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대장장이 휴

  • 상대가 은근히 날 무시하거나 성가시게 할 때

    상대가 은근히 날 무시하거나 성가시게 할 때

    누군가가 우릴 성가시게 할 때가 있다.
    온갖 이상한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은근히 우리를 깔아뭉개거나 하는 일들이, 살다보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
    아주 간단하게 세가지 정도로 정리해서 이야기해보자.

    1. 그건 그의 자유다. 내비둬라.

    이게 무슨 해결책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게 첫번째 대책이다.
    그가 당신을 아니꼽게 볼지 말지는, 사실 그의 자유다.
    ‘아니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저러지?’
    라는 건 사실 우리의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잘못하는거라고 느끼는 중일것이다 아마 상대방은.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은, ‘저 XX 왜 이유도 없이 XX이야?’라는 생각을 하는 건 우리의 자유이고.
    우리를 아니꼽게 생각하고 눈흘기며 쳐다보는 건 사실 그의 자유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당신이 잘못했을수도 있다는 류의 말을 하려는 게 전혀 아니다.
    원래 잘못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단 하나의 진실을 제시하긴 어렵다.
    오후6시반에 집에서 치는 피아노 소리는 피아노 치는 사람에겐 이 정도는 양해해줄 수 있는 취미생활이고, 옆집 할머니에겐 한마디하기엔 좀 이른 시간이지만 개념밥말아쳐먹은 망나니의 잘못된 행동이다.
    그리고 아랫집 혼자 사는 덩치큰 고등학생에겐 언제 한 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일부러 시비걸어서라도 반쯤 죽여놔버리고 싶은 X같은 선전포고일지도 모른다.

    잘못인지 아닌지는 상대적인 거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사람이 누군가의 어떤 점을 보고 잘못이라고 말할 때 그 판단은 본질적으로 다분히 편향적이다.
    누구나 그렇다.
    인간이라는 게 다 그렇다.

    그러니 쟤는 저런 판단을 하다니 ‘틀렸어’!라고 열내지 말고 그냥 내비둬라.
    각자는 각자의 자유가 있는 법이다.

    2. 같이 XX해라.

    같이 XX하는 건,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선택지다.
    하지만 애초에 선택지는 이 두가지다.
    내비두는거, 혹은 같이 XX하는 거.
    같이 XX하는 게 어려운 이유는 대개 두가지다.
    상대방이 나보다 더 강하고 잔인할까봐 두려운 것 하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결국에는 ‘문제아’로 볼까봐 하나.
    이렇게 두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같이 XX하는 걸 두려워한다.
    하지만 사실 자꾸 성가시게 구는 놈들은 XX 안할수록 더욱 하이에나처럼 길길이 날뛴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가만히 있으면, 더 잔혹한 군주처럼 구는 게 인간의 특성이다.

    3. 할 일 해라.

    사실 나는 이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데, 성가시게 굴더라도 그냥 길가던 똥개가 짖는건가, 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사는 게 제일 베스트다.
    인간 중에는 자신의 시기와 질투, 공격성과 더러운 탐욕으로 누군가를 비난하고 물어뜯어야만, 적과 함께 투닥거려야만 그나마 삶이 채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극단적으로 공허한 자들이 상당히 많다.

    근데 여기에 참가해 같이 플레이어로 굳이 역할놀이를 해줄 이유는 사실 없다.
    그냥 이상한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해 늦은밤 길거리에서 날 툭 건드리면, 그저 가만히 내비두고 쳐다보거나 열받아서 패버리거나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냥 갈 길 가는 게 제일 좋다.

    문제는 사실 그런 하이에나들이라기보다는, 내 ‘갈 길’이 없는 공허한 우리 각자의 삶이 더 큰 문제다.
    자기 삶을 살기 바쁜 사람들은, 수십만명이 재잘거린다고 한들 사실 신경쓸 여유가 없다.
    (물론 대중의 평가와 호감이 생명줄인 연예인들은 조금 예외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을 살기에도 바쁜데, 맞는말을 하는 것도 아닌 세상 별의별 온갖 사람들이 지나가며 시비건 걸 언제 다 들어주고 상대해주고 있겠는가.

    자, 정리해보면.
    가령, 회사에서 똥꼬를 열심히 핥는 회사가 인생 전부인 동료가,
    아부라고는 못하는 당신을 자꾸 뒤에서 씹고 은근히 무시하는 말을 하고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오늘 당신이 할 일을 해라 ㅋㅋ
    오늘 당장 당신의 삶에 의미있는 할 일이 없으니, 그게 자꾸 크고 중요하게 마음에 들어오는거다.

    그건 그냥 도망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도망이나 회피와 내가 더 중요한 일에 삶을 써야해서 신경쓸 겨를이 없는 건 다르다.
    스님들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고안해낸 ‘명상’을 왜 호흡부터 하는지 아는가.
    호흡에 집중 안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온갖 번뇌가 올라와서 감당이 안 되거든.
    그 마음챙김과 명상의 대가인 스님들도, 당장 본인이 할 게 없으면 휘청거린다는 말이다 ㅋㅋ
    원래 사람이 해탈하기 전까진, 몰입할 게 있어야 다른 무가치한 잡념들이 가라앉고 그러는거다.
    그러니 이게 도망 아닌가, 이러면서 민망해하덜 말고, 그냥 내 갈 길 가면 된다.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라.
    좀비들 신경쓰지 말고.

  • 두려움이 동력인 사회의 만성불안장애

    두려움이 동력인 사회의 만성불안장애

    두려움, 우리의 동력

    인간은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가.
    인간을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인가.
    인간을 지금까지 살아있게 한 것은 무엇일까.
    한없이 나약한 인류가 그 엄청난 맹수들 사이에서 목숨을 부지해온 동력은 무엇일까.

    이족보행, 높은 사회성, 고도지능의 발달 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의 뿌리를 타고 거슬러올라가면 나오는 건 하나다.
    두려움.
    다르게 말하면, 욕망.

    욕망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가장 태초의 형태를 이야기해보자면, 욕망은 ‘두려움을 직면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고 두려움은 ‘욕망을 채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욕망이 강할수록 두려움도 강하고, 두려움이 클수록 욕망도 거대해진다.

    하지만 조금 더 우리에게 생생하고 강렬하게 와닿는 녀석을 꼽자면 역시 ‘두려움’이다.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원하는 것보다 두려운 걸 생생히 느끼는 게 생존에 유리했나보다.
    인류는 두려움을 기반으로 살아남아왔다.
    두려움이 옅은 개체들은 자연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채 점점 사라져갔고, 지금 우리가 후손으로 이렇게 살아남아있는 이유는 모두 두려움에 민감했던 선조들 덕분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에 비하면 자칫 미개해보일수도 있는 아주 오랜 과거부터 인간사회는 항상 두려움을 뿌리삼아 존재해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도, 과거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화려해져버렸지만 결국 두려움을 먹고 살아남아있다.

    두려움이 가득찬 사회

    누구나 다 불안하다.
    모든 사람들은 다 각자 마음에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학교도, 회사도, 군대도, 크고 작은 모든 집단도 언제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형국이 도처에 존재하는 이유는, 구성원인 우리 개개인이 두려움에 민감한 존재로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구성원 개개인을 예측가능하게 만들고 통제해야 하는 지배층 입장에서는 이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두려움을 잘 활용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무엇을 두려워할까.
    무엇을 두려워했길래, 살아남아 지금까지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후손을 남길 수 있었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을 두려워해야 했다.
    맹수, 재난재해, 기아, 살인, 부상 등등.
    결국 형태는 다르겠지만 내가 생존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모든 자극들을 두려워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두려움의 저주

    육체의 저주

    그 진화의 결과로, 우리는 이제 살면서 지하철역이나 집앞에서 맹수를 만날 일이 거의 없음에도 작은 자극이나 위협이 가해지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혈류가 손발 끝까지 쫙쫙 펌핑을 타고 전달된다.
    사실 이 반응은, 맹수를 만났을 때 도망치거나 목숨을 걸고 한판 붙어야될 때는 유용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핀트가 안 맞다.
    (사실 지금은 Type-A라고 해서 성마른 성격을 가져서 자주 심박수 높여가며 붉으락푸르락할수록, 심장질환 발병률만 높고 오히려 생존에 불리하다 ㅋㅋ)

    이렇게 핀트가 맞지 않는 진화의 산물은 우리 몸과 마음 곳곳에 산재해있다.
    우리가 밤에 치맥 달리면서 천상의 행복을 느끼는 건, 치킨이 진리여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애당초 단맛에 행복을 느끼도록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비만과 당뇨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삶을 힘겹게 만든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넘어가자.

    마음의 저주

    진화의 흔적은 마음에도 존재한다.
    우리는 누구 한 명만 우리를 미워하고 적대해도 막 심장이 두근거리고 집에 가서도 자꾸 생각나고 아주 막 어쩔 줄을 몰라한다.
    아닌 척들 하지만, 굳이 내가 개인내담자들을 상담한 경험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들 다 그렇다.
    그게 그렇게 민망할 일도 아니다.
    애초에 인류는 출현한 이래 거의 언제나 집단 내 부족원들과 잘 어울려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소위 ‘개썅마이웨이’였던 개체들은 우리 선조 중에는 없다.
    이미 수억년 전에 다 죽어버렸으니까.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각기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여전히 부족사회 시절 우리 선조들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소외되거나 추방될까봐 벌벌 떨면서 산다.
    인간을 가장 옥죄는 것은 타인에게 수용받지 못하고 거부당할까봐 가지게 되는 공포다.
    우리 중 누가 과연 타인의 판단과 비웃음에서 완전히 의연하고 자유로울 수 있을까.
    회사생활, 학교생활, 공부, 운동, 친구관계, 가족관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걱정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만성불안상태다.
    상담대학원에서 불안장애 카테고리를 공부하면서 유독 느꼈던 것이 있다.
    나는 불안장애 종합선물세트인가,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해보면 나랑 수업듣던 동기들도 매한가지다.
    알고 보니, 수십년 전 공부하던 사람들도 비슷하게 느꼈다고 책에 고백해놨다.
    그냥 우리는 누구나 만성불안상태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정신적 자유를 되찾는 일의 시작이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소외감의 역학

    소외감의 역학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한국인의 19%는 종종 소외감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우리가 오늘 얼굴을 마주친 5명 중 1명은 평균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며 지낸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종종 느낀다는 것일뿐, 실제로 종종은 아니어도 잊을만하면 ‘한번씩’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훨씬 많겠지.

    2년반 넘게 상담수련을 할 때 만났던 내담자들 중, 소외감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사실 정말 속을 터놓게 된 친구들 중에서도 소외감을 말하지 않았던 사람은 정말 소수의 몇명을 빼곤 없었다.
    설문조사와 달리, 내가 보기에 압도적인 절대다수는 삶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소외의 두 가지 의미

    소외란 무엇일까.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소외는 다음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번째 의미는 따돌림당하는 일상적인 의미의 소외, 두번째 의미는 철학적 관점에서 보는 본질적인 차원의 외로움, 소위 말하는 인간소외, 자기소외를 말하는 걸로 보인다.

    내가 소외의 ‘역학’이라고 말한 이유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정의하는 두가지 ‘소외’ 간의 역학을 이야기해볼 생각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통제가능하지 않은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소외를 예기치않게 겪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물론 그 확률을 낮추려고 대다수가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는 형국이지만,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그건 우리 통제영역 밖에 있다.
    그리고 그 소외감이 두렵고 괴롭고 절망적이어서 그 소외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다보면, 사전에서 정의하는 ‘두번째 소외’가 어느샌가 가슴에 머무른다.
    즉, ‘자기의 본질을 상실’한다는 의미다.

    누구나 느끼고 사는 ‘소외감’의 이야기

    무슨 이야긴지 조금 쉽게 이야기해보자.

    어떤 집단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진 A라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는 A가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람들은 A를 멀리 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본다.
    A는 소외감을 느낀다.
    A는 소외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자기 생각이 아닌 다른 대다수의 생각이 맞다고 말한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타인의 생각이 마치 자기생각인 양 연기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점차 A도 자신들과 같은 부류라는 생각에 덜 따돌리기 시작한다.
    A는 점점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라고 이야기가끝나면 좋겠지만,
    그 광대놀음에 점점 A는 어딘지 모르게 공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공허감은 곧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는 두번째 사전적 의미인 ‘소외’다.
    진짜 자기자신이 스스로에게조차 외면받고 소외받는 것이다.

    또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볼까.

    내향적인 B라는 사람이 있다.
    B는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에서 거의 유일하게 내향적인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외향적이고 활발해서, 일주일에 몇번이고 서로 만나고 여행도 다니고 거의 항상 카톡과 전화를 하면서 서로 즐겁게 지낸다.
    B는 사실 일주일에 하루이틀만 저녁 약속을 잡아도 기가 다 빨려서, 다른 날에는 퇴근하고 나면 집에서 쉬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친구들은 B가 좀 자기들과 지내는 게 재미가 없거나 자신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지 의심하며 점점 B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본다.
    B는 초조하다.
    원래도 말수가 많지는 않고 조용한 성격인 내향적인 성향의 B는 친구들이 삐죽거리면 웃으며 그런거 아니라고 손사래친다.
    B는 이 집단 안에서 혼자 소외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열심히 친구들이 일주일에 몇번이고 모임을 잡고 놀러 다니고 할 때마다 꾸역꾸역 그 약속에 다 나간다.
    사실 가서 하는 거라곤 앉아서 누군가가 재밌는 농담을 하면 웃어주고 박수쳐주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하면 사람들이 날 나쁘게 보진 않을테니까 그렇게 한다.
    문제는, 계속 그렇게 자기마음 대신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더 신경쓰고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다보면, 점점 그런 삶이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B는 결국 친구들에게 소외받지 않기 위해, 진짜 자기자신을 소외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B는 언젠가부터 별 사건사고도 없는데, 한번씩 이유없이 지치고 눈물이 날 것 같다.

    소외감의 문제는, 결국 우리가 결정하는 문제

    화두는 ‘소외’지만, 사실 핵심은 내 마음과 타인의 마음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의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히 소외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에 관한 문제이자,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삶을 조각하는 일에 관한 문제다.
    얼마만큼 나를 포기하고 내 마음 대신 타인의 마음을 따라 살 것인가.
    이건 곧 주인으로서 자유로운 삶을 내 마음을 따라 누릴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 자신보다 타인을 더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소외받지 않는 대신 진짜 우리자신을 소외시키게 될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타인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을 더 우선순위에 놓고 살게 되면 아마 최소 언젠가 한 번은 사람들에게 소외받는 상황이 생길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첫번째 소외와 두번째 소외 중 한가지를 포기하고 더 중요한 한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에 처하는 것이다.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비법

    아니, 그럼 사전에 나오는 두가지 소외 중 하나는 무조건 감수해야 된다는 이야기냐, 하고 항의할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일단은 ‘그렇다’이다.
    뭐 동화처럼 타인에게도 소외받지 않고 나자신에게도 소외받지 않는 게 공짜로 턱 주어지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삶이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하기만 한 줄 아는가.
    그렇지가 않다 ㅋㅋ

    국어대사전의 첫번째 소외와 두번째 소외를 각각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소외,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소외라고 부를수도 있겠다.
    이 양쪽에서 오는 두 가지 소외가 모두 없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긴 있다.
    그건 바로, 진짜 내 마음이 집단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완전히 같으면 된다.
    그리고 이 ‘같음’이 시간이 흘러도 계속 변하지 않고 유지된다면, 그렇다면 인간은 두가지 소외를 모두 겪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게 되겠냐고 ㅋㅋ

    안된다, 미안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에 그런 인간은 없다.
    그렇게 ‘고장나있을수는‘ 있어도, 진실로 그런 인간은 없다.
    모든 인간에겐 각자만의 고유한 잠재력과 개성, 예술성이 잠들어있다.
    집단의 구성원들과 내 생각이 진짜로 계속 같으려면, 내가 그 집단의 독재자가 되면 된다.
    그럴 순 없지 않나.

    자, 그러면 이제 가급적 두가지 소외가 발생할 확률을 최소한으로 낮추는 방향을 이야기해보자.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에서 생활하면 된다.
    우리가 집단이라고 소속되는 거라고 해봐야, 초중고는 그냥 나이가 같고 동네가 같아서고, 남자라면 군대도 매한가지다.
    대학은 성적에 따라 모이고, 직장은 알다시피 되는대로 지원서 뿌려서 가는 것이니 생각이 같은 사람이 모이는 게 애당초 비현실적인 기대다.
    동호회라고 나가면 자전거든 와인이든 캠핑이든 다 동호회 활동 자체보다 이성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경우가 허다하다.

    진짜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끼며 머물고 교류할 수 있는 진정한 공동체를 만드는 건, 생각보다 쉽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그저 가볍고 편안하면 될 뿐이다.
    그런 공동체는 안타깝게도 기존 집단 중에 거의 극소수를 제외하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 결국 누군가가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만들 생각이다.)

    우리는 가급적 소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집단에 소속되어야 한다.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고,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지 않고, 엄근진 말고 자유롭고 가볍고 편안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확률이 최소한이 될 뿐, 근본적으로 소외는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문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나로부터의 소외와 타인으로부터의 소외 중 하나를 택하는 일이다.
    적어도 그 둘 간의 우선순위는 확실히 정립해놓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타인에게 소외당하지 않기 위한 노력은 십중팔구는 진짜 나 자신을 소외시키는 일로 이어진다.
    이 소외의 역학을 이해하고 무엇을 선택할지 차분히 생각해보길 권한다.

    무슨 선택을 해라고 말하진 않겠지만, 뭘 권할지 짐작하리라 생각한다.

    건투를 빈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주위 사람들의 믿음에 지배당하지 마라

    주위 사람들의 믿음에 지배당하지 마라

    믿음은 중요하다.
    믿음의 힘은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을 초월하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1912년 국제육상경기연맹이 세계기록을 관리하기 시작한 이후, 육상 100m 달리기의 마의벽은 언제나 10초였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선수들이 10초 초반대까지 밀어붙였으나 인간이 100m를 10초 전에 주파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모두가 믿었다.
    56년이 지난 후, 짐 하인즈 선수가 9초대로 100m를 주파하자 우후죽순 다른 선수들도 10초라는 마의 벽을 넘기 시작했다.
    인간이 10초 안에 100m를 주파하는 게 가능하구나, 라고 기존의 믿음이 변화한 것이다.

    심리학에서 유명한 실험이 있다.
    두 학급으로 학생들을 균등한 성적분포로 나누어두고, A반 교사에게는 이 아이들이 우등반이라고, B반 교사에게는 이 아이들이 보충이 필요한 열등반 학생들이라고 일러준다.
    시간이 흐른 후, 실제로 A반 아이들은 B반 아이들보다 유의미하게 높은 성적을 거둔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타인의 영향을 받는다.
    어떤 집단에서 저 아이는 우수하다, 쟤는 웃긴 아이다, 쟤는 형편없는 아이다, 이러한 많은 구성원들의 믿음이 공고하면 실제로 그 사람은 똑같은 사람임에도 그 믿음의 영향을 받아 실제로 그런 사람으로 변해가기도 한다.

    시크릿이라는 책에서는 마음 속으로 한치의 의심없이 믿으며 생생하게 그리면, 우주가 그 생생한 믿음을 현실에서 나타나게 도와준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모든 형태의 물질은 고유의 진동수를 가진다.
    생각과 감정도 아직 인간이 관찰하지 못하는 어떤 형태의 에너지나 물질이라면, 무언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뭐 그런 양자역학이나 물리학적인 관점의 논의는 아니다.

    믿음은 분명 강력하다.
    우리가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으면 왠지 그대로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기만 할까.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수많은 위인들은 대개 주위 사람들이 믿은대로 그런 모습의 삶을 살았던걸까.
    아니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절대 그게 가능할리 없다는 것을 오롯이 혼자의 믿음으로, 세상 모두의 반대와 상반된 믿음을 깨버리면서 무언가를 창조해낸걸까.
    어쩌면 그렇게 세상 모두의 확신을 깨부숴버리고 나서, 뒤늦게 사람들이 ‘아, 저게 되는 일이었구나.’라고 사후적으로 위인들을 위대한 사람이라 믿기 시작한건 아닐까.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어떠한 현상을 판단하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 믿음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그 믿음에 영향을 받기로 결정했을 때다.
    앞서 말한 것처럼 100m를 인간이 10초 안에 주파할 수 없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확신을 가질 때, 자기자신은 그와 반대되는 믿음을 가지고 혼신의 단련을 거듭했기에 10초라는 마의 벽을 뚫어버린 것이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믿음이 중요하긴 한데 나 자신의 믿음이 중요하다.
    타인의 믿음은, 마치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 우리를 바꿔버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타인의 믿음은 우리의 믿음을 바꾸는 영향을 미쳐서, 결국 우리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타인의 믿음에 따라 우리의 믿음을 바꾸기로 결정하지 않으면, 타인의 믿음은 힘이 없다.

    세상 모두의 믿음을 박살내고 생각지 못한 발견과 혁명과 진보를 이룩했던 모든 사람들은 타인의 믿음이 자신의 믿음을 일그러뜨리도록 허락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삶으로 돌아와서, 우리 또한 그러한 역학을 잘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결정해야 한다.
    타인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을 변형시키고 바꾸고 누르고 펴도록 내버려둘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신념을 가슴 한가운데 지니고 내 믿음대로 내 삶을 조각해나갈 것인지.

    세상이 피해자와 조각가로 나뉘는 이유는 그래서다.
    아쉽게도,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자신을 가장 위하기 마련이어서 나를 위해 상대방이 행동하길 바라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내가 아닌 상대방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바라지도, 옳다고 여기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아무도 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기왕이면 나에게 득이 되고 내가 원하는대로, 날 위해 움직여주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타인이 우리에 대해 가지는 믿음은 무엇일까.
    내 입장을 대변해주고 나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해주면, 우리는 그 주장이 옳고 그 사람이 현명하고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믿음이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기보다는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경향이 매우 강하다.
    결국 우리에 대한 타인의 믿음이란, 지 맘에 들게 행동하고 지한테 유리하게 말하면 좋은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에 영향을 많이 미치게 허락할수록, 타인이 바라고 기대하는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아니면 남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자기자신이 별로라고 생각하거나.

    예를 들어, 우리가 고1 학생이라고 해보자.
    모든 사람들은 우리에게 공부를 하길 기대한다.
    부모도,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학교 선생님도, 아는 모든 어른들도, 선후배들도 다.
    근데 나는 공부를 못한다.
    반에서 하위 10%다.
    학교에서는 나같은 애들을 그저 그런 별 가치없는 학생 중 하나라고 여긴다.
    모든 과목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옆집 아주머니도.
    내 주위환경을 채우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큰 가능성도 없는 존재라 믿는다.
    나도 그들의 믿음을 보며, 그들의 수없이 반복되는 나에 대한 태도를 보며 점점 그리 믿는다.
    난 공부도 못하고 빡대가리라 크게 가망이 없구나…
    난 공부가 하기 싫어진다.
    난 어차피 패배자다.
    공부를 더 안 한다.
    그럼 더욱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날 더 한심하게 여긴다.
    난 더더욱 내가 한심하다는 걸 강하게 믿게 된다.

    여기서 공부하는 게 무슨 그들에게 유리한 입장을 대변하는 행동이냐,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들에게 당신이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그들에게 분명 유리하다.
    여러분이 성적이 낮다고 깔보는 그들 대다수는, 그저 시키는대로 사회에서 제시하는대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냥 정해진대로 룰이라고 알려준대로만 산 사람들에게, 룰대로 하지 않는 모든 존재는 위협의 대상이다.
    내가 혹시 너무 노예처럼 시키는대로 아무 생각없이 그들 손에 휘둘려서 살아온 건 아닌지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성적 부진아라는 정체성을 가진 채로 세상에 나온다.
    10대를 그렇게 보내고 나면, 그 후 삶이 쉽사리 갑자기 확 나아지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주위 사람들이 믿은대로 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면, 나는 꼼짝없이 ‘피해자’다.

    조각가는, 그들의 믿음이 왜 그런지에 대해 잘 이해하고 파악하되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것일 뿐 내 삶을 살아가는 나자신의 믿음이 그 믿음들에 의해 맹목적으로 변해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조각가는 그들의 믿음을 경청하되 과연 내 삶에 이 믿음을 참고해서 변화시킬만한 부분이 있는지 차분히 살펴보고 선별적으로 선택해서 참고할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을 보면, 유리병에 넣은 벼룩 이야기가 나온다.
    벼룩은 뚜껑 닫힌 유리병에서 한동안 머리를 부딪히며 유리병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한동안 내버려두었다가 유리병 뚜껑을 열어도 벼룩은 영원히 그 유리병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을 본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것.
    절대 남이 마음대로 휘두르도록 내어주어선 안 되는 것.

    무언가를 믿기로 결심했다면, 내 눈으로 보고 내 피부로 겪고 더이상은 아무래도 신념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확신이 서지 않는 이상, 그 믿음을 유지해도 좋다.

    세상이 틀렸다고 말하는 확신과 간섭에 신경쓰지 마라.
    세상은 검증되지 않은 모든 것을 조롱하고,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은 모든 것을 비웃는다.
    훗날 결과로 보여주면, 세상은 언제그랬냐는듯이 당신이 믿는 걸 믿게 될 것이다.

  • 주위의 탄식을 이겨내는 일의 가치

    주위의 탄식을 이겨내는 일의 가치

    끔찍한 운전재능과 주위의 탄식

    나는 차를 평생 사지 않지 않을까 생각했다.
    30대가 되고 한참이 지나서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내가 운전하는 것보다, 남이 운전해주는 버스나 지하철을 좋아한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버티고 버티던 나는, 결국 신체적 안전을 위해 차를 샀다.
    (결국 코로나에 걸렸지만.. ㅋㅋ)
    부산에 있는 중고차 매매시장에서 차를 샀는데, 운전면허를 장롱에 넣어둔 지 10년이 넘었던 나는 처음 집에 차를 끌고 가는 것부터 동생에게 운전을 부탁해야했다.

    집에 차는 가져다놨는데, 차에 손이 가질 않았다.
    도로연수를 받았다.
    사흘 간 도로연수를 받은 후, 동네에 차를 끌고 나갔던 나는 다시 근 두달을 차를 몰지 않았다.
    운전을 하면서 금세 온몸을 가득 채우는 긴장감과 피로감이 나에게 운전을 할 수 있겠냐고 으름장을 놓는 것 같았다.
    가끔 고향에 내려가서 부모님 차를 한번씩 몰기도 했지만, 나는 무척이나 둔하고 익히는 속도가 더뎠다.

    난생 처음으로 부진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온화하게 끈기를 가지고 응원하던 가족들도 나중에는 나에게 답답함을 호소하고 급기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몇 번의 사고 위험에 가까운 나의 삽질?!을 보고난 후 엄마, 아빠, 동생 할 것 없이 탄식을 내뱉었다.

    후… 그 정도였다.
    엄마는 사실 도로연수도 없이 수십년만에 그냥 도로 나가서도 운전 잘 하던데, 나는 누굴 닮은건지 그러지 못했다.
    (참고로, 아빠는 근 40년 무사고 운전경력을 채워가고 있었다… 난 왜…)
    나중엔 결국 가족들도 두손 두발 다들었다.
    나의 이 모지리 같은 운전 행태에, 가족들은 결국 손을 놨다.

    그렇게 온갖 핍박과 구박, 비난을 직격탄으로 맞으며 나는 한껏 풀이 죽은 채 정말 한동안 차를 몰지 않았다.
    차를 괜히 샀나 싶었다.
    운전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 차를 다시 팔아야 하는 운명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정말 간헐적으로 한달에 한 번 정도는 차를 몰곤 했고, 잠시 차가 하나도 없는 너른 도로를 타고 와서 집에 들어오면 힘들어서 드러누워 뻗어버리곤 했다.

    주위의 탄식이 무색하게

    그런데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
    언제부턴가 사이드브레이크 체크하고 전조등 체크하고 백미러 체크하고 안전벨트하고 변속기 바꾸고 핸들 꺾고 도로 신호 보고 사람보고 뭐 정신이 없던 것들이 차츰 안정감있게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어느 시점부터, 영원히 늘지 않을 것 같던 나의 운전실력이 갑자기 확 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은 편안히 운전을 잘 하고 있고, 다들 한번씩은 가벼운 접촉사고라도 난다는데 나는 겁이 많았고 더딘 탓에 무사고로 몇년째 잘 운전중이다.

    주위의 탄식에 귀기울이지 마라

    운전을 익히면서 나는 두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주위의 탄식이 엄청나게 못하고 있는 내 마음을 생각 이상으로 압박해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탄식에 지레 겁먹고 고개숙일 필요 없다.

    사실 별거 아닌거 같지만, 신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거의 무얼 시작하든 가족들은 응원하는 편이었고 무엇이든 곧잘 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안 되는건가’ 싶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 수준으로 무언가를 남들보다 확 뒤쳐지게 못한 경우가 없었다.
    그래서 주위의 탄식이 그렇게 가슴에 팍팍 꽂혔고, 나도 덩달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바닥을 쳤었다.
    (실제로 그래서 한달에 한두번 운전하고 마느라 익히기까지 오래 걸리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번잡한 도시인 서울에서도 사고 한 번 없이 잘만 운전하고 다닌다.
    역시 주위의 탄식에 덩달아 내가 나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랬다면, 나는 평생 운전을 못하는 운전부진아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매일 꾸준히

    내가 느낀 다른 하나는, 꾸준하게 실천하는 용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고 나니 정말 운전을 하게 되질 않는 날들만 계속 됐다.
    그런데 뒤돌아 생각해보니, 내가 만약 그리 풀죽어서 잔뜩 쫄아서 한달에 한번이나 운전대 잡아보고 이러지 않았다면, 나는 훨씬 빠르게 운전마스터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걸 시작할 때도 그런 상황이 벌어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운동이나 기술, 학문, 활동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도무지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나에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역부족인 것만 같고 그런 감정이 많이 든다.
    그럴 때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한심한듯한 눈빛을 보내는 걸 자꾸 보게 되면 더욱더 주눅이 든다.

    하지만 그럴 때 내 마음이 설령 주눅이 들지라도, 그저 묵묵히 꾸준하게 매일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용기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원하는 나 자신을 조각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We are what we repeatedly do.
    Excellence, then, is not an act, but a habit.”

    번역하면 이렇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외로움을 통제하는 방법

    외로움을 통제하는 방법

    우리는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한다.
    1인 가구가 이렇게 늘고 다들 혼자 사는 개인이 된 마당에 무슨 소리냐,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그렇기 때무네, 전화하는 게 부자연스럽다는 어린 친구들조차도 끝도 없이 DM하고 카톡하고 그러는 거라고 본다.

    왜 우리는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할까.
    혼자 있으면 외롭기 때문이다.
    세상을 혼자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외롭고 고독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외로움은 술, 담배보다도 더 건강에 해롭다고.
    한 연구에 따르면, 외로움은 매일 담배 15개피를 피는 것보다 더 해롭고 심지어 만병의 근원인 비만보다도 2배 이상 해롭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외로움을 측정하는 척도와 외로움을 얼마나 세분화해서 문항화했는지에 대해 하나하나 따져물으려는 건 아니지만.
    실제로 외로움과 관련된 각종 연구들을 보면, “내가 잘 아는 사람과 일정 빈도 이상 만난다” 이런 식으로 설문조사 문항이 만들어져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잘 아는”… 이라…)
    이런 논문이나 통계적 연구방법론을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은 좀 더 기초적인 차원에서 척도설계와 표본설계, 통계방법 등을 면밀히 살펴보길 권한다.
    비허위적 관계(Nonspurious relation)가 맞는지, 이런 연구에서 얼마나 통제변수가 잘 통제되는지,에 대해서도 찬찬히 잘 생각해보길 권한다.
    (자, 이번 글은 이제 연구, 통계 이런 이야기 더 안 한다 ㅋㅋ)

    한 번 생각해보자.
    외로움이 진짜 담배 15개피를 매일 피는 것보다 해롭다고?
    내가 담배를 피진 않지만, 저건 헛소리다.

    일단,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외로움은 사실 거의 모든 부정적인 정서에 수반되는 감정이고, 곁에서 타인이 대신 해결해줄 수 있는 그런 만만한 녀석도 아니다.
    ‘잘 아는’ 사람을 자주 보고 산다고 해서 그가 덜 외롭다고 보기는 힘들다.
    자신의 분야를 평생 연구하며 홀로 지내는 누군가는 서로 ‘도원결의’를 외치며 매달 100명 이상의 ‘진짜 친구’들과 어울리는 누군가보다 훨씬 덜 외로운 삶을 살수도 있다.

    외로움을 달래보고자 누군가와 친구관계를 맺고, 자주 만나고 술잔을 기울이는 건 사실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막상 그런 사람도 상대방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신을 찾는다는 걸 알면 입맛이 쌉싸름할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의 연인이, 알고보니 외로워서 당신을 곁에 두고 있다고 한다면.
    그런데 당신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당신은 더없이 외로워질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잊어보려고 다같이 모여 자주 놀러도 가고 회식도 하는 삶이, 과연 정말 그들의 외로움을 해소시켜주긴 하는걸까.
    아니면, 그저 마취총을 맞는 것처럼 아주 잠시 마비가 되는걸까.

    일단 외로움이 이렇게 여러 양상을 지니고 사람마다 다 기준도 정도도 느낌도 다른 관념이라는 걸 머리에 넣어두고 조금 더 생각해보자.

    외로움을 서로 달래며 살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와 관계를 맺고 외로움을 잊기 위해 이 관계가 달라지지 않도록 계속 신경을 써야 한다.
    난 외로우니까, 이 관계가 계속 이대로 잘 이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사실 이 문제는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의 근본적인 문제다.
    우리는 우리와 관계맺는 사람들에게서 소외당할까봐, 내쳐질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날 미워하거나 적대하지 않도록 내 진심을 숨기고 솔직한 표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안 괜찮아도 괜찮은 척 한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내 생각과 일치하는 척 그들이 하는 말을 똑같이 읊는다.
    실은 크게 재미없어도 리액션을 하고, 속으로는 동의하지 않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라도 많은 사람들과 가까이서 어울려 지내면, 정말 외롭지 않게 되는 것일까.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외로움은 분명 한결 해소된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서 접하는 절대다수의 관계는, 미안하지만 절대로 외로움을 해소해줄 수 있을 정도의 ‘진짜’가 아니다.
    그럴 수가 없지.

    일단 인생 대부분의 관계는 그저 비슷한 인생루트와 비슷한 공간에 처해있게 되는 ‘바람에‘ 그냥 친해진 관계인데.
    집단관계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 집단에서 당신이 얼마나 진정한 유대감과 공감, 아늑함을 느끼며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을까.
    그저 같이 비슷한 곳에 떨어졌다는 이유로 맺어진 관계일 뿐인데.
    물론 그럼에도 벼락맞을 확률로 삶의 진정한 친구를 만나는 경우가 없진 않겠지만,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진정한 관계의 핵심은,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연기하지 않는 것.
    내가 진짜 나의 모습을 아무 주저함이나 고민없이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낼 수 있는 것.
    이런 관계는 삶에서 그리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식도 부모 앞에서 온전히 다 드러낼 수 없고, 부모도 자식 앞에서 매한가지다.
    연인도 배우자도 말할 것도 없다.
    친구는 더욱더 말할 것도 없다.
    집단은? 에라이 그건 그냥 포기해라.

    삶에서 그런 소중하고 천운이 따르는 관계는 많아야 한 두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관계를 삶에서 가져가기 위해서는 다분히 용기를 내고 노력하고 배려하고 애써야 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양반은, 평생 쉽지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접근하면 되는 관계는,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나 자신과의 관계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그 접근이 통한다.
    하지만 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자신에게조차 그렇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다.
    지가 지한테도 안 그러는 걸 남한테 하는 건 선넘는거지 ㅋㅋ

    사실 인간은 자기자신과만 진정한 관계를 잘 맺어도 평생 충분히 외롭지 않게 삶을 조각해나갈 수 있다.
    내가 어떤 순간에 행복한지를 알고, 도저히 내 마음의 일부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는 그대로 애정을 가지고 잘 받아들여주고, 내가 가진 재능과 잠재력을 두려움을 딛고 잘 세상에 드러날 수 있게 자기자신의 하루하루를 조각해나간다면.
    그에게 외로움이나 공허함은 찾아오지 않는다.
    대신, 매순간이 자유롭고 의미있고 자랑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 모두가 살았으면 하는 조각가의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결국 관건은, 잘 아는 친구녀석들과 자주 보는 게 아니라 나 자신과 진짜 관계를 맺고 내 삶을 잘 조각해나가는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외로움을 잘 극복하며 삶을 채워나갈 수 있다.
    거기에 만약 같은 삶의 방향을 바라보는, 하지만 서로 진솔할 수 있는 그룹에 소속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지.

    사실 그런 그룹, 크게는 마을을 만드는 건 내 계획 중 하나다.
    그건 내가 할테니, 우리 각자는 우선 우리 자신과 좀 더 진솔한 관계를 맺어나가는 데 집중하자.

    어차피 우리가 삶의 고유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과정이니까.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자존감이 낮아지는 우리의 숨겨진 비밀

    자존감이 낮아지는 우리의 숨겨진 비밀

    “아, 요즘 자존감이 바닥이야.”

    이런 이야기가 심심찮게 귀에 들린 지 몇년 된 거 같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자아존중감’이라고 부른다.
    내 존재의 가치와 잠재력에 대해 가지는 기대, 믿음 같은거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는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저 질문이 실제 어떠한지를 묻는거라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아마 주위 사람들, 사회, 소속된 집단, 문화 등 타인이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정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최근에 자존감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타인의 반응을 목격했거나 경험했던 경우가 많다.

    놀라운 비밀을 하나 말할까 한다.
    충격적이게도, 우리의 가치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너무 교과서에 자주 나오는 진부한 말이라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ㅋㅋ
    안 믿기겠지만,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말을 책에서도 보고 유튜브에서도 듣고 강연에서도 듣는데 왜 그게 와닿지 않을까.
    왜 우리는 여전히 상사에게 깨지고 내 뒷담화를 전해들으면 자존감이 낮아지는 거 같을까.

    그렇게 진화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위 사람들의 비위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부족의 우두머리 눈밖에 나고서도 죽지 않을 수 있게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류가 출현한 이래 거의 모든 시간동안 개인은 절대 자기가 속한 부족의 룰이나 기득권층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됐다.
    부족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행동하면 결말은 뻔했다.
    어디 짱박혀서 자다가 산짐승을 만나 물려 죽거나, 어디 잘못된 곳에 빠져서 못나와서 죽거나.
    이래나 저래나 혼자 살아남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부족장이나 부족의 집권층의 미움을 사면, 부족에서 쫓겨나 죽게되는 게 너무나 자명한 수순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생존해있는 우리들의 조상 중에, 쿨하게 부족장 말을 어기고 혼자 산딸기 따러 무리에서 벗어나고 남이 날 싫어하든 말든 개무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던 애들은 우리 조상이 되지 못하고, 자손을 못 남긴 채 어느 시기엔가 결국엔 죽어 사라졌을테니까.
    진화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남 눈치를 보고 남이 날 보고 뭐라고 하는지에 예민한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죄다 그런 애들만 살아남아 자손을 낳고 길러온 시기가 어마무시하게 길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애’들의 ‘애’다 ㅋㅋ

    결국 우리가 남눈치를 보는 건, 애초에 그렇게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화는 매우 더디고 큼직하다.
    빠르고 디테일한 인간문명의 발전과 현대사회 환경을 정확히 반영할만큼 섬세하지 못하다는 의미다.

    지금 우리는 이제 그런 세상에서 벗어난지 오래다.
    사회와 문화는 모나면 안 되고 튀어서도 안 되고 니 생각을 남들 앞에서 말하지 말고 그저 조용히 숨죽여 남들이 하는 걸 비슷하게 따라 말하면서 지내라고 말한다.

    그건 지배하는 입장에서는 구성원들이 그렇게 순종적이고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서로가 서로를 속박하는 게 가장 통제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각자의 입장에선 그걸 곧이곧대로 따르기엔 문제가 생긴다.
    아까 말했듯이, ‘자존감이 떨어진다.’
    남들의 반응이나 판단에 의해서.
    타인에 의해 내 존재가치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건 꼭두각시 인형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 각자의 가치는 누군가의 변덕스럽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생각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그따위 꺼는 사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그것에 쩔쩔매게 진화해왔다고 해도 그걸 따를 이유는 없다.
    포도당이 중요 급원이라서 달달한 맛만 나면 좋아하는 우리가 그럼 맨날 혈당을 치솟게하는 꿀 듬뿍 찍은 식빵만 허구한날 먹다가 당뇨로 사망할 순 없지 않나.

    하지만 사람들은 의외로 당뇨가 심해질만큼 달달구리한 음식만을 찾는 건 나쁘다 생각하면서도, 정신이 망가질만큼 남눈치를 보고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굽신거리는 건 의외로 나쁘다고 자각하지 않는다.
    그저 힘들다고 생각할 뿐이지.

    내가 딱 말해주겠다.
    그건 ‘나쁜거’다.
    윤리적으로 옳고 그르고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냥 남의 비위를 맞추느라 애써 웃고 내 생각을 감추고 가면을 쓰고 남들이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건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나쁜 일’을 하는거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되지 않나.
    그렇게까지 해서 얻고자 하는 게 무어란 말인가.
    남들의 칭찬? 썩 좋은 사람이라는 인정?
    끊임없이 남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만 눈치보며 살다가는.
    삶에는 ‘공허함’만이 더욱 번져가고, 진정한 자유와 의미, 행복은 절대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진화를 남눈치를 보는 모냥으로 해왔다는 것 외에 하나 더 있다.
    우리가 끝도 없이 남의 눈치를 보고 남의 평가에 휘둘려 자존감이 낮았다가 높았다가 휘둘리는 이유가.

    그건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데 있다.
    남들에 의해 내 가치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걸 진심으로 받아들인다고 치자.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날아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니 존재의 가치는 뭔데?”

    근데 내가 내 가치가 무엇인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본적도 없고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거다.
    “… 너 그렇게 안 봤는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보기보다 별로네 너.”

    크윽.
    자존감에 타격이 팍 간다.
    어차피 난 내가 무슨 의미가 있고 어떤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모르는 상황인데 누가 와서 그 문제의 답은 00이야. 하고 알려주는 형국이니까.

    그러면 결국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삶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발견해야 한다.

    그래서 ‘발견’하는 단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테지만, 지금 여기서 명확하게 말하고 싶은 건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치를 모르고,
    타인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판단해대고,
    우리는 남눈치를 오지게 보게 진화해왔고,
    고로 우리는 타인에 의해 자존감이 휘둘리며 산다.
    하지만,
    사실 그따위 꺼 신경쓸 이유가 전혀 없다.

    (남한테 이쁨받아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니까.)

  • 대학 중퇴가 가지는 엄청난 의미

    대학 중퇴가 가지는 엄청난 의미

    우리가 이름을 아는 사람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에게는 여러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 중에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중퇴’다.
    스티브 잡스는 대학교를 중퇴했고, 델 컴퓨터로 유명한 마이클 델은 의대를 중퇴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하버드 중퇴, 빌게이츠도 하버드 중퇴, 조르지오 아르마니 의대 중퇴, 심지어 그 바른생활 사나이 같은 유재석도 서울예대 중퇴, 뭐 사실 조금만 검색해보면 이런 사람들은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 힘들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중퇴해야 크게 성공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농담으로 치부할 이야기가 맞을까.

    예전에 전공수업을 들을 때 한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
    니네는 왜 여기서 수업을 듣느냐는 것이다.

    어차피 한국은 대학에 입학했다는 자체가 그 사람이 그 정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걸 입증해주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는 과정이 외국처럼 빡쎄서 졸업사실이 무언가를 입증해주는 어려운 과정이 아니다.
    그런데 왜 4년이란 젊음을 엄청난 학비, 생활비와 함께 여기서 보내느냐.
    내 수업은 사실 내가 쓴 책만 봐도 다 배울 수 있는데.

    그 수업을 듣던 많은 학생들이 그 농담을 듣고 웃었다.
    그 교수님은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다, 라고 말을 이어갔지만 다들 그 말을 진지하게 듣지는 않았다.
    대형강의실에 100명이 넘게 듣는 수업이었는데, 그 어느 누구도 거기서 그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자퇴를 고려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다들 전혀 현실성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저 위에 열거한 사람들은 교수가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걸 실천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대학중퇴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내가 보기에 중퇴는 성공한 사람들의 엄청나게 큰 용기와 안목을 보여주는 요소다.

    내가 굳이 중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이유는, 중퇴가 결국 우리가 우리 삶을 조각하는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를 중퇴한다는 건, 내가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학교 커리큘럼을 따르는 데 드는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효과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중퇴는, 주위 사람들과 내가 속한 문화, 사회에서 내게 보내는 기대와 요구를 거절한다는 걸 의미한다.
    사회에서 짜놓은 보편적인, 하지만 크게 나에게 해가 되지도 않을 루트를 굳이 걷어차버릴 정도의 소신과 신념을 가지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보편적 루트’를 지켜내고 유지시키는 게 국가 권력이나 절대자가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일반적인 삶의 궤도를 끊어버리려면, 내 주위의 기대와 압박, 나아가 비난과 적대, 손가락질을 이겨내야 한다.
    거의 모든 자수성가형 인물들은 상당기간 주위의 기대를 저버린 채 비웃음과 동정, 냉소 등을 견뎌가며(사실 자기 인생이 바쁘면 그냥 무시하게 된다.) 가시적인 결과없이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구간을 거친다.

    이러한 것들, 즉 학교를 중퇴하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 비웃든 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일들은 사실 ‘거절’이다.
    주위 사람들, 사회와 관습이 요구하는 역할과 기대에 ‘거절’을 시전하는 일이다.
    그러면 그 때부터 난리가 난다.
    온갖 조언과 걱정, 비난, 조소와 멸시, 설득과 타이름이 미친듯이 일어난다.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조각해내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

    과거 어느 토크 프로그램에서 김영하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가장 고마운 일이, ‘그저 묵묵히 기다려주신 것’이라고 했다.
    이게 정말 중요한 일이다.
    세상에 내가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한 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비난과 조소가 아니라 그저 가만히 지켜봐주는 것은 엄청난 힘과 위안이 된다.
    반대로 말하면, 절대 세상은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 ㅋㅋ

    그래서 중퇴는 사실 그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조각해낸 것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사건이다.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를 거절할 용기를 냈던 것, 그 용기를 낼만큼의 소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비전이 확실했다는 것, 남이 짜놓은 판에서 남이 짜놓은 규칙대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걸 어느 순간엔가 거부했다는 것.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잠재력에 대해 가늠해볼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 꿈을 통해 진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법

    꿈을 통해 진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법

    말끔하게 생긴 훤칠한 그 남자 간호사는 그렇게 무참히 부모가 살해당하는 일을 겪어야 했다.
    그것도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 병동에서.
    그의 부모는 자식이 일하는 병동에 갑작스런 사고로 입원한 지 이틀만에 사망했다.
    그 사망이 살해라는 건, 아들인 남자 간호사, 그리고 그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나있는 앙숙관계인 그의 동료 간호사 A가 전부였다.
    심지어 그 남자간호사는 자신의 부모가 병원의 실수에 의해 의식불명이 된 후 결국 사망하기까지 방치된 그 장면을 옆에서 직접 보지 못했다.
    그의 동료간호사 A가 몰래 그의 등뒤에서 깊숙이 찔러버린 주사를 맞은 후로 몇시간을 창고에서 잠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남자는 하늘을 날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얼마든지 높게 날 수 있었다.
    원하는만큼 빠르게 날 수도 있었다.
    사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가끔 하늘을 날 수 있는 날들이 있긴 했지만, 언제나 방향조절도 높이나 속도도 항상 마음처럼 잘 조절되지 않았다.
    그래서 두렵기만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에 얼른 그만 날고 싶다는 생각에 안전하게 죽지 않고 착지할 곳만 찾곤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그는 달랐다.
    얼마든지 편안하고 원하는대로 완벽하게 생각처럼 자신의 몸을 세상 어디로든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약간의 조마조마함과 큰 설렘과 짜릿함으로 세상 곳곳을 누비며 밤새 하늘을 날았다.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그는 어딘가에 조용히 내려앉았고, 편안히 새벽도시의 광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나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원하는대로 조절이 가능한 날아다니기 꿈을 꾸었다.. ㅋㅋ

    잠에서 깨면, 우리는 아주 잠시동안이지만 꿈이 기억난다.
    꿈의 해석이라는 책으로도 유명한 프로이트는, 꿈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꿈의 정서를 강조했다.
    특히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내 마음에 남아있는 그 정서가 중요하다.
    평온하게 꿈을 꾸지 않고 고요한 마음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어떠한 정서가 이미 일어나있는 상태로 잠에서 깨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잘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허겁지겁 지각할까봐 눈을 뜨자마자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야 하는 입장인 경우가 많으니까.

    프로이트가 꿈의 정서를 강조한 건, 타당한 이야기다.
    우리의 뇌는 잠들어 있는 동안 고등사고기능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비활성화된다.
    꿈이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내용들로 흘러가는 이유가 있었던거다.

    뇌과학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꿈을 내용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방식의 맹점은 또 있다.
    상담심리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한 방학세미나 중에 “꿈을 해석하는 심리상담”으로 유명한 분의 꿈 해석 관련 세미나가 있었다.
    잠에 대해 아직도 완벽하게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구미가 당기던 나는 이 강의를 신청해서 들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이틀 강의를 내돈내산으로 들으러 갔다가 첫날 반나절만에 같이 듣던 동기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강의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강사가 꿈에서 나오는 물건, 장소, 상황을 다 내용적으로 무얼 상징하는지 설명해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분석심리학으로 유명한 칼 융의 이론을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래서인지 누구에게나 물건들의 의미가 유사할거라 보는듯했다.
    (융은 기본적으로 집단무의식을 주장하고 전설, 신화, 전승에 대한 입장이 강한 편이다.
    가령, 한 문화권에서 빨간 사과의 의미는 무의식적으로는 유사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건 그렇지가 않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각자 받아들이는 상황이나 물건, 사람, 행동의 의미는 생각보다 많이 다르다.
    가령, 나는 비오는 날이 그렇게 쾌청하고 좋다.
    청량감이 느껴지고 모든 색채가 비에 젖어 선명해지는 듯한 느낌과 공기 중에 머금은 수분이 모든 소리를 조금 더 울림있게 들리게 하는 느낌을 사랑한다.
    하지만 내가 처음 직장에 입사했을 때 신입연수에서 강의를 하던 어떤 교육업체 강사는 비오는 걸 그렸더니 내가 스트레스에 무방비로 노출되어있다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뭐, 내가 모르는 내 내면 깊숙한 비밀을 그 강사가 먼저 알아챈 것일수도 있지만, 그 강사는 그저 교육을 위해 책을 서너권 읽고 단순히 거기서 본 걸 전달해버린 걸지도 모른다.

    꿈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이지만, 우리의 무의식과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인 건 분명해보인다.
    일단 이성적 사고가 둔화되면 사람은 진짜에 가까워진다.
    괜히 술을 마시면 본 모습이 드러나는 게 아니다.
    잠은 외부자극을 차단하고 이성적 사고와 판단이 둔화된 채 내 마음 안에서만 머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시간이다.

    내 진짜 마음을 더 잘 알아차리고 싶다면, 일어나자마자 지난밤 꿈 속에서의 감정을 잘 살펴라.
    구체적으로, 이 작업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5분 정도 시간을 내서 기록하는 게 가장 좋다.
    자는 동안 느꼈던 감정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사라져버리니까.

    꿈은 깨어있을 때는 마주하지 못하는 진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데이트장소다.
    처음엔 좀 어색해도, 데이트 많이 하자.

    P.S) 이 글을 ‘발견’ 카테고리로 분류할지, ‘집단관계’ 카테고리로 분류할지 고민이 좀 되었다.
    꿈을 이해하는 건 평소에는 이성에 의해 가려져 있던 좀 더 심층적인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기회기 때문이다.
    그 심층적인 마음에는 우리가 발견해야 할 우리의 타고난 재능이나 소질, 흥미, 잠재력도 깃들어있다.
    하지만 우리는 부정적인 요소에 훨씬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고 큰 자극으로 받아들이게 진화해왔다.
    그렇다면 우리의 꿈은 사실 오늘 하루 너무 즐거웠던 일보다 오늘 하루 너무 두렵고 불안했던 일을 상연해줄 가능성이 높다.
    두려움에 관한 것, 특히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에 대한 것은 ‘집단관계’ 카테고리로 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우선 ‘집단관계’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다만 꿈은 우리가 우리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일에도 매우 중요한 기회임을 밝혀둔다.

  • 깻잎논쟁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_2편

    깻잎논쟁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_2편

    자, 지난 글에 이어 계속 이야기해보자.
    (지난글을 못 읽었거나 기억이 안 난다면, 읽고 오길 추천한다.)

    깻잎논쟁과 같은 문제가 불거졌을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삶의 영역과 우리의 영역이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상대방이 타인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그 타인들이 이성이라 할지라도 결국 상대방의 영역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역 안에서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가령, 내 지금 느끼는 감정과 떠오르는 생각을 상대방에게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상대방이 이렇게 해줬으면 하는 걸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까지가 우리의 영역’임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상대방이 이랬으면, 하고 바라는 건 우리의 영역이다.
    그 바램대로 자신의 행동을 바꿀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상대방의 영역이다.
    이 냉혹한 진실을 가급적이면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마음을 진지하게 전달한다면, 상대방이 의외로 쉽게 앞으로는 다른 오빠, 다른 여사친의 깻잎을 떼어주지 않겠노라 말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상대방도 나를 아끼고 좋아한다면, 굳이 내가 싫다는 일을 감수하면서 할만한 행동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할지 저렇게 할지 결정은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몫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결정하는 데 참고하고 고려할 수 있도록, 나의 마음과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럼에도 계속 떼주면? ㅋㅋ
    자, 여기서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해하려고 노력을 ‘진지하게’ 해봐야 한다 ㅋㅋ
    이건 기본적으로 타인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게임이다.
    무슨 이야긴지 아는가.
    내가 지금 보수적인 측에서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 말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는 상대방의 영역에 내가 들어가려는 행위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만을 통제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거꾸로 보면, 타인이 자신이 자연스럽게 하고싶은 걸 하는 일을 막아서 상대방이 좀 갑갑하더라도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여라는 것 아닌가.
    상대방이 나의 마음을 듣고도 그게 잘 안되고 어렵다고 하면, 이젠 나도 다시 내 생각과 판단을 재고해봐야 한다.
    진지하게 말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도록 애써봐야 한다.
    여기서 지난 글의 논의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어차피 내 연인이 다른 이성과 가지는 모든 관계에 대해 모니터링할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내가 싫어하는 부분과 내 가치관을 전달했으니, 그가 살면서 나를 배려해주고 고려해주길 바라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건 그것대로 내비두고, 우리는 이제 우리가 가급적 사랑하는 상대방의 스타일을 수용할 수 있게 진지하게 내 생각을 좀 바꿔보려는 노력을 해야 할 때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과 깻잎을 떼주는 행위에 대해 서로 그 일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해석이나 관점도 나누고 이런 과정이 매우 가치있고 중요하다는 걸 언급해두고 싶다.)

    아무리 재고해도 나도 그게 납득이 안 되고, 상대방도 도저히 그걸 안 하고는 안 되겠다면?
    자, 이제 남은 건 하나다.
    이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
    (이게 그냥 무작정 때려치울지 고민하라는 단순한 표현은 아니다.
    관계의 양상에 대해서, 그리고 이 관계 자체에 대해서 다시 되짚어봐야한다는 이야기다.)
    이 결론이 나오면 충격을 먹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안다.
    나도 이미 가정을 이루고 아내와 함께 미래를 약속하고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오는 입장에서, 그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누구보다 크게 느낀다.
    하지만, 이제 남은 건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일이다.
    아니, 그렇게 가벼워도 되는가? 라고 말할수도 있지만, 원래 관계라는 게 그런거다.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다.
    그게 연인관계든 부모자식관계든 매한가지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끊임없이 변한다.
    여사친이라고는 없던 내 남편이 10년 뒤에는 성향이 바뀌어서 매 주말만 되면 친한 여동생과 누나들을 태우고 캠핑을 가자고 당신을 조를지도 모른다.
    싫으면, 자기 혼자 다녀오겠다고 ㅋㅋ 트렁크에는 와인을 잔뜩 싣고서 말이다.
    운동에 취미가 생긴 당신의 아내가 생전 안 입던 레깅스를 입고 주말마다 등산을 나가고 동호회 친한 오빠, 남동생들과 자전거를 타고 전국일주를 다닐지도 모를 일이다.
    이 문제가 지금 당장 우리에게 벌어지지 않더라도(연애 중이 아니면 더욱이 나한테는 안 올 일 같아도), 언제든지 충분히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사실, 연인보다 보수적이던 당신이 10년 후에는 오히려 상대방의 기준에 갑갑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ㅋㅋ
    뭐, 그 때 당신의 자유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지금 좀 개방적이다 싶은 걸 넘어가주고 보험으로 들어놓으면…
    나중에 당신도 한 번…? ㅋㅋ
    농담이지만, 정말 그런 변화가 생기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걸 마지막으로 적어둔다.

    사랑하는 관계는, 결국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나 끊임없이 배려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의 시간들로 점점 더 견고하게 완성되어간다.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진솔하게 서로에게 전달하고 알아가는 과정만이, (너무 교과서 같아서 마음에는 안 들지만) 오래 서로 사랑하며 삶을 채워나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정리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걸(마음표현, 요구사항 전달) 하고, 상대가 안 되겠다고 하면 내가 다시 마음을 바꾸려 해보고, 둘 다 서로 안 되면 관계 다시 생각해라.

  • 깻잎논쟁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_1편

    깻잎논쟁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_1편

    깻잎논쟁.
    2000년대가 들어선 이래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한반도에서 일어난 그 누구도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못한 희대의 논제.
    이성인 친구가 깻잎을 한장만 가져가려 할 때 내 연인이 그 이성의 깻잎을 떼어줘도 되느냐.
    떼어줘도 된다.
    아니, 그걸 굳이 왜 떼어주는거냐.

    내가 사랑하는 연인이 다른 이성과 어떤 것까지 교류하고 공유해도 되는지는 언제나 희대의 논제였다.
    이 화두는, 비단 깻잎을 떼어주는 것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연인이나 배우자가, 다른 이성과 얼마나 친밀하게 지내며 그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을 자신의 연인에 대한 미안함이나 죄책감없이 만끽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고민거리가 있을 때 몇시간이고 통화를 하는 건?
    둘 다 영화를 좋아해서 같이 영화를 보는 건?
    1년에 몇번 안 되더라도 둘이 맛있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는 건?
    술집에서 술을 한잔 하는 건?
    동선이 같을 때 차를 태워주는 건?
    스터디카페 비용을 아끼기 위해 둘이서 스터디 카페 룸을 대여해서 공부를 하는 건?
    같은 헬스장에 다니는 건?
    이건 사실, 끝도 없는 수만가지 상황에 대한 문제이며, 동시에 결국 한가지 문제다.

    필연적으로 나와 내 연인, 둘 중 한명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고 한 명은 상대적으로 더 개방적이다.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개방적인 상대방 기준대로 가자니 이건 아닌 거 같아 화가 나고, 또 내 기준대로 상대방을 강제하자니 상대는 답답해하고 다툼만 생기니 어렵다.
    개방적인 입장에서는 보수적인 상대방 기준대로 참고 살자니 숨 막히고, 내 기준대로 하면 안 되냐고 말하니 상대방은 그건 너무 선넘는 거 같다고 화를 낸다.
    (흥미로운 건, 개방적인 측에서 막상 자기처럼 상대방이 다른 이성과 그런 관계를 가지며 지내면 화내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ㅋㅋ)
    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자, 일단 가장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기본적으로 각자의 행동은 각자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건 결혼을 한 연인 사이든, 피가 섞인 부모자식 사이든 모든 관계에서 동일하다.
    상대방이 다른 이성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든 그건 근본적으로 상대방의 삶의 영역이다.
    내 통제가능영역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니 그러면 뭔짓을 하든 다 냅두란 이야기냐! 라고 분노할 모습들이 눈에 선한데, 그런 방향성을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다.
    (참고로 난 어릴 때부터 그런 사안들에 좀 과도하게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며 살아오고 있다만 그건 내 개인적 취향일 뿐이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다.
    왕의 용안을 보면 즉결처형 당하기도 하던 조선시대에도, 백성들은 언제나 왕을 다같이 씹어대고 희화화해서 공연도 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도 결국 타인의 행동은 통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거다.
    우리가 연인인 상대방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하지 않는 이상, 어차피 상대방이 다른 이성과 그저 자판기 앞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만족감까지 통제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핵심은 깻잎을 떼주느냐, 같이 영화를 보느냐가 아니라 결국 나와 나누기로 한 ‘이성 간의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과 행복감’을 다른 이성과도 나누면 안 되는 것 아니냐, 가 아니던가.

    악! 내 연인은 그렇게 나 몰래 뒤에서 내가 싫어할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거든요?
    나랑 의견차가 있는거지 내 말을 들어주기로 했으면 들어주거든요!!

    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존재 자체부터 자각하지도 못하고 자각하더라도 정확히 자각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건 각 개인이 아둔해서가 아니라, 태초부터 모든 사람은 어떤 영역에서는 적어도 분명히 그렇다.
    (이건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 번 썰을 풀어보자.)

    이쯤에서 이 이야기로 넘어가자.
    이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사안별로 볼 문제가 아니라 큰 하나의 문제로 환원해서 봐야 한다.
    밤에 두시간 통화하는 건 안 되고, 낮에 잠깐 15분 통화하는 건 되는 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밤에 저녁 먹고 와인한잔은 안 되지만 잠시 낮에 지나가는 길에 카페에서 커피 한잔은 되는 식으로, 이렇게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이건 명백히 내 연인과 서로 독점적으로 지배하기로 한 ‘이성과의 교감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감’을 다른 이성과도 아주 작고 사소하게라도,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안 보이는 애매한 상황을 통해서도 만끽하면 안 되는거 아니냐, 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면 지금 하려는 주제가 튀어나오게 된다.
    “아니, 난 그럴 음흉한 목적으로 얘랑 둘이 영화보러 간 게 아닌데…???”

    자, 한 번 생각해보자.
    이 논의는 애초에 이성이지만 이성이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긴장감이나 즐거움, 설렘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시각차이로 시작된다.
    추운 겨울날, 그저 친한 여자사람친구가 가방을 들고 있어서 손이 없으니까 열려있던 점퍼 지퍼를 대신 올려줬을 뿐인데, 이 행동을 여자친구가 듣고서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사람친구가 떼려는 깻잎을 그저 젓가락으로 잡아 도와줬을 뿐인데, 이 행동을 남자친구인 내가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충 생각해도, 여기서 음흉한 목적을 가지고 지퍼를 올려주고 깻잎을 떼준 게 아닐텐데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는 존재다.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하이힐이나 물건을 보고도 섹슈얼한 욕구를 느끼기도, 충족시키기도 할 수 있는 존재다.
    무의식과 달리, 우리가 자각하는 ‘의식’은 엄청나게 큰 빙산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프로이트의 삼원구조모형을 나타낸 그림을 보면, 물 밑에 어마무시하게 큰 빙산의 대부분이 가라앉아있다.)
    이성과 그저 같이 키득거리며 둘이 대낮에 커피만 마시고 있어도, 어쩌면 그게 이성과 함께 있어서 느껴지는 즐거움이 크든 작든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아, 나는 그거 그 친구가 여자라서 그런 게 아닌데?
    라고 모든 개방적인 입장의 사람들은 이야기하겠지만, 자신이 자각하는 의도가 그렇지 않더라도 그럴 수도 있다.

    그런 게 존재한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아직도 긴가민가하면 직장을 떠올려보라.
    왜 신입직원이 들어오면, 여자신입직원, 특히 외모가 출중한 여자신입직원일수록 남자 상사들이 끝도 없이 밥약속을 잡는지 생각을 해보면 답이 나온다.
    요즘은 예전과 달라서 술약속을 잡고 회식자리에 막 부르기도 쉽지 않은 시대인데, 그런 행태는 여전하다.
    왜 그런가.
    대낮에 그것도 단 둘이도 아니고 세넷 이상 모여서 밥먹는 걸 왜 그리 편향되게 여자직원에게 많이 요구하는가.
    그냥 단둘이 아니더라도, 그저 낮에 바쁘게 점심 한 끼 먹는거라도, 그냥 앞에 어린 여자직원과 같이 밥을 먹으면 그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거다!

    사실 모두가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말을 하면 괜히 더 고상한 척, 자기는 아닌 척, 어우 그런 놈들은 변태새끼들이지, 이러는데.
    항상 말하는건데, 그렇게 고상한 척 점잖은 척 하는 놈들이 제일 위험하다.
    오히려 이 ‘불편한’ 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애새끼 상태를 벗어나는 성장의 시작이다 ㅋㅋ
    예전에 최화정 씨가 어떤 방송에서 그런 말을 한 걸 본적이 있다.
    자기가 예전에 대기실에 친한 동료들하고 앉아있었는데 다 여자만 있었단다.
    그래서 다들 피곤하기도 하고 축 쳐져 있다가, 남자 동료가 한 명 딱 들어오니까 다들 톤이 한 옥타브는 올라가서 텐션이 확 살더라, 고 말하며 막 웃는 이야기였다.
    저게 뭐가 이상한가.
    저게 자연스러운거다.
    인간은,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었다.
    이성에게 기쁨을 느껴야 번식을 하고 자손을 낳아왔을 거 아닌가.
    인간도 동물이다.

    이 이야기를 정리하면, 인간은 애초에 이성을 보며 설렘과 즐거움을 느끼게 만들어졌고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정말 별 것 아닌 이성 간의 상황에서도 크든 작든 상대방이 이성이기 때문에 느낄만한 기쁨을 느낄 수도 있다.
    이 전제를 깔고 보면, 글 서두에서 말한 게 좀 더 이해가 갈 것이다.
    이걸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뭐 남자친구나 남편을 남자나라에 쳐박아두던가, 여자친구나 아내를 여자나라에 쳐박아두지 않는 이상 그건 통제불가능하다.

    사실 이런 논쟁에서 더 큰 문제는, 내 연인이 싫어하는 걸 감수하면서도 다른 이성과 그 행동을 하고 싶다는 마음 그 자체가 문제인건데… ㅋㅋ
    사실 다른 동성친구와 해도 되고, 연인이 싫으면 사실 그 행동까지는 안 하면 그만일 문제이기도 한 건데 그걸로 언쟁이 생긴다는 건 많은 함의를 담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각자의 행동은 각자의 삶의 영역이라는 것.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모든 영역에서의 모든 행동의 의미와 기저에 깔린 욕망을 다 자각하진 못한다는 것.

    (글이 너무 길어져서, 다음 편으로 나눠서 글을 계속 써야겠다.)

  • 부모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마라.

    부모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마라.

    부모가 힘들게 살면, 자식은 일찍 철이 든다.
    ‘사춘기가 없이 지나간다’는 아이들은 대개 그런 환경에서 자란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가 너무 힘들고 괴로워하며 인생을 어떻게든 견뎌나가는 걸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나까지 엄마아빠를 힘들게 하면 안 되겠구나.”
    “내가 꼭 저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줘야지.”

    투정부리고 떼 쓸 여유같은 건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애초부터 없다.
    어린 아이에겐 세상 전부인 ‘부모라는 세상’이 천둥번개가 치고 쓰나미가 일어나 끝없이 위태위태하면, 아이들은 편하게 누워 투정이나 부릴 생각은 감히 꿈꾸지도 못한다.

    이런 척박한 환경을 대물림하는 부모들을 탓하거나 비난할 건 아니다.
    누구나 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몇이나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장악하고서 아이를 낳을까.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애초에 준비가 다 된 후에 일어나는 중요한 일 따위,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아이를 낳는 일은 누군가를 적어도 성인이 될때까지는 일정 강도 이상의 울타리를 만들어 보호해줘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일이지만, 그게 완벽한 준비 이후에나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엄청난 비밀을 하나 누설하자면, 부모가 자식이 자라기도 전에 자식을 망쳐버리는 일은 사실 여유롭지 못한 현실보다는 전혀 수습하지 않고 살아왔던 부모의 망가진 정신세계 때문에 벌어지는 경우가 절대다수다.

    그럼, 충분히 준비하고 아이를 가지지 않은 대다수의 부모들을 비난할 것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반대로 자식들을 비난하거나, 자식들이 그런 상황에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걸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부모가 사는 게 힘들면, 그건 냉정하게 말해서 부모 각자가 살아온 그들의 삶인건데, 자식들은 그런 부모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부모는 자식을 키우고, 자식은 그런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부모가 괴로우면, 자식은 자신 때문에 부모가 괴롭다고 느낀다고 쉽게 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나 또한 가족에 대한 애착과 엄마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에 유독 컸던 탓에, 성인이 되고 나서도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죄책감이 마음을 짓누르곤 했다.
    그런 죄책감을 덜어내는 모든 변화나 행동이 전부 다 비겁한 자기합리화고 배신이라고 철썩같이 확신했던 시기가 꽤 길었다.

    하지만, 아주 오랜시간 곱씹고 곱씹으면서 조금씩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내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었다.
    주위 많은 사람들이 부모가 되고, 나 또한 내가 모르던 나의 모습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며 나와 타인의 마음 속 서사들을 끝없이 공부해가면서 알게 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누구나 다, 자기 손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간다.

    엄마 아빠가, 어릴 때부터 엄마아빠 생각, 엄마아빠 걱정을 자주 하던 내게 해준 이야기가 있었다.

    “느그 태어나서 한 3,4년동안 한창 이쁠 때 엄마 아빠 행복하게 해준것만으로 느그는 엄마아빠한테 평생 해줄 효도는 다한기다. 나머지 시간은 엄마 아빠 생각하지 말고 느그 행복하게 살면 그게 엄마아빠한테는 최고 효도다. 항상 느그 마음 가는대로 살아라. 엄마아빠 생각하지 말고.”

    이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지만, 나는 그럼에도 죄책감이 있었다.
    부채감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런 마음이. 미안함이.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황당하게도 엄마아빠의 그 말을 100% 믿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저, 자식 마음 편해라고 해주는 이야기일 뿐 어쩌면 거짓말 아닐까, 라는 궁예(?!)가 쓰는 관심법을 시전하기도 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한 데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결국 피해자였던 걸 하도 많이 목격한 탓도 있었다.
    억울하고 자기만 희생하고 양보하고 참고 포기했다는 걸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는 너무 많은 사람들.
    현실에서도 매체에서도 모두가 다 ‘나는 피해자’라면서 비명을 지르는 탓에, 나는 혹시라도 엄마 아빠가 언젠가 (누구나 다 가지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될까봐 두려웠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나도 이제 중년이 되어가는 지금 시점에서 본다면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어디 아픈 데 없이 건강해서 그저 고맙다’는 말을 달고 살고, 아빠는 그저 ‘어디 다치거나 감기 걸리지 않게, 밥 거르지 않게 잘 챙겨’라는 게 가장 관심사인 사람이다.

    만약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듯이 우리 엄마아빠가 나에게 ‘널 키우느라 희생하고 젊음을 바쳤다’며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면, 그 때는 어땠을까.
    아마 그랬어도, 지금의 내가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협박과 위협으로 상처 받고 피흘리는 사람들이 정말 셀 수도 없이 너무나 많다는 걸 나는 몸소 체험했다.
    개인상담을 하고 사적인 관계로 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런 이야기는 주위에 산재해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살면서 절절하게 깨달은 사실은, ‘누구나 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인생을 선택하고 산다.’는 것이다.

    누구나 매순간 그 상황에서 가장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선택을 하고 산다.
    이 세상 많은 부모들에게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그들이 해야할 도리를 일정기간 다 하는 것은 자식이 죄스러워할 일이 아니다.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기꺼이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이야기다.
    부모가 혹시 ‘널 키우느라 내 인생은 하나도 없었다’며 얼토당토 않은 위협을 하거든 죄책감을 느끼지는 마라.
    그저 슬퍼해라.
    깊게 오롯이 다 슬퍼하고,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삶을 조각하면 된다.

    도저히 그렇게 마음을 먹을 수 없거들랑, 그럼에도 당신의 삶을 조각하는 데 집중해라.
    그들에게 현실적으로라도 보답하고 도움을 주고 싶다면, 그들을 지키고 싶다면, 결국 당신이 해야할 일은 주저앉는 게 아니라 당신의 삶을 완벽하게 조각하는 일이니까.

    결국, 부모가 피해자인듯이 하든 그렇게 행동하지 않든, 우리는 우리자신의 삶을 조각하는 데 집중하면 된다.
    당신들이 희생했다는 말에 선을 긋든 긋지 못하든, 우리는 우리의 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하는 데 몰입하면 된다.
    지나간 시간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라도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면 그리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죄책감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있다.
    자식이 부모 슬하에서 보살핌을 받은 건, 절대 죄스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들도 그들 입장에서 가장 행복할 것 같은 선택을 했을 뿐.
    사랑한다면, 그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힘을 기르고 그들을 지켜주면 된다.
    죄책감은, 미안하지만 우리가 부모에게 가져야 할 감정은 아니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