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대장장이 휴

  • 신체 회복

    신체 회복

    위험천만한 모험

    잠드는 건,
    굉장히 위험천만한 짓이다.

    아주 오랫동안 그랬다.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시점은 한 20만년 전이겠지만,
    대형 유인원이 출현한 시기는 800만년도 더 된 이야기니까.

    잠시 그 오랜기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상상해보자.
    인간은 잠을 자는 동안
    언제든지 맹수나 다른 동물에 의해 물려죽을 수 있는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먹이를 구하지도, 새끼를 지켜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의 생존확률을 높여주는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잠을 잔다는 건 아주 골때리는 짓이었을 것이다.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꿀잠을 잤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진화과정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진화라는 것은,
    오랜 세월 수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어떤 특성이 생존에 유리하지 않으면 그 특성이 사라져버리는 걸 의미한다.

    기린의 목이 긴 이유에 대해,
    진화적으로 먹이를 구하기 쉬워서, 체온조절을 위해 등등 여러 가설들이 있다.
    뭐가 맞든 간에 한가지 확실한 건,
    생존에 유리한 특성을 지닌 개체만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개체들은 살아남지 못해
    오랜 시간이 흐르며 유리한 특성을 지닌 개체만이 자손을 남기고 살아남아
    결국 그 특성을 가진 종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그럼 잠을 생각해보자.
    잠을 자는 이 위험천만한 짓은,
    진즉에 진화과정에서 사라졌어야 맞다.
    잠든 동안 그 어떤 동물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의 공격을 막고 먹이를 구하고 자식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인간은 24시간 중에 8시간은 잔다.
    90살까지 산다 치면, 30년은 잠든 채 보낸다.
    인생 전체의 3분의1을 자버리는 것이다.

    물론 인간만 그런 건 아니다.
    해양동물들이 잠을 자는 건 우리가 자는 것보다 더 위험한 짓이다.
    왜냐면, 물 속에서는 계속 헤엄을 쳐야 하니까.
    그런데 얘네들도 진화과정에서 잠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뇌의 절반만 잠들고 나머지 절반은 깨어있는 상태로
    좌우 뇌를 번갈아가며 교대로 잠을 잔다.

    잠이 진화과정에서 사라지기는커녕,
    저런 극단적인 상황에서조차
    뇌가 반씩 자는 신박한 기술을 구사해서라도 어떻게든 잠을 자는 것이다.

    …왜??
    …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신체를 회복시키는 연금술

    잠은, 신체를 회복시키는 연금술이다.

    인류문명이 정말 놀라운 일들을 많이 해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의학계에서 해결하지 못한 미개척 영역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잠이 가져다주는 신체회복능력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서 그렇지,
    사실 인체가 스스로 신체를 회복하는 힘은 경이로운 수준이고
    그 근간에는 잠이 있다.

    잠을 자는 동안 인간의 신체는 회복한다.
    신체적 손상이나 이로 인한 질병위험이 감소한다.
    잠이 뇌청소, 뇌노폐물 배출 등을 통해 알츠하이머 발병을 예방한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잠은 비단 뇌와 연관된 치매같은 병이 아니더라도,
    우리 신체와 관련된 모든 회복체계를 가동시킨다.
    각종 암질환이나 심장, 뇌혈관 질환 발병률이 떨어지고
    고혈압, 고지혈증, 대사증후군, 당뇨 등
    우리가 한번씩 들어보는 모든 병에 걸릴 확률이
    비약적으로 낮아진다.

    사실 저런 질병까지 가지 않아도,
    당장 일상에서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고 상처가 날 때
    우리는 그저 푹 자면 된다.
    우리 몸의 면역시스템은
    자는 동안 당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활기를 되찾아준다.
    알지 않나.

    자기안락사의 시대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는 살아있는 시간의 3분의1을 잠에 할애했다.
    호랑이, 표범 등 온갖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숲과 초원에서 살던 시절부터.
    잠들고 나면 당장에라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잠들어서 생기는 그 위험보다,
    잠을 자지 않으면 지게 되는 위험이 더 치명적이었다는 의미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잠든다고 해서 맹수에게 목이 물려죽거나 내 자식이 잡아먹히는 일은 없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인간은,
    오히려 초기인류보다 잠을 더욱 적게 잔다.

    실제로 대부분의 선진국 사람들 중 3분의2는
    하루 권장수면시간인 8시간을 채우지 못한다.
    2020년 ‘사람인’에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직장인의 74%는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평균수면시간은 6시간에 불과하다.

    그런데 부족해진 잠은,
    은행대출처럼 온전히 상환하는 게 불가능하다.
    즉, 하루 1시간을 부족하게 자면
    1시간을 더 잔다고 회복되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실제로 단하루 1시간을 부족하게 자면,
    나흘 정도의 회복기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문제는 습관적으로 늘 잠을 적게 자는 생활이다.
    만성적으로 잠을 적게 자는 건,
    곧 ‘자기안락사’와도 같다.
    (이 표현은, 수면분야 권위자인 맷 워커의 표현이다.)

    실제로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자는 시간이 부족할 때 면역계가 손상되고 혈당수치가 교란된다.
    심혈관질환 발병률이 급증하고,
    뇌졸중이나 뇌혈관질환 발병확률도 올라간다.
    우리가 볼 때 그리 적지 않은 7시간 미만 자는 것만으로도,
    암발병률이 두 배 이상 증가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호르몬 교란으로 비만이 심해진다는 것 또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잠을 적게 자는 만행을 습관적으로 지속하면,
    충분한 신체회복이 불가능해지고,
    결국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죽어간다.
    (물론, 잠은 일회성으로 적게 자는 것만으로도
    신체에 상당한 손상을 가져온다.)
    그래서,
    모든 세계기록을 죄다 다루는 기네스북에서도
    ‘잠 안자기’ 기록은 없다.
    너무 위험천만하기 때문에.

    잠은,
    신체회복을 관장하는 요체다.
    그리고 우리는,
    잠이 일으키는 연금술을 잘 활용해서
    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아 원하는 삶을 조각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신체회복을 위한 간단한 지침

    그렇다면, 효과적인 신체회복을 위해
    잠은 얼마나 자는 게 좋을까.
    WHO나 미국수면재단, 영국 국민건강보험 등
    각종 수면 관련 기관에서 권장하는 시간은 7~9시간이다.

    평균적인 수면싸이클은 90분이고,
    각 싸이클마다 비렘수면 대비 렘수면 비율 등
    수면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기능이 싸이클마다 조금씩 다르다.
    따라서, 하루에 가급적 5개의 수면싸이클을 가져가는 게 좋다.
    잠드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8시간 정도가 적당하다.

    그리고 가급적 잠깐이라도 낮잠을 자자.
    오랜기간 과거 전통을 간직해온 원시부족들을 보면,
    낮잠은 인간의 신체에 자연스러운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지역에는
    씨에스타라는 낮잠시간이 공식적으로 존재한다.
    그리스에서 시에스타 풍습이 사라진 영향에 관해 조사한 연구를 보면,
    낮잠풍습이 사라진 후 직장인 기준 사망률이 약 60%나 증가했다.
    여유가 되면 딴 짓 하지 말고 자라.

  • Lv1. 끝없는 회복가

    Lv1. 끝없는 회복가

    우리가 가장 첫 레벨인 Lv1에서 해야할 일은,
    바로 우리가 가진 엄청난 회복력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다.

    삶은 불확실하고, 그래서 더 잔혹하다.
    아무리 피해다니더라도,
    인간은 살면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다칠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몸에 생채기가 나고 뼈가 부러지고 마음이 무너지고 다쳐도,
    우리의 몸과 마음은 엄청난 회복력으로 손상된 몸과 마음을 스스로 회복시킨다.
    심지어 더욱 고양된 상태로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한다.

    사실 이건, 완전 개사기 스킬이다.
    최고의 우리자신을 조각하기 위해 우리는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아프거나 죽지 않고 생존해서 최상의 컨디션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지닌 회복력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결코 건강할수도, 자유로워질수도, 원하는 삶을 실현할수도 없다.

    P.S) 아, 그리고 이걸 말 안 했는데
    이 모든 회복력의 원천은 바로 ‘잠’이다.

  • 나의 분노가 암시하는 세가지 사실

    나의 분노가 암시하는 세가지 사실

    나의 화는
    몇가지를 스스로 드러내는데,
    그 중 세가지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이야기해보자.

    첫째, 경계의 착오

    누군가 내게 상해를 입히거나
    생명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의 거의 모든 화는
    아직 명확히 확립되지 않은 경계선을
    드러내는 표식이다.

    삶은 원래 잔혹하다.
    각자는 각자의 자유라 믿는 걸 행사할 뿐이다.
    그 잔인하고 처연한 진실이
    우리 앞에 드러나는 일은
    드물지만 의외로 빈번하다.

    감정이 생존을 위해 진화해왔다곤 하나,
    전쟁터가 아닌 일상에서 우리에게 유익한 건
    자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은 우리를 수렵시절로 돌려놓고
    우리는 불필요한 소모와 제살깎아먹기를
    자동으로 가동시키게 된다 ㅋㅋ

    옳든 옳지 않든
    그게 얼마나 잔인하든
    그것과 무관하게
    각자의 경계는 자기자신으로 한정되어있다.

    둘째, 위협의 출현

    화는,
    그것이 내게 위협이 되었다는 증거다.

    상대가 꼬마아이든,
    젠틀한 지식인이든,
    드라마 속 인물이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화가 났다는 것이고
    그건 결국 무언가가
    우리에게 명백하게 위협이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인간의 감정은
    생존을 위해 진화해온 것이다.
    내 생존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를 진정으로 화나게 하지는 않는다.

    명심해라.
    우리를 화나게 하는 모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내게 위협이 되는 것들이다.
    위협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되면,
    더이상 그것은 우리를 화나게 만들지 못한다.

    셋째, 화를 내지 않는 두가지 경우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두 경우다.
    애초에 나의 위상을 낮추고
    철저하게 상대를 거스르지 않거나,
    일상의 많은 것들이
    내게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거나.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전자는 화를 ‘내지’ 않는 것에 그치지만
    후자는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심리상담 현장에서
    일관적으로 느껴온 건
    사람들은 의외로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을
    혼동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둘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나보다 타인이 너무나 중요해서
    내면에서 화가 나냐 안 나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릴 때가 많다.
    대신 화를 내냐 안 내냐가 늘 핵심이다.
    이건 타인에게 드러나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인 채
    내면에서 화가 나든 안 나든
    일단 화를 내지 않고 친절하게 군다.
    그리고 삶의 어느 순간엔가
    무시해왔던 내면의 화가 터져나오면
    그 때부터 엄한 일(?!)을 하기 시작한다 ㅋㅋ

    이게 전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오랜시간 나를 잘 조각해서
    충분히 강인하고 성숙해진 인간은
    화가 잘 나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내게 위협이 될 일이 적기 때문이다.

    조금 더 와닿는 이해를 위해,
    니체의 인간관을 잠시 이야기해보자.
    인간은,
    낙타 -> 사자 -> 아이
    가 되며 이상적인 인간이 되어간다고 했다.

    묵묵히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군말 한마디 없이 짐을 나르는 낙타,
    그저 내가 지금 기쁘고 즐거운 것에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몰입하며 사는 아이,

    사자를 뺀 이 두가지 단계의 인간이
    각각 화를 내지 않는 두 경우의 전자, 후자다.
    낙타도, 아이도
    화를 내지 않는다.

    기회

    화는,
    기회다.
    나를 이해하고 돌아볼 수 있는 기회.
    오늘 우리가 나눈 세가지 이야기를
    잘 기억해두었다가,
    삶을 윤택하게 조각해나가는 데
    유용하게 써먹어보자.
    이런 게 하나 하나 쌓이면,
    삶은 몰라보게 쾌적해져간다.

  • 레벨업 시스템 설명

    레벨업 시스템 설명

    레벨업의 조건

    당신은,
    이 책의 각 레벨을 거치며
    점점 완전히 자유롭고 청량감 넘치는 존재로,
    될 수 있는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하는 존재로,
    렙업을 해나가게 될 것이다.

    각 레벨은,
    딱 3개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원하는 삶을 조각하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내용을
    추리고 또 추려서 딱 3개의 글로 줄였다.

    만렙(최대레벨)은 Lv20이다.
    각 레벨의 렙업은 그저 글 3개만 읽으면 끝난다.
    아무리 세상을 거저 먹고 싶더라도
    글 3개 정도는 읽는 근성을 보여주길 바란다.
    매일 글 1개씩만 읽으면, 두달만에 만렙이다.

    각 레벨은,
    향후 고렙을 찍기(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초부터
    가장 최고의 나를 조각해 세상에 구현해내는 만렙까지
    점점 더 성장하고 고양되어가는 흐름으로 쭉 이어진다.

    다만, 욕구 5단계 피라미드를 창시한 매슬로의 말처럼,
    그 앞전 레벨의 글을 숙지하는 정도가 완전히 100%가 되어야
    다음 레벨로 넘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 너무 빡빡하게 접근하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훌훌 읽으며 렙업을 해나가면 된다.

    당부

    단,
    한가지는 부탁하고 싶다.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있거든,
    그냥 넘어가지 말고
    거기 멈춰서서 꼭 10초라도 음미를 해주길 바란다.
    그 별 것 아닌 잠깐의 행동이,
    하늘과 땅의 간극을 만들어낸다.

    이 책을 당신 곁에 두고,
    오랜 시간 당신의 좋은 친구이자 도구로 삼길 바란다.

    당신은 분명히,
    지금보다 훨씬 더 청량감 넘치고 확신이 가득찬 날들을 누릴 수 있다.
    공허감, 후회, 불안 대신 긍지와 기쁨, 여유가 가득한 일상을 보낼 수 있다.

    이 책이,
    당신이 길 위에서 헤매지 않게 지도가 되어줄 것이다.

    추신

    각 레벨의 내용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읽어라고 말하진 않겠다.
    엄마아빠 말도 안 들을텐데,
    말해봤자 어차피 내 말을 들을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럼에도, 언젠가 한번은 꼭 읽어보길 권한다.

    … 렙업하는데 글 3개만 읽으면 된다.
    솔직히 말해서 개꿀 아닌가.

  • 영상제작을 위해 필요한 구성

    영상제작을 위해 필요한 구성

    영상을 제작하려면 어떤 구성이 필요할까.
    여기서 영상이란, 아주 짤막한 숏폼의 클립이나 광고영상부터 시작해
    드라마나 영화 등 큰 대형 영상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을 의미한다.

    내 생각은 이렇다.

    크게 세가지 파트가 필요하다.
    글, 영상, 소리.
    이렇게 세가지 파트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글 파트(연출계열)

    글은 언어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걸 상징한다.
    즉, 글은 우리가 표현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 철학, 가치, 의미를
    보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을 담당하는 파트다.

    글 파트에서 필요한 팀은 2개다.
    연출부, 그리고 제작부.

    각 부는 이러한 역할을 맡는다.

    1. 연출부 : 감독, 작가 등이 소속. 주제를 표현하는 연출 총괄
    2. 제작부 : 예산, 인력관리, 일정 관리 등 제작운영 제반사항 총괄

    영상 파트(시각계열)

    두번째로 필요한 파트는 영상 파트다.
    영상은 결국 우리가 제작해서 예술작품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최종 형태다.
    영상은 결국 시각적인 측면의 모든 걸 상징한다.
    따라서 영상 파트에서 필요한 팀은 4개다.

    1. 촬영부 : 촬영감독 휘하 카메라촬영 및 촬영장비 등 현장 촬영 총괄
    2. 미술부 : 미술감독 휘하 배경 등 세트, 소품, 시각적 디자인 총괄, 의상도 담당
    3. 조명부 : 조명감독 휘하 조명 전체 총괄
    4. 편집부 : 컷편집, 색감 및 질감 보정, 시각효과, 자막 등 편집 총괄

    소리 파트(청각계열)

    소리 파트는 청각적인 측면의 모든 걸 상징한다.
    촬영현장에서의 녹음부터, 영상 전반에 깔리는 OST와 효과음 등을 모두 관장한다.
    소리파트에 필요한 팀은 1개다.

    1. 음향부 : 음향감독 휘하 사운드트랙, 모든 촬영녹음 및 사운드 관련 총괄

    이렇게 총 7개의 팀이 필요하다.
    물론 각 팀들은 서로 상호보완적이고 유기적으로 협업을 하며 영상제작을 해나가야 한다.

    앞서 괄호로 표시한 각 파트별 계열을 키워드로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이렇다.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철학을 어떻게 전달할지 근본적인 예술작품의 조각을 구상하는 연출계열에 포함되는 연출부와 제작부.
    촬영, 미술, 조명, CG 등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내는 시각계열에 포함되는 촬영부, 미술부, 조명부, 편집부.
    시각만큼이나 전달하려는 주제를 구현해낼 때 중요한 청각적 요소를 관장하는 청각계열인 음향부.

    P.S) 글을 쓰고 나서 급작스럽게 떠오르는 잡생각

    …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영상을 제작하는 일은 종합예술이 맞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활동들이 다 포섭되는 걸 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내가 망치질이라 부르며 혼자 뚱땅거리기 좋아하는 활동들,
    어릴 때부터 무척이나 좋아라하던 다섯가지 활동은
    서사를 감상하는 것,
    말하는 것,
    무언가를 다시 내 식대로 재구성하는 것,
    작곡,
    운동.
    이렇게 5가지다.

    평생에 걸쳐 내가 참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딱 5개가 전부인데,
    그게 전부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형영상물을 제작하는 일에는 전부 다 제작의 일부과정에 포함된다.
    (뭐 내가 너무 예측가능하고 편협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걸수도 있긴 하다만…)

    … 만약 내가 영화감독을 꿈꾸는 사람이었다고 상상해보면,
    나는 이렇게 이해했을 것이다.

    서사를 감상하는 것은 영화나 좋은 예술작품을 보는 것이고,
    말하는 것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이구나.
    무언가를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건,
    내가 쓴 글을 시나리오로 바꿔서 새로운 세계관의 플롯으로 구현해내고,
    그걸 다시 콘티로 영상화할 수 있게 재구성하는 것이구나.
    작곡은 각 장면에서 나오는 모든 OST와 효과음을 만들어 배치하는거구나.
    운동은..? 아 운동은 안 걸치겠네.

    아무튼 뭔가 쓰고 보니 내가 평생토록 겨우 찾은 내가 사랑하는 활동들이
    영상 제작의 일부로 무조건 끌려들어가는 거 같아서 기분이 미묘했음을 기록해둔다.

  • 만동자 이야기

    만동자 이야기

    부처의 제자 이야기

    부처의 제자 중에는 ‘만동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부처에게

    세계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여래(붓다의 다른표현)는 사후에도 존재하는 것인가
    영혼은 육체와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와 같은 질문에 한 번도 부처가 답해주지 않았다며
    이에 대해 알려달라고 거듭 청한다.

    그러자 부처는, 한가지 이야기를 해준다.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아 고통을 겪으며 위태로운 상황인데,
    이 독화살을 내게 쏜 사람이 누구일까,
    무엇 때문에 내게 이 독화살을 쏜 것일까,
    이 화살의 문양은 어느 집단에서 쓰는 것일까,
    이런 것들에 집중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그 궁금증들을 해소하기 전에 죽고 말 것이다.
    중요한 건, 일단 독화살을 뽑는 것이다.

    관념적인 사색의 방향성

    어떤 것의 원인을 이해하고 숨겨진 이치를 깨닫는 일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숙고와 사색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좀 더 원하는 모습의 삶을 조각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저 오랜 고민과 탐구가 즐거워 그런 사색을 원하는 것이라면,
    이 책은 당신에게 맞지 않다.

    이 책에서 나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정리하고 재구성한 많은 이야기들을 할 생각이지만,

    이 모든 것들은 철저하게 우리가 삶을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들로 한정된다.

    그 이상의 고민들은 지금 우리에겐 필요하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독화살을 뽑는 일이니까.

  • 저항하지 마라

    저항하지 마라

    샤먼킹

    예전에 샤먼킹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타케이 히로유키 작가의 대표작으로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만화였다.
    샤먼들이 등장해서 서로 전투를 하는 내용인데,
    주인공인 아사쿠라 요우가 만화의 어느 지점에선가
    한참 성장을 한 후 상대의 공격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열몇살이 채 되지 않던 당시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항상 힘을 막아내고 물리치고 되받아치고 공격하는
    전투만화들을 사랑해왔던터라 ㅋㅋ
    공격을 해도 죄다 흘려버리는 컨셉에
    적잖이 당황하며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런 류의 아이디어들은 사실
    다분히 불교적이다.
    개인적인 흥미로 동국대에서 명상지도자과정을 들을 때,
    대학 시절 불교철학 교양수업을 들었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불교에서는 굳이 저항하고 받아치지 않는다는 걸.
    그저 흘려보낸다는 걸.
    그들은 그저 알아차리고 오히려 마음을 내려놓은 채
    그저 바라보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고요함을 얻고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사실 불교가 아니라도 오랜시간 검증되어온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세계 3대 영적지도자로 꼽히는 에크하르트 톨레도
    종교는 없지만 ‘저항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걸 보면.
    내 마음에도, 나의 상황에도,
    우리는 굳이 저항할 필요가 없다.

    순종하란 건 아니다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 순종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당연히 굴종적으로 굴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일에
    에너지를 소진하며 우리 삶을 낭비할 이유는 없다.

    피로감의 원천

    피로감의 원천은,
    받아들이기 힘들어서다.
    우리가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용납하기 힘들어서다.

    그러나 사실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 자체는
    그리 피로감이 쌓이는 일이 아니다.
    피로한 건,
    저항하느라 버티느라 걱정하느라
    힘을 쓰고 경계하고 긴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항하고 힘을 겨루는 대신,
    그저 흘려보낼 수도 있다.
    그저 계곡물이 온갖 바위모퉁이를 부드럽게 지나가듯.
    바닷물이 그 어떤 기후변화에도 의연하듯.
    우리가 종종 쓰는 표현처럼 ‘물 흐르듯’.

    버틸 이유는 없다

    우리는 대개 소신과 신념을 위해 ‘버티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굳이 버틸 이유는 없다.
    그건 마치,
    어린어이가
    친척어른이 말을 시킬 때
    대화하는 게 갑갑하고 싫어서
    어떻게든 입을 꾹 닫고 아무말도 안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거나
    가만히 째려보는 것과 비슷한 것인데,
    이건 비단 사춘기 꼬마아이들에게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우리는 명절날
    공부는 반에서 몇등이나 하냐,
    대학 어디 다니냐,
    취직 안 하냐,
    결혼 안 하냐,
    집은 샀냐,
    애는 안 낳냐,
    와 같은 질문을 친척어르신들이 던질 때
    애써 웃어주며
    적당히 둘러대곤 하는데,
    사실 아이들의 입꾹닫은 이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ㅋㅋ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기서 ‘저항’하는 일은,
    심히 무의미한 일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뺏기는 일이다.
    물론 웃어넘기며 아무 감정적 소모가 없다면 괜찮지만,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긴 그렇다지만)
    묘하게 나의 감정적 고요함에 잔물결이 일어난다 ㅋㅋ

    경계를 세우고, 이해해줘라

    자, 그럼 이런 숱한 문제들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라는거냐.
    일단 인지적으로.
    경계를 떠올려라.
    우리의 통제영역이 어디까지인지 경계선을 다시 한 번 떠올려라.
    그리고 통제영역 바깥이면 이해해줘라 ㅋㅋ

    응..?!
    뭘 이해해줘.
    저 눈치없는 친척이 맨날 나한테
    결혼 안하냐, 집장만 안 하냐, 애 안낳냐고 난리인데
    내가 뭘 이해해줘 저런 사람을.

    ㅋㅋ 아니다, 그래도 이해해줘라.
    뭐 그만의 세계와 합당한 이유와 상식과 의무가 있겠지.
    사실 우리에겐 그를 이해해주고 말고 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이해해줘라.
    어차피 그건 그의 자유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 우리의 통제권을 되찾아오도록 한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든 우리의 자유고
    그 누구도 감놔라 배놔라 할 수 없다는 걸
    가슴에 콱 새겨라.
    그러면 저항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은, 전적으로 우리꺼다.
    우리가 판돈을 건 게 아닌데,
    우리 돈으로 남과 저항하고 씨름할 이유가 있나.

    (만약 여기까지 읽고, 현실은 판돈을 걸고 돈을 따고 잃는 게임이 아니라, 이 돈이 우리꺼지만 우리손에서 돈을 강탈해가려는 무자비한 자들과의 관계인 거 아니냐!! 라고 말한다면,
    캬. 당신은 놀라운 통찰력의 소유자다.
    당신이 깨달은 그게 바로, 세상이 좀 댕같은 이유다.
    자, 이제 다시 하려던 이야기로 돌아가자.)

    흘려보내고 반응을 지켜보자

    근데 그렇게, 내 반응은 내 꺼라면서 상대방을 고려 안해버리면… 사이가 나빠질텐데 친척들하고?!!

    그럼 계속 맞춰주든 저항하든 에너지 쓰며 살면 된다.
    하지만 각자의 자유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눈치없는 친척 어르신들이
    적어도 상대가 불편한 질문을 설령 본의아니게 던졌더라도
    상대가 그에 대해 호의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아 내가 그의 불편함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잽싸게 물러선다.
    그가 최소한의 배려심과 사고력을 갖춘 분이라면.

    그런데 만약 그가 그렇게도 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이어가야할 관계인자 고민해봐야 한다.

    혈연의 저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글을 마치자.
    우리는 보통 혈연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혈연만큼 사람들이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게 하는 것도 없다 ㅋㅋ
    나의 길지 않은 개인상담 경험 속에는
    가족관계 문제로 상처받고 피흘리는 내담자의 비율이
    절반이 넘었다.

    언젠가 따로 글을 쓰겠지만,
    혈연이라는 사실이
    반드시 그 사람과 관계를 이어가야하는
    신성불가침의 이유가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혈연관계인 사람이
    무례하고 저급하고 속물적인 사람으로 당첨되느니,
    차라리 가족이 없는 게 나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내 가족을 끔찍하게도 사랑하지만,
    그들이 나와 가족이라는 건 그들과 끈끈해질 계기였지
    그들과 내가 서로 평생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내 부모가 날 아끼고 보살펴주어 그들과 깊은 관계를 이어가는거지,
    그냥 날 낳아줬다고 해서 그런 관계를 이어가는 게 아니란 이야기다.
    형제자매도 매한가지다.
    사는 내내 서로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고 받았기에 지금 우애가 좋은 것이지,
    피가 섞인 게 솔까말 그냥 우연인거지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다만 여기서 우리는 저항하게 된다.
    어차피 이 사람은 가족이고 나와 뗄 수 없는 사이니,
    이렇게 하지 마라, 저렇게 살지 마라,
    최소한 이건 해야지, 하면서.
    그럴 필요 없다.
    그건 상대의 자유다.
    대신 이 관계를 이어갈지도, 내가 어찌 반응할지도
    철저하게 나의 자유다.
    그냥 내버려두고 흘려보내라.
    각자의 자유를 존중하고.
    저항하지 말자.

    혈연관계야말로, 관계를 끊을 자유가 없어서
    우리가 흘려보내지 못하고 저항하게 되는 강력한 관계다.
    그런데 생각을 바꿔야 한다.
    패륜? 뭔 패륜.
    부모가 자식에게,
    배우자가 서로,
    형자자매가 서로,
    그것만 유독 뭐 엄청난 것처럼 잡아놓은 건
    그저 사회와 문화에서 그러기로 정한 약속일 뿐이다.
    거기에 무슨 엄청난 영혼이 깃든 게 아니라고.

    사회구성원이 그런 삼강오륜에 얽매이는 게 좋지.
    지배하고 관리하는 입장에서야.
    그런데 정작 왕족이었던 킬방원은
    형제 다 쳐죽이고도 잘만 왕으로 살았는데,
    일개 시민인 우리는 왜 거기에 아직까지 얽매여야 하나.

    우리나라 민법이 5개의 ‘편’으로 구성되는데, 그 중 두 개가 친족편, 상속편인 이유가 뭘까.
    가족 그게 그리 학교에서 가르치는만큼
    영원불변하고 강력한 그런 게 아니다.

    마치며

    이제 우리는 안다.
    저항하는 대신 흘려보내는 일이 퍽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케이스스터디도 했다.
    무례하고 눈치 밥말아쳐먹은 친척어른 이야기도,
    혈연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경계를 세우고 이해해주라는 이야기도.

    이 정도만 알게 되었어도, 필요한 건 다 안 셈이다.
    이제 우리는 시도해볼 수 있다.
    마음도 몸과 같아서,
    갑자기 250kg 스쿼트를 할 수 없듯이
    늘 눈치보고 참던 사람이 갑자기 강해지는 건 불가능하다.
    일상 속에는 다행히도 우리가 저항해야 할 크고작은 것들이 무수히 많으니,
    1kg핑크덤벨부터 무게를 늘려가듯이,
    하나씩 저항하는 대신 흘려보내는 일을 연습해보자.

    삶이 아주, 쾌청해지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ㅋㅋ
    꾸준함이 답이다.
    원석을 내리쳐라,
    신이 인사를 건넬 때까지.

  • 중2병이 가진 비범함

    중2병이 가진 비범함

    중2병

    그런 말 들어봤을지도 모르겠다.
    중학생 때.

    ‘쟤 요새 중2병 걸렸잖아.’
    ‘사춘기라 그래 쟤가 요새.’
    ‘한창 외모 신경쓰고 머리 피부 신경쓸 때지.’
    ‘자의식 과잉일 나이지. 다 자기 쳐다보는 거 같고 남들이.’

    어른들은 예나 지금이나
    고만한 나이쯤 되는 아이에게
    그렇게 말하곤 한다.

    … 근데 형님들.
    진짜야..?
    진짜 사춘기라 그런거고,
    이제 니들은 안 그런 게 맞아..?

    혹시 나이 60 넘어서도 여전히 그러면서,
    체면 때문에 안 그런 척 하는 거..
    아니겠지…?
    에이… 아닐꺼야…? 설마..

    위선

    늘 이야기하지만,
    어른들에게 속지 마라.
    살만큼 살고 나이를 먹으면
    자동으로 성숙해지고 현명해진다는 말은,
    당신이 변기에 오래 앉아있었으니
    더 매끈한 똥이 나올거라고 외치는 것만큼이나
    어이없는 소리다.

    이 말이 자기한테 내세울 게 나이밖에 없다고 착각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심기를 긁을 걸 알지만,
    내가 보기에는 더 살았다고 해서
    덜 산 사람보다 현명하고 지혜로울 이유는 거의 없다.
    더 오래 산 누군가가 더 현명하고 성숙한 건,
    결코 그가 단지 몇천번의 밥을 더 먹고 더 잠들어서가 아니다.
    그는 자각하든 하지못했든 스스로를 조각해왔던거다.
    깎고 가다듬고 가끔은 생채기도 내고 실수도 해가면서.
    그러니 어리다고 함부로 들이대는 어른놈들은
    말하는 것 중 태반이 구라라고 봐도 무방하다 ㅋ

    그렇게 어른이 된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내가 소위 말하는 ‘중2병’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하지만 체면이 있으니 이제 중2병이 지나간 것처럼
    그렇게 평생을 연기하며 살고 나면.
    그렇게 어른이 된다.

    어른은,
    망신당하고 조롱당할 게 무서워서
    더이상 중2들처럼 함부로 도전하지 않는다.
    상처받고 주저앉을 게 두려워서
    더이상 온마음을 열고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남들을 의식하며 살아온 게 통째로 부정당할까봐
    사회가 시키는대로 하지 않는 놈들을 미리 화형시킨다.
    부러우면 지는거라서, 그런 모습은 비웃음을 살거라서,
    부러워도 아닌 척, 원해도 안 원하는 척을 열심히 한다.
    남들이 날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무시하고 배척할까봐,
    나를 배신하고 타인의 기준에 맞는 사람으로 살기로 한다.

    결국에는

    결국에 이 ‘어른’이라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것인가.
    글에 굳이 하나하나 쓰진 않겠다.

    확실한 건,
    그들은 살던대로, 익숙한대로 가다간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자신은 잘못한 것도 없고
    남들 다하는대로 할 거 해내며 살았고
    착실하게 성실하게 바쁘게 살아왔는데,
    오지게 억울하게도 남은 것도 없고
    공허하고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나이가 먹어간다.
    이런 내 삶이 가엾고 괜히 짜증이 치밀어오르기도 한다.

    변화

    달라질 수 있다.
    움켜쥔 걸 내려놓을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중2때처럼
    진심을 다해 용기를 내볼 수 있다면.

    고로,
    중2병은
    병이 아니라,
    위대함이다.

    적어도 중2는 좀 솔직하잖아.
    자기가 남의식하는 거 인정도 좀 하고.
    젠 체 안하고 대놓고 좀 예민하기도 하고 ㅋㅋ
    우리 어른들하곤 다르게.

  • ‘살아남는 법’의 의미

    ‘살아남는 법’의 의미

    사실 이 책은
    단순히 생명을 부지한다는 의미의 ‘살아남는 법’
    에 대해서만 적혀있는 책은 아니다.

    물론 나는,
    책 제목을 보고 이 책을 펼친 당신이 기대한 대로
    이 험한 세상에서 죽지 않고 생존하는 법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도 렙업을 하는 초기단계에서 가장 먼저.
    다만, 단순히 생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좀 더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남는’ 법을 이야기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살아남는 일’

    모든 관념이 그렇듯이,
    ‘살아남는다’는 말의 관념 역시 모호하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나무 뗏목에 매달려
    어떻게든 숨은 쉬고 버티고 있다면
    그것도 ‘살아남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좀 더 넓은 의미의 ‘살아남는 일’이란,
    목숨에 위협을 받지 않고
    예기치 않은 위협에도 견고하게 존재하고 있을 수 있는 삶을
    구축하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조금 더 넓은 의미로 생각해볼까.
    만약 육체적으로 살아남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살아남는 것까지 생각해본다면?
    주위 사람들의 기대, 조직과 집단의 압박, 사회의 요구와 위협에 휘둘리며
    정신적으로 노예처럼 속박되어 휘둘린다면,
    그 삶이 과연 진정으로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실은 ‘죽어가는 것인지’는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나는 진정으로 살아남는 법을 이야기할 것이고,
    우리의 목표는 명확하다.
    우리가 최고의 우리자신을 조각하는 조각가가 되어,
    삶에서 ‘공허함’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청량감’으로 가득채워
    희열과 설렘이 가득한 삶을 사는 것.

    나는 당신이,
    죽거나 아프지 않고 생존해서
    몸과 마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힘을 가지도록 도울 것이다.

    그리고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에서 더 나아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충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진정한 스스로를 발견한 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잠재력과 예술성을 남김없이 발휘하여
    ‘될 수 있는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함으로써,
    후회와 불안 대신
    긍지와 확신을 가득채운 일상을 누릴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다.

    이게,
    책 제목에 적혀있는 ‘살아남는 법’의 진정한 의미다.

    전자가 협의의 ‘살아남는 법’이라면,
    후자는 광의의 ‘살아남는 법’이다.
    이 책에서 쓰는 ‘살아남는다.’의 의미는
    이 두가지가 혼용되어 쓰일 것이다.
    가급적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해두겠지만,
    어떨 때는 자세한 설명없이 그저 ‘살아남는’으로 적어두기도
    할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문맥에 따라,
    그것이 협의의 의미인지 광의의 의미인지
    스스로 잘 판단해주리라 믿는다.

  • 사고의 흐름

    사고의 흐름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

    이제 거의 다 왔다.
    우리는 곧 출발선에 서서, 본격적으로 렙업을 시작할 것이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전체적인 레벨업 흐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아까운 지면을 할애해서 렙업에 관한 사고흐름을 풀어쓰는 이유는,
    이쯤에서 전체적인 흐름에 대해 음미하고 시작하는 게
    당신이 렙업해나가는데 명백히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 때문이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

    의미

    삶에서 공허함을 몰아내는 단 하나의 방법은,
    최고의 나 자신을 조각하는 것이다.
    (이미 이야기했지만, 여기서 최고는
    통상적으로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최고’가 아니다.)

    최고의 나 자신을 조각하려면,
    당연하게도 우선 ‘최고의 나 자신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최고의 나는,
    태어날때부터 지니고 있던 잠재력과 예술성을 남김없이 모두 발휘해서
    내가 될 수 있는 가장 나답고 탁월한 나를 조각하여 실현했을 때의 내모습이다.
    즉, 그런 스스로를 조각하는 일에 몰입해 결국 최고의 나를 세상에서 실현해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최고의 나자신’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유

    최고의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유로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우리자신을 발견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자유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고 바라고 꿈꾸는 수많은 것들이
    사실은 타인이나 사회, 문화, 국가, 혹은 원초적 본능에 의해
    내가 바라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유란 무얼 의미하는가.
    자유란, 신체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 시간적 자유 모두를 의미한다.
    우리는 신체적으로 구속당하고, 정신적으로 속박당한 채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은, 사실 우리의 시간이 아니다.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신체적 자유를 어떻게 타인에게 내어주고 있는지 자각해야 하고,
    그걸 멈추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얼마나 정신적으로 주위의 시선이나 평가에 속박당해 있는지,
    왜 그런 형태의 예속과 지배가 우리도 모르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생존

    사실 자유를 얻는 과정은,
    우선 살아남아 몸과 정신의 컨디션을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힘을 기른 후에야 가능하다.
    아프거나 건강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한 의식상태에서는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제대로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영적으로 충만하고 직감이 날카롭게 깨어있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최고의 나로 조각해서 삶의 공허함을 없애고 의미를 향유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첫번째 관문이다.

    오늘 하루의 진짜 의미

    인생은 프랙탈 구조로 되어있다.
    프랙탈 구조란,
    전체의 일부가 전체와 유사한 기하학적 형태를 말한다.
    구름, 산, 번개, 난류, 해안선, 나뭇가지, 눈송이 등
    우리가 숨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대자연은 모두 프랙탈 구조로 되어있다.

    대자연의 일부인 우리의 삶 또한 프랙탈 구조로 되어있다.
    수많은 하루가 모여서,
    그 하루들과 동일한 모습의 ‘삶 전체’가 형상화된다.
    가령, 왼쪽 모퉁이가 찌그러진 하루들이 아주 오랜기간 반복된다면,
    우리 삶 전체의 모습도, 왼쪽 모퉁이가 찌그러진 모양으로 점점 바뀌어간다.

    오늘 하루는
    우리의 삶을 압축시켜놓은 우리 삶 전체의 집약체와도 같고,
    우리의 삶 전체는
    수만번의 하루들을 겹겹이 겹쳐놓은 것과도 같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건,
    흥미롭게도 삶 전체가 아니라 오늘 하루다.
    단지 그것 하나가 전부다.
    내일, 다음주, 내년, 미래라는 건 사실 허상이다.
    물론 미래는 높은 확률로 우리에게 주어지겠지만, 그렇다고 장담할 순 없다.
    게다가 언제 지금 현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달라져버릴지도 알 수 없다.
    미래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해도,
    그 미래는 늘 ‘지금’, 즉 현재의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영원히 ‘현재’안에서만 존재할 것이고, 수만번의 ‘오늘’만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최고의 나를 조각하기 위해 가장 먼저 조각해야 할 것,
    아니 유일하게 조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이다.

    오늘하루를 조각하는 일

    오늘 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하는 것,
    결국 내가 이 책에서 끝에서 할 이야기는 이것이다.
    오늘 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한다면,
    결국 건강한 심신에 깃든 최상의 컨디션과 완전한 자유를 얻어
    우리자신만의 의미를 실현하는 최고의 우리자신을 조각하는 일에 성공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최고의 나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난생 처음으로 발견하게 될 것이고,
    결국 최고의 나를 조각해
    삶에서 완벽하게 공허를 몰아내고 삶을 청량감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후회와 불안 대신, 긍지와 확신으로 가득한 일상을 보내게 될 것이다.
    피해자가 아니라, 조각가로서의 삶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먼 훗날, 죽음 앞에서도 후회없이 당당한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 영상제작의 3단계

    영상제작의 3단계

    언젠가 나는 글쓰기의 3단계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글이 아니라 영상에 관해,
    영상을 제작할 때의 3단계 과정을 살펴보자.
    전체적인 단계의 흐름은 이렇다.

    시나리오 -> 제작 -> 공개

    1단계. 시나리오

    1단계는 시각화에 들어가기 전
    모든 구상과 영감을 구현하는 글쓰기 과정을 말한다.
    영상을 제작할 때 1단계 과정인 ‘시나리오’단계는
    다시 크게 세 가지 세부단계로 구성된다.

    휘갈겨쓰기 -> 시놉시스 -> 시나리오

    역시 모든 창작의 혼을 잉태하는 건,
    휘갈겨쓰는거다.
    글을 쓰는 과정이므로, 사실 글쓰기의 ‘휘갈겨쓰기’와 같다.
    시놉시스 또한 글쓰기의 시놉시스 단계와 마찬가지다.

    감정선 -> 구간나누기 -> 구간별 주제(플롯구성)

    감정선을 그리고 구간을 나누어 구간별 주제를 잡는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전체적인 플롯을 짠다.

    그러고 나서는 시나리오를 작성한다.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건, 글쓰기에서 초고를 쓰는 것과 같다.
    글쓰기에서 초고를 쓰고 이를 수없이 퇴고하는 과정이 이어진다면,
    영상제작은 일단 시나리오를 쓰고 이걸 시각화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참고로, 영상을 제작하기 전에 별도로 글쓰기 자체만을 위한 글을 쓴다면,
    이 시놉시스 단계까지는 거의 유사하니 글쓰기 시놉시스 단계로 대체해도 된다.
    물론 그 후 플롯을 구성하는 건 아무래도 좀 더 영상에 맞게 짜야하므로
    글쓰기 단계로 대체가 완전히 되진 않겠으나,
    그 전 단계인 시놉시스 작성까지는 글쓰기의 동일단계로 대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2단계. 제작

    ‘제작’단계는 다시 세부적인 세가지 단계로 나뉜다.
    이 단계는 사실 모든 영상을 제작할 때 통용되는 단계구성이다.

    사전제작(Pre-Production) -> 촬영(Production) ->후반작업(Post-Production)

    사전제작 단계에서는 1단계 ‘시나리오’ 단계에서 완성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이제 ‘시각화’ 작업에 들어가는 단계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콘티를 만드는 일이다.
    시나리오는 인물, 배경, 사건, 지문, 대사 등 여러 가지가 담기지만,
    이를 영상화할 때 필요한 세부사항들은 담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시각화에 필요한 세부사항들을 담아 만드는 것이 콘티다.
    (콘티를 짜고 나면, 이를 좀 더 단순화해서 장면 위주로 요약한 스토리보드를 만들기도 한다.
    참고로 서양에서는 보통 ‘스토리보드’라는 단어만 사용한다. 혼용되니 버전이 다를 뿐 같은 개념이라 생각하자.)
    또, 출연하는 인물을 캐스팅해야 한다면 배우를 캐스팅하고, 스탭이 필요하다면 스탭을 구성한다.
    촬영장비와 장소를 선정하고 예산을 고려하여 촬영일정을 짠다.

    촬영단계에서는 콘티(스토리보드 포함)와 촬영일정에 따라 촬영을 한다.

    후반작업 단계에서는 영상을 편집한다.
    영상편집은 크게 세가지 파트로 구성된다.
    영상, 소리, 자막 및 효과.
    즉, 시각, 청각, 기타효과.
    이렇게 세가지 파트라고 이해하면 된다.

    영상 파트에서는 컷편집, 장면전환 및 배치, 색감 및 질감 보정 등을 담당한다.
    소리 파트에서는 촬영 사운드, OST, 효과음 등을 담당한다.
    자막 및 효과 파트에서는 자막 및 여러가지 VFX 등을 담당한다.

    후반작업 단계의 방향성을 한가지 적어두자면,
    영상은 글보다는 훨씬 흐릿한 날씨라고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유튜브 같은 숏폼 위주의 플랫폼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왜냐하면,
    유튜브는
    글이나 영화를 보는 것만큼 유심히 집중해서 감상하는 컨텐츠 플랫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확해야 하고,
    크고 자극적인 것들이 의외로 그리 과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디테일이 달라지더라도 같은 내용을 강조하게 되면
    자칫 단순반복으로 오해하기 쉬운 등 여러 면에서 글과는 차이가 있다.
    시청자는 늘 중간에 이탈할 준비를 하고 있는 수준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걸 고려해서
    좀 더 직관적이고 재밌게, 조금은 과장되게,
    절대 반복되는 것 없이 훨씬 컴팩트하게 만들어지는 방향으로
    편집이 되는 게 필요하다.

    3단계. 공개

    자, 이제 공개단계다.
    이 역시 글쓰기와 유사하게,
    아무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하다.
    세상에, 사람들에게.
    내가 나의 내면에서 끄집어낸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개되는 순간부터,
    이 영상은 이제 내 품을 떠나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다.

    공개의 방식 중 하나로 요즘 내가 생각하는 것은,
    애초에 촬영하는 단계를 아예 스트리밍 생중계를 통해 하는 것도
    꽤나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시간 스트리밍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숨길 수 없는 ‘인간성’을 가진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시대는
    AI가 모든 예술작품을
    상상 이상으로 평균적인 수준으로 빠르게 만들어낼 것이
    자명해보이는 시대다.
    여기서 우리가 AI보다 명백하게 탁월할 수 있는 건
    바로 ‘인간적인 것’이다.
    즉, 인간이어야만 줄 수 있는 것.
    실시간 스트리밍 말고 모든 비실시간 작품들은
    점점 더 빠르게 AI도 제작할 수 있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여러 가지 형태로 가공해서 다른 버전들을 예고편이나 클립 등으로
    공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요즘은 초단위의 시대다.
    다른 의미에서 초단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초단위에 결정난다.
    이걸 계속 볼지 말지, 이게 재밌는지 아닌지, 같은 것들 말이다.
    숏폼 영상은 오늘날의 대세다.
    사람들은 긴 영상을 끈기있게 보는 일이 낯설고 힘들다. 점점 더.
    그러므로,
    완성된 영상에서 좀 더 중요하고 흥미로운 부분을
    숏폼 형태로 잘라서 공개하는 건, 퍽 괜찮은 일이 된다.

  • ‘결자해지’는 착각이다

    ‘결자해지’는 착각이다

    결자해지

    맺을 결(結), 놈 자(者), 풀 해(解), 어조사 지(之).

    일을 저지른 놈이 사고친 건 수습해야 한다는 말이다.

    좋은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이 저 말처럼 그렇게 굴러간다면,
    ‘세상이 지옥같다’는 말을 굳이 내뱉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자성어는 사자성어일 뿐.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는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이걸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한다.

    잔혹한 삶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는 사자성어 대신,
    진실을 이야기해보자.

    사는 게 힘들다.
    아무리 노력해도 생각처럼 잘 되지 않고,
    기대할만한 미래가 보이지 않고,
    하루하루 겨우 견디긴 하지만 고통의 연속이다.

    그래, 세상이 문제다.
    이 세상은 불공평하고 더럽고
    윤리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못해서 그렇다.

    그러면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은,
    세상이 다시 아름답고 윤리적이고 공평해져서 해결되어야 할 일이다.
    내 탓이 아니니까.

    … 정말 그럴까?

    세상은 애초부터 공평하지 않다.
    그리고 세상이 공평해야 한다는 건,
    우리들의 간절한 희망일 뿐,
    실제 세상은 전혀 그런 거에 관심이 없다.
    단 한 번도 세상은 그런 적이 없었다.

    그리고 위의 결론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백번 양보해서 이 모든 나의 고통이 철저하게 세상 탓이라고 해보자.
    그렇다고 해도 저 결론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맞는 말 절반은 ‘세상이 지옥같아서 내 삶이 이리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틀린 말 절반은 ‘이 고통의 원인인 세상이 올바르게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틀렸다는 게,
    세상이 더이상 그러지 않도록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야, 너무 좋지.
    세상이 그렇게 올바르게 된다면, 정말 너무 좋지.
    그래서 우리 각자의 힘겨움과 고통이 해소된다면, 너무 좋지 진짜.

    근데 그게 되냐고.
    우리가 힘겨우니 세상은 속히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라,
    라고 외치면 세상이 우리 뜻대로 변할까.
    그럴 일은 없다.
    세상은 우리의 뜻대로 움직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녀석이 아니다.

    내가 힘겨운 게 지옥같은 세상 때문이라 한들,
    원인을 제공한 세상이 이 힘겨움을 해소해주는
    ‘결자해지’는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해결은 누가해야 할까

    해결은 우리가 해야 한다.
    그게 바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다.

    아니, 왜?
    내 잘못이 아니잖아?
    내 탓이 아닌데 왜 내가 그걸 해결해야 해?

    이 XX같은 생각을 뜯어고쳐야 한다.
    비난을 하는 게 아니다.
    그냥 우리는 모두 당한거다.
    학교에서 그리 가르치니까.
    그래야 옳은 것이니 우리에겐 책임이 없다고 가르치니까.

    하지만 우리의 삶은 오롯이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잘못이 0.1도 없다한들 내 삶의 중심에 선 주인은 우리다.

    학폭

    이미 오래전부터 불거져왔지만 여전히 쉽게 해결되지 않는 학폭문제는
    요즘도 항상 거론되는 문제다.
    유명해진 연예인이 과거 학폭문제로 나락가는 일은,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익숙한 광경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학폭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얼마나 개같은 경우인가.
    물리적인 힘에 짓눌려 나의 존엄이 짓밟히는 일은
    그 어떤 시대,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긴다.
    여기에 학폭 당하는 사람의 잘못이 뭐 얼마나 있을까.
    십중팔구 학폭가해자의 잘못이다.

    그런데 여기서, 결자해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 고상한 사자성어에 따르면,
    이 학폭 문제가 해결되려면 학폭가해자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태어나 피해자에게 무릎꿇고 싹싹 빌며 사과하고 죄를 뉘우쳐 더이상 폭행을 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그러면 너무 좋지!
    그런데 그 숱한 학폭문제의 결말을 인터넷으로 한 번 찾아봐라.
    그런 일이 벌어지냐고.
    그런 일이 안 일어난다는 걸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세상 모두가 안다.

    이 때 피해자는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피해로 심신이 피폐해진다.
    하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새 사람이 되어 죄를 뉘우치고 저 악행을 멈춰야지.’ 라고만 생각한다면,
    그 피해자의 삶은 그 버러지같은 가해자 때문에 계속 흔들리고 허물어진다.

    분통이 터지더라도, 결국 선량한 피해자 본인이 힘을 내어 자신의 삶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신고를 하든, 고소를 하든,
    학교를 옮기거나 무단결석을 해서라도 가해자를 피하든,
    아니면 이악물고 MMA체육관에 가서 그 새끼를 죽여버릴 수 있을 때까지 힘을 기르든,
    무언가 움직임이 있어야만 한다.

    억울할 수 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그 고생을 해야 하나.
    가뜩이나 이미 너무 고통스럽고 상처투성이에 피흘리는 중인데.
    하지만 내 삶을 위해 일어서서 움직여야 한다.
    여지껏 살아온 이 답답하고 공허한 삶, 후회와 불안으로 뒤범벅이 된 삶의 굴레를 끊어내고,
    될 수 있는 최고의 내가 되어 청량한 정신으로 기쁨과 희열이 가득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학창시절에 그런 일이 내게 벌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영영 나의 일은 아닐거라 장담하지 마라.
    장소가 학교가 아니고 벌어지는 일이 폭행이 아닐 뿐,
    힘에 의해 강제로 짓밟히거나 유린당하는 일은
    살다보면 부지불식 간에 인생에 불쑥 찾아오니까.

    그 때 가장 우리에게 중요한 건,
    ‘결자해지’는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