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대장장이 휴

  • 절대, 희생하지 마라.

    절대, 희생하지 마라.

    “삼촌(니 남편)이 얼마나 어머님을 아끼는데, 니가 안 오고 배길 수 있나 보자.”

    오늘 엄마는, 큰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아빠가 할머니를 모시는 큰아빠 큰엄마가 하는 식당일을 돕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빠는 엄마에게 직접적으로 식당일을 도우라 요청하진 않았지만, 엄마만 희생해주면 모두가 만족스러운 상황이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빠도, 할머니도, 큰아빠도, 큰엄마도, 엄마의 희생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나 미안함을 굳이 느끼지는 않았다.
    아빠는 속정이 많고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가족일에 있어서는 자기처럼 언제나 엄마에게 양보와 희생을 바랐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당하는 사람은, 타인들의 눈에도 얼마든지 희생해라고 요구해도 되는 사람처럼 보이는 법이다.
    그렇게 엄마는 바보같이 10년을 넘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남의 식당일을 돈도 받지 않고 매일같이 해주다가, 오늘 급기야 그런 모욕을 당한 것이다.

    엄마는 힘들었다.
    매일 같이 새벽부터 버스를 두번이나 갈아타고 그 힘들다는 식당 일을 하러 시골까지 들어가는 게.
    큰엄마는 머리가 나쁘고 아둔한 사람이어서, 식당은 만년 적자였다.
    주방일이든 홀을 보는 일이든 같이 일을 해도 엄마가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다보니, 엄마가 지친다는 이야기가 큰엄마의 불안과 걱정을 일으켰으리라.
    그렇게 엄마는 남편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희생한 10년의 대가로 그런 모욕을 당했다.

    큰아빠는 집안의 장손이라는 이유로 문중의 모든 재산을 이미 다 혼자 물려받은 상황이었다.
    그는 폐인이었다.
    큰엄마가 자기 몰래 도장을 훔쳐 온갖 빚을 낸 걸 알게된 사건이 있은 후, 그는 마치 자신이 세상 모든 보상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듯한 태도로 거의 3,40년을 매일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하며 생계활동은 하지 않은 채 지냈다.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큰아빠가 가진 재산으로 술도 사주고 여자가 나오는 술집도 데려가주는 것에 군침이 질질 흐르는 동네 청년들이 큰아빠 주위에 득실득실거렸다.
    큰아빠는 점점 바다 앞에 있던 땅도 팔고 자그마한 건물도 팔고 논도 팔고 물려받은 집안의 거의 모든 걸 팔아치우고 있었지만, 여전히 재산은 많았으니 걱정은 없었다.
    매일같이 술에 취해 사는 큰아빠는, 사람들이 자신 주위에 항상 많은 게 자신의 인덕이 아닌가 하는 상당히 흥미로운 생각에 젖어 살고 있었다.
    온갖 감투를 썼다.
    있는대로 물려받은 재산을 동네 사람들에게 다 뿌리면서, 이런저런 자리에 앉았다.
    그는 행복했다.
    자신의 감춰져있던 인덕과 영향력, 큰 그릇이 세상에서 드디어 인정을 받는 것만 같았다.
    현실은, 거의 매년 적자인 식당의 늘어가는 빚을 물려받은 재산으로 메우고 거의 365일 내내 술에 절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술값을 대주며 떠받들어지는 쓰레기들의 쩐주, 뭐 그런거였지만.

    이 짧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피해자’로 살아가는 일의 위험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누가 피해자일까?
    엄마? 엄마를 바라보는 아들?
    물론 그 두 사람이 가장 큰 피해자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모두가 피해자다.
    저 이야기에서 자신이 희생했기 때문에, 자신은 보상받아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을까?
    없다.
    참고 견디며 애써 못본 척하고 그러면서 억울한, 즉 내가 희생하고 있다고 조금이라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은 시기가 다를 뿐 언젠가 결국 피해자가 된다.
    저 이야기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피해자다.

    자신이 ‘희생’이라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자신의 모든 행동은 결국 그 사람을 피해자로 만드는 일이다.
    저 이야기에서 자신이 희생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
    그러면 모든 사람은 피해자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우리는 하나 발견할 수 있다.
    “희생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희생을 숭고한 단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희생은 반드시 피해자를 양산한다.
    앞서 이야기한 문장을 찬찬히 읽어보라.
    ‘자신이’라는 주어가 붙어있다.
    남이 누군가의 행동이나 삶을 보고 ‘희생’이라고 느끼든 연민을 하든 말든 그건 아무 쓰잘데기 없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다르다.
    우리가 우리자신이 ‘희생’한다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결국 억울함과 슬픔과 분노와 당위를 낳는다.
    좋은 마음으로 희생하다가도 상대의 태도나 내 심경의 변화로 억울해진다.
    슬퍼지거나 화가 나기도 한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하는데 최소한 다른 사람은, 상대방은, 이렇게는 하는 게 ‘옳지.’라는 당위가 아주 강력한 힘으로 마음을 지배한다.

    온전히 상대방을 위한 진심만으로 누군가에게 베푸는 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희생’이라고 생각할 상상을 잘 하지 못한다.
    그건 자신의 삶이 가지는 가치이자 의미이니까.
    옆에서 사람들이 희생정신이 대단하다며 자신들의 관점에서 평가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좋은 마음만 가지고 자발적으로 희생한다고 생각을 하던 누군가는, 먼훗날 억울함에 오랜시간을 아파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희생하지 마라.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지 마라.
    우리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의 희생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가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삶에서 공허를 걷어내고 우리가 인생을 후회없이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최고의 나를 조각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하고, 그걸 발견하기 위해서는 살아남아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결국 ‘피해자’가 되길 거부한다는 이야기다.
    피해자가 되지 말자.
    주위를 둘러보면,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우리는 누구나 억울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억울하더라도, 우리는 이제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하루를 조각하고, 자유를 되찾고, 최고의 우리자신을 조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하지 말자.
    피해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분명, 삶을 완벽하게 조각할 수 있다.

    오늘 하루도 완벽하게 조각할 수 있기를.

  • 아프지 않아야 한다.

    아프지 않아야 한다.

    건강 잃으면 다 잃는거다.
    라는 말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마치 건강은 한 번 잃으면 절대 다시 회복할 수 없는듯한 뉘앙스를 주기 때문이다.
    쉽진 않겠지만, 혹시 한동안 잃게 되더라도 다시 되찾으면 된다.

    하지만, 건강이 그만큼 우리 인생에서 중요하다는 데는 동의한다.
    건강하지 못해서 우리가 삶을 조각하는 데 지장을 주는 상태에서는, 모든 일들이 녹록치 않게 된다.
    예를 들어, 나는 10살 때부터 안경을 쓰고 있는데 사실 이 또한 건강하지 못해 장애가 있는 것이다.
    그건 실수로 안경이 부서졌을 때 내가 얼마나 발을 헛디디고 아무것도 알아보지도 읽지도 못하는지 보면 어렵지않게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사실 내가 내 삶을 조각하는 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시각능력이 아니라 청각능력이 떨어져 보청기를 끼거나, 다른 장애가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만약 이게 우리가 삶을 조각하는 일에 치명적인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그건 그저 불편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건강하지 못한 상태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하루를 조각하는 데 지장을 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극심한 통증으로 원하는 일을 하다가 계속 머리를 두드리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뒤로 젖혀 쉬어야만 한다면 이건 실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사는 것이 된다.
    육체적 건강만이 건강은 아니다.
    정신적 건강도 마찬가지다.
    내가 회사에서,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주위 상급자나 동료의 눈치를 보고 긴장을 하느라 내가 하는 일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이렇게 건강을 잃은 상태에서, 우리는 진정한 삶을 조각하는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건강, 건강 거리니 좀 영 딱딱하니 이제 이 ‘건강’을 ‘아프지 않는 일’로 적겠다.

    아프지 않아야 하는 첫번째 이유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프게 되면 우리가 진정한 삶을 살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공허함’을 날려버리고 자유롭고 의미있는 시간으로 충만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조각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게 방해를 받게 되니, 실로 치명적인 일이다.

    그리고 또다른 하나의 이유는, 만약 당신에게 모든 걸 내어줄만큼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소중한 사람도 같이 아프게 된다는 데 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크게 아프면, 우리도 크게 아프다.
    그건 사랑하는 사람들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게 부모든, 배우자든, 자식이든, 연인이든, 은인이든 매한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과 안전을 생각할 때 반드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한 사람, 혹은 몇 사람도 같이 고려해서 삶을 조각해나가야 한다.

    그건 사랑하는 이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반대로, 우리는 아프지 않아야 한다.
    그건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우리의 몸은 알아서 외부의 침입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회복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움직이면 우리는 아프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자고 먹고 움직인다는 말은 일상적인 의미에 더해 좀 더 추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자는 건 잘 이완하고 잠재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먹는 건 영양소를 흡수하는 일 외에도 독소를 흡수하지 않는 일을 포함한다.
    움직인다는 것은 신체를 단련하고 강건한 몸을 만들어나가는 성장을 포함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아프지 않기 위해 필요한 건 잘 자고 먹고 움직이는 일이 전부다.

    몸에 대해서만 아프지 않는 일이 중요한 건 아니다.
    우리의 마음도 아프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마음이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무얼 해야 할까.
    사실 마음 또한 스스로 방어하고 생존하기 위한 나름의 자구책들을 이미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방어작용 자체가 우리가 삶을 조각해나가는 일에 큰 걸림돌이 된다.
    아주 어린 나이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자기 욕망을 따라 어떤 행동을 했다가 크게 엄마에게 꾸지람을 듣고 나면 그 행동을 안했던것처럼 되돌리고, 싫어하게 된다.
    그래야 내게 중요한 존재인 엄마에게 수용받고 이쁨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성인과 달리 아주 어린 아이들은 진짜로 자기가 좋아하던 행동을 진심으로 싫어하게 순식간에 자신의 선호를 바꾼다.
    (물론 좀 더 크면 개기기 시작하지만 ㅋㅋ 이건,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다.)
    혹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스트레스를 무의식에 억압하기도 한다.
    가령, 우리 팀의 팀장이 나만 너무 싫어하고 자꾸 쪽을 주고 괴롭히면, 그 팀장에게 극심한 분노와 무력감을 느끼지만 무력감을 감당하기 힘들어 무의식에 억압한다.
    그래서 그냥저냥 괜찮고 견딜만하다고 느끼게 된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런 마음의 방어책들을 방어기제라고 부른다.

    문제는 이런 방어기제들이 당장의 정신적 고통이나 긴장은 줄여주지만, 크게 놓고 보면 삶을 조각하는 우리의 작업에 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가령, 괴롭히는 팀장의 패악질에도 괜찮다고 여기던 팀원은 어느날부턴가 컨디션이 나빠지고 일에 더욱 집중이 안 되고 자꾸 저녁 먹을 때마다 소주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내 삶을 위해 계획한대로 삶을 조각하는 일을 자꾸 미루거나, 작업을 할 때도 온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자꾸 잡생각이 많아지게 된다.

    마음이 아프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그게 전부다.
    읭, 이라고 갸우뚱하기 쉽지만 사실이다.
    이 자유에는 우리가 우리의 신체적 자유와 시간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굴레를 끊어내는 일과 정신적으로 남에게 지배당하지 않는 정신적 자유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신체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를 얻는 구체적인 방법은 이 글에서 풀기 시작해서는 끝이 없겠지만, 한가지 명확한 것은 마음이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적자유 뿐만 아니라 금전적인 속박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금전’ 이야기가 불편한 이야기인 걸 잘 안다.
    많은 자기계발서나 인문학 서적들은, ‘돈이 전부가 아니다.’ , ‘돈은 행복과 무관하다.’, ‘돈은 많이 벌어보니 부질없더라.’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돈이 충분하지 않은 우리가,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우리가 ‘듣고싶어 할만한 말’일 뿐이다.
    회사 연말회식에서 부장님에게 ‘부장님 진짜 나이보다 한 10살은 더 어려보이세요.’ 라고 그냥 듣고싶은 말을 던지는 것이란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중에 돈에 진짜 쪼들리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최소한 ‘돈이 중요하지 않다’ 부르짖는 그 책이나 강연을 열심히 팔아서 돈을 엄청 벌어들이고 있을텐데.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돈은 행복과 직결되는 문제다.
    신체적 자유를 돈과 바꾸는 계약을 맺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진실이 불편하다고 외면하면, 나중에 더 큰 낭떠러지에 서있게 된다.

    핵심은, 경제적 자유든 정신적 자유든 마음이 아프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일이다.

    아프지 않는 사람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걸 해내고 사는 사람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자이언티의 노래 가사처럼,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아주 긴 이야기들을 통해 내가 들려줄 것이니 걱정마라.

    당신의 오늘 하루도 완벽하게 조각할 수 있기를.

  • 비난하는 사람의 마음속 비밀

    비난하는 사람의 마음속 비밀

    한 10년도 더 전인가.
    한동안 경계선 성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적이 있었다.
    경계선 성격장애에 대해서 많은 걸 설명할 수는 없으나, BPD의 경우 타인이 나를 나쁘게 보거나 적대하는 것에 굉장히 민감하다.
    사실 ‘민감하다’는 표현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듯하다.
    BPD 환자는 타인이 내게 보이는 적대감이나 공격적인 태도를 엄청나게 극단적인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굳이 BPD를 언급했지만, 사실 성격장애라는 것이 일정 수준 이상의 진단기준을 만족할 때 진단되는 것이므로 누구나 성격장애를 진단하는 기준 중 몇개는 충족시키기 마련이다.
    그리고 BPD 환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대다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타인이 내게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을 꺼리고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문제는, 비난이나 적대의 화살이 내게 돌아오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로운 고통일 때다.
    도저히 화살이 내게 오는 걸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민감한 사람은 어떻게 이 고통에 대응할까.

    화살이 내게 돌아오지 않는 것이 내가 생존하는 데 너무 중요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여기서 남을 까내리고 폄하하고 뒤에서 욕을하고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비난하는 행동의 역학이 드러난다.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지목되어 공격을 당하거나 비난을 당하는 일이 죽을 것같이 고통스럽고 힘든 사람일수록 그는 그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남을 욕한다는 이야기다.

    비난을 해서 상대방이 충분히 비난받을만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 되면, 화살이 내가 아닌 그 상대방에게 갈 것이기 때문이다.
    화살이 나를 향하는 걸 도저히 견디며 살아있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은, 필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상대방을 까내린다.

    결국 누군가에 대한 비난은, 상대방이 도덕적으로나 어떤 관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이어서일 때도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내가 비난을 받는 게 너무 두려워서 누군가를 미리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상황일 때도 많다.
    그가 정말 비난받을만한 행동을 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비난의 수위 = f(화살이 내게 돌아오는 것이 두려운 정도)

    이러한 역학을 잘 이해한다면, 우리가 비난을 만났을 때 좀 더 깊이있게 꿰뚫어보고 대처할 수 있다.

    누군가가 우리 앞에서 다른 사람을 험담한다면, 그 때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그 사람의 두려움을 살펴보고 그 두려움의 크기를 읽어낼 필요가 있다.
    상대방이 우리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상대방이 뭔가 큰 잘못을 해서 화살이 자신에게 올까봐 두려워하고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나쁜 사람으로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이 내면에서 자꾸 올라온다면, 어쩌면 화살이 나 자신에게 돌아올까봐 어떻게든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할 수도 있다는 걸 반드시 고민해봐야 한다.

    타인을 향한 비난은, 곧 나의 두려움이기도 하니까.

  •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는 법(ft.대상관계이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는 법(ft.대상관계이론)

    사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대부분의 경우, 자기자신을 이해하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물론 그건 자기자신을 이해하는 일이 결코 타인을 이래하는 일보다 쉽지는 않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에게,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 과연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일이다.

    다만, 우리가 삶에서 아주 소중하고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실현가능성을 떠나서 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때는 나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 못지 않게(어쩌면 더 많이) 타인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해진다.
    그래서 이 글은 ‘집단관계’ 카테고리가 아닌 ‘개인관계’ 카테고리에 넣었다.
    지금 이미 그럴지도 모르고,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올 것이다.
    그 때, 이 글을 읽기로 한 오늘의 선택은 분명 당신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어릴 때부터 내면에 자리잡아가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관계상이 존재한다.
    이 관계상들은 각 개인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던 누군가와의 관계상도, 나와 서로 피터지게 다투고 공격하던 누군가와의 관계상도, 서로 무관심하게 지내는 누군가와의 관계상도, 많은 관계상들은 우리 무의식에 천천히 자리잡는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재연된다.
    이 관계상들은 각자의 마음에 자리잡은 채로, 현실 속에서 생기고 사라지는 무수히 많은 관계에서 다시 재현된다.
    그래서 상담현장에서 내담자의 어릴 적 중요했던 사람과의 관계, 대개는 가장 중요하기 마련인 가족들과의 관계를 자세히 확인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관계상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정말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는 상대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침묵을 지키는 일은, 누군가에겐 평소에는 날 아끼고 사랑하던 부모가 내게 내리는 일종의 처벌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침묵은, 누군가에게는 언제나 힘겹고 고통의 연속이었던 내 아버지가 자식인 나를 그런 참혹한 현실에서 지키기 위한 사랑과 보살핌이었을 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당신 앞에서 침묵을 지킨다면, 그게 무엇인지 잘 헤아리기 위해 당신은 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관계상을 헤아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관계상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 그의 중요한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가늠해볼 수 있다.
    그의 이야기와 생각, 삶의 스타일을 보고 짐작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정보가 없더라도, 만약 당신이 그 사람과 마주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신과의 관계에서도 그의 내면에 자리잡은 관계상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반드시 재연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그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그의 내면에 자리한 그의 관계상을 이해함으로써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관계상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걸까.

    마음 깊이 느끼고 겪었던 관계가 마음에 자리 잡고 나면 어떤 특정한 형태의 관계이미지가 내면에 새겨진다.
    그 관계상은 크게 ‘나’와 ‘상대방’, 그리고 둘 사이의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관계의 두 주체인 ‘나’와 ‘상대방’은 이 관계와 관련해서 어떠한 감정을 지닌다.
    이 감정은 크게 ‘욕망’과 ‘두려움’, 두 가지로 크게 나뉠 수 있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 두 주체가 관계 앞에서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받는 감정은 욕망보다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욕망보다 우리를 더욱 강하게 휘두르기 때문이다.

    이는 다분히 진화적으로 유리한 경향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바라는 것을 향하라는 말은 하지만, 바라는 걸 이겨내고 두려움에 매진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내면에 자리하는 관계상에서 ‘나’와 ‘상대방’, 두 주체의 내면에 근본적으로 자리하는 욕망이 존재한다.
    그 욕망은 대개 무의식 깊숙이 자리잡고 있고,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거나 직접적으로 발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욕망은 그 사람이 살면서 말하고 행동하고 반응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 된다.
    두려움은 이 욕망에서 파생된다.
    근원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내면의 욕망은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비례해서 두려움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관계상에서 두 주체인 ‘나’와 ‘상대방’이 각각 지니고 있는 욕망과 두려움은 각 주체의 행동을 이끌어낸다.
    물론 대다수의 경우, 욕망과 두려움 중 더욱 강력하게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소는 두려움이다.
    정리하면, 관계상은 두 주체와 각 주체가 가지는 욕망과 두려움, 그리고 그로 인해 발현되는 각 주체의 행동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누군가의 관계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타인의 행동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내면에 있는 관계상을 짐작해보아야 한다.

    이 짐작에 정답은 없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는 특정 관계의 반복양상에 주목한다.
    과거의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와 지금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 지금 이 자리에서의 관계 등에서 반복되는 양상들을 비교대조하면서 좀 더 정교하게 짐작을 해나간다.

    가령, 그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일부 행동이나 말을 보고 대화를 하는 대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아예 끊어버리는 행동을 보였는데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의 내면에는 그러한 관계상이 존재할 것이다.
    마음은 상대방을 사랑하지만, 내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행동이나 말을 하는 상대방에게 대화를 할 수 없는, 혹은 해도 소용없는 관계상 말이다.
    대화를 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으나 비난과 상처만 돌아오게 될 것이 두렵거나 혹은 아무리 수차례 설득과 대화를 해도 어차피 소용없는 결과에 느끼게 될 무기력감이 두려울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 대화와 협의는 선택지가 아닌, 그래서 그저 일부 행동이 기대에서 크게 벗어나면 끊어내버리는 것이 최선인 관계상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

    조금 복잡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내면에 자리잡은 관계상은 실제 현재에서 크든 작든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고 이를 짐작함으로써 관계 속에서의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면, 상대방이 맺어온 중요한 관계에 대해 많이 살펴보고 들어라.
    (물론 지금의 마음에 대해 경청하고 공감하는 건 기본이다.)

    그렇게 한다면, 누구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

    영화 ‘아일랜드’를 보면, 인류는 환경오염으로 지금 우리처럼 지구에서 흙을 밟고 살지 못한다.
    인류가 과학기술로 외부환경과 격리시킨 인공공간 안에서 모든 신체컨디션과 성장, 질병 등을 완벽하게 모니터링하고 체크하는 최첨단 기술환경 하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오염되지 않은 천상의 섬 ‘아일랜드’가 존재한다.
    인공공간이 아닌 옛 선조들처럼 자연에 존재하는 청정구역인 그 곳에 가서 살기를 누구나 소망한다.
    복권당첨을 해서 당첨이 되면, 그 사람은 그 천상의 섬, 자연에 남은 마지막 유토피아라고도 할 수 있는 아일랜드에 가서 살 수 있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스포다.(읽기 싫으면 이문단 패스.)
    사실 이들에게 알려준 세계관은 가짜다.
    사람들은 자신과 완벽하게 똑같은 복제인간을 배양해 기를만큼 기술이 발전했고, 자신의 복제인간을 가짜 세계관 하에 그 인공공간에서 살게 하며 관리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사고가 나거나 질병에 걸려서 장기를 대체해야 하거나 노화 등으로 필요해지면 그 복제인간을 복권당첨시켜서 가져다 부품재료로 쓰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어머 미래에는 저런 잔혹한 세상이 올까?’ 라고 생각한다면 약간의 오해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애당초 과거에도 지금도 세상은 똑같았다.
    저 영화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유일한 차이는, 기술이 아직 그만큼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사회와 문화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나 똑같았고 똑같을 것이다.

    내가 ‘X같은 세상’이라고 (집필 중인) 책제목에 상스러운 단어를 넣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은 잘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몇살이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삶의 결정적 순간이나 큰 변화가 찾아오는 어떤 상황에서 진실은 드러난다.

    내가 나의 진실을 처음 목도한 건 30대가 되고나서였다.
    그 전의 나는 다행히도 운이 좋았고 진실을 경험할 일이 없었다.
    없었다기보다는,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아둔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직장생활을 하던 나는, 아빠가 쓰러지신 다음날 회사에 있는 팀장에게 아마 관둘거 같다고 사직을 예고했다.
    아빠랑 같은 나이였던 팀장은, 내게 아빠 입장에서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회사에 계속 남았고, 아빠가 투병으로 접어드는 그 힘겨운 순간에 그의 곁에 있지 못했다.
    일하는 주중에는 근무지역에 있고, 주말마다 고향에 내려갔다.
    매주말을 내려가길 몇달이 지나자 아빠는 버럭 화를 냈다.
    내 생활이 그렇게 자신을 병문안 오고 안타까워하는 걸로 가득 채워지는 게 미안하고 슬펐던 모양이다.

    자, 여기서 문제는 무엇일까.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일까.
    내가 계속 생계를 유지하는 한, 신체적 자유가 없다는 데 있다.
    내가 내 몸뚱아리를 쓰러져버린 아빠 곁에 두고 있을 자유가 없다는 데 있다.
    그 자유를 다시 얻으려면, 나는 내 생계를 포기해야 하고 결국 내 생계는 내 스스로 유지하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지워야만 한다.

    애초부터 인간이 자신의 몸뚱아리를 자신이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둘 수 있는 ‘신체적 자유’는 아주 극소수에게만 주어져온 특권이다.
    그리고 그 불편하지만 다같이 외면해온 그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삶의 국면들이 존재한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내 부모나 아이가 아픈 그 누구에게라도 가서 물어봐라.
    그들은 병원비를 내고 내 생계와 투병중인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미어지는 마음을 안고 일터로 나간다.

    요양병원에서 일어나는 간병인들의 경악을 금치못할 비인간적인 행동들이 가끔 뉴스에 나온다.
    어린이집 보육원에서 애들이 시끄러우니 낮잠시간에 재우려고 수면제를 야쿠르트에 타고 CCTV가 있는데도 애를 때리고 상처내는 일은 모두가 언론보도를 통해 목격한 현실이다.
    이 상황이 닥쳤을 때, 그 부모의 자식이나 그 아이들의 부모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시간을 팔아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99.99%의 사람들은 전부 저 상황에서 신체적 자유가 없다는 걸 절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외롭게 시간을 보내도, 마음처럼 곁에 있어주지 못한다.
    신체적 자유가 제한당한 채 살아가니까.

    사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즉, 가족이 아픈 상황이 아니라 당장 우리가 아파도 직장에서 내 건강을 위해 눈치 안 보고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기도 어렵다.
    수술비도 감당이 쉽지 않거니와, 시간을 직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치료를 위해 쓰는 걸 직장은 좋아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건, 같은 처지인 직장동료들도 눈치를 준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선 다음에 써보자.)

    이게 영화와 그리 다른 상황일까 과연.
    영화 ‘아일랜드’가 그렇게나 미래에 대한 상상이고 그저 흥미로운 상상일까.

    다시 말하지만, 영화 속 상황과 지금 우리 상황의 유일한 차이는 기술진보수준 밖에 없다.
    ‘개연성이 높은’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23년 12월, 미국에서는 리프제니아라는 약이 승인되었다.
    이 약제는 유전자치료제인데, 약값이 약 40억 정도다.
    40만원도 아니고 40억이다.
    앞으로 수많은 유전자치료제들이 점점 유전자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아질 것이다.
    혈우병치료제도인 햄제닉스도 40억을 넘는 고가에 판매되고, 어린이척수근위축증 치료제 또한 20억이 넘는다.

    가족이 그런 병에 걸려도 지금 동시대를 사는 압도적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약으로 치료를 할 수가 없다.

    다라프림 사태에 대해 들어본 적 있을지 모르겠다.
    2015년 튜링제약 대표 마틴 슈크렐리는 에이즈 치료제인 다라프림의 가격을 5500% 인상시켰다.
    에이즈 환자들은 그 약값으로만 연간 3억을 써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는 실제로 이 일로 청문회까지 불려나갔지만, 싫으면 안 사면 되지 않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아직도 영화 ‘아일랜드’는 허구 속 이야기이고 지금 우리의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이야기일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화 속 상황과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의 유일한 차이는 기술수준 밖에 없다.

    인류가 지금 모습으로 진화하기 전 지구도 여전히 약육강식의 세계였고 인류가 지구의 최상위 지배자가 된 지금도 그 원리는 여전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표면적인 현상과 상황들에 가려진 그 안의 진짜 모습을 잘 이해하고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세상이 X같다고 하니, 어쩌면 혹자는 이걸 세상을 비판하고 사회를 비난하고 상황탓으로 돌리는 데 요긴한 방패막이로 쓰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아, 역시 세상이 잘못됐네. 라고 불평불만을 쏟고 싶어질지 모르겠다.
    뭐, 불평불만을 뱉는 건 자유다.
    하지만 언제나 말하듯이, 우리의 통제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자꾸 탓하고 바꾸려고 하는 일은 ‘삽질’이 될 공산이 매우 크다.

    슬프고 잔혹한 일이지만, 윤리와 도덕을 자꾸 들이대고 당위를 잣대로 세상을 비난하는 일은 결국 우리의 삶을 갉아먹는 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이 이런 상태인 원인이 우리가 아니라 우리 바깥에 있다고 할지언정, 그걸 해결해나가는 방안이 우리 바깥에서 올 수는 없다.
    우리 바깥에 있는 거의 모든 존재들은 우리의 통제영역 밖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이 올바르고 그른지를 함께 논의하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현명하게, 완벽하게 조각해나갈지에 대한 일이다.
    그 일은, 명백히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내에서 찾아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세상 탓을 하지 마라.
    그 분노와 슬픔을 잘 정제해서, 최고의 우리 자신을 조각해나가는 데 활용할 연료로 쓰는 기개와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오늘 하루도 완벽하게 조각할 수 있기를.

  • 우리는 무얼 주고 돈을 버는가

    우리는 무얼 주고 돈을 버는가

    살기 위해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돈을 벌어야 한다.
    아마 나와 당신도 그 절대다수에 속할거고.

    돈을 벌기 위해 우리는 계약을 한다.
    모든 건 기브&테이크라고 했던가.
    테이크는 ‘돈’인데, 그렇다면 기브는 무엇일까.
    무얼 내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버는가.

    거의 모든 것들은 사실 돈을 버는 대가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돈은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것들과 교환이 되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학에서는 화폐를 Liquidity라고 부른다.)
    청소를 해주거나 상대가 갖고싶은 물건을 건네면 돈을 벌 수 있다.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줘도 되고, 좋아하는 게임을 줘도 된다.
    심지어 인신매매나 매춘같은 불법행위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 또한
    그러한 것들로도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다수인 우리는 무얼 대가로 돈을 벌까.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자유를 판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신체적 자유를 판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특정 시간동안의 신체적 자유를 판다.
    가령, 일반적인 직장인은 이렇게.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일단 사무실에 나가거나 현장에 나가
    당신이 시키는 일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월급을 주시죠.”

    아침9시부터 저녁6시까지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이 아닌 사장님이 원하는 곳에 앉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사장님이 원하는 것을 한다.
    이것을 ‘시간을 판다’고 말한다.
    그 시간동안은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자유를 대가로 내어주고 돈을 버는 거니까.

    뭘 그리 거창하게까지 가냐,
    중간에 잡담도 하고 인터넷도 보고 담배도 피고
    커피도 마시는데 뭘. 사람 사는 게 그런거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명백히 자유를 대가로 치른 게 맞다.
    당신은 갑자기 큰 병에 걸린 당신의 부모님을 위해
    출근하지 않고 마음가는대로 부모님 곁에서
    위독한 부모님과 함께해드릴 수 있는가.
    당신이 아파도 매한가지다.

    이것도 거창하다면, 좀 더 사소하게 가보자.
    당신은 자고싶을 때 잘 수 있나.
    일하다가 너무 졸리면 편안하게 어디 소파에 가서
    몸이 원하는 꿀잠을 잘 수 있나.
    잠조차도 마음대로 못자지 않나.
    정 너무 몸이 힘들어하면 화장실에 조용히 가서 자야되지 않나.
    9시부터 내 시간은 사장님꺼라서,
    아침에 알람을 듣고도 5분만 더 자고 싶은데
    안간힘을 써가며 내 건강이 갉아먹히는 건 뒤로 하고
    다급히 눈을 떠서 출근할 채비를 하지 않나.
    맹수에게 쫓기지 않는 한,
    이 지구 상에 어떤 동물이 매일 이렇게 잠조차 마음대로
    못자면서 살아갈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유를 대가로 치르는 게 맞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거창한 일이다.

    물론, 여러 가지를 제공하지.
    그냥 신체적 자유만, 달리 말해 시간만 내어준다고
    누가 쉽게 돈을 주지는 않는다.
    결국 상대방에게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주어야만 하고,
    그를 위해 시간이 제약당하는 건 기본전제일 뿐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어떤 과업을 수행해서 제공해야지.

    하지만 우리의 시간을 일단 내줘야 한다.
    그리고 이 신체적 자유를 파는 일이
    실은 우리 삶이 버겁고 힘든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명심하라.
    우리는, 시간을 대가로 돈을 번다.
    우리의 24시간 중 사실 우리 꺼는 극히 일부다.
    나머지는 타인꺼다.
    우리 대부분의 경우, 사장님꺼다.

    우리가 진짜 우리의 삶을 발견하고 살기 위해서는,
    그 전에 어느 정도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되’찾는 게 맞는지에 대해서는 언젠가 또
    이야기해볼 기회가 있겠지.)

    두 발은 땅을 딛고 두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라
    고 마키아벨리가 그랬던가.
    딛을 곳이 넓고 단단해야,
    우리는 비로소 안정된 자세로 하늘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기 전에,
    생존과 자유를 좀 성취해두어야 한다.

  • 실현을 위한 준비물

    실현을 위한 준비물

    실현을 위한 시간
    실현을 위한 공간
    충분한 신체적 자유
    충분한 정신적 자유
    스스로 발견한 내 삶의 의미
    그리고,
    생생한 최고의 나

  • 몰입을 위한 준비물

    몰입을 위한 준비물

    몰입할 시간
    몰입할 수 있는 공간
    몰입에 필요한 최상의 컨디션과 자유
    그리고,
    완전한 이완

  • 발견을 위한 준비물

    발견을 위한 준비물

    나를 발견할 시간
    나를 발견하기 위해 머무를 공간
    직관과 영감이 깨어날 정도의 건강한 컨디션
    그리고,
    충분한 정신적 자유

  • 졸음을 참지 마라, 죽는다

    졸음을 참지 마라, 죽는다

    고속도로 운전하다 보면, 보게 되는 문구다.
    졸음운전은 곧 생명을 담보로 한다는 둥.
    운전을 하지 않더라도, 차를 타고 고속도로에서 한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저 말은, 전적으로 진실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고속도로 위가 아니라 지구 그 어디에 서있을 때도 저 말은 진실이다.

    수면부족이 신체에 미치는 치명적인 결과에 대해 이런저런 연구결과를 나열하려는 건 아니다.
    (구글에 한 번만 쳐보면 한 일주일치는 읽을거리가 쏟아질 것이다. 검색해보라.)

    일단 당장 맹수에게 쫓기지 않는 이상, 졸음을 참는 종은 인간밖에 없다.
    지구 상에서 가장 번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강력하게 세뇌당하고 사육당하는 존재.
    그게 바로 우리다.
    건강에 나쁜 걸 차치하고서라도, 졸려 죽겠는데 허벅지를 찔러가며 졸음을 참아내는 생명체는 여지껏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커피라는 걸 만들어내서, (아데노신 수용체와 결합해) 아침마다 졸음을 쫓아내기 위해 그걸 들이키는 족속은 우리 인간밖에 없다.
    (심지어 카페인은 피로를 없애는 게 아니라 지연시키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그런건 중요치 않다.)

    학교 가야 해서, 출근해야 해서, 약속 시간 늦을까봐 어떻게든 기를 쓰고 눈꺼풀을 치켜올리며 졸음을 쫓아내고 잠에서 깨려는 우리가 가엾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뭔소릴 하려는거냐?

    졸음을 자꾸 참다간, 진짜로 죽는 수가 생긴다는 이야길 하는거다.
    신체가 타격을 받긴 하지만 그렇다고 잠을 적게 자고 수십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다 죽어나가는 것도 아닌데, 고속도로 위가 아니고서야 뭔 소리냐.
    졸음을 참는 건, 운전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위험하게 한다.
    여기서 위험이란,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가 졸음을 참아가며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수능공부나 시험공부 정도가 전부다.
    정말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들은, 절대 졸음을 참아가며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3당4락이라고 했다.
    3시간 자면 붙고 4시간 자면 떨어진다고.
    그건 그냥 시험 합격선을 넘겨야 할 때나 하는 이야기다.
    오죽하면, 싯다르타 형도 고행을 하다하다 얻지 못한 깨달음을, 고행을 내려놓고 우유를 마시다가 얻었다고 책에 적혀있을까.
    진짜 중요한 것들은, 그렇게 참고 견뎌가며 후다닥 얻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몸은 정신보다 훨씬 진실을 이해하기 쉽게 보여준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안다.
    계속 자는 시간을 있는 힘껏 줄여서 아무리 훈련을 하고 경기를 치르고 스킬을 익혀봐야 얻는 것보다 잃는 게 훨씬 많다는 걸.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걸.
    정신으로 하는 일은 몸으로 하는 일처럼 눈에 당장 보이진 않지만, 정신이나 몸은 완전히 똑같다!
    근육이 잘 때 성장하듯이, 학습한 것을 온전히 소화하는 작업이 수면시간에 이루어진다는 건 이미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졸음을 참는다는 건, 그냥 삶을 버리겠다는 것과 같다.
    ‘삶’을 버린다는 것, 이게 죽음이지 뭐가 죽음일까.

    졸리면, 자라.
    그래야 깨어있는 시간을 우리 자신이 가진 잠재력과 직관,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며 채울 수 있다.
    잠은, 깨어있는 시간의 질(의식상태의 수준)을 관장한다.
    깨어있는 시간에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하고 싶은 우리 모두에게, 잠은 진짜 ‘살게’ 해주는 아찔하게 중요한 일이다.
    이걸 참아보겠다고 고함지르는 건, 영 답이 없는 일이다.

    졸릴 때 참지 않는 일에, 조금 더 적극적이길 권하고 싶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졸리다면, 어떻게든 쪽잠이라도 잤으면 한다.
    회사에서는 화장실에 가서 옆칸 똥냄새를 맡으면서 눈을 5분이라도 붙이든, 점심시간에 자리에 엎드려서 잠시라도 자든.
    못 자면 힘들잖아, 건강에도 안 좋잖아, 이런 맥락에서 권하는 게 아니다.
    졸음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나중으로 지연시켜놓으면, 결국 잠을 보충할 때까지 깨어있는 시간 전체의 밀도와 색감이 확 떨어진다.

    나는 언제나 시간적 영토를 회복해서 돈을 대가로 자유를 구속받기로 한 시간을 다시 되찾는 일을 강조한다.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자유로운 시간을 되찾기 위해 정신적 자유 또한 끝없이 강조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돈버느라 사장이 시킨대로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나 옆사람 눈치보느라 전전긍긍 불안한 시간은 온전히 자유로운 시간이 아니니 24시간을 궁극적으로는 다 온전히 자유로운 시간으로 만들자는 이야기다.

    그런데,
    인생에서 앞서 말한 신체적 자유와 심리적 자유를 통해 온전히 자유로운 시간을 다 확보하고도, 그 시간이 제대로 아작이 나버릴 수 있는 강력한 함정이 있다.
    그게 바로, 졸린 채 시간 보내는거다 ㅋㅋ

    졸리면 자야한다.
    우리가 계속 함께 한다면, 우리는 우리 뜻대로 자유롭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점점 더 강렬하게 통감하게 될 것이다.
    그럴수록 지금 이 글은 당신에게 와닿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 당신에게 얼마나 이 글이 공감이 될지 알수는 없지만, 명심해라.

    졸리면 자라, 인생 진짜 종치고 싶지 않으면.

    오늘 하루도 완벽하게 조각할 수 있기를.

  • 최고의 컨디션을 24시간 유지하기 위한 수면세팅

    최고의 컨디션을 24시간 유지하기 위한 수면세팅

    일본에서 역대 가장 히트했던 만화는 ‘드래곤볼’이다.
    나도 얼마나 여러번 회독했는지, 한 때는 몇권에 무슨 장면이 나오는지를 얼쭈 때려맞출 정도였다.
    드래곤볼의 주인공 ‘손오공’은 자신의 아들 ‘손오반’과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는 곳에 들어가서 수련을 한다.
    거기 안에서 보내는 1년이 바깥 현실세계에서는 하루밖에 되지 않는 그런 신비한 공간이다.
    여기서 손오공은 손오반과 극단적인 위기상황에서만 나오는 신체상태인 ‘초사이어인’ 상태를 유지하며 생활하는 훈련을 한다.
    몸이 가장 전투에 적합하게 최적화된 컨디션을 찾아 그 컨디션이 평상시에도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삶을 완벽하게 조각하기 위해서, 우리도 그런 최적의 상태를 만들어 유지할 수는 없을까.
    우리가 최고의 나를 조각하고, 오늘 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하고, 생존과 자유를 찾고 의미를 찾는 일에 가장 최적화된 상태를 하루종일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이와 관련된 고민과 논의는,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저서와 황농문 교수의 저서들을 살펴보면 많은 영감들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저서에서 인간이 높은 몰입상태를 유지하며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하지만 오늘은 그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최적화된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이다.
    사실 이건, 그 무엇보다도 더 근원적이고 중요하다.

    잠을 왜 잘까.
    진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동물이 잠들어있는 것만큼 자신의 생존이 쉽게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상태도 없다.
    잠들어있으면 옆에서 누가 불을 질러도, 치명적인 공격을 해도,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가장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해왔다는 건 자명한 사실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인간은 인생의 3분의 1을 잠자는 일에 할애하는 것일까.
    (물론 내 친구들 중에는 3분의 1이 아니라 4분의1도 채 할애하지 않는 멋진 놈들도 있다.)

    구태의연할 지경이다.
    잠이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는 데 얼마나 엄청난 효과가 있는지를 말하는 건, 너무나 유명하고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라 이젠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을 정도다.
    그 정도로 잠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현존하는 그 무엇보다 탁월하게 회복시켜준다.
    아마 당장 다른 맹수에게 물려죽을 위험이 있음에도 여지껏 많은 동물들이 잠을 자는 이유는, 그 위험을 상쇄하고서도 더욱 큰 이점을 동물에게 안겨주기 때문일 것이다.
    잠이 얼마나 뇌신경세포를 잘 정화해주고, 세포를 회복시켜주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지 같은 진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잠을 잘 자서 가장 우리가 우리자신의 삶을 조각하는 데 최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해보려 한다.

    잠을 자면, 몸과 마음 모두 회복한다.
    헬스에 미쳐사는 헬창들은 안다.
    운동하는 시간이 아니라, 자는 시간 동안 내 근육이 성장한다는 것을.
    그래서 보디빌딩 선수들은 반드시 충분한 수면을 규칙적으로 취한다.

    마음도 매한가지다.
    뛰어난 창조력과 직관이 중요한 초거대기업의 주인들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항상 많이 잔다.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조스는 8시간 수면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둔다고 한다.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 빌게이츠, 일론머스크, 오바마 등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그리고 우리보다 평균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잠에 할애한다.
    매분 매초가 금전적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니는 그 바쁜 사람들이 말이다.
    그들은 알고 있다.
    자는 동안 나의 마음이 충분히 회복되어 그 선명한 마음상태를 기반으로 가장 탁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걸.
    심지어 제프 베조스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오후 5시가 넘어가면, 다음날로 결정을 미룬다고 한다.
    왜 그러는것일까.
    잠이 마음을 회복시킨 후, 충분히 회복한 심신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잠이 우리를 회복시켜주었던 시점에서 멀어질수록 삶에서 덜 중요한 것을 배치해야 한다.
    중요한 일은 반드시 잠에서 깬 시점에서 가급적 가까운 시간에 해야 한다.
    잠이 그 정도로 우리가 삶을 조각하는 데 최적인 상태로 우리를 회복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매일 규칙적으로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생기는 상처와 결함들을 회복시켜주고,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 가장 탁월하게 우리자신을 조각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준다.
    손오공이 바랐던 그 최적의 상태처럼 말이다.

    그리고 너무나 중요하고 엄청난 진실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해야겠다.
    제프 베조스가 오후 5시 이후에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는 건, 우리가 필사적으로 익혀야 하는 부분이다.
    중요한 결정 뿐만 아니라, 하루를 조각하는 전체적인 경기운영 측면에서 말이다.
    즉, 우리가 생계를 위해 팔아넘긴 시간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온전한 자유시간이 있다면, 잠에서 깬 직후에는 반드시 자유시간이 먼저 배치되어야 한다!
    잠에서 깬 직후부터 우리가 돈을 받는 대가로 계약을 통해 판매해버린 자유롭지 않은 시간 사이에 틈을 벌릴 수 있는대로 벌려야 한다.
    사람들이 잠과 관련한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묻곤 하는 게 있다.
    몇시부터 몇시까지 자야 좋은거죠? 성장호르몬이 10시부터 나오나요, 11시부터 나오나요?
    영원한 숙제처럼 갑론을박이 항상 가득한 주제다.

    여기서 딱 정리하자.
    잠은 무조건 기상시간이 출근시간과 멀어질 수 있도록, ‘가능한만큼 최대한’ 일찍 자는 게 정답이다.
    우리가 언젠가 24시간을 모두 다시 되찾아서, 온전히 주어진 모든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참으로 기쁜 일이고, 그 기쁜 상황에서야 언제 자든 무관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타인에게 저당잡혀있는 구속과 제약의 시간(자유롭지 못한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 어디엔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잠이라는 경이로운 과정이 우리를 가장 영민하고 깨어있는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준 시간에, 우리는 자유롭게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을 해야 할까, 남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할까.
    답은 정해져있다.
    잠은, 무조건 가능한 한 일찍 자는거다.
    잠이 내려준 컨디션을, 가급적 모두 자유롭게 내 삶을 위해 쏟아부을 수 있도록.
    내 삶을 조각하는 일에 녹일 수 있도록.

    단순하지만 쉽지는 않은 일이다.
    하지만 반드시 우리가 가장 먼저 쟁취하고 가야할 부분이다.
    잠은, 충분히 푹 규칙적으로 잔다.
    그리고, 아침시간은 가급적 많이 확보해서 전부 자유롭게 날 위해 쓰는 시간으로 만든다.

    이 두가지면, 우리의 첫 출발은 순조롭게 흘러가기 시작할 것이다.

    오늘 하루도 완벽하게 조각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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