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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곡의 3단계

    작곡의 3단계

    모든 창작은 3단계로 이루어진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여기를 누르세요.)
    고로,
    음악을 만드는 일 또한
    언젠가 말한 글쓰기의 3단계나 영상 제작의 3단계처럼
    3단계로 이루어진다.

    작곡 -> 편곡 -> 공개

    1단계. 작곡

    우선 첫번째 단계인 ‘작곡’이다.
    이 단계는 다시 3개의 소단계로 나뉜다.

    즉흥선율 -> 시놉시스 -> 작사,작곡

    이렇게 3가지 소단계로 나뉘는데, 하나씩 살펴보자.

    즉흥선율(=휘갈겨쓰기)

    일상 속에서,
    자다가,
    버스타고 있다가,
    떠오르는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선율을
    기록하는 일이다.
    (난 주로 흥얼거리며 녹음을 떠두지만,
    악보에 써도 된다. 난 악보가 영 어려워서… ㅋㅋ)

    가장 태초의 내 예술성과 잠재력, 개성을
    현실로 구현해내는 원석을 잉태해내는 작업이다.

    시놉시스

    시놉시스는
    글쓰기나 영상제작과 매한가지로 반드시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무언가를 창조해서 예술작품으로 만들어낼 때는,
    우리 영혼의 일부분,
    내면에 깃든 예술성의 어떤 한 측면을
    세상에 구현해내고 싶은 마음으로 창작활동을 한다.
    무얼 어떤 구성으로 예술작품으로 구현해내고 싶은지를 쓰는 부분이므로
    시놉시스를 작성하는 단계는
    여타 창작과 마찬가지로 음악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글쓰기나 영상제작과 유사하다.

    감정선 -> 구간나누기 -> 구간별 테마(SongForm)

    실선으로 감정선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그려본다.
    쉽게 기승전결을 그려본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 후, 몇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각 구간별 테마나 주제를 간단한 단어나 문장으로 적어본다.
    이게 이 곡 전체의 SongForm이 된다.
    SongForm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싸비’나 ‘벌스’ 같은 것들로 일워진 곡 전채의 뼈대를 말한다.
    SongForm의 전개와 각 파트별 분위기, 느낌이 개략적으로 정해지면 시놉시스는 그걸로 족하다.

    작사, 작곡

    첫째, 작곡

    말 그대로 업계에서 이야기하는 ‘작곡’을 한다.
    ‘업계에서’라는 말이 붙는 이유는
    통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작곡’은
    음악을 아예 통째로 다 만드는 것이지만,
    실제로 작곡가들이 하는 작곡은
    그저 어느 정도의 코드진행과 멜로디 작업 정도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은 어느 정도의 악기구성이나 작사, 심지어 간단한 믹싱작업까지도 해서 보내는 작곡가들도 많아졌다고 하나,
    그 대척점에는 ‘정말 이게 노래인가’ 싶을 정도로 노래를 완결성 없이 ‘적당히 만들다 만 것 같은?!’ 형태까지만 그려놓고 작곡이라 말하기도 한다 ㅋㅋ

    작곡단계에서 우리가 만들 것은 크게 3가지다.
    그건 바로,
    코드진행, 리듬, 탑라이닝(주 멜로디)이다.
    어떤 코드로 어떤 형태로 전개가 될 것인지
    코드진행의 전체적인 전개를 완성한다.
    그리고 간단히 피아노나 기타 정도로
    어떤 리듬으로 진행될 지,
    그리고 주선율이 될 탑라인이 어떻게 되는지를
    적당히 허밍이나 피아노 등으로 만들면 된다.
    나는 탑라이닝을 만들 때
    악기보다는 허밍을 좋아하는 편이다.

    둘째, 작사

    이 곡에 어울리는 가사도 같이 쓴다.
    가사는 사실
    시놉시스를 충실히 작성했다면 의외로 그리 어렵지는 않을 수도 있다.
    곡 전체의 분위기, 주제, 그리고 각 멜로디나 리듬에 따라
    어느 곳에서 호흡을 할 지,
    그리고 곡 각 파트의 대구(대응구조) 등을 고려해서
    작사를 한다.

    2단계. 편곡

    자, 이제 편곡을 시작한다.
    1단계에서도 큰 의미에서의 ‘작곡’이 있고 그 하위에 작은 의미에서의 ‘작사,작곡’이 있었는데,
    여기도 그렇다.
    2단계 편곡은 큰 의미의 ‘편곡’이고,
    이 편곡 단계 하위에는 다시 작은 의미의 ‘편곡’과 ‘믹싱’, ‘마스터링’이 있다.

    편곡 -> 믹싱 -> 마스터링

    편곡

    편곡은 쉽게 말해 악기를 배치하는 걸 말한다.
    전체적인 곡의 구조, 즉 SongForm에 맞게
    악기들을 하나씩 배치해나가되,
    각 파트가 진행되면서 고조되고 낮아지는 감정선의 세기나 흐름,
    악기 간의 조화나 파트별 분위기 등을 잘 고려해서
    편곡을 진행한다.

    편곡을 하는 과정에서
    주 선율 외에 리프(Riff) 멜로디 등을 루프 형식으로 간단히 라이닝할 일이 생길텐데,
    이 작업까지 이 단계에서 한다.
    (작사,작곡 단계에서는 주 멜로디만 라이닝한다는 의미다.)

    믹싱

    이제 믹싱을 할 차례다.
    곡 전체의 흐름을 고려하면서
    각 악기 간의 밸런스,
    악기와 목소리 간의 밸런스,
    파트 간의 밸런스 등을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일이다.

    마스터링

    믹싱작업이 끝나고 나면,
    이제 정말 음악이 최종 예술작품으로 완성되기 직전에 하는 마지막 작업을 할 차례다.
    바로 ‘마스터링’이다.
    곡 전체의 음압이나 밸런스 등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조율해서 완성시키는 작업이다.
    여기까지 마치고 나면,
    이제 우리가 창작한 예술작품은 비로소 완성이 된 것이다.

    3단계. 공개

    음악 또한
    글이나 영상처럼 공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음악은 보통 몇분 되지 않는 짧은 형태의 예술작품이기 때문에
    글이나 영상처럼 다른 형태로 만들어서 다양한 방식으로 공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만약 한다고 하면,
    다른 영상이나 작품 등에 내 곡 일부를 깔아서
    곡의 분위기나 임팩트를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식의 공개가 가능할 수는 있겠다.

  • 내 글을 영상으로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 : 컨텐츠 전환 단계별 튜토리얼

    내 글을 영상으로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 : 컨텐츠 전환 단계별 튜토리얼

    글을 영상으로 만드는 일

    바야흐로, 영상의 시대다.
    사람들은 명백하게,
    글보다는 영상을 더 사랑한다.
    영상은 좀 노곤해도 볼 수 있고,
    글은 좀 노곤하면 안 읽히기 때문에.
    영상은 청소하면서도 볼 수 있으나,
    글은 설거지하면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의 영상 사랑은 퍽 이해가 간다.

    물론 그럼에도 나는 글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영상도 못지않게 애정하기도 하고
    한 개인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글을 영상으로 제작하는 일은,
    아마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궁금하고 필요한 일이 되어갈 것이다.

    나 또한 글을 쓰고 그 글을 영상화하는 일에
    매우 큰 관심이 있고
    실제로 혼자 뚱땅거리면서 이래보고 저래보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과 이해를,
    여기 간단하게 정리해서 써보고자 한다.
    분명 시행착오를 미리 줄여주고,
    애매모호한 부분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글을 쓰는 과정에 대해 간략히 짚어보자.

    글을 쓰는 과정은 크게 세가지 단계로 이루어진다.

    집필 – 퇴고 – 공개

    여기서 첫번째 단계인 집필은 다시 세 하위단계로 나뉜다.

    휘갈겨쓰기 – 시놉시스 – 초고

    여기서 시놉시스는 다시 ‘감정선-구간-구간별 주제’로 이루어진다.

    영상

    영상을 제작하는 과정도 한 번 살펴보자.
    이 과정도 크게 세가지 단계로 이루어진다.

    시나리오 – 제작 – 공개

    시나리오는 다시

    휘갈겨쓰기 – 시놉시스 -시나리오
    (시놉시스는 다시 ‘감정선-구간-구간별 주제’로 이루어짐)

    제작은 다시

    사전제작 – 촬영 – 후반작업

    연결

    자, 이제 글쓰기와 영상제작의 과정을 연결해보자.

    연결되는 부분은 바로 영상제작의 큰 세가지 단계에서 첫번째 단계다.
    즉, ‘시나리오’단계.

    우리가 퇴고를 마치고 공개까지 한 글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서 이 글을 도대체 어떻게 영상화하는가.

    1.휘갈겨쓰기 -> 대체

    우선 영상제작의 ‘시나리오’단계를 살펴보자.
    이 단계의 하위 단계 중 첫번째인 ‘휘갈겨쓰기’는
    글을 이미 다 썼기 때문에 생략한다.

    2.시놉시스 -> 수정 후 활용

    그 후 ‘시놉시스’ 단계에서 감정선과 구간, 구간별 플롯을 만들게 되는데, 이 과정도 새롭게 작성하지 않고 글쓰기 할 때 작성한 시놉시스를 일단 가져온다.
    그 후 찬찬히 영상화를 위한 시나리오 작성에 적합한지, 아니면 조금 손봐야할 부분이 있는지 한 번 살펴본다. 그리고 수정이 필요하면 수정을 해서 사용한다.

    3.시나리오

    시나리오는 새로 써야 한다.
    여기에는 그냥 쓴 글에는 없는 여러 가지 사항들이 나름의 레이아웃에 맞게 들어가니까.
    일단 시퀀스와 씬별로 글이 단락처럼 구분되게 되고, 그 안에 장소, 시간, 지문, 인물, 대사 등이 적절하게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영상화를 고려해서 너무 많은 내면묘사보다는 좀 더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 표정, 분위기 등에 집중해 작성해야 한다.

    다만, 감정선 흐름과 구간 등을 차용했던만큼 그 감정의 흐름이 잘 유지되도록 조심히 시나리오를 작성해야 한다.

    4. 그 후

    이제 그 후는 사실상 개별 과정이다.
    영상제작 3단계 중 ‘시나리오’는 사실 철저하게 글을 쓰는 일이기 때문에 글쓰기에서 영상제작으로 이어질 때의 연결파트가 되는 것이다.

    그 후 영상제작을 위해 필요한 콘티 작성은 사전제작 단계에 해당하고, 처음으로 시각화를 위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는 파트다. 이 부분부터는 이제 영상을 제작하기 위한 고유 작업으로 들어가므로 이 이후의 과정에 대해 더 궁금하다면 ‘여기‘를 클릭해서 참고하기 바란다.

    이 글이 작가에서 영상제작자로 전직(?!)하는데 도움이 되어줄 수 있기를.

  • 잔소리하는 놈들이 미친 X들인 이유

    잔소리하는 놈들이 미친 X들인 이유

    잔소리 ㄴㄴ

    난 잔소리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나는 잔소리를 잘 안 듣기 때문이다.

    ‘아니, 안 들으면 싫어할 이유는 뭐냐 ㅋㅋ’
    라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이렇다.

    잔소리하는 애들은,
    잔소리를 안 듣고 말없이 지그시 쳐다만 보고 지나가면.
    화를 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십중팔구는 그렇다.

    고로,
    잔소리하는 X들은 미친 X들이다 ㅋㅋ

    경계

    책 ‘지옥살법’에도 썼지만,
    경계가 중요하다.
    모든 심리상담, 심리분석,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경계’를 명확히 하는거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의 경계를
    명료하게 세우고 자각해야 한다.

    경계를 세우는 원칙은 간단하다.
    그리고 그 결과도 간단하다.
    대략적인 결과의 윤곽은 이렇다.
    나는 내 통제영역 안에 주로 있고,
    나 이외의 타인, 미래, 세상, 그 모든 것들은
    사실 내 통제영역 밖에 주로 있다.
    … 끝이다.

    자 그럼 이 경계의 관점에서 봐보자.
    누구나 다 알지만 모두가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사는
    이 원칙을 알게 되면
    많은 것들이 명료해진다.

    잔소리의 본질

    기본적으로 잔소리의 목적은,
    나의 의견이나 시각,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해서
    상대가 내 의견의 영향을 받아
    내 생각대로 좀 더 변화하거나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이게 잔소리의 목적이다.
    즉, 잔소리는 근본적으로
    내가 아니라 타인을 내 뜻대로 한 번 통제해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시작된다.

    근데 아까 말했듯이,
    이 원대한 포부는 우리의 통제영역 밖에 있는 걸 움직이려고 하는거다.
    상대, 타인은 기본적으로 내 통제영역 밖에 존재한다.
    근데 일단 잔소리는
    내 영역 바깥의 그의 영역을 내 영역으로 점령해보고자 시도하는
    진취적인 기상이 묻어나는 행동이다.

    자, 그러면 이제
    잔소리를 듣는 ‘피잔소리자’의 입장을 봐보자.
    나는 ‘피잔소리자’로서,
    내 영역에 들어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관철시키고 싶어하는 ‘잔소리꾼’의 침략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그를 쫓아내야 하는가.
    이 잔소리의 세계에서는
    실제 전쟁처럼 쫓아내고 물리치고 그런 게 없다.
    그저 그냥 무시하면,
    그는 내 영역으로 들어와 나를 어찌 통제하지 못한다.
    내 목에 쇠고랑을 걸고 힘으로 자기가 원하는 행동을 시키지 않는 이상 ㅋㅋ

    ‘잔소리꾼’에게
    ‘내 영역으로 침범하려고 하지 말아라!!’
    라고 하는 건 어떤가.
    이건 이제
    내가 거꾸로 상대의 통제영역을
    내 의지나 생각대로 통제해보려는
    ‘거꾸로 된 침범’을 의미한다.
    사실 상대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하고,
    어떤 시도를 하는 건
    근본적으로 그의 자유다.
    우리의 자유는
    그의 그 자유를 우리 뜻대로 못하게 억누르는 것까지 포함하진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손쉽게 떠올리는,
    “아니 잔소리 좀 하지마!!”
    라고 말하는 반응은,
    협상과 대화의 시도가 될 순 있으나,
    사실 근본적으로는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행위다. 그가 우리에게 잔소리를 했듯이,
    우리도 그에게 똑같이 잔소리를 하는 셈이다 ㅋㅋ

    그러면 어쩌라고… ㅋㅋ

    잔소리꾼의 잔소리가 휙 날아오면,
    우리는 그저 우리의 통제영역 안에 있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제하면 그뿐이다.
    즉,
    ‘그냥 개가 짖나’
    하고 무시하면 된다.. ㅋㅋ
    이런 상황에서 ‘피잔소리자’는 대개
    상대를 우리 뜻대로 한 번 통제해보려고 하는데,
    그건 잔소리꾼의 잔소리와 비슷한 시도라 볼 수 있다.

    잔소리꾼의 극대노

    자, 이제 그럼 우리는
    우리의 통제영역 안에서 가볍게 잔소리를 무시하고 지나간다고 해보자.

    이제 여기서
    내가 잔소리하는 놈들을 상태 안 좋다고 보는 대목이 등장한다.

    잔소리꾼은
    극대노한다.
    ‘내 잔소리를 귓등으로도 안 듣다니..!’

    이걸 경계의 관점에서 보면,

    1. 잔소리꾼은 내 앞의 상대방을 내 뜻대로 한 번 움직여보려고 잔소리를 던지고,
    2. ‘피잔소리자’는 날아온 잔소리를 그냥 무시하고 내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즉, 내가 어찌 반응할지를 내가 스스로 정한 것이다.
    3. 잔소리꾼은 상대방이 스스로 자기자신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결정한 것에 대해 매우 분노한다.

    자, 들어보니 어떤가.
    잔소리꾼은
    애초에 무례한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나에게 똑같은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자신의 반응방식만을 결정했을 뿐인데
    그거에 다시 극대노하는 것이다.
    ‘날 무시하다니!!’
    이러면서.

    그래서 잔소리하는 놈들은
    거의 태반이 미친 X들이 맞다 ㅋㅋ

    지금 뜨끔하고 있다면,
    아무도 안 볼 때 남몰래 조용히
    본인자신과 한 번 담소를 나눠보길 강하게 권한다.
    삶이 윤택하고 쾌적해지는 과정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 이제 원내신인 하러 가보자.

  • 나의 분노가 암시하는 세가지 사실

    나의 분노가 암시하는 세가지 사실

    나의 화는
    몇가지를 스스로 드러내는데,
    그 중 세가지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이야기해보자.

    첫째, 경계의 착오

    누군가 내게 상해를 입히거나
    생명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의 거의 모든 화는
    아직 명확히 확립되지 않은 경계선을
    드러내는 표식이다.

    삶은 원래 잔혹하다.
    각자는 각자의 자유라 믿는 걸 행사할 뿐이다.
    그 잔인하고 처연한 진실이
    우리 앞에 드러나는 일은
    드물지만 의외로 빈번하다.

    감정이 생존을 위해 진화해왔다곤 하나,
    전쟁터가 아닌 일상에서 우리에게 유익한 건
    자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은 우리를 수렵시절로 돌려놓고
    우리는 불필요한 소모와 제살깎아먹기를
    자동으로 가동시키게 된다 ㅋㅋ

    옳든 옳지 않든
    그게 얼마나 잔인하든
    그것과 무관하게
    각자의 경계는 자기자신으로 한정되어있다.

    둘째, 위협의 출현

    화는,
    그것이 내게 위협이 되었다는 증거다.

    상대가 꼬마아이든,
    젠틀한 지식인이든,
    드라마 속 인물이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화가 났다는 것이고
    그건 결국 무언가가
    우리에게 명백하게 위협이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인간의 감정은
    생존을 위해 진화해온 것이다.
    내 생존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를 진정으로 화나게 하지는 않는다.

    명심해라.
    우리를 화나게 하는 모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내게 위협이 되는 것들이다.
    위협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되면,
    더이상 그것은 우리를 화나게 만들지 못한다.

    셋째, 화를 내지 않는 두가지 경우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두 경우다.
    애초에 나의 위상을 낮추고
    철저하게 상대를 거스르지 않거나,
    일상의 많은 것들이
    내게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거나.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전자는 화를 ‘내지’ 않는 것에 그치지만
    후자는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심리상담 현장에서
    일관적으로 느껴온 건
    사람들은 의외로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을
    혼동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둘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나보다 타인이 너무나 중요해서
    내면에서 화가 나냐 안 나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릴 때가 많다.
    대신 화를 내냐 안 내냐가 늘 핵심이다.
    이건 타인에게 드러나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인 채
    내면에서 화가 나든 안 나든
    일단 화를 내지 않고 친절하게 군다.
    그리고 삶의 어느 순간엔가
    무시해왔던 내면의 화가 터져나오면
    그 때부터 엄한 일(?!)을 하기 시작한다 ㅋㅋ

    이게 전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오랜시간 나를 잘 조각해서
    충분히 강인하고 성숙해진 인간은
    화가 잘 나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내게 위협이 될 일이 적기 때문이다.

    조금 더 와닿는 이해를 위해,
    니체의 인간관을 잠시 이야기해보자.
    인간은,
    낙타 -> 사자 -> 아이
    가 되며 이상적인 인간이 되어간다고 했다.

    묵묵히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군말 한마디 없이 짐을 나르는 낙타,
    그저 내가 지금 기쁘고 즐거운 것에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몰입하며 사는 아이,

    사자를 뺀 이 두가지 단계의 인간이
    각각 화를 내지 않는 두 경우의 전자, 후자다.
    낙타도, 아이도
    화를 내지 않는다.

    기회

    화는,
    기회다.
    나를 이해하고 돌아볼 수 있는 기회.
    오늘 우리가 나눈 세가지 이야기를
    잘 기억해두었다가,
    삶을 윤택하게 조각해나가는 데
    유용하게 써먹어보자.
    이런 게 하나 하나 쌓이면,
    삶은 몰라보게 쾌적해져간다.

  • 영상제작을 위해 필요한 구성

    영상제작을 위해 필요한 구성

    영상을 제작하려면 어떤 구성이 필요할까.
    여기서 영상이란, 아주 짤막한 숏폼의 클립이나 광고영상부터 시작해
    드라마나 영화 등 큰 대형 영상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을 의미한다.

    내 생각은 이렇다.

    크게 세가지 파트가 필요하다.
    글, 영상, 소리.
    이렇게 세가지 파트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글 파트(연출계열)

    글은 언어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걸 상징한다.
    즉, 글은 우리가 표현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 철학, 가치, 의미를
    보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을 담당하는 파트다.

    글 파트에서 필요한 팀은 2개다.
    연출부, 그리고 제작부.

    각 부는 이러한 역할을 맡는다.

    1. 연출부 : 감독, 작가 등이 소속. 주제를 표현하는 연출 총괄
    2. 제작부 : 예산, 인력관리, 일정 관리 등 제작운영 제반사항 총괄

    영상 파트(시각계열)

    두번째로 필요한 파트는 영상 파트다.
    영상은 결국 우리가 제작해서 예술작품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최종 형태다.
    영상은 결국 시각적인 측면의 모든 걸 상징한다.
    따라서 영상 파트에서 필요한 팀은 4개다.

    1. 촬영부 : 촬영감독 휘하 카메라촬영 및 촬영장비 등 현장 촬영 총괄
    2. 미술부 : 미술감독 휘하 배경 등 세트, 소품, 시각적 디자인 총괄, 의상도 담당
    3. 조명부 : 조명감독 휘하 조명 전체 총괄
    4. 편집부 : 컷편집, 색감 및 질감 보정, 시각효과, 자막 등 편집 총괄

    소리 파트(청각계열)

    소리 파트는 청각적인 측면의 모든 걸 상징한다.
    촬영현장에서의 녹음부터, 영상 전반에 깔리는 OST와 효과음 등을 모두 관장한다.
    소리파트에 필요한 팀은 1개다.

    1. 음향부 : 음향감독 휘하 사운드트랙, 모든 촬영녹음 및 사운드 관련 총괄

    이렇게 총 7개의 팀이 필요하다.
    물론 각 팀들은 서로 상호보완적이고 유기적으로 협업을 하며 영상제작을 해나가야 한다.

    앞서 괄호로 표시한 각 파트별 계열을 키워드로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이렇다.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철학을 어떻게 전달할지 근본적인 예술작품의 조각을 구상하는 연출계열에 포함되는 연출부와 제작부.
    촬영, 미술, 조명, CG 등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내는 시각계열에 포함되는 촬영부, 미술부, 조명부, 편집부.
    시각만큼이나 전달하려는 주제를 구현해낼 때 중요한 청각적 요소를 관장하는 청각계열인 음향부.

    P.S) 글을 쓰고 나서 급작스럽게 떠오르는 잡생각

    …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영상을 제작하는 일은 종합예술이 맞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활동들이 다 포섭되는 걸 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내가 망치질이라 부르며 혼자 뚱땅거리기 좋아하는 활동들,
    어릴 때부터 무척이나 좋아라하던 다섯가지 활동은
    서사를 감상하는 것,
    말하는 것,
    무언가를 다시 내 식대로 재구성하는 것,
    작곡,
    운동.
    이렇게 5가지다.

    평생에 걸쳐 내가 참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딱 5개가 전부인데,
    그게 전부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형영상물을 제작하는 일에는 전부 다 제작의 일부과정에 포함된다.
    (뭐 내가 너무 예측가능하고 편협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걸수도 있긴 하다만…)

    … 만약 내가 영화감독을 꿈꾸는 사람이었다고 상상해보면,
    나는 이렇게 이해했을 것이다.

    서사를 감상하는 것은 영화나 좋은 예술작품을 보는 것이고,
    말하는 것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이구나.
    무언가를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건,
    내가 쓴 글을 시나리오로 바꿔서 새로운 세계관의 플롯으로 구현해내고,
    그걸 다시 콘티로 영상화할 수 있게 재구성하는 것이구나.
    작곡은 각 장면에서 나오는 모든 OST와 효과음을 만들어 배치하는거구나.
    운동은..? 아 운동은 안 걸치겠네.

    아무튼 뭔가 쓰고 보니 내가 평생토록 겨우 찾은 내가 사랑하는 활동들이
    영상 제작의 일부로 무조건 끌려들어가는 거 같아서 기분이 미묘했음을 기록해둔다.

  • 영상제작의 3단계

    영상제작의 3단계

    언젠가 나는 글쓰기의 3단계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글이 아니라 영상에 관해,
    영상을 제작할 때의 3단계 과정을 살펴보자.
    전체적인 단계의 흐름은 이렇다.

    시나리오 -> 제작 -> 공개

    1단계. 시나리오

    1단계는 시각화에 들어가기 전
    모든 구상과 영감을 구현하는 글쓰기 과정을 말한다.
    영상을 제작할 때 1단계 과정인 ‘시나리오’단계는
    다시 크게 세 가지 세부단계로 구성된다.

    휘갈겨쓰기 -> 시놉시스 -> 시나리오

    역시 모든 창작의 혼을 잉태하는 건,
    휘갈겨쓰는거다.
    글을 쓰는 과정이므로, 사실 글쓰기의 ‘휘갈겨쓰기’와 같다.
    시놉시스 또한 글쓰기의 시놉시스 단계와 마찬가지다.

    감정선 -> 구간나누기 -> 구간별 주제(플롯구성)

    감정선을 그리고 구간을 나누어 구간별 주제를 잡는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전체적인 플롯을 짠다.

    그러고 나서는 시나리오를 작성한다.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건, 글쓰기에서 초고를 쓰는 것과 같다.
    글쓰기에서 초고를 쓰고 이를 수없이 퇴고하는 과정이 이어진다면,
    영상제작은 일단 시나리오를 쓰고 이걸 시각화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참고로, 영상을 제작하기 전에 별도로 글쓰기 자체만을 위한 글을 쓴다면,
    이 시놉시스 단계까지는 거의 유사하니 글쓰기 시놉시스 단계로 대체해도 된다.
    물론 그 후 플롯을 구성하는 건 아무래도 좀 더 영상에 맞게 짜야하므로
    글쓰기 단계로 대체가 완전히 되진 않겠으나,
    그 전 단계인 시놉시스 작성까지는 글쓰기의 동일단계로 대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2단계. 제작

    ‘제작’단계는 다시 세부적인 세가지 단계로 나뉜다.
    이 단계는 사실 모든 영상을 제작할 때 통용되는 단계구성이다.

    사전제작(Pre-Production) -> 촬영(Production) ->후반작업(Post-Production)

    사전제작 단계에서는 1단계 ‘시나리오’ 단계에서 완성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이제 ‘시각화’ 작업에 들어가는 단계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콘티를 만드는 일이다.
    시나리오는 인물, 배경, 사건, 지문, 대사 등 여러 가지가 담기지만,
    이를 영상화할 때 필요한 세부사항들은 담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시각화에 필요한 세부사항들을 담아 만드는 것이 콘티다.
    (콘티를 짜고 나면, 이를 좀 더 단순화해서 장면 위주로 요약한 스토리보드를 만들기도 한다.
    참고로 서양에서는 보통 ‘스토리보드’라는 단어만 사용한다. 혼용되니 버전이 다를 뿐 같은 개념이라 생각하자.)
    또, 출연하는 인물을 캐스팅해야 한다면 배우를 캐스팅하고, 스탭이 필요하다면 스탭을 구성한다.
    촬영장비와 장소를 선정하고 예산을 고려하여 촬영일정을 짠다.

    촬영단계에서는 콘티(스토리보드 포함)와 촬영일정에 따라 촬영을 한다.

    후반작업 단계에서는 영상을 편집한다.
    영상편집은 크게 세가지 파트로 구성된다.
    영상, 소리, 자막 및 효과.
    즉, 시각, 청각, 기타효과.
    이렇게 세가지 파트라고 이해하면 된다.

    영상 파트에서는 컷편집, 장면전환 및 배치, 색감 및 질감 보정 등을 담당한다.
    소리 파트에서는 촬영 사운드, OST, 효과음 등을 담당한다.
    자막 및 효과 파트에서는 자막 및 여러가지 VFX 등을 담당한다.

    후반작업 단계의 방향성을 한가지 적어두자면,
    영상은 글보다는 훨씬 흐릿한 날씨라고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유튜브 같은 숏폼 위주의 플랫폼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왜냐하면,
    유튜브는
    글이나 영화를 보는 것만큼 유심히 집중해서 감상하는 컨텐츠 플랫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확해야 하고,
    크고 자극적인 것들이 의외로 그리 과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디테일이 달라지더라도 같은 내용을 강조하게 되면
    자칫 단순반복으로 오해하기 쉬운 등 여러 면에서 글과는 차이가 있다.
    시청자는 늘 중간에 이탈할 준비를 하고 있는 수준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걸 고려해서
    좀 더 직관적이고 재밌게, 조금은 과장되게,
    절대 반복되는 것 없이 훨씬 컴팩트하게 만들어지는 방향으로
    편집이 되는 게 필요하다.

    3단계. 공개

    자, 이제 공개단계다.
    이 역시 글쓰기와 유사하게,
    아무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하다.
    세상에, 사람들에게.
    내가 나의 내면에서 끄집어낸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개되는 순간부터,
    이 영상은 이제 내 품을 떠나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다.

    공개의 방식 중 하나로 요즘 내가 생각하는 것은,
    애초에 촬영하는 단계를 아예 스트리밍 생중계를 통해 하는 것도
    꽤나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시간 스트리밍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숨길 수 없는 ‘인간성’을 가진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시대는
    AI가 모든 예술작품을
    상상 이상으로 평균적인 수준으로 빠르게 만들어낼 것이
    자명해보이는 시대다.
    여기서 우리가 AI보다 명백하게 탁월할 수 있는 건
    바로 ‘인간적인 것’이다.
    즉, 인간이어야만 줄 수 있는 것.
    실시간 스트리밍 말고 모든 비실시간 작품들은
    점점 더 빠르게 AI도 제작할 수 있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여러 가지 형태로 가공해서 다른 버전들을 예고편이나 클립 등으로
    공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요즘은 초단위의 시대다.
    다른 의미에서 초단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초단위에 결정난다.
    이걸 계속 볼지 말지, 이게 재밌는지 아닌지, 같은 것들 말이다.
    숏폼 영상은 오늘날의 대세다.
    사람들은 긴 영상을 끈기있게 보는 일이 낯설고 힘들다. 점점 더.
    그러므로,
    완성된 영상에서 좀 더 중요하고 흥미로운 부분을
    숏폼 형태로 잘라서 공개하는 건, 퍽 괜찮은 일이 된다.

  • 글쓰기와 작곡의 3단계 비교분석

    글쓰기와 작곡의 3단계 비교분석

    글쓰기와 작곡의 3단계

    모든 창작은 세 단계로 실현된다.
    잉태 -> 조각 -> 공개

    이에 따라,
    글쓰기라는 창작활동도 크게 3단계로 이루어진다.
    집필 -> 퇴고 -> 공개

    작곡이라는 창작활동 역시 크게 3단계로 구성된다.
    작곡 -> 편곡 -> 공개

    왜 글은 다 쓰고 나서 이걸 수정하는 일이 두번째 단계인데,
    작곡은 두번째 단계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걸 완성해가는 활동인가.

    이건 보는 시각의 차이다.
    사실 글만 집필에서 끝난 게 아니라,
    작곡도 첫번째 단계에서 작곡이 거의 끝난 상황이라 봐도 무방하다.
    퇴고의 수정하고 고치는 정도는,
    편곡에서 곡이 변화하는 정도와 비슷하다.
    퇴고는 여전히 많은 걸 다듬고 손보는 과정이고,
    그런 의미에서 편곡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글의 초고는 사실 내 감정과 가치의 흐름을 쓰는 것이지,
    그에 맞는 여러 형태의 논거들은 퇴고에서 붙여도 된다.
    곡 또한 첫번째 단계인 ‘작곡’에서 내 감정과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그에 맞는 여러 가지 악기나 효과음들은 편곡에서 붙이면 된다.

    첫번째 단계의 세부단계

    글쓰기의 첫번째 단계는 ‘집필’이고,
    작곡의 첫번째 단계는 ‘작곡’이다.

    ‘집필’의 세부단계는
    휘갈겨쓰기 -> 시놉시스 -> 초고작성(ft.1차퇴고)
    이고,
    ‘작곡’의 세부단계는
    즉흥선율(=휘갈) -> 시놉시스 -> 작사,작곡
    이다.
    (작곡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반복되나,
    이건 알잘딱해서 층위를 이해하도록 하자.)

    글쓰기의 시놉시스는
    감정선 -> 구간나누기 -> 구간별 화두 설정(목차)

    작곡의 시놉시스는
    감정선 -> 구간나누기 -> 구간별 테마 설정(송폼)

    글쓰기의 초고작성은
    앞서 구간별 화두를 통해 글 전체의 목차를 잡은 대로
    그 뼈대에 맞게 글을 작성하는 일이다.
    각 파트별 글을 쓰고 여러 파트간 흐름이 자연스럽도록
    글을 쓸 때 감정의 흐름을 잘 유지하면서 쓰도록 주의한다.

    작곡의 ‘작사,작곡’은
    역시 앞서 구간별 테마를 설정해서 잡은 송폼대로
    그 뼈대에 맞게 곡과 가사를 쓰는 일이다.
    BPM, 코드진행, 리듬, 멜로디 등을 전반적으로 다듬어가며
    곡의 감정선이 유지되도록 가사와 탑라인을 만든다.

    두번째 단계의 세부단계

    글쓰기의 두번째 단계는 ‘퇴고’이고,
    작곡의 두번째 단계는 ‘편곡’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실상 초고는 Shit이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글을 깎고 조각해나가는 단계는 퇴고단계다.

    작곡도 마찬가지다.
    물론 작사, 작곡을 마쳐두었으나,
    편곡을 하면서 곡이 자아내는 최종적인 느낌을 완결짓는다.
    실제로 곡을 다듬어 원석 속의 완결된 예술작품을 조각해내는 건
    편곡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글쓰기의 퇴고는
    내가 쓴 초고의 전체 흐름을 다시 한 번 검토하고
    그 과정에서 부자연스러운 문장을 다듬고
    불필요한 부분을 빼고 좋은 논거를 추가하는 작업 등을 한다.

    작곡의 편곡은
    작곡한 곡의 전체적인 흐름을 다시 한 번 검토하고
    그 과정에서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빼거나
    더 좋은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 포인트를 개선해나간다.
    그리고 각 파트별 감정에 맞는 악기들을 음역대별로
    차곡차곡 하나씩 쌓아나간다.

    세번째 단계

    글쓰기나 작곡이나 세번째 단계는 ‘공개’다.
    좋은 시기에, 좋은 대상에게, 좋은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의 작품을 공개하는 것.

    여기까지가 글쓰기와 작곡의 3단계를 비교분석해본 것이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일에는 분명 오묘한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모르지만 아는 척 하는 자와 알지만 티내지 않는 자의 차이

    모르지만 아는 척 하는 자와 알지만 티내지 않는 자의 차이

    둘의 차이

    모르지만 아는 척 하는 자.
    알지만 굳이 티내지 않는 자.

    이 두사람 간의 가장 큰 차이는 뭘까.
    체면?
    사회적 지위?
    영향력?
    인품?
    평판?
    능력?
    부?
    명예?

    과연 이 두사람의 삶은
    어떤 측면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날까.
    이 두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불안이다.
    진짜 나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

    학벌,
    연봉,
    번듯한 직장,
    외모,
    서사,
    감정,
    태도,
    그 어느것에서라도
    그럴싸한 척을 하거나 연기를 해야하는 순간,
    인간은 불안해진다.
    더이상 직위가 박힌 명함이 없는
    날 것 그대로의 나,
    갑옷을 벗어버린 맨몸뚱아리의 나를
    과연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그렇게 배우가 된다

    이 불안은 인간을 옥죈다.
    그리고 대개 이건
    우리가 배우가 아님에도
    배우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가장 근원적인 계기
    가 된다.

    불안한데 하나도 불안하지 않은 척,
    질투가 나는데 전혀 질투나지 않는 척,
    모르는데 아는 척,
    겁나고 두려운데 겁먹지 않은 척,
    주눅이 드는데 주눅들지 않은 척,
    화가 치미는데 화나지 않은 척,
    안 착한데 착한 척,
    친절하지 않은데 친절한 척,
    안 멋진데 멋진 척,
    약한데 약하지 않은 척,
    가지지 못했는데 가진 척,
    좋아하는데 좋아하지 않는 척,
    싫어하는데 싫지 않은 척,
    못 하는데 잘하는 척,

    이거 뭐… ㅋㅋ
    다 쓰려면 밤샐 거 같다.

    사는 게 피곤하고 지치는 한가지 이유

    하고싶은 말은,
    우리가 사는 게 지치고 피곤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자꾸 ‘척’을 해야돼서다.

    ‘척’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와
    삶이 쾌활하고 청량한 정도는
    정확히 비례한다.

    왜 그럼 우리는
    그렇게 사는 내내 척척척 해대느냐.
    하다하다 척하지 않으면,
    사회성이 없니,
    개념이 없니
    그리 좋으면 지 혼자만 ‘척’하면 되지
    나는 하는데
    옆의 사람은 척 안 한다고
    ㅈㄹ을 떠는 성가신 세상이 되었느냐.

    … 그건 옥살법 Lv14와 Lv15에 걸쳐서
    이해하기 쉽게 써해두었다.
    (… 근데 아직 책을 쓰는 중이라는 게 함정…)

    비밀을 말하자면,
    ‘척’하지 않아도 된다.
    안 믿기겠지만,
    진짜다.

    의아하다면,
    오늘 하루 내가 조금이라도
    ~척 한 게 있다면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타고타고 올라가보기 바란다.

    느낌이 올 것이다.

    P.S) 제목의 저 두가지 부류의 인간,
    즉 몰라도 아는 ‘척’하는 인간과
    알지만 티내지 않는 인간은
    결국 전혀 다른 존재로 살다 간다.
    전자는 ‘피해자’로,
    후자는 ‘조각가’로.

    조각가로 살자.
    특별한 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지금 ‘옥살법’을 집필 중인 나의 목적은
    단지 그것 하나다.

    힘내자.

  • 아이의 소통방식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아이의 소통방식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유전

    부모에게서 자식이 물려받아
    무언가가 대를 이어 내려오는 걸 말한다.

    DNA와 생물학이 곁들여지다보니
    그리 재밌다고 환영받는 주제는 아니다만,
    다행히 지금 말할 건 그런 건 아니다.

    내가 지금 말하려는 이야기는,
    그저 마음에 관한 것이니까.

    소통방식

    소통하는 방식, 스타일은
    유전된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저게 다다.

    당신이
    친구,
    동료,
    연인,
    선생님,
    가족
    주위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아주 높은 확률로 유전된다.
    적어도 유전된 후 변형된다.

    여기서 소통이라는 건,
    타인과의 소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나자신과의 소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기자신에게 유독 엄격한 사람

    뭐 그런 걸 생각해보자.

    당신이 당신 스스로에 대해
    꽤 엄격하고 가혹하게 구는
    스타일이라면.

    왜 그런걸까.
    대부분은 내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문제는 왜 그리 나에게
    유독 기대치가 높냐는 것이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존재하지만,
    자기자신이 힘들어하는 걸
    그다지 가엾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에 도사리는 이유와 절박함을
    하나의 일률적인 관점에서 단정지을 순 없다.
    누군가는
    내가 내 가족을 이끌어나가야만 하고,
    이 빚을 나라도 꼭 갚아야만 하고,
    이 병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아이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고 엄하게 구는 건,
    대개 내가 힘들고 지치는 게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좀 길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기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잘 모른다.
    자신이 힘들고 외롭고 지칠 때,
    스스로를 위로해주지는 않는다.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이 힘들어하면
    잘 다독여주고 이야기도 들어주면서,
    내가 두렵고 불안해서 외치는 비명은
    들은 채 만 채 경청하지 않는다.

    요즘 사회가 각박하다면서
    길가에 칼맞고 피흘리면 보고서도
    못본 척하고 지나가지 않나.
    그거 사실 예전이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50년 전에도, 200년전에도,
    인간은 자신에게 위해가 될 거 같은 일은
    그게 어떤 일이든 어지간해선 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걸 자기자신에게도
    그렇게 한다는거다.
    길가에 피흘리며 쓰러져있는 나를
    내가 본둥 만둥 못본 척 지나가버린다.

    소통방식의 유전

    이런 스스로에게 유독 엄격하고 가혹한
    사람들은 세상에 매우 많다.
    그 원인도 여러 가지,
    양상도 여러 가지이나,
    나는 지금
    자기자신의 나약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다듬어주지 못하는 태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 주제는 그거니까..? ㅋㅋ)

    자.
    이런 소통의 방식이나 태도는,
    유전된다.
    자기자신과의 소통방식이 저러하다면,
    이건 유전이 된다.

    당신이 당신의 아이를 키운다면,
    당신의 아이도 그 방식을 물려받는다.
    아이는 세상과 처음 마주하면서부터
    부모의 소통방식을
    말하는 법, 말을 듣는 법이라 느끼며
    그걸 그대로 내재화한다.

    이럴 때 대개 던지는
    ‘진절머리가 나서 난 부모랑 전혀
    반대인데요..? ‘
    라는 말은,
    유전을 운명으로 잘못 이해해서 하는 이야기다.
    부모가 대장암이었다고
    자식이 대장암에 걸리지 않고,
    부모가 서울대 교수라고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는 건 아니다.

    … 하지만 그럴 소지는 다분하다.
    부모가 스스로에게 가혹하고
    자기자신의 연약한 면을 감싸안을 줄 모르면,
    자식도
    자기자신이 살다가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스스로 자신에게 위로를 해줄 줄 모를
    소지가 다분하다.

    유전은 반복된다

    개인상담에서 내담자들이 종종 묻는 질문 중 하나는,
    바로 이거다.

    “아니, 저랑 부모님 관계가 제 고민이 아닌데,
    이거에 대한 것도 이리 자세히 이야기하나요..?”

    한 인간에게
    부모와의 관계와 그 안에서의 소통방식은
    그 인간이 세상, 타인, 자신과 소통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뿌리가 되고,
    사실 아주 빈번하게 거의 유사한 형태로 재연된다.

    이건 후기정신분석이론 중 하나인
    대상관계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고 명확한 개념이다.
    (자세한 설명은 일단 오늘은 제끼자.)

    그러면 이제 느낌이 팍, 올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스스로에게 가혹하고
    힘든 상황에 처해 주저앉아있는 자기자신을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가엾어해주지 못한다면,
    이건 어디서 왔을까.

    그렇다.
    당신의 부모에게서 왔을 확률이,
    결코 낮지 않다.
    아까도 말했지만 운명이라는 게 아니다.
    부모님이 심한 당뇨병을 앓았다고 해서,
    아이가 무조건 당뇨병에 걸리진 않는다.
    그런데 그럴 가능성은 높다.

    그래서 심리상담을 할 때,
    나는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해서
    내담자와 부모님과의 관계를,
    나의 가설에 비추어볼 때, 필요하다 생각되면
    조부모님과 부모님과의 관계를 묻기도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프랑스 시인 아그리파 도비녜의 말이다.

    “악의 어머니는 지식일 수 없고,
    정의는 무지함의 딸일 수 없다.”

    아는 게 힘이다.
    이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건,
    우리가 도저히 그걸 감내할 힘이 없다고 생각될 때
    합리적일 수 있는 말이다.
    무언가를 아는 것만큼,
    근본적인 해결의 뿌리가 되는 건 없다.

    소통방식은 유전된다는 걸 이해하면,
    당신은 당신의 아이에게
    좀 더 좋은 부모로서 현명한 양육을 해줄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의 부모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그들도 아마
    그의 부모로부터 유전받은 소통방식으로
    당신을 키웠을테니까.)
    당신 스스로에게 좀 더 다정할 수 있는
    실마리가 떠오를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 글이
    당신이 누군가(자기 포함)를 사랑하며 사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어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며 글을 마친다.

  • 글쓰기의 3단계

    글쓰기의 3단계

    과거에 한 번 창작의 3단계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이제 글을 쓰는 일에 대해 살펴보자.

    글을 쓰는 일 또한
    모든 창작이 그렇듯이 3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1단계 : 집필

    1단계는 다시 세 가지 소단계로 나뉜다.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집필 = 휘갈겨쓰기 -> 시놉시스 -> 초고&1차 퇴고

    휘갈겨쓰기

    무언가 내 감정의 요동침에 기반해
    휘갈겨쓰고 싶은 것을 써내려가는 걸 말한다.
    말 그대로
    내 영혼, 마음, 생각, 감정에서 터져나오는 것들을
    일필휘지로 휘갈겨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의 내면에 깃든 예술성과 잠재력, 정체성과 개성이
    있는 그대로 쏟아져나와 담긴다.

    시놉시스

    시놉시스 작성은
    글 전체의 흐름을 그려내는 과정이다.
    여기서 흐름이란,
    다분히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기승전결을 의미한다.

    우선 곡을 쓸 때처럼,
    글의 목적과 이유만 딱 방향을 정한 채,
    전체적인 감정의 강도가 어떤 흐름으로 흘러갈지를
    먼저 실선으로 자유롭게 그려본다.
    연필을 딱 종이에 찍고서,
    떼지 않고 하나의 선으로 주욱 그리고 끝낸다.

    그러고 나서는, 세로줄로 구간을 나눈다.
    구간을 나누는 방식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작가들이 이론을 성립해두었다.
    찾아보기 구찮으면
    3막 구성으로 가도 좋다.
    서론, 본론, 결론, 이렇게.
    기승전결, 이렇게 4막 구성으로 가도 좋겠다.
    ‘하몬 써클’처럼 8막 구성으로 가도 좋다.

    이제는,
    각 구간에 생각하고 있는 단어나 글감을 붙여본다.
    단어라는 건
    결국 각 구간을 하나의 시퀀스로 볼 때, 그 시퀀스의 주제다.
    이에 더해, 글 전체에서 그 구간이 차지하는 단계다.
    소제목으로 봐도 무방하다.
    글감이란, 말 그대로 주제 전달에 쓰이는 소재다.
    (브런치 글감 관련 글 링크)

    이 정도면 글 전체의 개략적인 뼈대가 갖춰진 것이다.
    여기까지가 시놉시스다.

    초고&1차퇴고

    시놉시스 작성이 끝나면,
    이걸 참고하며 초고를 쓴다.
    시놉에 적힌 감정선의 흐름과 구성에 맞게,
    그에 해당하는 주제와 글감을 고려해서
    글을 써내려가는 걸 의미한다.

    그 다음 1차 퇴고를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1차 퇴고는 초고를 다 쓰고 난 즉시 바로 한다는거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초고를 휘갈기며 뿜어져나오던
    감정선과 영적인 결, 에너지의 여운이 다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걸 간직한 채 글을 다듬는 것이
    그 나름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퇴고이니만큼,
    어느 정도 큰 흐름 차원에서의 다듬는 일이 가능해지므로
    글은 분명히 한결 정갈해질 수 있을 것이다.
    1차 퇴고에서 가장 중요한 건,
    불필요하고 집중도를 해치는 부분들을 삭제하는 일이다.

    2단계 : 퇴고

    진짜 퇴고의 본체는 2차 퇴고다.
    퇴고는 이제 말 그대로 내가 잉태해낸 원석,
    즉 간단한 1차 퇴고가 끝난 초고를
    깎고 다듬고 조각해나가는 일이다.
    헤밍웨이가 모든 초고는 shit이라고 했듯이,
    초고는 그 자체의 매력과 에너지가 분명 있음에도
    분명 아직 예술작품으로 완성되진 못한 상태다.
    이 날 것의 원석을,
    진정한 예술작품으로 완성시켜나가는 일이
    글쓰기에서는 바로 이 퇴고다.

    퇴고는
    초고를 작성한 후 일정시간이 지난 후에 하는 게 좋다.
    나는 보통 하루 뒤에 하는 편이다.
    만약 그날 당장 2차 퇴고를 해야한다면,
    1차 퇴고와 2차 퇴고 사이에 여백을 둬야 한다.
    그 사이에 낮잠을 자거나 다른 일을 하는 등.
    머리를 비워낸 후 다시 테이스팅을 할 수 있도록
    중간에 어떤 일정을 끼워두는 편이다.

    3단계 : 공개

    공개 단계에서는,
    퇴고가 끝난 글을 세상에 공개한다.
    나의 경우에는,
    일단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퇴고를 마친 나의 글을 공개하고 있다.

    이 단계를 거치고 나면,
    사실상 이제 글은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물론 요즘이야 쉽게 삭제도 하고 수정도 하고,
    번복도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일단 공개를 하고 나면,
    원칙적으로 그 글은 나의 손을 떠나게 된다.
    그걸 이미 읽어버린 사람들과,
    고이 자신의 폰이나 pc에 간직한 사람들과,
    마음에 나의 문장이나 단어 하나를 기억한 사람들.

    그들에게 나의 글은 더이상 쉽게 수정하고 삭제할
    그런 류의 무언가가 아니다.
    이제 그 글은 그 글자체로서 하나의 존재가 된다.

    공개를 할 때는,
    여러 가지 형태로 공개를 할 수 있다.
    가령, 긴 글을 좀 더 간명하게 축약해서
    짧은 글로 요약해서 SNS나 커뮤니티에 공개할 수 있다.

    특정 일부분을 발췌해서
    이 부분이 와닿을거라 짐작되는 사람들에게
    그 부분만을 제시할 수도 있다.

    글 이외의 시각적인 요소를 더해 공개할수도 있을 것이다.
    글을 뼈대로 아예 영상이나 웹툰을 제작하는 일이,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은 시대가 아닌가.
    꼭 거창하지 않더라도,
    나의 글에 맞는 점 하나, 모형 하나, 붓질 하나도
    충분히 좋은 공개방식이 될 수 있다.

    용기있게 공개하되,
    나의 작품이니 다른 방식으로 글을 공개해도 된다는 걸
    잘 이해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가,
    글쓰기의 3단계다.

  • 투사적 동일시의 명확한 의미

    투사적 동일시의 명확한 의미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는
    정신분석학이나 대상관계이론 등의 책에서
    참 많이 나오는 개념이다.
    하지만 그 의미가 불명확하다.
    내가 상담심리대학원에서 듣던 수업들마다,
    심지어 똑같은 대상관계이론에 대한 수업들 간에도,
    쓰는 교재에 따라 투사적 동일시의 개념은 조금씩 달랐다.
    시험기간마다 사람들 각자 이해한 정의가 조금씩 다 달랐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책, 저 책 다르고 이 수업, 저 수업 다르다는건
    충분하게 합의된 명료한 정의가 아직 정립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의미겠으나,
    그럼에도 늘 기준이라는 건 필요하니
    그것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해보고 넘어가려고 한다.

    투사란 무엇인가.

    투사(Projection)란,
    도저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 감정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나의 감정이라 인정하기 어려운 걸
    타인에게 던지고,
    그 감정이 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짐작되겠지만,
    이건 자각되지 않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다.

    동일시, 투사적 동일시란 무엇인가.

    동일시(Identification)란,
    외부대상의 일부를 나의 내면으로 가져와 내 것으로 여기는 행위를 의미한다.
    방어기제의 한 종류이자, 내면화의 한 형태다.

    자연스럽게 투사적 동일시란,
    위의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감정을 상대방에게 투사하고,
    다시 그 투사된 감정이나 그를 느끼는 상대방을
    동일시하는 방어기제다.

    투사적 동일시 개념은 사실 좀 혼란스럽다.

    이제 여기서 공부하는 입장에서도,
    그냥 교양으로 책을 보거나 강연을 듣는 입장에서도,
    혼동이 오기 시작한다.
    투사는 사실 헷갈릴 부분이 없다.
    원래 투사의 의미와 다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동일시는 다르다.
    동일시는 내면화의 세가지 분류 중
    가장 성숙하고 건강한 방어기제로 꼽힌다.
    본받을만하거나 중요한 대상의 긍정적인 특성을
    자신의 내면이나 정체성의 일부로 가져오는 걸
    동일시라고 설명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투사적 동일시는,
    그리 성숙한 방어기제로 평가되지도 않고,
    긍정적인 것으로 설명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 동일시가 헷갈린다.
    뭘 동일시한다는 말인가.
    책마다, 사례마다 다 다르다.

    투사적 동일시에서 동일시의 첫번째 의미

    투사적 동일시에서의 ‘동일시’는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번째 의미를 살펴보면,
    투사적 동일시에서의 동일시는
    감정을 투사하는 나(이하 ‘투사자’)의 감정을
    투사받은 상대방(이하 ‘피투사자’)이
    투사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동일시를 말한다.
    즉, 피투사자가 투사자 때문에 느끼는 투사된 감정을
    투사자가 다시 내 것으로 동일시한다는 의미다.

    이쯤되면 더 헷갈린다.
    투사자라는 놈은, 도대체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가.
    그냥 지 감정인데 지가 느끼면 되지.
    이런 욕이 절로 나올 수도 있다.
    이건 좀 이따 이야기해보고 일단 개념만 짚고 넘어가자.

    동일시의 두번째 의미

    동일시의 두번째 의미는,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걸 의미한다.
    즉,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이 내 것이라고 여기고
    경험하게 되는 내사(Introjection)와 유사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투사적 동일시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아무래도 첫번째 의미가 좀 더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투사적 동일시에서의 동일시는
    이 피투사자의 내사를 ‘동일시’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므로 이 단어가 가지는 두번째 의미도
    정확하게 이해해두는 것이 도움이 된다.

    러프하게 정리하면,
    부차적 의미라 볼 수 있는 두번째 의미는,
    피투사자의 ‘내사(Introjection)’다.

    투사적 동일시에서 ‘통제’의 의미

    대상관계이론이나 정신분석 전문서적들을 보면,
    투사적 동일시와 관련해서 이런 표현들이 나온다.

    ” ~ 투사한 후 그 감정을 통제하려 한다.”
    ” ~ 간접적으로 관리하려 한다.”
    ” ~ 조종하려 한다.”

    뭐 이런 뉘앙스들의 표현들이 서술된다.
    아니, 동일시면 동일시지 뭘 통제하고 조종한다는거야.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 ‘통제’에 대한 의미도 크게 두가지로 이해하면 된다.

    첫번째 의미.
    투사자가 감정을 투사한 후
    그 감정을 느끼는 피투사자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정확히는, 투사된 감정에 대한 피투사자의 반응을
    통제하려는 시도다.
    이는 자기가 도저히 처리하지 못해서 뱉어버린 그 감정을
    피투사자를 통해서라도 처리해내보려는 시도다.

    두번째 의미.
    투사자가 견디지 못하고 투사해버린 감정 그 자체를 피투사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통제하려는 시도다.

    즉, 첫번째 의미는 피투사자의 감정에 대한 반응이,
    두번째 의미는 투사한 감정 그 자체가,
    ‘통제의 대상’이 된다.

    이걸 좀 구분해서 이해하고 있으면,
    여러 서적에서 나오는 관리, 통제, 다루는 일, 을
    이해하며 읽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첫번째든, 두번째든, 결국 통제의 취지는 똑같다.
    자신이 못견디고 뱉어낸 감정을 타인이라는 완충지대를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통제하고 처리해내고 싶은거다.

    간접적으로 다룬다는 개념의 구현

    간접적이라는 건,
    투사자가 직접이 아니라 피투사자를 통한다는 걸
    의미하는 표현이다.
    그러면 간접적으로 ‘다룬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구현되는가.

    여러 서적의 여러 사례들을 보면,
    대강 훑어도 딱 드는 생각이 일관성이 없다는거다.
    나는 특히 초창기에 여러 책들을 보며
    너무 ‘막 갖다붙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ㅋㅋ
    물론 모르고 그리 함부로 생각했던 것도 있고,
    꽤 공부하고 나서도 그런 느낌을 완전히 지울 순 없으나… ㅋㅋ

    간접적으로 다루고 관리한다, 통제한다, 처리한다.
    이런 류의 표현들은 두가지 형태로 삶에서 구현된다.
    즉, 사례에서 두가지 양상으로 드러난다는 의미다.

    첫번째 양상은,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을 경험하고 알아서 처리하는 모습을,
    투사자는 그저 지켜본다.

    이것만으로도 투사자는 어느 정도 자신이 그 감정을 간접적으로긴 하지만 처리하고 소화해낸다고 느낀다.
    이게 바로 위에서 말한,
    ‘도대체 왜 이런 번잡한 짓을 하는지’에 대한 첫번째 대답이다.
    애초에 투사자는 이 감정이 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조차 할 수 없지 않았나.
    그에 비하면 단지 지켜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름 장족의 발전 아닌가.

    두번째 양상은,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에 특정 행동이나 특정 반응으로 대응하도록
    투사자가 피투사자를 유도하거나 조종함으로써,
    자신이 못견디고 뱉어버린 그 감정을 ‘제대로 한 번’ 통제하고 처리해본다는 식.
    이건 첫번째 양상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느낌이다.

    대학원 교재에서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

    자, 여기까지면 이제 투사적 동일시를 이해할 때,
    혹은 관련 전문서적들을 볼 때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부족함이 없다는 건,
    적힌 걸 이해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안 적혀있으나 궁금한 걸 해결하는 건 각자의 몫이다.

    궁금하지 않나.
    자기가 감당 못해서 그 감정을 남에게 던졌는데,
    어떻게든 다시 처리하려는 예상밖의 용감함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분명 투사자는,
    자신이 기대한 방향으로
    피투사자가 그 감정에 반응하거나 행동하도록 하려는
    무의식적인 동기를 가진다.

    그렇다면 이 무의식적인 동기는 어디서 오는가.
    그건 미해결된 감정이나 과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장기적으로 인간의 생존에 유리하다는 사실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지금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는,
    무조건 어렵고 실패한 것들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오랜 진화과정에서 인간은
    내가 아무리 도망쳐도 다시 마주해야 하는
    여러 가지 미해결된 과제들에 죽임을 당해왔을 것이다.
    삶은 다분히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인간은 실패한 과제로부터 어떻게든 도망가려는 동시에
    미해결된 감정이나 문제에 다시 달려들어
    제대로 통제하고 해결해보려는 타고난 성향을 지닌다.
    그래서 내가 미처 어쩌지 못하고 타인에게 투사한 감정도
    그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통제하고 처리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당신의 쿨한 팀장이 자꾸 서성이는 이유

    자.
    이렇게만 말하고 끝나면 기억에 오래 남지 않을 수 있으니,
    흔히 일어나는 직장에서의 상황으로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지금 회사 A팀의 팀원이다.
    팀에 사장에게 직접 보고해야 하는 중요 업무가 떨어졌다.
    팀장은 평소에도 쿨한 성격의 소유자다.
    사장보고 사안이 떨어지자,
    팀장은 팀원인 나에게 와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좀 급한 일이긴 하나 뭐 별 거 아니니까,
    그냥 우린 하라는대로 해서 보고하면되니,
    괜히 긴장할 거 없단다.
    묘하게 좀 상기된듯한 느낌도 언뜻언뜻 보이지만,
    아무튼 마음 편하게 가지라니 마음 편하게 가지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근데 내가 보고서 쓰는데 자꾸 뒤에서,
    팀장이 서성거리며 왔다갔다 한다.
    초안을 보여줬더니 단어 하나를 두고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계속 고민을 거듭한다.
    보고서가 20장인데.
    보고를 언제까지는 해야 될 거 같다며,
    자꾸 데드라인을 언급하며 얼마나 작성됐는지 확인한다.

    뭘까.
    팀장은 속으로 초조하지만 겉으로 아닌 척 한걸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닌 경우도 허다하게 많다.

    팀장은 사실 진심으로 초조하고 불안하다.
    사장 보고인데 갑작스럽게 생겨서 미처 준비도 못해서
    걱정이 되고 보고갈 생각만 해도 두렵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나는 평소에도 팀원들이 담력도 쎄고 남자다워서
    멋있다고, 나도 본받고 싶다고 칭송받는 담대한 팀장이다.
    그런 내가 이런 급작스런 보고 하나로 덜덜 떨다니.
    내가 초짜도 아니고 회사생활 20년의 베테랑인데.

    그래서 자신의 속마음,
    즉 불안함과 초조함, 두려움 따위의 감정들을
    남에게 투사한다.
    보고서를 작성 중인 담당팀원에게.
    즉, 나에게 투사하는거다. 팀장이 자신의 감정을.

    당신은 팀장이 자꾸 괜찮다 괜찮다 다독이고
    너무 쫄지 마라 그러고, 떨지 말라 그러니까.
    원래는 별 생각없다가 점점 초조해진다.
    울지 마라 다독이니 더 눈물날 거 같은 아이가 된 기분이다.

    여기서 지금 팀장은
    자신이 소화하지 못하는 자기 불안을 팀원인 나에게 던진 뒤
    내가 그 감정을 내것으로 여기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팀장은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그 불안함에
    반응하는 당신의 대응이나 행동을 통제하려고 한다.
    ‘그 불안함에 너무 휩쓸리지마.
    너무 그 감정에 압도되지 마.
    별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팀장은 팀원인 나를 통해
    자신이 못견디고 내게 투사한 감정을 간접적으로라도
    통제하고 처리하려고 한다.
    물론 팀장은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채 은연 중에 이런 식의 행동을 보이는거지 의도를 갖고 그러는 건 아니다.
    자기도 자기가 그러는지 모르고, 왜 그러는지도 모른다.

    이게 투사적 동일시가 실제로 구현되는 모습이다.
    이런 일은 일상에서 비일비재하다.
    투사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만약 눈에 보인다면 무슨 무선 와이파이 기기들이 수백개가 주위에 넘쳐나듯이 아주 장관일거다.

    이것이,
    우리가 정신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힘을 길러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기 위해서 타인을 은연 중에 이용하려는 존재니까.
    이용당하느라 소중한 감정과 시간이 소진되면 안 되지 않나.
    (이에 관한 레벨업은, X살법 Lv15를 통해 시작하면 된다.)

  • 인간은, 달면 삼키고 쓰면 ‘투사’한다

    인간은, 달면 삼키고 쓰면 ‘투사’한다

    투사

    투사.
    투사(Projection)란,
    ‘자신의 것이라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을 타인에게 전가해서 그 사람의 감정이라고 여기는 행동’
    을 의미한다.
    이건 마치 아기가 달콤한 건 삼키지만
    쓰거나 맛없는 건 퉤, 하고 뱉어버리는 것과 유사하다.
    내 안에 들어오기 거북한 건, 바깥으로 뱉어버리는거다.

    투사를 이렇게 한 줄로 딱 정리하면. 사실 간단해보인다.
    하지만 이 간단해보이는 단어 하나에도, 꽤나 그럴듯한 함의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은, 딱 말그대로 간단한 것만 생각해본다.
    단순하게 내뱉는 것 그 자체 하나만 딱 보자.
    이것만으로도 주위 세상과 타인을 이해하는 눈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니.

    사람들은 늘 타인을 욕한다.

    일상에서,
    뒷담화나 험담이 없는 자리가 얼마나 있을까.
    그 자리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투덜거림이나 당했음을 빙자한
    비난과 조롱이 난무한다.

    하지만 자신도 그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이러한 모습이 미성숙하고 최악이라며
    누군가를 욕하는 그 사람도,
    막상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똑같이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령,
    친구 누구누구는 늘 자기 말만 맞다고 주장하고
    남의 이야기는 경청도 하지 않고 무시한다며
    실컷 욕을 하고 있는 A를 상상해보자.
    그 A는 그런데 그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그렇게 한다.

    ….왜 그런걸까.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늘 나오는 진리의 단어가 있다.
    내로남불.
    내로남불이 판치는 시대에, 역시 그놈도 그런거 아니냐!
    내로남불이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결과론적으로는 맞으나,
    그 단어에 뉘앙스적으로 깔린 ‘악의’는 틀렸다.

    늘 내가 주장하는 거지만,
    인간은 의외로 의도해서 내로남불하는 게 어려운 존재다.
    내로남불러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법학에서 말하는 ‘악의’, 즉 알고도 그러는 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투사의 힘이 여기서 드러난다.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트는,
    초창기에 투사를 비롯한 방어들이 분열을 위해 태어난 것 같다, 는 말을 한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투사의 핵심 중 하나는, 무의식적이라는 데 있다.
    투사를 한 사람은 자신이 투사한 걸 자각하지 못한다.

    무슨 이야기냐면,
    ‘XYZ’라는 단점을 헐뜯고 남을 욕하는 사람이
    자신도 똑같이 ‘XYZ’를 가지고 드러낼 때는.
    그 사람은 자신의 XYZ를 자기 것이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안에 있던 걸 바깥으로 뱉어버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떠올려보라.
    분명히 이러이러한 문제가 너무 과도한 거 같아서 조심스럽게 그것을 이야기했을 때,
    상대방이 연인이었든 친구였든 동료였든 뭐라고 했었는지.
    내가 뭘? 내가 언제? 왜 없는 말 지어내?
    속에 열불이 터질 수도 있고
    정말 우리가 잘못 본 걸수도 있지만,
    핵심은 상대방의 저 반응이
    알고도 잡아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저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상대방이 저렇게 반응할 때, 너무 진심인 거 같아서 의아할 때가 있지 않았나?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있을텐데.

    세상에는 의외로 내로남불러들이 적다.
    그는 그저
    도저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 못나고 최악이라 느껴지는 것들을
    자각하지 못한 채 남에게 투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반복된다.

    세상에 난무하는 험담과 비난으로 다시 돌아와보자.
    인간이 그렇게 ‘투사’라는 걸 하는 존재라면,
    내 눈에 자꾸 보이는 짜증나는 무언가가
    어쩌면 내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봐야 한다.

    이쯤 오면 이제,
    우리는 짜증이 나고 불쾌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그렇게 혐오하고 최악이라 여기는 그것이,
    그래서 그런 모습만 보이면 짜증이 치미는 나에게,
    그게 실은 투사한 내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다니.
    역시 이론은 현실과 안 맞구나, 돌팔이네 프로이트 XX.

    ㅋㅋ 뭐 이상할 거 없다, 자연스러운 반응이니까.
    그건 그저 당신이 내로남불러가 아니라는 증거다.
    내 것이 아니라 확신하니,
    그걸 가진 누군가를 욕하고 미워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건 내로남불러들과 다르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만 돌팔이인 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MBTI의 심리적 유형 구분의 모태를 확립한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자꾸 누군가가 싫고 거슬린다면 그건 사실 우리가 억압하고 부정하는 우리자신의 면모를 그에게서 보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억압된 인간의 모습을 그림자(Shadow)라고 칭했다.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개성화(individuation)는,
    ‘이 그림자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을
    필수적인 과정으로 한다고 말했다.
    이거 이거, 프로이트고 융이고 돌팔이들이 많았네…

    그들이 돌팔이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보면,
    인간은 자기가 투사한 것들이 자꾸 삶에서 보이는 양상을 띠게 된다.

    내가 날 알아야 하는 이유

    어쩌면 우리의 세계관이,
    우리가 소화하지 못한 감정이 투사되어 윤색된 걸지도 모른다는 성찰을 우리는 해야 한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비판할 때,
    그것이 어쩌면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아, 물론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비판적 사고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비판보다 순응이 개인의 삶을 망치는 시대니까.

    그러나 이 비판과 의심이,
    그저 내 투사로 인해 내가 용인하지 못하는 내모습을 투영해서 보는 건 아닌지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파악해야만,
    그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칼 융이 말한 개성화는,
    우리가 최고의 우리자신을 조각해
    원하는 삶을 공허감 없이 쾌청하게 누리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어다.
    그의 말처럼,
    그러려면 일단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는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