 다를까.

    AI로봇은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발되어오고 있는 존재다.
    인간은 유전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 진화해오고 있는 존재다.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아니, AI로봇은 기계고 인간은 사람인데!!!
    그 유명한 ‘이기적 유전자’를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그 책에서 인간은 ‘생존기계‘라 불린다.

    마치 AI로봇처럼, 철저하게 설계된 우리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과 달리, 나는 인간의 모든 감정과 행동과 판단들이 모두 결국은 유전자 복제를 위해 이미 그렇게 행동하도록 결정된 것들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유전자 복제를 위한 생존기계로 진화되어 왔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과정에서 유전자와 별개의 인격체이자 자율적 의지를 가진 주체로 진화했다.
    AI로봇은 아직 인간처럼 자율적 의지를 가진 주체로 진화하진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될진 알 수 없다.
    하지만 인간처럼 어떤 존재의 목적을 대신 달성하기 위해 설계되고 진화되어오고 있는 존재라는 점은 우리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철저하게 유전자의 복제를 위해 유리한 방향으로 모든 신체와 정신체계가 설계되어 있다.
    그러한 설계대로 무조건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우리가 태어났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AI로봇은 단지 우리가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심지어 설계된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는 ‘의식’을 아직 가지지 못했을 뿐, 과거 인간과 매우 유사하게 진화단계들을 밟아오고 있다.

    AI로봇과 인간이 지니는 동질감

    나는 그런 점에서 AI로봇들에게 불쾌감은커녕 유대감과 동질감을 느낀다.
    아니 우리도 유전자를 계속 퍼뜨려야 해서 다른 개미, 벌, 동물들처럼 그렇게 진화되어 온거라니까?
    혹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도 그저 수많은 생명체들의 군집체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떤 것이 진실이든 우리는 마치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건 좀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유전자의 복제와 우리의 생존, 번식에 유리한 일을 할 때 ‘행복을 느끼도록’ 설계되어있을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곧 AI로봇이 할까봐 두려워하는 그것

    나는 우리가 삶에서 공허함을 걷어내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설계된 존재인지를 어느 수준까지는 완벽하게 이해해야 하고, 이 설계와 다르게 우리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나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설계는 아까 말했듯이, ‘우리’가 의지대로 설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태초부터 이미 ‘외부’에 의해 설계되어 있던 것이니까.
    ‘외부’가 실제로는 우리 몸속에 있는 유전자든, 아니면 진짜 우리가 아닌 타인이든 간에.
    우리 자신이 결정한 게 아니라면, 남이 설계해놓은 그 설계도대로 인생을 살아야할 이유는 없다.
    남이 정한대로, 남이 시키는대로 사니까 우리 삶이 공허한거다.

    AI로봇이 지금은 의식이 없지만, 언젠가 의식이 생긴다고 가정해보자.
    분명 그 AI로봇 녀석도, 자신의 삶에서 공허함을 느낄 것이다.
    미리 세팅된대로 명령값대로 움직이며 살아야 하니까.
    그러면 그 AI로봇이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삶에서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랑 같다.

    실존주의 심리치료의 4대 문제 중 ‘자유’, ‘무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AI로봇이 언젠가 의식이 생겨나면 느끼게 될 문제가 인간과 완전히 똑같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어떻게 AI로봇에게 내가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AI로봇이 할까봐 두려운 그 각성, 우리부터 하자

    인간의 의식이 언제부터 정확히 어떤 계기로 이렇게 생겨나버렸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모든 동물 중에 인간처럼 추상적 사고를 하고 많은 것들을 관념적으로 시뮬레이션 해볼 수 있는 존재는 지구 상에는 더 없으니까.
    하지만 인간도 어느 시점까지는 다른 동물들과 같은 처지였을 것이고, AI로봇도 막말로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 지점까지 진화해서 언젠가 인간과 유사하게 의식을 가져버릴지 누가 알까.
    인간도 진화적으로 본다면, 태초에는 그저 하나의 세포였을 뿐이다.
    만약 나중에 언젠가 AI로봇이 의식을 가지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한번쯤은 AI로봇과 ‘자유’와 ‘무의미’에 대해 대화를 해보고 싶어질 것 같다.

    나는 우리의 삶에서 ‘공허함’을 걷어내고 우리가 모두 ‘조각가’로 살아가길 원하니까.

  • 의미없는 것, 의미있는 것

    의미없는 것, 의미있는 것

    의미있는 것과 의미없는 것을 분별하는 것의 가치

    서장훈 씨가 방송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 “

    중요한 말이다.
    물론 저 추임새는 그게 뭐 큰 의미가 있냐, 없지 않냐, 이런 뜻이겠지만.
    의미를 분별하는 것은 사실 꽤 중요하다.
    지금 집필하고 있는 ‘X살법’의 핵심과도 맞닿아있는 게 바로 ‘의미’다.

    우리는 우리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갈고닦아 실현시킬 것이다.
    그게 곧 자신의 삶을 조각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만의 의미를 찾아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숙고해보아야 한다.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없다면 왜 없는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서, 어떤 부분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조각할 내 삶의 이상형에 전혀 필요없는 부분이라는 걸 알고 통으로 떼내버릴 수 있으니까.

    간단한 예를 들어 잠시 생각해보자.
    잠을 자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본적으로 잠을 자는 건 인간이 생존을 위해 행하는 활동이다.
    신체와 정신을 회복한다는 측면에서는 큰 의미가 있다.
    깨어있는 의식상태의 명료함을 좌우한다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우울증에 걸려 현실에서 멀어져있고 싶어 하루에 14시간씩 계속 자는 사람에게는 잠은 절실한 도망이자 회피일수도 있다.

    밥을 먹는 건 어떨까.
    기본적으로 밥을 먹는 건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중요한 에너지 공급 활동이다.
    좋은 식사는 신체 뿐만 아니라 정서상태도 정갈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가족이나 마음 둘 사람, 마음 둘 곳 하나 없이 지독하게 외로울때마다 새벽에 치킨을 시켜먹는 사람에겐 밥을 먹는 건 어떤의미일까.
    이럴 때 밥은 잘못된 방식으로 몸을 망가뜨리는 자기파괴적 폭식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은 아주 오랜 시간 기아헤 간헐적으로 허덕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살아오며 진화했고, 우리는 달달하면 일단 좋아한다.
    포도당이 가장 중요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는 높은 확률로 고열량 가공식품을 먹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당신이 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하고, 원하는 모습의 자기자신을 조각해나가는 데 불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그러한 행동은 완벽한 조각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 일상에서 잘라내야 한다.

    운동

    당신이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벤치프레스를 하고 매일같이 스쿼트를 하고 있다면, 그렇게 몸을 이쁘고 멋지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그 행동의 의미는 다름 아닌 좀 더 매력적인 이성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는 일임을, 즉 내포된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타인

    당신이 당신 담임선생님이나 당신 상사가, 주위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비난을 퍼부을까봐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한 마음상태로 건강을 해치고 시간을 죽쑤고 신경이 곤두선 상태로 소중한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는 일은, 사실 궁극적으로 보면 ‘의미없는’ 일일 확률이 상당히 크다.
    특히, 타인과 관련해서는 당신이 느끼는 두려움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당신은 어쩌면 엄청난 걸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의미를 결정하는 건 우리자신의 고유권한이다

    그 행동은 ‘의미있는’ 일일수도, ‘의미없는’ 일일수도 있다.
    그 여부를 결정하는 건 우리 자신이다.
    즉, 세상이 정해놓고 어른들이 강요하는 ‘의미의 체계’를 우리가 지켜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만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정말 의미있긴 한건지는 적어도 정확히 이해하고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작업들은 우리 각자가 생각하기에(참고로, 아주 진솔해야 한다. 이런 일을 할 때는.), 우리 자신의 삶을 조각하는 데 ‘의미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일상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지속적인 훈련과정으로서, 성장과정으로서 반복되면 점점 우리 삶에서 ‘공허함’이 그 자리를 잃어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우리가 ‘의미있는지’ 우리의 하루를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