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대장장이 휴

  • 어린시절 행복했던 순간

    어린시절 행복했던 순간

    인간의 삶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낙타와 사자를 거쳐
    어린아이가 된다.
    그리고는 결국
    자기자신 안에 잠들어있던 신에
    가까워져간다.
    그래서 혹자는
    ‘어린아이가 결국 인간의 원형이므로
    어린아이가 궁극의 인간상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어린아이의 상태로
    매순간 존재하며 살아가는 건,
    분명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긴 하다는 데는 백번 동의한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상태를 유지하지못한다.
    어린아이들은
    머지 않아
    타인과 세상의 끝없는 회유와 협박,
    세뇌와 통제에
    굴복할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세상에 갓 나와 잠시동안 경험했던
    거리낌없던 자유와 희열을 다시 되찾아가는 과정을
    삶 전체를 통해
    경험해나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다만 세상은
    절대 당신이 그 여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가치의 조건화

    세상은
    어떻게 당신이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도록
    만드는가.

    인간은
    소위 ‘사회화’라는 그럴싸한 명분 하에
    지속적으로 한가지를 주입당한다.
    그건 바로,
    굴복이다.

    무엇에 굴복하는가.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타인이 원하는 요구에 굴복한다.
    우리는 이걸 배운다.

    그냥 협동심과 양보, 배려심을 배운다고 하면 되지
    굳이 굴복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실제로 나의 욕구와 소망 대신
    타인의 요구와 기대를 선택하는 일은
    너무나 비극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은
    타인의 인정과 애정을 잃을까 두려워,
    자기 내면의 진심을
    벼랑끝에서 떠밀어버린다.

    최초로
    인간이 굴복을 배우는 사건은,
    보통 배변을 가리는 일이다.
    배변욕구가 일어나면
    다른 동물들처럼 그 자리에서 배변을 하다가,
    사회에서 약속한대로
    그걸 어떻게든 참고 견뎌서
    시간과 장소에 맞게 배변을 통제하는 일.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부모가 지닌 가치를 잣대로
    자기자신을 판단하고 통제하는 일을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정신분석에서
    배변을 가리는 시기에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생기고
    초자아(Superego)가 태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하는 건
    그래서다.

    부모가 좋다고 판단하는 게
    내게도 좋은 것이고,
    부모가 나쁘다고 판단하는 게
    내게도 나쁜 것이다.
    여기서 내 경험적 가치와 부모의 가치가 충돌하면,
    어린아이는
    주저없이 내 가치의 목을 베고
    부모의 가치를 내 가치로 새롭게
    이식해버린다.
    어린아이에게는,
    자신에게 세상 전부인 부모에게 버림받지 않는 것이
    내 내면의 가치와 욕구를 보살피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꽤나 눈물겨운 일이어서,
    내가 진짜 나로서
    아주 솔직하게 체험하는 모든 경험은,
    조금씩 내 기준이 아니라
    부모님의 기준에 따라 체험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굴복은,
    사는 내내 우리가
    우리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가치가 아니라
    타인과 세상이 정해주는 가치를 따라 살게 한다.
    이를 인간중심상담이론에서는
    ‘가치의 조건화’라고 한다.

    진실을 찾는 한가지 방법

    이 몹쓸 짓거리로
    평생동안 세뇌되어 온 우리가
    가치의 조건화를 풀기 위해 해야할 일은,
    사실 우리가 레벨업을 하며
    이 책에서 차근차근 밟아온
    모든 렙업과정들이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두고,
    지금 우리가 이번 레벨업을 위해 해야할 일을
    이야기해보자.
    사실 이건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렙업들보다는
    좀 더 간단한 일이다.

    그건 바로,
    가치의 조건화가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전에
    우리가 내면의 소리를 따라 움직였던 순간들을
    찬찬히 떠올려보는 일이다.

    어릴 적 당신은 무엇이었을까

    소위 ‘사회화’가 조금이라도 덜 되었을 때,
    우리가 타인의 가치에 따라 세뇌되고 휘둘리기 전으로
    한 번 돌아가보자.
    그 어떤 의무도,
    그 어떤 요구나 압박이나 기대도,
    그 어떤 수치심이나 비웃음이나 열등감도,
    아직 우리에게 주입되지 않았던 시절,
    그 때도 분명 우리는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니, 그 때가 오히려
    무언가를 하며
    훨씬 더 즐겁고 청량감이 가득한 시간들을 보냈던
    시기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시간들을 찬찬히 떠올리며
    되뇌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가장 길들여지지 않았고
    세뇌당하지 않았던 순수한 시간들,
    그 시간들 속에서
    당신은 분명
    더할나위 없는 행복을 누렸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릴 적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에도 쫓기거나 초조해하지 않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던 시절.

    그 시절 속에,
    분명히 내가
    그저 기뻐하며 희열을 느끼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걸 찬찬히 편안한 마음으로 떠올려보고
    무언가 생각이 날 때마다
    그게 무엇이든 적어라.
    시간을 길게 두고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말고
    충분히 편안한 상태로
    오랜시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하던 일들은,
    그 일을 하면
    타인의 칭찬이나 인정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 일을 하면
    친구들의 부러움이나 세상의 찬양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어린아이들은
    무언가를 하다가도
    조금이라도 더 흥미로운 것이 나타나면
    즉시 하던걸 멈추고
    더 흥미로운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기 내면의 소리에만 충실하던 시절의
    순수했던 당신,
    나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세상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주던
    놀라운 현명함으로 가득하던 당신이
    한껏 행복해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라.

    그 중 분명
    나만의 고유한 개성과 정체성,
    내 영혼의 결에 맞는 순간들이
    숨어있다.
    우리의 예술성과 잠재력이
    아주 찰나라도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웠던 순간들이
    숨어있다.
    어린 시절
    우리가 가장 기쁘고
    유난히 희열에 가득찼던 순간들.
    그 순간들이
    당신이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 Lv18. 별빛을 발견한 여행가

    Lv18. 별빛을 발견한 여행가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법과
    지금 이 순간
    가장 영감과 직관이 가득할 수 있는 상태로 머무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제
    진정한 자기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날 시간이다.
    이번 레벨을 통해 우리는,
    가장 나다운 나,
    타고난 예술성과 잠재력을 발휘해 될 수 있는
    최고버전의 나,
    진정한 나자신을 발견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 자연스러운 속도

    자연스러운 속도

    나의 속도

    페이스.
    호흡.
    리듬.
    이렇게 생각해도 무방하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리듬이 존재한다.
    나에게는 나만의,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페이스와 속도가
    존재한다.
    각자는
    각자에게 가장 편안한
    호흡의 리듬이 있다.
    그 페이스를 유지하는 일은
    우리가 내면에서
    예술성과 잠재력을 가장 마음껏 발휘하고
    삶을 가장 청량감 넘치게 누리는 일의
    토양이 된다.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템포를 유지하는 일,
    이는 매우 중요하다.

    나의 자연스러운 속도를 찾는 일

    나의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속도, 리듬은
    어느 정도의 템포인가.
    그 척도가 되는 속도는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시간의 왜곡이 일어날 때까지 했을 때
    를 보면 알 수 있다.

    가령,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거나 운동을 했을 때,
    혹은 좋아하는 작가가 쓴 책을 읽었을 때,
    나도 모르게
    시간이 터무니없이 빠르게 흘러가버렸을 때
    가 있을 것이다.
    이 시간왜곡이 발생했을 때
    나의 템포를 살펴보면 된다.
    그 때의 내 속도가 바로
    가장 자연스러운 나만의 페이스다.

    그런데 각자가 가지는 페이스는
    무언가에 몰입할 때 그 몰입대상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즉, 운동할 때와 음악을 들을 때의 페이스는
    같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삶을 구성하는 각 활동들에 대한
    나만의 리듬은
    활동마다 별개로
    각각 알아두는 것이 좋다.

    늘 조급하다

    인간은 늘
    자신의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템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살아간다.
    조급해하고, 초조해하며,
    뭐에 쫓기듯이 말이다.

    왜 그런걸까.
    왜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페이스를 내팽개치고
    더 빠르고 급하게 움직이는가.

    그건 바로,
    불안 때문이다.
    인간은 불안하기 때문에,
    늘 초조해하며 다급히 움직인다.

    재촉당하던 기억

    이 불안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건 바로
    과거에 늘
    누군가로부터 채근당하고
    얼른 하라고 질타받던
    기억으로부터다.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우리만의 자연스러운 템포로
    그 일을 마칠 때까지
    충분히 시간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는 존재는
    인생에서 거의 마주칠 일이 없다.

    세상의 재촉, 압박과 무관하게
    나만의 편안한 호흡을 유지하는 일은,
    엄청난 비난과 공격에 부딪힌다.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했음에도,
    타인이 요구한 속도와 시간제한에 맞추지 못하면
    감사와 지지는커녕
    비난과 손가락질만 돌아온다.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이런 경험들은,
    우리가 결코
    우리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잘못된 믿음

    빨리 빨리 하는 것이
    가장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착각은
    의외로 사람들의 뇌리에
    뿌리깊게 박혀있다.

    중간에 실패하거나
    시행착오로 인해 멈추거나
    중단되지 않고,
    그냥 스트레이트로 쭉
    빠른 속도로 모든 과정을 뚫고 지나가는 것만이,
    최상의 결과를 만드는
    가장 완벽한 왕도라는 믿음.

    이 잘못된 믿음은
    우리가 삶을
    내 페이스가 아닌
    가급적 빠른 페이스로 채워나가도록
    우리를 현혹한다.
    하지만
    가장 탁월한 최고의 작품을 조각해내기 위해
    필요한 속도는
    ‘빠른 속도’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편안한 ‘우리만의 속도’다.

    장거리 달리기를 해보면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가장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원하는 목적지까지 달리기 위해
    필요한 첫번째는,
    바로 나에게 맞는 페이스를 찾아
    그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리는것이다.
    단거리 달리기처럼
    지금 내 힘이 닿는대로 힘껏 내달려서는
    10분도 채 못가서 멈춰서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가장 탁월한 결말을 조각해내는 일은,
    우리 각자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데서
    시작된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존재

    누구나
    자기자신을 믿지 못한다.
    인간은 결코
    자기자신을 믿지 못한다.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느낌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한다.
    그러니
    초조하고
    다급해지고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는,
    조급한 마음과 불안함 때문에
    나만의 속도를 잃어버리는 이유는,
    바로 자기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졸갑증에 의해
    인간은
    자신만의 페이스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내가 지금 걷는 이 길이,
    내가 선택한 나만의 의미와 삶의 방향이,
    지금 자신의 결정이
    가지는 권위를 충분히 인정하고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이 흔들릴 때,
    인간은 자신의 페이스를 잃어버리고
    남들은 어쩌고 있는지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나만의 호흡을 유지하라

    스스로의 경험에 대한 확신은,
    우리를 마음놓게 한다.

    누군가의 허락도 구하지 말고,
    누군가의 간섭을 허락하지도 말고,
    더이상 불안해하지도 말고,

    그저 내가 느끼고 체험하는
    경험과 확신으로
    내 자연스러운 호흡과 속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우리가 가져야할 세번째 마음가짐이다.

  • 청량감

    청량감

    청량감

    쾌활함.
    기쁨.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다.
    늘 언제 어디서든
    티없이 즐겁고
    쾌활하고
    기쁜 마음으로
    청량감 넘치는 정신을 지닌 채
    일상을 누리는 일.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청량하고 쾌활한 마음의 뿌리

    청량감 넘치고 쾌활한 정신은
    무엇으로부터 꽃피우는가.
    그건 바로,
    감사함이다.

    지금 이 순간 살아숨쉬고 있음이,
    오늘도 여전히 어제처럼
    사랑하는 이의 눈을 맞출 수 있음이,
    자유롭게 말하고 움직이며
    내 삶을 원하는 모습으로 조각해나가는 일을
    한걸음 더 내딛고 나아갈 수 있음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이 감사한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세계의 많은 것들이
    진심으로 감사하다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쾌활하고 기쁜 마음을 지닌 채
    존재하게 된다.

    충분한 쾌활함을 위해 필요한 것

    뿌리가 땅 속에 잘 자리잡았다고 해서,
    모든 식물이
    그가 가진 잠재력을 남김없이 꽃피워내는 건
    아니다.
    충분한 쾌활함과 청량감을 위해서는,
    우리가 터득해야 할 것들이 있다.
    정확히는,
    우리의 청량감과 쾌활함을 방해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힘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정신적 자유

    인간의 정신적인 자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이야기를 나눴다.
    (까먹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Lv14부터 Lv16까지
    다시 한 번 슥 읽어보길 권한다.)
    타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타인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고자 노력하는 한,
    인간은 결코
    진정으로 쾌활한 정신을 지닐 수 없다.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기쁨을 지닌 채
    일상을 보내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여야 한다.
    삶이 추구하는 목표가,
    변덕스럽고 편협하기 그지 없는
    ‘타인의 마음’이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결코 청량감 넘치고 쾌활한 마음으로
    매순간을 누릴 수 없다.

    타인에게 부여한 권능

    타인의 마음을
    삶의 지향점으로 삼는 것과 별개로,
    인간이 쉽게 저지르는 실수가
    하나 더 있다.

    인간은
    타인에게
    일종의 권능을 부여한다.
    그 권능이란,
    나의 쾌활함과 청량감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능이다.
    이 실수의 대가로,
    인간은
    쾌활한 정신을 유지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청량한 마음을 유지하는 일의 핵심은,
    타인에 의해
    내 청량감과 쾌활함이 좌우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물론,
    타인과 세상은
    그걸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학교선생님과 교수님은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당신이 마음 깊숙이 쾌활한 상태인 걸
    참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상사는
    자신이 가족과 다퉈서 기분이 X같을 때,
    팀원인 당신이
    청량감 넘치는 시간을 보내는 걸
    X같이 여길 수 있다.
    이건
    당신의 연인,
    친구,
    심지어 부모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것들은 결국
    당신의 쾌활함을 대하는 타인의 태도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에 따라
    당신은 아마
    쾌활하고 청량한 마음상태였다가
    타인의 적대적이고 경멸하는듯한 태도에
    화들짝 놀라 주눅이 들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이 허락해주기 전까지
    쉽사리 마음껏 쾌활하거나 기쁘지 못한다.

    통제영역에 대한 명확한 지각

    하지만
    우리가 이미 여러 레벨에 걸쳐 이야기했듯이,
    통제영역의 명확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
    타인이 그러고 싶은 건 그들의 문제고,
    그들의 그 생떼를 받아줄지 말지 결정하는 건
    우리의 문제다.
    그들이 그런 권능을 우리로부터 부여받아
    횡포를 부리고
    그 횡포에 우리가 벌벌 떨 지 말 지는
    전적으로 우리가 결정할 일이라는 말이다.

    나는 나,
    타인은 타인이다.
    그들이 우리의 쾌활함에 적대적이고 싶은 건
    그들의 자유다.
    ‘그들이 그러면 안 되지’ 라는 건
    순전히 내 욕심일 뿐이다.
    하지만 그거에 하루에도 열번씩
    나의 쾌활함이 오락가락 할 지 말 지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다.
    우리가 그러길 바라는 건
    순전히 그들의 욕심일 뿐이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

    내가 즐겁고 기쁜 경험을 하고 있다면,
    그걸로 된거다.
    내 마음이 쾌활하다면,
    내 삶은
    지금 충분히 쾌활하고 기쁘면 된다.
    여기에
    불순물이 끼어들 틈을
    허락하지 마라.
    여기에
    타인의 요구와 욕망이 끼어드는 걸
    허락해주지 마라.
    당신의 마음과 감정,
    당신의 느낌을
    믿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용기를 낸다면,
    당신은
    늘 쾌활하고 청량감 넘치는 일상을
    누리는 존재가 되어가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감사함(ft. 유한함)

    감사함(ft. 유한함)

    유한함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다.
    즉,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늘
    있어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어떤 경우에도 일어나지 않는다.

    죽음

    변화란,
    지금 이 모습은
    언젠가는 소멸한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가 죽음이라 말하는 것.
    늘 우리 가까이 있지만,
    반드시 외면해야만 하는 것.
    그래야만 숨을 쉴 수 있는 것.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죽음을 망각한 생활과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옴을 의식한 생활은
    두 개가 서로 완전히 다른 상태다.
    전자는
    동물의 상태에 가깝고,
    후자는
    신의 상태에 가깝다.

    반성

    나는,
    그 누구보다도
    동물의 상태에 머문 채
    삶의 대부분을 살았다.
    천성적으로
    감사보다 불만을 민감하게 느끼던 내가,
    얼마나 많은 걸 잃고서야
    비로소 모든 것들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가만히 돌이켜보면
    지금도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아직 잃지 않았다고 해서
    내일도 여전히 그럴 것이라는
    XX같은 착각은,
    인간을
    지옥의 바닥 끝으로 떨어뜨리는
    가장 끔찍한 패착이 된다.
    나에게나 당신에게나,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더이상 단 0.1초도 듣지 못하게 되는 그 순간은
    반드시 온다.
    우리는 단지,
    그게 언제가 될 지
    그 타이밍을 모를 뿐이다.

    신의 상태

    톨스토이가 말한
    ‘신의 상태’에 가까운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시시각각 죽음이 다가오고 있고
    어쩌면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질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의식하고
    곁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한다.
    두렵고 고통스러워 망각할 뿐,
    죽음은
    엄연한 인생의 진실이고
    우리에게 늘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감사하지 않는 일의 어려움

    학교에서는
    도덕 교과서와 옛 성현들 말씀을 이야기하며
    ‘모든 것에 감사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나는
    ‘성숙한 인간이라면 마땅히’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걸
    싫어한다.
    그리고 또
    그리 규정된대로,
    지켜야하는 교리를 따르느라
    감사하며 사는 것 또한
    싫어한다.
    그건 흔해빠진 위선이고,
    가장 변절하기 쉬운 굴종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순간,
    모든 사소하고 당연한 것들에
    깃들어있는 기적과 축복에 감사하는 일은,
    그 모든 것들이
    반드시 언젠가는 그 모습을 잃고 사라질 거라는
    강렬하고 선명한 자각에서 탄생한다.
    도망치지 않고
    죽음과 유한함을 마음 깊숙이 받아들이고
    시시각각 이를 인식하며 사는 한,
    인간이 매순간 감사하지 않는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당신은,
    늘 곁에 죽음을 두고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 용기와 강인함이,
    인간에게
    가장 깊고 순수한 감사함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이것이,
    최고의 나를 발견하기 위해 지녀야 할
    첫번째 마음이다.

  • Lv17. 미소를 머금은 나무꾼

    Lv17. 미소를 머금은 나무꾼

    드디어 우리는,
    인간이 타인에게 정신적으로 속박되어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가는 세가지 이유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은
    혼자 소외되어 버려질까봐 느끼는
    유기불안을 안고 산다.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낮은 위상을 가지게 될까 벌벌 떤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하는 자유가 두려워
    집단에 의탁한다.

    당신은
    타인으로부터 충분한 정신적 자유를 얻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것은,
    진정한 우리자신을 찾아나가는 일이다.

    단, 진짜 우리자신을 발견해나가기 전에
    먼저 발견해야 하는 게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머물러야 하는
    상태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만을 살아간다.
    매순간,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이번 레벨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매순간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최상의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루하루
    가장 영감과 직관이 충만하고
    기쁨과 청량감이 가득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를 늘 유지하면서,
    우리가 가야할 삶의 방향과 의미를
    편안하고 여유롭게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 그 결정은 결코 당신을 위한 건 아니다

    그 결정은 결코 당신을 위한 건 아니다

    정말 그거면 괜찮을까

    모든 집단은
    구성원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그 길을 함께 걷는 아늑함에
    우리도 함께 할 수 있다.
    실패하면
    책임은
    우리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진다.
    이걸 제시한 집단의 책임이지,
    나의 책임이 아니다.

    그런데 정말
    그거면 되는걸까.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그게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만 보장되면,
    그걸로 우리 삶은
    충분한걸까.
    어쩌면 정말 중요한 결정이
    그렇게 내가 아닌 외부의 선택에 의해 내려져서
    그게 실패로 끝나버리고 나면,
    혹시 언젠가
    억울함이나 원망을 가지게 되는 건 아닐까.
    왜 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그렇게
    날 위한 결정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결정으로 내려버렸냐고
    누군갈 원망하고 억울해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예정된 후회

    타인이,
    즉 무리와 집단이
    당신 대신 결정을 해주겠다는 유혹은
    사는 내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책임 없이
    시키는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그 아늑함에
    당신은 매혹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들이 당신 대신 내리는 그 결정은,
    단언하건대 당신을 위한 건 아닐꺼다.
    물론 입으로야
    당신을 위한 결정이라 말하겠지만.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이다.
    이용당했다는 걸.
    그들은
    당신을 모르며,
    당신을 아끼지도 않고,
    당신의 자유를 자신들을 위해
    최대한 착취하고 이용하고 싶어한다.
    하여,
    먼훗날 어쩌면
    당신은
    삶이 이상하게 흘러가버렸다고
    울부짖게 될지도 모른다.

    판단을 의탁하기로 한 결정도 결정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둘로 나뉜다.
    자신의 삶을
    원하는 모습으로 조각해나가는
    ‘조각가’와
    끝없이 외부로부터
    휘둘리고 조종당하며 이용당하는
    ‘피해자’.

    우리가 피해자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스스로 삶을 결정하는 자유가
    내 손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자유를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책임이 전적으로 내게 올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판단을 의존하기로 한 선택도,
    스스로 무언가를
    판단내리고 선택하는 결정만큼이나
    큰 의미를 가지는 중대한 결정이다.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무언가를 하는 결정보다
    더 엄청난 결정이 되곤 한다.
    내 삶의 결정권을
    남에게 줘버리기로 한 결정이,
    과연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일보다
    덜 위험한 결정일까.

    더욱 혹독한 대가

    내 삶을 내가 결정하지 않는 대가는,
    무언가를 선택해서 받는 대가보다
    더욱 혹독할 수 있다.
    특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남들이 하는 선택,
    내가 속한 집단이 하는 판단을
    그저 따르게 되면,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무능하고
    현명하지도 않고
    우리보다 뛰어날 것도 하나 없는
    멍청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대로,
    그렇게 우리의 삶이
    흘러가버릴수도 있게 된다는 말이다.
    다들 자신이 직접 책임지고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한 탓에,
    시덥잖은 소수가
    지들 마음대로
    다수를 움직이고 조종하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용당하는 다수 중 한 명이
    바로 우리일지도 모른다.

    아마 애초부터 그들은
    우리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선택을 해왔을 것임은
    이제 더 말할 필요도 없고.
    결국 이 서사의 결말은,
    우리가 ‘피해자’가 되어 살아간다는
    슬픈 내용이 전부다.

    스티브잡스가
    한 대학교의 졸업식 축사로 했던 말을
    여기 적어둔다.
    “Everything around you that you call life
    was made up by people that
    were no smarter than you.”
    “(당신이 ‘세상’이라고 부르는) 당신 주위의 모든 것들,
    즉 당신의 세상은,
    실은 당신보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스스로 결정하는 힘을 길러라

    착각하지 마라.
    우리가 결정을 타인에게,
    내가 속한 무리나 집단에게 넘겨준다고 해서
    삶의 중대한 결정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실패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 결정권을
    우리를 위하지도 않는 타인에게
    넘겨버리기로 한 것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현명하지도,
    지혜롭지도 않은 멍청한 자들에게
    내 삶을 넘겨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것을 선택하고
    무슨 판단을 내려야 할지
    두렵고 고민되더라도,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삶을 결정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막연하고 공허하더라도,
    설령 방황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결국
    진정한 우리자신을 발견해
    최고의 나를 조각해나갈 것이다.
    스스로를 믿어라.
    당신은
    충분히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다.

  • 집단은 모든 걸 대신 결정해준다

    집단은 모든 걸 대신 결정해준다

    당신을 이용하고 싶은 자들

    타인의 시간(혹은 시간적 자유)을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이용하고 싶어하는 존재는
    세상에 수없이 많다.
    국가,
    사회,
    문화,
    지역,
    회사,
    학교,
    그 외에도 다양한 무리집단과 모임들.

    이들은
    해결책을 찾았다.
    인간의 자유롭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
    ‘그냥 누가 시키는대로 했으면’ 하는 마음.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게
    실패로 판명날까 전전긍긍하는 두려움.
    이걸 이용하는
    탁월한 해결책을 발견해낸거다.

    모든 집단은 개인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한다

    그 집단을 이끄는 자들,
    혹은 그 집단 자체는
    늘 그 집단에 속하는 개인에게
    매혹적인 제안을 한다.
    니가 짊어져야했던 책임을,
    대신 떠안아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내가 시키는대로 하면
    그게 올바른 정답이야.
    너 무엇이 올바른지 잘 모르겠잖아 사실.
    봐, 니 주위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어.
    너만 니멋대로,
    정답을 알려주는데도 다른 오답을 선택하려고?
    니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조롱거리가 될꺼야.
    내가 제시한 대로 하면 돼.
    책임은 내가 지는거야.
    넌 그냥 내가 시키는대로 한 것밖에 없잖아.
    니 부모,
    니 친구,
    니 동료,
    니 주위 사람들 모두 다
    올바른 결정을 했어.
    너만 따르지 않겠다고?

    판단의존의 달콤함

    이게 바로
    우리가 속한 집단, 조직, 사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판단을
    그대로 따르게 되는
    ‘판단의존’이다.

    이 판단의존은
    굉장히 아늑하고 편안하다.
    나와 같이 여기에 속해있는 사람들
    모두가 다같이
    그 집단 전체의 판단과
    똑같은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하니까,
    실패해도 다같이 실패한거고
    이 무리 전체가 실패한거지
    내가 실패한 게 아니다.
    나만 XX인 게 아니라는거다.
    내 책임도 아닌거고.
    잘못 결정해서 실패할지도 모르는 책임이
    나에게 올 위험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는거다.

    게다가
    내가 더 고민하고
    노력하고
    스스로를 단련해서
    좋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나는
    내가 속한 이 무리가 결정한 판단을 따라
    그대로 똑같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무리에서 제시한 ‘올바른’ 길을
    모두와 함께
    걸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너무 든든하지 않나.
    이쯤되면,
    진짜 ‘개꿀’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올바른 길’의 의미

    앞서 말했듯이,
    집단은 개인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준다.
    여기서 올바르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걸까.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알고 있다.
    인간이 타인을 보고 ‘옳다’고 말할 때
    그 말의 뜻은
    자기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의미다.
    내 맘에 든다,
    나의 생각, 나의 삶을 지지해준다,
    는 의미다.

    이 심리적 메커니즘은
    집단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냥 지한테 유리하면
    그게 선이고
    도덕이고
    정답이다.
    조직, 집단, 무리도
    결국 인간이 모여 이룬 것 아닌가.
    집단이 구성원에게 제시하는 ‘올바른’ 길은
    당연하게도,
    ‘집단에게 유리하다’,
    ‘집단을 지지해준다’,
    ‘집단 입장에서 마음에 든다’,
    ‘집단을 부정하지 않는다’,
    는 의미다.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

    얼핏 들으면
    결국 집단에게 이용 당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왜 사람들은
    여기에 넘어가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스스로 결정해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위험을
    너무나도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거에 쐐기를 박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애초에 자기가
    삶에서 무얼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지못한
    모든 인간은,
    뼛 속부터 공허하다.

    애초에 내가
    어디를 향해 가야하는지 모르는데.
    무얼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데.
    집단에게 삶을 의탁하는 판단의존은,
    그 공허함을 일단 멈춰준다.

    원래 자신의 삶이 공허한 자일수록,
    이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더이상 방황하고 헤매지 않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얼 좇아야 하는지,
    어떤 걸 위해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제시해준다는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인간은
    그들이 속한 사회, 집단, 무리에
    기꺼이 자신의 자유와 결정권을
    헌납한다.

  •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길 두려워한다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길 두려워한다

    갈망하지만 두려워하는 것

    인간은 자유를 갈망하지만,
    과도한 자유는 싫어한다.

    과도한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에도 과도한 게 있는가.
    인간에게 있어 ‘과도한 자유’란,
    책임을 져야 할만큼의 자유를 의미한다.
    즉, 진정한 자유를 의미한다.

    책임은 자유의 그림자 같은 거라서,
    그 자유가 진정한 자유인 한
    늘 어디에나 따라다닌다.

    고로
    책임없는 자유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마치
    ‘그림자 없는 귀신’과도 같은 상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체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
    시간적 자유를 얻는 것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이제 여기서
    정신적 자유와 관련된 마지막 레벨인
    Lv16까지 마치고 나면,
    우리는
    그 자유로운 상태를 바탕으로
    진정한 우리자신을 발견해나가는
    이야기를 해나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인간은 자유를 두려워한다니…?!
    하지만 사실이다.
    인간은
    늘 자유를 갈망하지만,
    실은 자유를 두려워한다.

    잘못 결정할 위험

    인간은 기본적으로
    위험을 싫어한다.
    진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위험을 극도로 기피하는 사람들만이
    그 오랜시간을 죽지않고 살아남아,
    지금 이 시대에 사는 인간들을
    자신의 자손으로 남길 수 있었을테니.

    문제는,
    위험이라는 건 굉장히 다양해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할 위험’ 역시
    큰 위험이라는거다.
    그리고 인간은
    그 위험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사람들이 왜 맨날
    로또를 ‘자동’으로 살까.
    분석해보니 자동이 더 확률이 높아서?
    아니다.
    내가 직접 손으로 고른 숫자가
    자꾸 실패로 판명나는 게
    기분나쁘고
    싫고
    묘하게 두렵기 때문이다.
    기계가 로또숫자를 자동으로 선택해서
    당첨되지 않으면
    내 탓이 아닌 거 같은데,
    내가 직접 골라서 당첨이 안 되면
    내가 숫자를 잘못 고른 탓인 거 같은거다.

    우리는
    우리가 아둔하고 멍청한 선택을 해서
    실패를 하게 될 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기가
    너무 너무 싫은 존재다.
    어쩌면 그게 가장 두려운 존재다.

    그러니 자유가 두려울 수밖에

    이제 문제는
    자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유는 필연적으로
    실패의 위험과 모든 책임을
    자유의 주체인 내게 돌린다.
    자유라는 게 기본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직접 모두 선택하는 것이니까.
    타인이 나 대신 결정해주고
    선택해주는 게 아니니까.
    이쯤되면
    자유라는 녀석이
    싫을 법도 하다.
    자유가 고통스럽다는 철학자들의 말은
    그래서 나온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냥,
    내가 직접 무언가를 결정했다가 실패할 위험없이,
    전문가나 선구자가 딱 그 길을 알려주면
    시키는대로 따라가고 싶어한다.
    아니면 그냥,
    남들이 다 하는대로
    나도 똑같이 그대로 따라한 후에,
    ‘누구나 다 그렇게 사니까’
    ‘남들도 다 그러니까’
    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있고 싶어한다.

    그래야 혹시 실패로 끝나더라도,
    내가 잘못 결정해서가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가 함께 그랬던거라며,
    사람들이 내게 그래라고 알려준거라며,
    나는 그냥 알려준대로 한 것뿐이라며,
    그래서 이건 내 책임이 아니라며,
    무리 속에 숨어
    나를 보호할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우리의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 Lv16. 스스로 길을 걷는 방랑자

    Lv16. 스스로 길을 걷는 방랑자

    우리는 이제
    인간이 어떻게 집단에 세뇌당하고 이용당하는지
    이해했다.
    인간은
    혼자가 되어 버림받는 것도,
    타인들보다 낮은 위상을 차지해서 비웃음을 사는 것도,
    아니,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을 벌벌 떠는 존재다.

    이제 Lv16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집단이
    인간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조종하기 위해 이용하는
    인간의 또다른 습성이다.

    그건 바로 ‘판단의존’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상태로 존재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되찾아
    원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인간은
    자유로워지는 걸 두려워한다.
    자유롭게 결정하고
    그 결정대로 살아가길 주저한다.

    이번 렙업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왜 자유롭게 사는 걸 두려워하는지,
    왜 그 두려움에 굴복해선 안 되는지에 대해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정신적 자유를 얻는 일

    정신적 자유를 얻는 일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한 사람들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수많은 위인들은
    대개 주위 사람들이 가진 삶에 대한 믿음대로
    그런 모습의 삶을 살았던걸까.
    아니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절대 그게 가능할 리 없다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
    오롯이 혼자의 믿음으로,
    세상 모두의 반대와 상반된 믿음을 부숴버리면서
    무언가를 창조해낸걸까.

    어쩌면 그렇게
    세상 모두의 확신을 깨부숴버리고 나서,
    뒤늦게 세상 사람들이
    ‘아, 저게 되는 일이었구나.’라며,
    사후적으로 위인들을
    위대한 사람이라 믿기 시작한건 아닐까.

    타인의 믿음과 나의 믿음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어떠한 상황을 판단하면,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 믿음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그 믿음에 영향을 받기로
    스스로 결정했을 때다.

    그래서
    우리자신의 믿음이 중요하다.
    타인의 믿음은
    그 타인의 수가 많을수록
    마치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 우리를 바꿔버리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1912년 국제육상경기연맹이 세계기록을 관리하기 시작한 이후,
    육상 100m 달리기의 마의벽은 언제나 10초였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선수들이
    10초 초반대까지 밀어붙였으나
    인간이 100m를 10초 전에 주파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모두가 믿었다.
    하지만 56년이 지난 후,
    짐 하인즈 선수가 9초대로 100m를 주파해버렸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한계라 믿었지만,
    그는 타인들의 믿음 대신 자신을 믿었다.
    재밌는 건,
    그 일이 있고 나서 우후죽순
    다른 선수들도 10초라는 마의 벽을
    넘어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타인의 믿음은 강력하지만,
    그 믿음은 오직
    남의 눈치를 보고 순종적인 자에게만 유효하다.
    그래서
    우리가 타인의 믿음에 따라
    우리의 믿음을 바꾸기로 결정하지 않으면,
    타인의 믿음은
    사실 아무런 힘이 없다.

    이제 믿음을 깨부술 차례다

    당신은 이 레벨에서 알게 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한가지 믿음을 깨부숴야 한다.
    그건 바로,
    ‘남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신념이다.
    진화적으로 우리 뼛속 깊숙이 새겨진
    이 잘못된 믿음은,
    먹는 족족 지방을 늘리고
    매일 단 음식만 찾아다니는
    인간의 진화적 본능보다
    100배는 더 해롭다.

    이미 우리는
    인간이 어떤 마음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하는지 알고 있다.
    인간은
    전혀 합리적이거나
    타당하거나
    현명한 방식으로 상대를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사실 타인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
    한없이 편협하고 속물적인 관점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저 두려움과 시기심이 전부다.
    쇼펜하우어의 말마따나,
    속물들은 탁월한 정신적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애써 감추던 열등감과 은밀한 시기심이 새어나와
    고요한 원망감과 혐오감을 느낄 뿐이다.

    타인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정말이지
    우리 인생에 하등 무의미하다.

    정신적 자유와 해방의 놀라운 경지

    타인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전긍긍하는
    ‘인간적인 굴레’에서 자유로워지면,
    인간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억지스럽지 않은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으로
    늘 존재하게 될 것이고,
    인간이 집착하는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
    전혀 지배당하거나 휘둘리지 않는
    의연하고 당당한 존재가 되어갈 것이다.

    물론, 마음의 각오는 단단히 해둬라.
    세스고딘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이단자를 어떻게든 화형시키려고 하니까.
    당신을 어떻게든
    흠집내고 끌어내리고 싶어할 것이다.
    아마 타인의 평판에 매달리고
    절절 매는 습관을 끊는 건,
    탄수화물 중독이나 라면 중독을 끊는 것보다
    10배는 어려울수도 있다.

    하지만 그 중독성이 아편수준이라한들,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끊어야하듯이
    결국에는 끊어내야 하는 일이다.
    적어도 지옥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아
    최고의 자신을 조각해
    원하는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 집단이 개인을 세뇌시키는 메커니즘

    집단이 개인을 세뇌시키는 메커니즘

    타인이 우리에게 가지는 기대와 믿음

    타인이
    우리에 대해 가지는 믿음은
    무엇일까.

    내 입장을 대변해주고
    나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해주면,
    인간은
    그 주장이 옳은 것이며
    그 사람이 현명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믿음이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기보다는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경향이
    매우 강하다.
    결국 우리에 대한 타인의 믿음이란,
    지 맘에 들게 행동하고
    지한테 유리하게 말하면
    좋은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이라는
    정해진 결론 위에
    세워진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의 믿음과 기대를 배신하지 않으며 살수록,
    자연스럽게
    타인들로부터 이쁨받고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의 모습이
    그들의 인생이나 가치관을
    늘 지지하는 일종의 증거로서
    그들 눈에 비춰질테니까.

    권력을 부여하다

    집단은 깨달았다.
    인간의 이런 특성을
    잘 활용하면 되겠다는 사실을.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들을
    예측가능하고 통제가능하도록
    내 입맛에 맞게 길들이기 위한 방법을.

    집단은,
    정해진 룰대로,
    이미 잘 길들여진 기존의 구성원들이 하는 대로,
    명령과 규칙에 잘 순종하는 개인들에게
    지위와 권력을 부여했다.

    이는 곧
    순종적으로 굴며 고분고분하게 살면
    남들보다 높은 위상을
    보상으로 얻게된다는 걸 의미했다.
    착실한 모범수가 되면,
    그 집단 안에서
    더 높은 지위와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잘 길들여진 모범수들이
    힘을 가지게 되면서,
    그들은
    집단의 규율대로 움직이지 않는 이단아들을
    좀 더 위력적으로 처단할 수 있게 되었다.
    힘을 가진 모범수들은
    자신들과 다른 각양각색의 개성 강한 이단아들에게
    효과적으로 모욕과 수치를 주고
    그들이 손가락질 당하고 비웃음을 사게 만들었다.

    이는 실제로
    처벌받는 자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진화적인 이유로
    남들 사이에서 무시당하고 낮은 위상을 가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위상을 곤두박질치게 만들고 나면,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은
    큰 고민없이 그가 낮은 위상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하고
    마음껏 조롱하고 멸시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며 생각했다.
    ‘시키는대로 순종하며 눈에 띄지 않아야지.’

    왜 힘을 얻은 모범수들은 이단아를 미워했을까

    권력을 부여받은 모범수들이
    자신의 개성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단아를
    그렇게까지 미워하지 않았다면,
    혹은 그를 처벌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면,
    집단이 개인을 세뇌시키는 메커니즘은
    지금처럼 효과적으로 작동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집단의 세뇌 메커니즘은
    매우 잘 작동했다.
    모범수들은
    집단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단아들을 증오했기 때문이다.

    왜 그리 미워했을까.
    타인이
    자기처럼 집단의 룰을 따르든
    자신의 개성을 따라 마음대로 살든,
    그게 그들과 사실 무슨 상관일까.

    상관이 매우 많다.
    비루한 자일수록
    탁월한 자와 함께 있으면
    자신의 비루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불만없이 남들이 하는대로,
    집단이 시키는대로 따르면서
    만족스럽게 잘 지내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런 삶이 비루하고 슬프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처럼 남들이 기대하고 원하는대로,
    집단이 정해놓은 규율대로 살지 않고
    자신만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불편해하고
    어떻게든 짓밟고 싶어한다.
    심지어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함을 느낀다.

    모범수들에게 가장 끔찍한 존재는,
    자신들에게 굴종을 종용하는 ‘집단’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 다르게
    진정한 삶을 살아가려는 이단아다.

    평범한 자들의 시기와 질투

    앞서 말한 이유로,
    평범하게 고분고분 룰을 잘 따르는 사람들에게
    탁월한 자들은
    가장 악랄한 적이었다.
    끝없이
    자신의 비루함과 고루함을 깨닫게 만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괴테의 말처럼,
    내 옆에 있는 누군가의 고결함은
    나의 품위를 땅에 떨어뜨린다.

    이와 관련한 절박함은
    생각보다 너무 강력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눈앞에 나타난 탁월한 자는
    말 그대로 ‘미친XX’여야만 했다.
    어떻게든 그 자는
    탁월한 게 아니라
    부적응적이고
    멍청하고
    아둔하며
    최악인 인간이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 자와 대비되는 내가,
    실은 그저 초라하고 비참한
    꼭두각시처럼 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의구심을
    떨쳐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세뇌당했다

    그들의 절박한 몸부림을 보며,
    집단은 깨달았다.
    순종적인 모범수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까스로 자신만의 길을 걸으려는 못된 자들을
    척결할 수 있구나.

    게다가 인간은
    타인의 믿음에 쉽게 흔들리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누구나 삶의 의미나 목적을 찾지 못한 채
    공허함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모로 인간은,
    아주 효과적으로
    집단에 세뇌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