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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의 소통방식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아이의 소통방식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유전

    부모에게서 자식이 물려받아
    무언가가 대를 이어 내려오는 걸 말한다.

    DNA와 생물학이 곁들여지다보니
    그리 재밌다고 환영받는 주제는 아니다만,
    다행히 지금 말할 건 그런 건 아니다.

    내가 지금 말하려는 이야기는,
    그저 마음에 관한 것이니까.

    소통방식

    소통하는 방식, 스타일은
    유전된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저게 다다.

    당신이
    친구,
    동료,
    연인,
    선생님,
    가족
    주위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아주 높은 확률로 유전된다.
    적어도 유전된 후 변형된다.

    여기서 소통이라는 건,
    타인과의 소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나자신과의 소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기자신에게 유독 엄격한 사람

    뭐 그런 걸 생각해보자.

    당신이 당신 스스로에 대해
    꽤 엄격하고 가혹하게 구는
    스타일이라면.

    왜 그런걸까.
    대부분은 내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문제는 왜 그리 나에게
    유독 기대치가 높냐는 것이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존재하지만,
    자기자신이 힘들어하는 걸
    그다지 가엾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에 도사리는 이유와 절박함을
    하나의 일률적인 관점에서 단정지을 순 없다.
    누군가는
    내가 내 가족을 이끌어나가야만 하고,
    이 빚을 나라도 꼭 갚아야만 하고,
    이 병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아이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고 엄하게 구는 건,
    대개 내가 힘들고 지치는 게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좀 길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기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잘 모른다.
    자신이 힘들고 외롭고 지칠 때,
    스스로를 위로해주지는 않는다.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이 힘들어하면
    잘 다독여주고 이야기도 들어주면서,
    내가 두렵고 불안해서 외치는 비명은
    들은 채 만 채 경청하지 않는다.

    요즘 사회가 각박하다면서
    길가에 칼맞고 피흘리면 보고서도
    못본 척하고 지나가지 않나.
    그거 사실 예전이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50년 전에도, 200년전에도,
    인간은 자신에게 위해가 될 거 같은 일은
    그게 어떤 일이든 어지간해선 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걸 자기자신에게도
    그렇게 한다는거다.
    길가에 피흘리며 쓰러져있는 나를
    내가 본둥 만둥 못본 척 지나가버린다.

    소통방식의 유전

    이런 스스로에게 유독 엄격하고 가혹한
    사람들은 세상에 매우 많다.
    그 원인도 여러 가지,
    양상도 여러 가지이나,
    나는 지금
    자기자신의 나약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다듬어주지 못하는 태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 주제는 그거니까..? ㅋㅋ)

    자.
    이런 소통의 방식이나 태도는,
    유전된다.
    자기자신과의 소통방식이 저러하다면,
    이건 유전이 된다.

    당신이 당신의 아이를 키운다면,
    당신의 아이도 그 방식을 물려받는다.
    아이는 세상과 처음 마주하면서부터
    부모의 소통방식을
    말하는 법, 말을 듣는 법이라 느끼며
    그걸 그대로 내재화한다.

    이럴 때 대개 던지는
    ‘진절머리가 나서 난 부모랑 전혀
    반대인데요..? ‘
    라는 말은,
    유전을 운명으로 잘못 이해해서 하는 이야기다.
    부모가 대장암이었다고
    자식이 대장암에 걸리지 않고,
    부모가 서울대 교수라고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는 건 아니다.

    … 하지만 그럴 소지는 다분하다.
    부모가 스스로에게 가혹하고
    자기자신의 연약한 면을 감싸안을 줄 모르면,
    자식도
    자기자신이 살다가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스스로 자신에게 위로를 해줄 줄 모를
    소지가 다분하다.

    유전은 반복된다

    개인상담에서 내담자들이 종종 묻는 질문 중 하나는,
    바로 이거다.

    “아니, 저랑 부모님 관계가 제 고민이 아닌데,
    이거에 대한 것도 이리 자세히 이야기하나요..?”

    한 인간에게
    부모와의 관계와 그 안에서의 소통방식은
    그 인간이 세상, 타인, 자신과 소통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뿌리가 되고,
    사실 아주 빈번하게 거의 유사한 형태로 재연된다.

    이건 후기정신분석이론 중 하나인
    대상관계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고 명확한 개념이다.
    (자세한 설명은 일단 오늘은 제끼자.)

    그러면 이제 느낌이 팍, 올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스스로에게 가혹하고
    힘든 상황에 처해 주저앉아있는 자기자신을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가엾어해주지 못한다면,
    이건 어디서 왔을까.

    그렇다.
    당신의 부모에게서 왔을 확률이,
    결코 낮지 않다.
    아까도 말했지만 운명이라는 게 아니다.
    부모님이 심한 당뇨병을 앓았다고 해서,
    아이가 무조건 당뇨병에 걸리진 않는다.
    그런데 그럴 가능성은 높다.

    그래서 심리상담을 할 때,
    나는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해서
    내담자와 부모님과의 관계를,
    나의 가설에 비추어볼 때, 필요하다 생각되면
    조부모님과 부모님과의 관계를 묻기도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프랑스 시인 아그리파 도비녜의 말이다.

    “악의 어머니는 지식일 수 없고,
    정의는 무지함의 딸일 수 없다.”

    아는 게 힘이다.
    이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건,
    우리가 도저히 그걸 감내할 힘이 없다고 생각될 때
    합리적일 수 있는 말이다.
    무언가를 아는 것만큼,
    근본적인 해결의 뿌리가 되는 건 없다.

    소통방식은 유전된다는 걸 이해하면,
    당신은 당신의 아이에게
    좀 더 좋은 부모로서 현명한 양육을 해줄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의 부모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그들도 아마
    그의 부모로부터 유전받은 소통방식으로
    당신을 키웠을테니까.)
    당신 스스로에게 좀 더 다정할 수 있는
    실마리가 떠오를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 글이
    당신이 누군가(자기 포함)를 사랑하며 사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어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며 글을 마친다.

  • 투사적 동일시의 명확한 의미

    투사적 동일시의 명확한 의미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는
    정신분석학이나 대상관계이론 등의 책에서
    참 많이 나오는 개념이다.
    하지만 그 의미가 불명확하다.
    내가 상담심리대학원에서 듣던 수업들마다,
    심지어 똑같은 대상관계이론에 대한 수업들 간에도,
    쓰는 교재에 따라 투사적 동일시의 개념은 조금씩 달랐다.
    시험기간마다 사람들 각자 이해한 정의가 조금씩 다 달랐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책, 저 책 다르고 이 수업, 저 수업 다르다는건
    충분하게 합의된 명료한 정의가 아직 정립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의미겠으나,
    그럼에도 늘 기준이라는 건 필요하니
    그것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해보고 넘어가려고 한다.

    투사란 무엇인가.

    투사(Projection)란,
    도저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 감정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나의 감정이라 인정하기 어려운 걸
    타인에게 던지고,
    그 감정이 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짐작되겠지만,
    이건 자각되지 않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다.

    동일시, 투사적 동일시란 무엇인가.

    동일시(Identification)란,
    외부대상의 일부를 나의 내면으로 가져와 내 것으로 여기는 행위를 의미한다.
    방어기제의 한 종류이자, 내면화의 한 형태다.

    자연스럽게 투사적 동일시란,
    위의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감정을 상대방에게 투사하고,
    다시 그 투사된 감정이나 그를 느끼는 상대방을
    동일시하는 방어기제다.

    투사적 동일시 개념은 사실 좀 혼란스럽다.

    이제 여기서 공부하는 입장에서도,
    그냥 교양으로 책을 보거나 강연을 듣는 입장에서도,
    혼동이 오기 시작한다.
    투사는 사실 헷갈릴 부분이 없다.
    원래 투사의 의미와 다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동일시는 다르다.
    동일시는 내면화의 세가지 분류 중
    가장 성숙하고 건강한 방어기제로 꼽힌다.
    본받을만하거나 중요한 대상의 긍정적인 특성을
    자신의 내면이나 정체성의 일부로 가져오는 걸
    동일시라고 설명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투사적 동일시는,
    그리 성숙한 방어기제로 평가되지도 않고,
    긍정적인 것으로 설명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 동일시가 헷갈린다.
    뭘 동일시한다는 말인가.
    책마다, 사례마다 다 다르다.

    투사적 동일시에서 동일시의 첫번째 의미

    투사적 동일시에서의 ‘동일시’는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번째 의미를 살펴보면,
    투사적 동일시에서의 동일시는
    감정을 투사하는 나(이하 ‘투사자’)의 감정을
    투사받은 상대방(이하 ‘피투사자’)이
    투사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동일시를 말한다.
    즉, 피투사자가 투사자 때문에 느끼는 투사된 감정을
    투사자가 다시 내 것으로 동일시한다는 의미다.

    이쯤되면 더 헷갈린다.
    투사자라는 놈은, 도대체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가.
    그냥 지 감정인데 지가 느끼면 되지.
    이런 욕이 절로 나올 수도 있다.
    이건 좀 이따 이야기해보고 일단 개념만 짚고 넘어가자.

    동일시의 두번째 의미

    동일시의 두번째 의미는,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걸 의미한다.
    즉,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이 내 것이라고 여기고
    경험하게 되는 내사(Introjection)와 유사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투사적 동일시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아무래도 첫번째 의미가 좀 더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투사적 동일시에서의 동일시는
    이 피투사자의 내사를 ‘동일시’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므로 이 단어가 가지는 두번째 의미도
    정확하게 이해해두는 것이 도움이 된다.

    러프하게 정리하면,
    부차적 의미라 볼 수 있는 두번째 의미는,
    피투사자의 ‘내사(Introjection)’다.

    투사적 동일시에서 ‘통제’의 의미

    대상관계이론이나 정신분석 전문서적들을 보면,
    투사적 동일시와 관련해서 이런 표현들이 나온다.

    ” ~ 투사한 후 그 감정을 통제하려 한다.”
    ” ~ 간접적으로 관리하려 한다.”
    ” ~ 조종하려 한다.”

    뭐 이런 뉘앙스들의 표현들이 서술된다.
    아니, 동일시면 동일시지 뭘 통제하고 조종한다는거야.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 ‘통제’에 대한 의미도 크게 두가지로 이해하면 된다.

    첫번째 의미.
    투사자가 감정을 투사한 후
    그 감정을 느끼는 피투사자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정확히는, 투사된 감정에 대한 피투사자의 반응을
    통제하려는 시도다.
    이는 자기가 도저히 처리하지 못해서 뱉어버린 그 감정을
    피투사자를 통해서라도 처리해내보려는 시도다.

    두번째 의미.
    투사자가 견디지 못하고 투사해버린 감정 그 자체를 피투사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통제하려는 시도다.

    즉, 첫번째 의미는 피투사자의 감정에 대한 반응이,
    두번째 의미는 투사한 감정 그 자체가,
    ‘통제의 대상’이 된다.

    이걸 좀 구분해서 이해하고 있으면,
    여러 서적에서 나오는 관리, 통제, 다루는 일, 을
    이해하며 읽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첫번째든, 두번째든, 결국 통제의 취지는 똑같다.
    자신이 못견디고 뱉어낸 감정을 타인이라는 완충지대를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통제하고 처리해내고 싶은거다.

    간접적으로 다룬다는 개념의 구현

    간접적이라는 건,
    투사자가 직접이 아니라 피투사자를 통한다는 걸
    의미하는 표현이다.
    그러면 간접적으로 ‘다룬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구현되는가.

    여러 서적의 여러 사례들을 보면,
    대강 훑어도 딱 드는 생각이 일관성이 없다는거다.
    나는 특히 초창기에 여러 책들을 보며
    너무 ‘막 갖다붙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ㅋㅋ
    물론 모르고 그리 함부로 생각했던 것도 있고,
    꽤 공부하고 나서도 그런 느낌을 완전히 지울 순 없으나… ㅋㅋ

    간접적으로 다루고 관리한다, 통제한다, 처리한다.
    이런 류의 표현들은 두가지 형태로 삶에서 구현된다.
    즉, 사례에서 두가지 양상으로 드러난다는 의미다.

    첫번째 양상은,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을 경험하고 알아서 처리하는 모습을,
    투사자는 그저 지켜본다.

    이것만으로도 투사자는 어느 정도 자신이 그 감정을 간접적으로긴 하지만 처리하고 소화해낸다고 느낀다.
    이게 바로 위에서 말한,
    ‘도대체 왜 이런 번잡한 짓을 하는지’에 대한 첫번째 대답이다.
    애초에 투사자는 이 감정이 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조차 할 수 없지 않았나.
    그에 비하면 단지 지켜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름 장족의 발전 아닌가.

    두번째 양상은,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에 특정 행동이나 특정 반응으로 대응하도록
    투사자가 피투사자를 유도하거나 조종함으로써,
    자신이 못견디고 뱉어버린 그 감정을 ‘제대로 한 번’ 통제하고 처리해본다는 식.
    이건 첫번째 양상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느낌이다.

    대학원 교재에서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

    자, 여기까지면 이제 투사적 동일시를 이해할 때,
    혹은 관련 전문서적들을 볼 때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부족함이 없다는 건,
    적힌 걸 이해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안 적혀있으나 궁금한 걸 해결하는 건 각자의 몫이다.

    궁금하지 않나.
    자기가 감당 못해서 그 감정을 남에게 던졌는데,
    어떻게든 다시 처리하려는 예상밖의 용감함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분명 투사자는,
    자신이 기대한 방향으로
    피투사자가 그 감정에 반응하거나 행동하도록 하려는
    무의식적인 동기를 가진다.

    그렇다면 이 무의식적인 동기는 어디서 오는가.
    그건 미해결된 감정이나 과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장기적으로 인간의 생존에 유리하다는 사실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지금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는,
    무조건 어렵고 실패한 것들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오랜 진화과정에서 인간은
    내가 아무리 도망쳐도 다시 마주해야 하는
    여러 가지 미해결된 과제들에 죽임을 당해왔을 것이다.
    삶은 다분히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인간은 실패한 과제로부터 어떻게든 도망가려는 동시에
    미해결된 감정이나 문제에 다시 달려들어
    제대로 통제하고 해결해보려는 타고난 성향을 지닌다.
    그래서 내가 미처 어쩌지 못하고 타인에게 투사한 감정도
    그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통제하고 처리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당신의 쿨한 팀장이 자꾸 서성이는 이유

    자.
    이렇게만 말하고 끝나면 기억에 오래 남지 않을 수 있으니,
    흔히 일어나는 직장에서의 상황으로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지금 회사 A팀의 팀원이다.
    팀에 사장에게 직접 보고해야 하는 중요 업무가 떨어졌다.
    팀장은 평소에도 쿨한 성격의 소유자다.
    사장보고 사안이 떨어지자,
    팀장은 팀원인 나에게 와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좀 급한 일이긴 하나 뭐 별 거 아니니까,
    그냥 우린 하라는대로 해서 보고하면되니,
    괜히 긴장할 거 없단다.
    묘하게 좀 상기된듯한 느낌도 언뜻언뜻 보이지만,
    아무튼 마음 편하게 가지라니 마음 편하게 가지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근데 내가 보고서 쓰는데 자꾸 뒤에서,
    팀장이 서성거리며 왔다갔다 한다.
    초안을 보여줬더니 단어 하나를 두고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계속 고민을 거듭한다.
    보고서가 20장인데.
    보고를 언제까지는 해야 될 거 같다며,
    자꾸 데드라인을 언급하며 얼마나 작성됐는지 확인한다.

    뭘까.
    팀장은 속으로 초조하지만 겉으로 아닌 척 한걸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닌 경우도 허다하게 많다.

    팀장은 사실 진심으로 초조하고 불안하다.
    사장 보고인데 갑작스럽게 생겨서 미처 준비도 못해서
    걱정이 되고 보고갈 생각만 해도 두렵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나는 평소에도 팀원들이 담력도 쎄고 남자다워서
    멋있다고, 나도 본받고 싶다고 칭송받는 담대한 팀장이다.
    그런 내가 이런 급작스런 보고 하나로 덜덜 떨다니.
    내가 초짜도 아니고 회사생활 20년의 베테랑인데.

    그래서 자신의 속마음,
    즉 불안함과 초조함, 두려움 따위의 감정들을
    남에게 투사한다.
    보고서를 작성 중인 담당팀원에게.
    즉, 나에게 투사하는거다. 팀장이 자신의 감정을.

    당신은 팀장이 자꾸 괜찮다 괜찮다 다독이고
    너무 쫄지 마라 그러고, 떨지 말라 그러니까.
    원래는 별 생각없다가 점점 초조해진다.
    울지 마라 다독이니 더 눈물날 거 같은 아이가 된 기분이다.

    여기서 지금 팀장은
    자신이 소화하지 못하는 자기 불안을 팀원인 나에게 던진 뒤
    내가 그 감정을 내것으로 여기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팀장은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그 불안함에
    반응하는 당신의 대응이나 행동을 통제하려고 한다.
    ‘그 불안함에 너무 휩쓸리지마.
    너무 그 감정에 압도되지 마.
    별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팀장은 팀원인 나를 통해
    자신이 못견디고 내게 투사한 감정을 간접적으로라도
    통제하고 처리하려고 한다.
    물론 팀장은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채 은연 중에 이런 식의 행동을 보이는거지 의도를 갖고 그러는 건 아니다.
    자기도 자기가 그러는지 모르고, 왜 그러는지도 모른다.

    이게 투사적 동일시가 실제로 구현되는 모습이다.
    이런 일은 일상에서 비일비재하다.
    투사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만약 눈에 보인다면 무슨 무선 와이파이 기기들이 수백개가 주위에 넘쳐나듯이 아주 장관일거다.

    이것이,
    우리가 정신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힘을 길러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기 위해서 타인을 은연 중에 이용하려는 존재니까.
    이용당하느라 소중한 감정과 시간이 소진되면 안 되지 않나.
    (이에 관한 레벨업은, X살법 Lv15를 통해 시작하면 된다.)

  • 인간은, 달면 삼키고 쓰면 ‘투사’한다

    인간은, 달면 삼키고 쓰면 ‘투사’한다

    투사

    투사.
    투사(Projection)란,
    ‘자신의 것이라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을 타인에게 전가해서 그 사람의 감정이라고 여기는 행동’
    을 의미한다.
    이건 마치 아기가 달콤한 건 삼키지만
    쓰거나 맛없는 건 퉤, 하고 뱉어버리는 것과 유사하다.
    내 안에 들어오기 거북한 건, 바깥으로 뱉어버리는거다.

    투사를 이렇게 한 줄로 딱 정리하면. 사실 간단해보인다.
    하지만 이 간단해보이는 단어 하나에도, 꽤나 그럴듯한 함의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은, 딱 말그대로 간단한 것만 생각해본다.
    단순하게 내뱉는 것 그 자체 하나만 딱 보자.
    이것만으로도 주위 세상과 타인을 이해하는 눈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니.

    사람들은 늘 타인을 욕한다.

    일상에서,
    뒷담화나 험담이 없는 자리가 얼마나 있을까.
    그 자리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투덜거림이나 당했음을 빙자한
    비난과 조롱이 난무한다.

    하지만 자신도 그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이러한 모습이 미성숙하고 최악이라며
    누군가를 욕하는 그 사람도,
    막상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똑같이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령,
    친구 누구누구는 늘 자기 말만 맞다고 주장하고
    남의 이야기는 경청도 하지 않고 무시한다며
    실컷 욕을 하고 있는 A를 상상해보자.
    그 A는 그런데 그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그렇게 한다.

    ….왜 그런걸까.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늘 나오는 진리의 단어가 있다.
    내로남불.
    내로남불이 판치는 시대에, 역시 그놈도 그런거 아니냐!
    내로남불이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결과론적으로는 맞으나,
    그 단어에 뉘앙스적으로 깔린 ‘악의’는 틀렸다.

    늘 내가 주장하는 거지만,
    인간은 의외로 의도해서 내로남불하는 게 어려운 존재다.
    내로남불러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법학에서 말하는 ‘악의’, 즉 알고도 그러는 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투사의 힘이 여기서 드러난다.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트는,
    초창기에 투사를 비롯한 방어들이 분열을 위해 태어난 것 같다, 는 말을 한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투사의 핵심 중 하나는, 무의식적이라는 데 있다.
    투사를 한 사람은 자신이 투사한 걸 자각하지 못한다.

    무슨 이야기냐면,
    ‘XYZ’라는 단점을 헐뜯고 남을 욕하는 사람이
    자신도 똑같이 ‘XYZ’를 가지고 드러낼 때는.
    그 사람은 자신의 XYZ를 자기 것이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안에 있던 걸 바깥으로 뱉어버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떠올려보라.
    분명히 이러이러한 문제가 너무 과도한 거 같아서 조심스럽게 그것을 이야기했을 때,
    상대방이 연인이었든 친구였든 동료였든 뭐라고 했었는지.
    내가 뭘? 내가 언제? 왜 없는 말 지어내?
    속에 열불이 터질 수도 있고
    정말 우리가 잘못 본 걸수도 있지만,
    핵심은 상대방의 저 반응이
    알고도 잡아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저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상대방이 저렇게 반응할 때, 너무 진심인 거 같아서 의아할 때가 있지 않았나?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있을텐데.

    세상에는 의외로 내로남불러들이 적다.
    그는 그저
    도저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 못나고 최악이라 느껴지는 것들을
    자각하지 못한 채 남에게 투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반복된다.

    세상에 난무하는 험담과 비난으로 다시 돌아와보자.
    인간이 그렇게 ‘투사’라는 걸 하는 존재라면,
    내 눈에 자꾸 보이는 짜증나는 무언가가
    어쩌면 내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봐야 한다.

    이쯤 오면 이제,
    우리는 짜증이 나고 불쾌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그렇게 혐오하고 최악이라 여기는 그것이,
    그래서 그런 모습만 보이면 짜증이 치미는 나에게,
    그게 실은 투사한 내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다니.
    역시 이론은 현실과 안 맞구나, 돌팔이네 프로이트 XX.

    ㅋㅋ 뭐 이상할 거 없다, 자연스러운 반응이니까.
    그건 그저 당신이 내로남불러가 아니라는 증거다.
    내 것이 아니라 확신하니,
    그걸 가진 누군가를 욕하고 미워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건 내로남불러들과 다르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만 돌팔이인 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MBTI의 심리적 유형 구분의 모태를 확립한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자꾸 누군가가 싫고 거슬린다면 그건 사실 우리가 억압하고 부정하는 우리자신의 면모를 그에게서 보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억압된 인간의 모습을 그림자(Shadow)라고 칭했다.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개성화(individuation)는,
    ‘이 그림자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을
    필수적인 과정으로 한다고 말했다.
    이거 이거, 프로이트고 융이고 돌팔이들이 많았네…

    그들이 돌팔이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보면,
    인간은 자기가 투사한 것들이 자꾸 삶에서 보이는 양상을 띠게 된다.

    내가 날 알아야 하는 이유

    어쩌면 우리의 세계관이,
    우리가 소화하지 못한 감정이 투사되어 윤색된 걸지도 모른다는 성찰을 우리는 해야 한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비판할 때,
    그것이 어쩌면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아, 물론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비판적 사고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비판보다 순응이 개인의 삶을 망치는 시대니까.

    그러나 이 비판과 의심이,
    그저 내 투사로 인해 내가 용인하지 못하는 내모습을 투영해서 보는 건 아닌지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파악해야만,
    그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칼 융이 말한 개성화는,
    우리가 최고의 우리자신을 조각해
    원하는 삶을 공허감 없이 쾌청하게 누리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어다.
    그의 말처럼,
    그러려면 일단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는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