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대장장이 휴

  • 지옥같은 세상에 태어난 자의 운명

    지옥같은 세상에 태어난 자의 운명

    그의 이야기

    ‘해수’는, 열심히 살았다.
    참고 또 참았다.
    좋은 자식이 되고자.
    좋은 학생, 친구, 동료가 되고자.
    결혼도 했다.
    직장도 번듯하게 잡았다.
    돈도 모았다.
    하지만 불행했다.
    부모가 아팠다.
    작년부터는 아이도 아팠다.
    난 시간을 팔기 때문에 곁에 있어줄 수 없다.
    매일 연기를 했다.
    애써 웃고, 아파도 괜찮은 척, 힘들어도 안 힘든 척.
    몇번을 연기를 했을까.
    언젠가부턴 내가 연기를 한다는 느낌이 없어져버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나는,
    좋은 팀원, 좋은 학벌에 좋은 직장을 가진 착한 아들, 최고의 남편이고 아빠였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졌다.
    아니, 너무 지쳤다.
    아니, 뭔가… 진절머리가 났다.
    뭐 땜에 그런거지?
    다 가진 난데.

    애써 나를 위안했다.
    ‘아마 좀 요즘 바빠서 그럴꺼야.’
    그러던 차에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아이가 아픈 탓에 자주 자리를 비워서 그런건가, 하고
    혼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부장실로 들어갔다.
    ‘해고’.
    회사 상황의 어려움을 말하며, 그는 내게 사직을 권고했다.
    16년이었다.
    … 문득 퇴직 이후를 준비하느라 정신없던 선배들이 생각났다.

    아이가 눈에 밟혔다.
    아파서 우는 아이의 눈동자로 수척하게 쳐져 있는 내가 보였다.
    엄마는 오늘도 애기는 좀 괜찮냐며 전화를 했다.
    당신도 많이 아프면서.
    아내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듯 했지만, 힘겨움이 느껴진다.
    괴롭다.
    회사에선 일단 권고사직을 고사하고 당분간이라도 버티기로 했다.
    눈치가 보여서 회사에 나가기가 힘들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가만히 돌아보니 나는…
    하루하루가, 매 시간 매 초가 두렵고 불안하고 힘겹다.
    고통의 연속.

    … 시키는대로 열심히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이렇게 버겁고 힘들까.
    나는 무얼 잘못한 걸까.

    인생이 지옥같은 이유

    … 안다.
    아직 학생인데,
    난 무직인데,
    알바도 구하기 힘든데,
    취업은커녕 학자금도 못 갚고 있는데,
    난 몸도 아픈데.
    나는 ‘해수’보다도 훨씬 더 시궁창인데.

    하지만 다행히 가까스로 병을 고치고,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학자금도 갚고 돈도 모아도,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목표를 다 이루고 나도,
    그런 것들이 무색하게, ‘해수’처럼 똑같이 저렇게 불행할 가능성이 높다.
    그게 지금 이야기한 ‘해수’의 노력에 대한 결과다.
    아니, 아마 우리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고 나면 얻게 될 결과다.

    이룰 거 다 이루고 결국 누구나 원하는 걸 다 얻어냈는데,
    여전히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결말.
    … 언젠가 당신에게 저런 상황이 닥치면,
    당신은 오히려 열심히 살며 참고 견뎠던 세월이 원망스럽고 억울해질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되어버리는 걸까.
    그리고, 지금 우리는 왜 이런 걸까.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지만,
    해결은 우리가 해야 한다.
    그게 바로,
    인생의 잔혹함이자 지옥같음이다.

  • 글쓰기와 작곡의 3단계 비교분석

    글쓰기와 작곡의 3단계 비교분석

    글쓰기와 작곡의 3단계

    모든 창작은 세 단계로 실현된다.
    잉태 -> 조각 -> 공개

    이에 따라,
    글쓰기라는 창작활동도 크게 3단계로 이루어진다.
    집필 -> 퇴고 -> 공개

    작곡이라는 창작활동 역시 크게 3단계로 구성된다.
    작곡 -> 편곡 -> 공개

    왜 글은 다 쓰고 나서 이걸 수정하는 일이 두번째 단계인데,
    작곡은 두번째 단계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걸 완성해가는 활동인가.

    이건 보는 시각의 차이다.
    사실 글만 집필에서 끝난 게 아니라,
    작곡도 첫번째 단계에서 작곡이 거의 끝난 상황이라 봐도 무방하다.
    퇴고의 수정하고 고치는 정도는,
    편곡에서 곡이 변화하는 정도와 비슷하다.
    퇴고는 여전히 많은 걸 다듬고 손보는 과정이고,
    그런 의미에서 편곡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글의 초고는 사실 내 감정과 가치의 흐름을 쓰는 것이지,
    그에 맞는 여러 형태의 논거들은 퇴고에서 붙여도 된다.
    곡 또한 첫번째 단계인 ‘작곡’에서 내 감정과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그에 맞는 여러 가지 악기나 효과음들은 편곡에서 붙이면 된다.

    첫번째 단계의 세부단계

    글쓰기의 첫번째 단계는 ‘집필’이고,
    작곡의 첫번째 단계는 ‘작곡’이다.

    ‘집필’의 세부단계는
    휘갈겨쓰기 -> 시놉시스 -> 초고작성(ft.1차퇴고)
    이고,
    ‘작곡’의 세부단계는
    즉흥선율(=휘갈) -> 시놉시스 -> 작사,작곡
    이다.
    (작곡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반복되나,
    이건 알잘딱해서 층위를 이해하도록 하자.)

    글쓰기의 시놉시스는
    감정선 -> 구간나누기 -> 구간별 화두 설정(목차)

    작곡의 시놉시스는
    감정선 -> 구간나누기 -> 구간별 테마 설정(송폼)

    글쓰기의 초고작성은
    앞서 구간별 화두를 통해 글 전체의 목차를 잡은 대로
    그 뼈대에 맞게 글을 작성하는 일이다.
    각 파트별 글을 쓰고 여러 파트간 흐름이 자연스럽도록
    글을 쓸 때 감정의 흐름을 잘 유지하면서 쓰도록 주의한다.

    작곡의 ‘작사,작곡’은
    역시 앞서 구간별 테마를 설정해서 잡은 송폼대로
    그 뼈대에 맞게 곡과 가사를 쓰는 일이다.
    BPM, 코드진행, 리듬, 멜로디 등을 전반적으로 다듬어가며
    곡의 감정선이 유지되도록 가사와 탑라인을 만든다.

    두번째 단계의 세부단계

    글쓰기의 두번째 단계는 ‘퇴고’이고,
    작곡의 두번째 단계는 ‘편곡’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실상 초고는 Shit이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글을 깎고 조각해나가는 단계는 퇴고단계다.

    작곡도 마찬가지다.
    물론 작사, 작곡을 마쳐두었으나,
    편곡을 하면서 곡이 자아내는 최종적인 느낌을 완결짓는다.
    실제로 곡을 다듬어 원석 속의 완결된 예술작품을 조각해내는 건
    편곡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글쓰기의 퇴고는
    내가 쓴 초고의 전체 흐름을 다시 한 번 검토하고
    그 과정에서 부자연스러운 문장을 다듬고
    불필요한 부분을 빼고 좋은 논거를 추가하는 작업 등을 한다.

    작곡의 편곡은
    작곡한 곡의 전체적인 흐름을 다시 한 번 검토하고
    그 과정에서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빼거나
    더 좋은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 포인트를 개선해나간다.
    그리고 각 파트별 감정에 맞는 악기들을 음역대별로
    차곡차곡 하나씩 쌓아나간다.

    세번째 단계

    글쓰기나 작곡이나 세번째 단계는 ‘공개’다.
    좋은 시기에, 좋은 대상에게, 좋은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의 작품을 공개하는 것.

    여기까지가 글쓰기와 작곡의 3단계를 비교분석해본 것이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일에는 분명 오묘한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세상이 지옥같은 이유에 관한 십계명

    세상이 지옥같은 이유에 관한 십계명

    십계명

    본의 아니게 태어나고 보니, 요구사항이 너무 많다…. 후..

    태어나서 한동안은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곤 못 살아남는데,
    살기 위해 내가 의존해야만 했던 그들도 내게 요구사항이 많다.
    (만약 당신이 요구사항이 없는 보호자 밑에서 자랐다면,
    그건 다이아 수저도 아니고 그냥 은하계 수저다.)

    친구들, 학교 선생님, 친척들, 사회적 관습, 문화 등등 열 겹 스무 겹으로 겹쳐서 요구사항이 점점 더 많아진다.
    나이 좀 들어서 정신 차려 보면, 진짜 요구하는 게 X나 많다.

    요구사항을 내게 강요하는 인간들이, 하나같이 다 이렇게 말한다.
    ‘널 위해서야.’

    요구사항을 하도 들이대길래 그들은 ‘요구하는 자’, 나는 ‘요구받는 자’ 뭐 이런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들도 다 ‘요구받는 자’였다 ㅋㅋ
    (즉, 가해자-피해자 구도인가 싶었는데 죄다 피해자 밭이었다는 말이다.)

    정신없이 요구사항 들어주며 살다 보면,
    나중엔 남이 원하는 것만 들어주는 기계인형처럼 돼버려서
    내가 뭘 해야 행복한지조차 모르는 지경에 이른다.

    내 주위 사람에 대한 요구사항도 나에 대한 것일 때가 많아서,
    내가 요구사항을 거절하고 내가 원하는 걸 하려고 하면
    내 주위 사람들도 덩달아 ‘요구사항을 안 들어주는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다 ㅋㅋ

    요구사항을 계속 안 들어주면,
    내 세상에 존재하는 압도적인 절대다수가 나를 다구리 놓기 시작한다 ㅋㅋ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며 사는 사람일수록 대개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좋은’ 사람인데,
    이 ‘좋은 사람’들한테조차 미움과 원망을 받는다 ㅋㅋ
    (원래 요구사항 다 들어주며 사는 ‘좋은’ 사람일수록
    그렇게 살지 않는 ‘나쁜’ 사람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시간을 팔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가장 냉혹한 부분은 싹 다 빼놓고 이야기해본 것들이다… ㅋㅋ

    추신

    정리하면, 애당초 인간은 ‘자유’를 상당히 구속당한 채 태어난다.
    자유라는 것은,
    ‘남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남이 원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면,
    그건 단지 노예일 뿐이다.
    그런데 내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태어나고 보니,
    모든 인간들이 우리가 노예이길 바란다.
    그러니 ‘지옥같은 세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물론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렇게 살다 가지 않도록 렙업을 시작할 것이다.
    앞으로 당신은 원하는 모습으로 삶을 조각해 나갈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다만, 인간에게 주어진 ‘세상’이라는 게 애초에 좀 거시기하다는 걸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당신이 ‘아.. 인생 지옥같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건,
    사실 자연스러운거다.

  • 구체적으로 무얼 줄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무얼 줄 수 있는가

    이 책이 당신에게 구체적으로 줄 수 있는 건 세 가지다.

    첫째, 살아남아 몸과 마음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유지하는 법.
    둘째,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얻는 법.
    셋째, 하루를, 일상을, 최고의 나 자신을 조각하는 일을 실현하는 법.

    첫번째.

    이 책은 레벨1부터 레벨20까지 하나씩 레벨을 올려가는,
    RPG 게임처럼 ‘레벨업’(소위 ‘렙업’)을 하는 책이라고 여기면 편하다.
    (편의상 이 책에서 레벨은 Level의 약자인 Lv로 표시한다.)

    Lv1에서 Lv8까지는 ‘생존’하는 것에 대한 렙업을 하는 구간이다.
    살아남아야 뭐라도 할 거 아닌가.
    물론 여기서 ‘생존’은 단순히 살아남아 생명을 부지하는 걸 넘어서,
    아프거나 질병에 걸리지 않고
    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육체적, 정신적 컨디션을 만들어
    이 컨디션을 유지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걸 말한다.

    두번째.

    Lv9에서 Lv16까지는 ‘자유’를 얻는 일에 관한 렙업을 하는 구간이다.
    자유로워지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진정한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발견하지 못한다.
    즉, 나다운 나를 찾지 못하고 삶의 의미와 방향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시간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해서 생기는 신체적 구속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지고,
    결국 내 삶의 시간 전부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시간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법은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다.

    세번째.

    Lv17에서 Lv20까지는 ‘의미’를 찾는 일에 관해 렙업을 하는 구간이다.
    진정한 나만의 길을 찾아 가장 나다운 나 자신을 발견하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 발견한 삶의 목적을 늘 곁에 두고 최선을 다해 몰입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고,
    하루, 일상, 최고의 나, 이렇게 세 가지를 조각하는 법에 대해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루, 일상, 최고의 나

    하루는 곧 우리 인생 전체다.
    삶은 프랙탈 구조로 되어 있다.
    하루가 곧 삶이고 삶은 곧 하루다.
    우리는 매일 우리 인생 전체를 살 기회를 얻는 셈이다.

    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하고 나면,
    이 하루들이 꾸준히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축적된다.
    이는 진하고 짙은 필압으로 삶을 변화시켜 나간다.
    완벽하게 조각된 하루들은
    조금씩 생존과 자유를 얻게 한다.
    생존과 자유를 얻고 우리가 조각해 나가는 일상은 점점 완전해져 간다.

    생존과 자유를 얻은 상태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나만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될 수 있는 최고의 나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하고 발견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최고의 나를 조각해서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삶에서 공허라는 단어를 박살낼 수 있다.
    죽음, 무의미, 고독, 부자유에서 오는 공허가
    우리의 삶에서 힘을 잃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대신 그 자리를 청량감과 긍지, 확신이 가득 채울 것이다.

  • 무엇을 위한 책인가

    무엇을 위한 책인가

    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이 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하는 것.
    당신이 될 수 있는 최고의 당신,
    즉, 가장 당신다운 당신이 되게 하는 것.
    그리하여, 당신의 삶에서 공허함을 몰아내는 것.
    그 공허감 대신 청량감으로 당신의 삶이 가득 차게 하는 것.

    공허하지 않으려면,
    내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나’를 조각해서
    내가 원하는 인생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최고의 나’는,
    우리가 저 단어를 듣고 1초면 떠올리게 되는,
    학교와 사회에서 떠들어대는 그런 게 아니다.

    최고란,
    남이나 세상이 최고라고 평가해 주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가장 나다운 것,
    내가 지니고 태어난 잠재력을 남김없이 발휘하는 것.
    진정한 나로서 내가 가진 소질과 예술성을
    모두 펼치는 존재가 되는 것.
    이게 ‘최고’라는 말의 진짜 의미다.

    그래서 ‘최고의 나’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고,
    오직 나 자신만이 발견할 수 있다.
    내 삶에서 나만의 의미를 찾고
    내가 될 수 있는 진정한 나 자신을 조각하는 것이
    곧 최고의 나로서 진짜 나다운 인생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나다운 것인지 모른다.
    그러니 최고의 내가 과연 어떤 것인지도 상상하지 못한다.
    짐작도 가지 않는다.
    오직 무얼 해야 남들이 우러러봐 줄지 고민해왔을 뿐이니.

    그걸 알려면,
    우선 진정한 우리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많은 것들을 걷어내야 한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진정한 의미의 ‘생존’과 ‘자유’를 얻어내야 한다.
    그것들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고 그것들을 지배하는 순간,
    그때 비로소 우리는 최고의 나 자신이 무엇인지
    태어나 처음으로 조금씩 발견해가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하여,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생존’과 ‘자유’를 얻고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비로소 최고의 나 자신을 발견하고 조각해나가는 일을
    이해하고 터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하고,
    생존과 자유를 얻어 일상을 완벽하게 조각하고
    결국 최고의 나를 조각해내서
    삶이 더 이상 공허하거나 불안하지 않고,
    청량감 넘치고 확신으로 가득하게 되는 경지에 이를 것이다.

    이게, 내가 이 책을 쓴 궁극적인 목적이다.

  • 모르지만 아는 척 하는 자와 알지만 티내지 않는 자의 차이

    모르지만 아는 척 하는 자와 알지만 티내지 않는 자의 차이

    둘의 차이

    모르지만 아는 척 하는 자.
    알지만 굳이 티내지 않는 자.

    이 두사람 간의 가장 큰 차이는 뭘까.
    체면?
    사회적 지위?
    영향력?
    인품?
    평판?
    능력?
    부?
    명예?

    과연 이 두사람의 삶은
    어떤 측면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날까.
    이 두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불안이다.
    진짜 나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

    학벌,
    연봉,
    번듯한 직장,
    외모,
    서사,
    감정,
    태도,
    그 어느것에서라도
    그럴싸한 척을 하거나 연기를 해야하는 순간,
    인간은 불안해진다.
    더이상 직위가 박힌 명함이 없는
    날 것 그대로의 나,
    갑옷을 벗어버린 맨몸뚱아리의 나를
    과연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그렇게 배우가 된다

    이 불안은 인간을 옥죈다.
    그리고 대개 이건
    우리가 배우가 아님에도
    배우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가장 근원적인 계기
    가 된다.

    불안한데 하나도 불안하지 않은 척,
    질투가 나는데 전혀 질투나지 않는 척,
    모르는데 아는 척,
    겁나고 두려운데 겁먹지 않은 척,
    주눅이 드는데 주눅들지 않은 척,
    화가 치미는데 화나지 않은 척,
    안 착한데 착한 척,
    친절하지 않은데 친절한 척,
    안 멋진데 멋진 척,
    약한데 약하지 않은 척,
    가지지 못했는데 가진 척,
    좋아하는데 좋아하지 않는 척,
    싫어하는데 싫지 않은 척,
    못 하는데 잘하는 척,

    이거 뭐… ㅋㅋ
    다 쓰려면 밤샐 거 같다.

    사는 게 피곤하고 지치는 한가지 이유

    하고싶은 말은,
    우리가 사는 게 지치고 피곤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자꾸 ‘척’을 해야돼서다.

    ‘척’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와
    삶이 쾌활하고 청량한 정도는
    정확히 비례한다.

    왜 그럼 우리는
    그렇게 사는 내내 척척척 해대느냐.
    하다하다 척하지 않으면,
    사회성이 없니,
    개념이 없니
    그리 좋으면 지 혼자만 ‘척’하면 되지
    나는 하는데
    옆의 사람은 척 안 한다고
    ㅈㄹ을 떠는 성가신 세상이 되었느냐.

    … 그건 옥살법 Lv14와 Lv15에 걸쳐서
    이해하기 쉽게 써해두었다.
    (… 근데 아직 책을 쓰는 중이라는 게 함정…)

    비밀을 말하자면,
    ‘척’하지 않아도 된다.
    안 믿기겠지만,
    진짜다.

    의아하다면,
    오늘 하루 내가 조금이라도
    ~척 한 게 있다면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타고타고 올라가보기 바란다.

    느낌이 올 것이다.

    P.S) 제목의 저 두가지 부류의 인간,
    즉 몰라도 아는 ‘척’하는 인간과
    알지만 티내지 않는 인간은
    결국 전혀 다른 존재로 살다 간다.
    전자는 ‘피해자’로,
    후자는 ‘조각가’로.

    조각가로 살자.
    특별한 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지금 ‘옥살법’을 집필 중인 나의 목적은
    단지 그것 하나다.

    힘내자.

  • 누구를 위한 책인가

    누구를 위한 책인가

    당신에 대한 가설

    당신은 왜 이 책을 집어들었을까.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도대체 무얼까 정체가.
    그저 우연일 수도, 혹은 필연일 수도 있겠다.
    어지간해서는
    주위 동료들, 친구들, 가족들이 사는 방식과 똑같이,
    그렇게 하루하루 웃어넘기며 살고 있을 텐데.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있을 수도,
    너무 ‘시궁창’일 수도,
    혹은 어떤 큰 계기가 당신의 머리를 야구배트로 후려친 것처럼
    당신의 세상을 찌그러뜨렸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주위 사람들과 서로서로 “그래, 다 이렇게 사는데 뭐” 하며
    가까스로 외면하고 위안하며 버티다가
    이제는 이 지리멸렬하고 미래에 기대할 게 없는 쳇바퀴 같은 날들이 너무 지겨워져서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당신에게 제시하는 조건

    어떤 계기이든, 어떤 상황이든, 나는 당신을 환영한다.
    나는 당신과 함께 ‘우리’이고 싶고 당신을 돕고 싶다.
    우연이었다 한들, 우주가 생겨난 것도 빅뱅이라는 ‘우연’에 불과했음을 생각해 보면
    나는 여전히 이렇게 종이 쪼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당신과 만난 게 가슴이 뛴다.

    하지만 이런 내게도 조건은 있다.
    나라고 무조건 내 책을 펼친 모든 사람들을 전부 환영하는 건 아니다.
    그건 내가 사람을 가리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번지수를 잘못 찾아와 서로 오해한 채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면
    당신도 실망, 나도 실망이기 때문이다.

    조건은 세 가지다.
    이 책은 내가 내거는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첫째, 매춘(봄날을 팔다.)

    팔 매(賣), 봄 춘(春).
    나의 봄을 파는 사람이어야 한다. (몸이 아니다. 봄이다.)
    즉, 생계를 위해 시간을 팔아야 ‘만’ 하는 상황일 것.
    혹은 지금 그러고 있지 않더라도,
    머지않아 나의 여생 중 가장 젊은 날을,
    나의 남은 인생 중 가장 풋풋한 봄날을 팔아야만 하는 상황이 될 것.
    (사랑하는 이가 당신 몫까지 짊어지고 봄을 팔고 있다면,
    이 책을 당신이 읽기 전에 그에게 먼저 건네주길 바란다.)

    둘째, 질식(숨통이 막히다.)

    내 생의 봄날을 팔고 있지만,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최고의 내 모습이 드러나지도,
    타고난 나의 예술성과 잠재력이 전혀 발휘되지도 못하고 있을 것.
    즉, 그냥 억지로 일하고 소리 없이 숨죽인 채 눈치 보며 살고 있을 것.
    최대한 눈에 안 띄게 지내는 게 지상목표인 것처럼 인생을 흘려보내고 있을 것.

    셋째, 한계(참을 수 있는 최대한의 한도에 다다르다.)

    매춘을 하며 질식해 가는 이 상황이 진절머리가 날 것.
    이대로 죽을 때까지 수십 년 더 버티는 걸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해서 몸서리가 쳐질 것.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
    이런 상황에 빠져 살다 가지 않게
    그를 지켜내고 싶을 것.
    도저히 이대로만 살다가 죽는 건 용납이 안 돼서,
    어떻게든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을 것.

    아니, 너무 까다로운 거 아니냐, 저걸 세 가지 다 꼭 만족해야만 이 책을 볼 수 있다는 거냐,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내 대답은,
    그렇다.

    이 책은 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사람들만을 위한 책이다.
    그러니 만약 세 가지 조건 중 두 가지만 충족한다거나 한다면,
    이 책은 과감히 집어던져라.
    이 책은 아직 당신을 위한 책이 아니니.

  • 무례한 환영인사

    무례한 환영인사

    나는 당신의 미래를 맞출 수 있다.
    점술가냐고?
    아니다.
    하지만 짧게는 3개월, 길게는 해를 두어 번 넘겨가며
    누군가의 심리상담을 한 경험들이 있기 때문에
    잘 안다.
    누군가의 짧은 과거 한 자락을 함께 꺼내 살펴보는 일조차,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
    섬세한 공감과 신뢰, 용기가 필요한지.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럼에도 나는 당신의 미래를 맞출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이미 일어나버린 과거도 아니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당신의 미래를 말이다.

    그럼 당신은 이쯤에서 슬슬 궁금해할 법도 하다.
    이 새끼는 뭔데 이런 말을 할까.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예언

    어찌저찌 학교를 마치고 돈을 벌고 여행도 다니던 당신은,
    아마 언젠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게 되는 날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비로소 당신이 어떤 처지인지 알게 되기 시작할 것이다.
    쇠고랑만 없을 뿐,
    교도소 수감자처럼 목줄이 채워져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이
    공포와 싸우고 병마와 맞서며 눈물을 흘리는 동안,
    직장에서 애써 웃고 고개 숙인 채 업무 보고를 해가며
    아무렇지 않은 듯 일하고 있는 자신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서야,
    생각지 않고 살아왔던 것들에 대해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이 자유롭지도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줄 힘도 없으며,
    삶이라는 게 유한하다는 걸 느끼며
    산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공허함을 느낄 것이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는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가지 더.

    그리고 한 가지 더 당신(그리고 우리 모두)의 미래에 대해 말해보자면,
    어지간해선 절대 그 미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아무리 극심한 고통으로 찾아와
    그 고통과 좌절이 우리의 눈앞을 새카맣게 만들어도,
    어지간해서는 결코 그 미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그저 우리는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라고 늘 배워왔으니까.
    우리는 그게 익숙하다.

    이 책은,
    그때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만약 답답함이 분노가 되고 변화에 대한 의지가 되어
    도저히 이대로 계속 살아가는 건 못 참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면,
    뭐라도 해서 어떻게든 이 잔혹하리만치 갑갑한 인생을 바꿔버리고 싶은 마음이라면,

    환영한다.

    우리는 아무래도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 정중한 환영인사

    정중한 환영인사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사실 방황하고 있습니다.
    끝도 없는 압박과 유혹의 소용돌이 속에서
    길을 잃은 채 휩쓸려가고 있습니다.
    아니, 애초에 길이 무엇인지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껏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 채
    그저 그렇게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학교와 어른들이 가르쳐준 걸 따르는 건,
    위험천만한 짓입니다.

    사회와 제도는 우리에게
    정해진 길을 따르고 시스템에 복종하면
    필요한 것을 얻게 해주리라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더 이상 지켜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애초부터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상반된 존재가 함께 살아갑니다.
    거칠고 투박한 돌덩어리 속에 깃든 신을 깨워서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자,
    돌덩어리 속에 영원히 신을 잠들어 있게 내버려 둔 채
    끝없이 비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자,
    전자는 ‘조각가’이고, 후자는 ‘피해자’입니다.

    ‘조각가’는 돌덩어리를 깨고 깎고 조각해서,
    그 속에 잠들어 있던 신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우리가 한 번씩 너무 힘들고 공허한 건,
    사실 모두가 겪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지불식간에
    ‘피해자’로 삶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피해자’로 남기를 거부하고
    ‘조각가’로 살아가리라 마음먹는 그 순간,
    당신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법 같은 날들과 기적 같은 일들이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당신은,
    ‘조각가’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그저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돌덩어리 중 하나지만,
    당신 안에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신이 잠들어 있습니다.
    전사, 천사, 우주, 자연, 진리, 영웅, 거인.
    신이 아닌 그 무엇으로 칭해도 좋습니다.

    분명한 건,
    당신 안의 신이 깨어나 세상에 나타나도록
    나 자신을 조각해 나가는 흥분되고 가슴 뛰는 삶을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쉽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매일이
    자유롭고 의미 있고 가슴 뛸 것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게 더 이상
    지겹거나 공허하진 않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충분히 믿지 못해서,
    불안에 떨며 우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먹고살기 위해 영혼을 팔지도 않고,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가 두려워 눈치 보지도 않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제 ‘조각가’로 살겠다고, 마음먹어 주세요.
    더 이상 ‘피해자’가 되지 않기로 결심해 주세요.
    나 자신을 신뢰하겠노라, 다짐해 주세요.
    더 이상 외면하며 도망치지 않겠다고,
    한 번만 용기를 내어 주세요.

    아직도 인간 문명은 세상과 우주, 자연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하루하루가 모여 1년이 되고,
    결국 우리의 삶 전체가 된다는 것.
    자연이 따르는 프랙탈 구조(Fractal structure)처럼
    우리의 하루가 곧 우리 인생 전체라는 것.
    그리고 다행히 내일이면 또다시
    우리에겐 하루가 새롭게 주어질 거라는 것.
    즉, 우리에겐 또 한 번 또 한 번
    인생이, 기회가, 새롭게 주어진다는 것.

    오늘 하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는 그냥 하면 됩니다.

    무얼 해야 하는지는,
    이 책에 이미 다 적어 두었습니다.

    “원석을 내리치세요. 신이 인사를 건넬 때까지.”
    (Hammer the block, Until God says Hi.)

    환영합니다.

  • 책 소개

    책 소개

    세상은 원래 지옥 같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세상이 정해놓은 룰대로 살아간다.
    하지만 결국 우리에게 남는 건 공허함뿐이다.
    뭘 위해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방황하는 우리에게,
    세상은 그런 고민 따위 사치라고 말한다.
    그저 열심히 참고 견디면,
    언젠가 보상해줄 거라 말한다.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우리는,
    젊음과 건강과 정신을 제물로 바친다.
    모든 걸 다 바치고 나면,
    남는 건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여전히 견뎌내야 하는 현실이다.

    우리는 살아남는 법을 이해해야 한다.
    살아남아,
    최고의 나를 조각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공허감 대신 청량감으로 삶을 채우는 법을 익혀야 한다.
    피해자가 아닌,
    조각가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대신해,
    과거에 대한 긍지와 미래에 대한 확신을 머금는 비결을
    체득해야 한다.
    신체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
    시간적 자유를 얻는 법을 이해해야 한다.
    진정으로 나다운 나 자신,
    될 수 있는 최고의 나 자신이 어떤 건지 발견해
    이를 조각해 내는 일에 성공하는 법을 깨달아야 한다.
    타고난 예술성과 잠재력을 모두 발휘한 상태로
    원하는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아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최고의 나 자신을 발견해 조각해 내는 방법을
    레벨업 방식으로 구현한
    일종의 비전서(를 빙자한 운빨X망겜 튜토리얼)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내면에 깃든 고유한 정체성,
    즉 내 안에 깃들어 있던 신을 발견해
    세상 밖으로 구현해낼 것이다.
    걱정할 건 없다.
    당신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그저 이 책을 곁에 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는 것이다.
    책을 읽어가며 레벨업을 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가장 내 영혼의 결에 맞는 나다운 나로
    조각되어 갈 것이다.

    환영한다.

  • 아이의 소통방식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아이의 소통방식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유전

    부모에게서 자식이 물려받아
    무언가가 대를 이어 내려오는 걸 말한다.

    DNA와 생물학이 곁들여지다보니
    그리 재밌다고 환영받는 주제는 아니다만,
    다행히 지금 말할 건 그런 건 아니다.

    내가 지금 말하려는 이야기는,
    그저 마음에 관한 것이니까.

    소통방식

    소통하는 방식, 스타일은
    유전된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저게 다다.

    당신이
    친구,
    동료,
    연인,
    선생님,
    가족
    주위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아주 높은 확률로 유전된다.
    적어도 유전된 후 변형된다.

    여기서 소통이라는 건,
    타인과의 소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나자신과의 소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기자신에게 유독 엄격한 사람

    뭐 그런 걸 생각해보자.

    당신이 당신 스스로에 대해
    꽤 엄격하고 가혹하게 구는
    스타일이라면.

    왜 그런걸까.
    대부분은 내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문제는 왜 그리 나에게
    유독 기대치가 높냐는 것이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존재하지만,
    자기자신이 힘들어하는 걸
    그다지 가엾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에 도사리는 이유와 절박함을
    하나의 일률적인 관점에서 단정지을 순 없다.
    누군가는
    내가 내 가족을 이끌어나가야만 하고,
    이 빚을 나라도 꼭 갚아야만 하고,
    이 병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아이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고 엄하게 구는 건,
    대개 내가 힘들고 지치는 게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좀 길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기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잘 모른다.
    자신이 힘들고 외롭고 지칠 때,
    스스로를 위로해주지는 않는다.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이 힘들어하면
    잘 다독여주고 이야기도 들어주면서,
    내가 두렵고 불안해서 외치는 비명은
    들은 채 만 채 경청하지 않는다.

    요즘 사회가 각박하다면서
    길가에 칼맞고 피흘리면 보고서도
    못본 척하고 지나가지 않나.
    그거 사실 예전이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50년 전에도, 200년전에도,
    인간은 자신에게 위해가 될 거 같은 일은
    그게 어떤 일이든 어지간해선 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걸 자기자신에게도
    그렇게 한다는거다.
    길가에 피흘리며 쓰러져있는 나를
    내가 본둥 만둥 못본 척 지나가버린다.

    소통방식의 유전

    이런 스스로에게 유독 엄격하고 가혹한
    사람들은 세상에 매우 많다.
    그 원인도 여러 가지,
    양상도 여러 가지이나,
    나는 지금
    자기자신의 나약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다듬어주지 못하는 태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 주제는 그거니까..? ㅋㅋ)

    자.
    이런 소통의 방식이나 태도는,
    유전된다.
    자기자신과의 소통방식이 저러하다면,
    이건 유전이 된다.

    당신이 당신의 아이를 키운다면,
    당신의 아이도 그 방식을 물려받는다.
    아이는 세상과 처음 마주하면서부터
    부모의 소통방식을
    말하는 법, 말을 듣는 법이라 느끼며
    그걸 그대로 내재화한다.

    이럴 때 대개 던지는
    ‘진절머리가 나서 난 부모랑 전혀
    반대인데요..? ‘
    라는 말은,
    유전을 운명으로 잘못 이해해서 하는 이야기다.
    부모가 대장암이었다고
    자식이 대장암에 걸리지 않고,
    부모가 서울대 교수라고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는 건 아니다.

    … 하지만 그럴 소지는 다분하다.
    부모가 스스로에게 가혹하고
    자기자신의 연약한 면을 감싸안을 줄 모르면,
    자식도
    자기자신이 살다가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스스로 자신에게 위로를 해줄 줄 모를
    소지가 다분하다.

    유전은 반복된다

    개인상담에서 내담자들이 종종 묻는 질문 중 하나는,
    바로 이거다.

    “아니, 저랑 부모님 관계가 제 고민이 아닌데,
    이거에 대한 것도 이리 자세히 이야기하나요..?”

    한 인간에게
    부모와의 관계와 그 안에서의 소통방식은
    그 인간이 세상, 타인, 자신과 소통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뿌리가 되고,
    사실 아주 빈번하게 거의 유사한 형태로 재연된다.

    이건 후기정신분석이론 중 하나인
    대상관계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고 명확한 개념이다.
    (자세한 설명은 일단 오늘은 제끼자.)

    그러면 이제 느낌이 팍, 올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스스로에게 가혹하고
    힘든 상황에 처해 주저앉아있는 자기자신을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가엾어해주지 못한다면,
    이건 어디서 왔을까.

    그렇다.
    당신의 부모에게서 왔을 확률이,
    결코 낮지 않다.
    아까도 말했지만 운명이라는 게 아니다.
    부모님이 심한 당뇨병을 앓았다고 해서,
    아이가 무조건 당뇨병에 걸리진 않는다.
    그런데 그럴 가능성은 높다.

    그래서 심리상담을 할 때,
    나는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해서
    내담자와 부모님과의 관계를,
    나의 가설에 비추어볼 때, 필요하다 생각되면
    조부모님과 부모님과의 관계를 묻기도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프랑스 시인 아그리파 도비녜의 말이다.

    “악의 어머니는 지식일 수 없고,
    정의는 무지함의 딸일 수 없다.”

    아는 게 힘이다.
    이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건,
    우리가 도저히 그걸 감내할 힘이 없다고 생각될 때
    합리적일 수 있는 말이다.
    무언가를 아는 것만큼,
    근본적인 해결의 뿌리가 되는 건 없다.

    소통방식은 유전된다는 걸 이해하면,
    당신은 당신의 아이에게
    좀 더 좋은 부모로서 현명한 양육을 해줄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의 부모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그들도 아마
    그의 부모로부터 유전받은 소통방식으로
    당신을 키웠을테니까.)
    당신 스스로에게 좀 더 다정할 수 있는
    실마리가 떠오를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 글이
    당신이 누군가(자기 포함)를 사랑하며 사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어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며 글을 마친다.

  • 직장인이 회사에서 느끼는 극도의 피로감

    직장인이 회사에서 느끼는 극도의 피로감

    사회화

    모든 인간은 연기를 한다.
    그게 사회가 원하는거니까.

    사회는 그래서
    ‘교육’이라는 제도적 통과의례를
    만들었다.
    사회의 일원인 구성원들을
    진정한 일원이 되게 하는 것.
    그걸 세상은 ‘사회화’라고 불렀다.

    사회는 흡족했다.
    내 이름을 따서 ‘사회화’라니.
    그럴싸하지 않나.
    당신의 이름이 철수인데,
    세상 사람들이 다들
    ‘철수화’를 거친 후 뿌듯해한다면
    당신도 분명 흡족해하리라.

    문제

    문제는 각 인간이 지니는
    개성과 예술성이었다.
    그냥 매드맥스에 나오는
    회색빛의 펩시맨들처럼
    전부 다 똑같으면 딱인데.
    그게 사회화의 이상형인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렇질 않았다.
    그들은 진짜 자신이길 바랐다.
    성공적인 ‘사회화’를 마친
    인간들조차,
    30년을 구른 후에는
    어느 순간엔가
    후회하고
    눈물짓고
    분노하고
    폭발했다.

    아, 딱 영화 매드맥스에 나오는
    그 회색 펩시맨들처럼만 해주면
    더 바랄 게 없는데.
    죽을 때나 그냥 아쉬움에
    ‘기억할께.’ 이러고 가면 되는데.
    사회는 아마 이런식으로
    신세를 한탄했겠지.

    고통은 누구의 몫인가

    평생 만족스럽게
    사회화된 채 살아가는 사람도 많고,
    그 시기가 20대든, 40대든, 60대든
    어느 순간엔가
    너무 오래 부여된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온 것에 깊은 회한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고통은 늘 후자의 몫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빨간약을
    가까스로 삶의 어느 국면에서 찾아낸
    후자의 사람들은
    극도의 고통과 우울과 불안을 겪었다.

    전자는,
    만족스럽고 행복하고 기뻤다.

    이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가.

    연기

    차이는 바로,
    ‘사회가 요구하는 ‘온당한 것’을
    연기하느냐 아니냐’

    에서 비롯되었다.

    전자는 연기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팀장이 남아있으면 나도 남고,
    주말에 부르면 등산을 하고
    회식 가면 숙취해소제 먹으며 술상무하고,
    힘들고 슬퍼도 앞에선 광대처럼 웃고,
    그게 훌륭한 사회일원, 조직구성원으로서
    온당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진짜 인간의 올바른 처사가 그런거니까.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겉과 다르게 저 자는 날 위하지 않는다.
    인간은 연약하고,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런 것들을 알아채고
    스스로의 독자적인 삶을 살아보려는 자들을
    거칠고 교묘하게 찌르고 학대해야했다.
    그래야만 내가 붕괴되는 위험을 막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덕에
    인간은 원시사회를 한참 지나고도
    지금까지도 다같이 큰 무리를 지어 살아야만 한다고
    세뇌된 채 살아왔다.
    (코로나가 여기에 균열을 만든 거 같긴 하지만.)

    그래서 후자인 사람들은 ‘연기’를 해야 했다.
    사회화가 뼛속 깊이 잘 된 사람인 양.
    사회가 제시하는 가장 올바르고 모범적인 삶을
    나도 진심으로 살고 싶은 양.
    내 생각도 당신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양.
    그렇게 웃고 끄덕이고 입을 닫고 순종하며,
    연기를 했다.

    배우 ‘허성태’가 언젠가 TV방송에서
    게릴라토크콘서트처럼 이야기하는 걸
    유튜브에서 몬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자신은 배우일 때보다
    직장을 다닐 때 더 연기를 많이 하며 살았던 것 같다고.

    그는 후자였지만 좋은 직원이어야 했던거다.
    배우인 지금보다 더 연기를 많이 해야할만큼.
    과연 이게 그만의 문제일까.

    현실

    나는 직장생활을 오래도 했다.
    먹고 살아야 했으니, 크게 후회하진 않는다.
    삶의 모든 순간을 실로 꿰는 것은 나의 몫이고,
    나는 노예처럼 ‘사무실 자리’라는 감옥에 갇혀
    꾸역꾸역 참고 버티던 시절을
    그저 불행이라는 이름의 허비로 쳐박을 생각이 없다.
    나는 그 시절을, 내 자양분으로 삼으며 산다.

    나는 월급을 얻어
    밥도 먹고 옷도 사고 병원도 가는
    직장인의 삶을 겪은 덕분에,
    상담심리대학원에서 그저 책으로 읽는 것들과
    전혀 궤를 달리하는 진짜 현실을
    피부로 오랜시간 경험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된 친절을 두르고 산다.
    과도하게 친절하고 다소곳하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분노와 적대감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다.
    나와 피부를 맞대고 지내는 누군가가
    꾸역꾸역 어디가 고장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그렇게 연기를 하며 사는 걸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보다보면,
    왜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게 지쳐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두들 눈물을 머금고,
    속에 있지도 않은 미소와 친절과 배려를 베푼다.
    보고 있으면 ‘이 정도면, 진심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철저하고 완벽하게 연기하며 산다.
    그러다가 간혹 진심을 내보이는 걸 볼 때면,
    그가 얼마나 속으로 분노하고 혐오하고 격분하는지
    깨닫게 된다.
    저렇게 불평, 불만, 시기, 분노가 많은데
    저렇게 하루종일 친절하고 상냥하게 굴 수 있다니.
    혀를 내두르게 된다.

    피로

    결국 그렇게
    피로감은,
    인간의 온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결국 그렇게 된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모든 시간들은,
    내면에 울분과 환멸이 쌓이게 만든다.

    그리고 그 피로감은 사라지지 않은 채
    켜켜이 쌓여서
    언젠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다.

    이유없는 수많은 감정과 기분들에 대해
    의아해할 수 있다.
    그런데 어쩌면,
    그건 우리가 이유를 모를 뿐
    이유가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