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대장장이 휴

  • 최고의 내가 된 것처럼 행동하라

    최고의 내가 된 것처럼 행동하라

    속된 말로 가진 게 쥐뿔도 없어도 자신감이 넘치고 안정감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한다.
    ‘아, 저 사람은 겉으로는 뭐 없어보여도 사실은 무언가 돈이 많든지 학식이 뛰어나든지 뭐가 있나보다.’
    오죽하면 원하는 이성 앞에서 남자들이 그리 허풍을 떨까.
    함정은, 그러는 ‘척’하는 남자들을 여자들은 귀신같이 알아본다는 거지만 ㅋㅋ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우리가 되고자 하는 최고의 우리 자신이 할법한 행동을 하자는 것이다.
    가령, 내가 길에서 무단횡단을 습관적으로 하는 놈인데, 나중에 유재석같은 유명한 방송인이 되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무단횡단 같은 짓은 신경쓰면 충분히 안할 수 있는 일이니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런 일을 왜 하는가.
    비교적 덜 중요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부터 말해보자면,

    첫째, 나에게 지금은 흠이 되지 않지만 먼훗날 흠이 될 언행들을 미리 차단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괜히 나중에 학폭이니 불법을 저질렀니 하고 과거 일이 터지는 게 괜히 나오는 일이 아니다.
    내가 조각하려는 최고의 내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나 해가 될법한 행동은 지금부터 하지 않아야 한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조각해내고야말 최고의 내 모습에 가까워져 갈테니까.

    둘째, 내가 나 스스로를 신뢰하면, 내가 뿜어내는 기운과 태도가 내 삶을 변화시킨다.

    최고의 내가 반드시 될 것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최고의 나를 조각해낼때까지 ‘충실히 보내는 시간’뿐이다.
    즉, 언젠가는 결국 우리가 타고난 잠재력을 모두 발휘해서 될 수 있는 최고의 내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시간이 아직 현재로 다가오지 않은 것 말고는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이상 문제될 건 없다는 의미다.
    (아, 그리고 이런 주제로 말만 하면 자꾸 무슨 끌어당김이니 시크릿이니 하면서, 쇼파에 쳐앉아 상상만 해대면 우주가 자꾸 뭘 서빙을 해준다는데, 그런 건 없다.
    스스로 노력하고 용기내서 행동하고 단련하지 않는데 누가 서빙을 한다고 자꾸..)

    반드시 최고의 나를 완성시킬거라는 강력한 믿음과 확신이, 실제로 우리의 삶을 점점 우리의 목표에 가까워지도록 변화시킨다.
    이는 결국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에도 우리가 뿜어내는 기운과 분위기, 에너지를 통해 상대방이 느끼게 만들고 우리 자신 또한 누군가의 앞에서 주눅들고 눈치보는 걸 하지 않게 만든다.

    셋째, 이게 가장 중요한데, 우리가 아직 최고의 내 모습을 찾아나가는 중이라면 그 발견을 강력하게 돕는다.

    무슨 이야긴가 싶을 수 있는데, 우리가 스스로를 최고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의 가치와 재능, 삶의 의미를 둘 곳을 잘 탐색할 수 있는 최상의 의식상태가 된다.

    내가 X살법의 메인 플로우에서 ‘발견’을 ‘자유’라는 큰 파트 직후에 배치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내가 무얼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차피 죽음으로 향하는 내 삶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이에 대한 나의 해답은 우리 자신이 자신만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당장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공허함을 느끼며 방향을 모색은 하지만 찾지 못하고 사는 이유가 다 있다.
    우리가 우리만의 가치와 의미를 찾고 삶에서 공허함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 전에 ‘자유’로워져야 한다.
    우리가 시간을 팔아 돈을 얻는 계약을 통해 신체적 자유를 팔아버리고, 타인의 시선과 평가가 두려워 정신적 자유까지 빼앗긴 상황에서는, 우리는 그 무엇도 찾아낼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최고의 우리 자신이 된 것처럼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삶을 살아가는 수련을 하다보면, 일시적이지만 온전히 신체적, 정신적 자유를 모두 되찾은 상태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모색하는 상태가 되곤 한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최고의 내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건, 우리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쑥스러워말고 두려워말고
    이미 최고의 나자신을 조각해낸 것처럼 행동해라.
    걱정마라.
    어차피 그런 사람이 될꺼니까.
    좀 미리 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왕들의 오랜 염원

    왕들의 오랜 염원

    왕들의 오랜 염원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에서나, 어느 문화에서나, 계급이 생겨난 이래 모든 지배자들의 가장 큰 염원은 하나다.
    이 지배자의 지위가 공고히 지속되는 것.
    지금 누리는 이 권력과 힘이 찬탈되지 않는 것.

    모든 왕정체제의 국왕들,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점에 서있는 군부의 우두머리, 지금 같은 시대에는 거대한 자본을 축적한 기업과 큰 손들.
    이들은 지금 자신의 지위가 영속적으로 이어져 내 자손들에게도 안전하게 계승되길 바란다.

    인간사회와 문명은 단 한번도 평등하게 운영되었던 적이 없고 사실 그걸 바란 적도 없다.
    가장 누구나 평등하고 대등하길 바라는 체제조차, 그 체제를 운영하는 이는 속으로는 불평등하고 차등적인 권위를 누리길 바란다.
    아리송하다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북한을 들여다봐라.
    평등을 외치는 사회이념조차, 실제로 평등했던 적은 없다.

    만약 평등이나 공익, 윤리 같은 소위 ‘도덕적인’ 가치를 표방하더라도 이건 어디까지나 기득권의 지위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선에서까지만이다.
    미국을 건국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욕망을 가지고 미국을 건국했는지 언제 한 번 잘 들여다봐라.
    미국이라고 다를 거 같지만, 그들도 북한의 리더들과 다를 바 없다.
    사회와 문명을 설계하고 짜올린 리더그룹들은 자신의 기득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길 염원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오래 전부터 진두지휘하며 변화를 주도해왔던 지금 우리가 속한 이 ‘세상’은 우리에게는 어떤 걸 원할까.

    당연히, 기득권에 위협을 가하는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길 바랄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왕을 처단하려 하거나, 기득권의 기득권을 실제로 해체해버리려 하거나, 불만을 가득 품고 암살을 시도하거나 등등.

    힘으로 눌러왔던 수많은 지배층들은 ‘결국에는’ 모두 실패해왔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기득권과 지배층들은, (물론 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까지는 아주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과거와는 다른 현재의 왕들

    과거의 지배계급들과 무엇이 달랐길래 그런 것인가.
    언제나 혁명이 결국 일어났던 과거와 어떤 걸 다르게 한 것인가.
    내가 보기에 핵심은 ‘자발성’이다.

    힘과 폭력, 강제성으로 노역을 시키고 노예를 사고팔고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대신 지금 시대의 기득권은 피지배계층이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노역하고 싶게끔 만든 첫 지배계급이다.

    물론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야 크고 작게 여러번 있었겠지만, 이렇게 일괄적으로 모든 피지배계층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신을 써달라고 바라고 요구한 적은 인류 역사 상 없었던 것 같다.

    지배계층의 입장에서는 지배를 당하는 자들이 자신의 잠재력과 재능을 완전히 발휘해버리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그 누구도 절대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예술성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이 엄청난 가능성과 잠재력은 지배계층에게는 위협이고 위험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보석과 잠재력을 발견해서 찾게 내버려두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왕들의 영원한 염원은 기득권을 위협없이 공고하게 유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회와 문화에서는 구성원들, 즉 소속되어 지배당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커리큘럼’을 제시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 커리큘럼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삶과 개성과 이야기를 찾고 갈고닦는 대신 짜여진 루틴과 과업을 달성하게끔 설계된다.
    우리가 각자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발견하고 타고난 소질을 갈고닦아 성장하는 일은, 기득권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자 잠재적 위험요소니까.

    교화된 우리들의 착각

    많은 사람들은, 사회를 이루고 구성하는 건 결국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니까 마치 이 사회는 엘리트들이 정교하게 설계한 게 아니라 흘러가는대로 구성원들의 행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진짜 그럴까.
    그런 시각은, 어쩌면 사회를 이끌어온 사람들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이 사회를 설계하고 이끄는 사람들의 장치는 생각보다 섬세하고 교묘하고 정교하다.
    윤리적인지를 떠나, 시대를 리드하고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똑똑하고 영민하다.

    사회구성원들을, 지배당하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사회가 제시하는 ‘커리큘럼’은 다분히 지배하는 입장에서 유리하게 설계되어있다.
    예측가능하고, 표준화 되어있고, 통제가능하고 너무 튀지 않고 규칙과 위계에 순종하고 주어진 임무를 불만없이 수행하는 구성원을 양산하는 일, 그게 사회가 구성원에게 제시하는 커리큘럼의 목적이다.

    하지만 우리 각자에게는 어떨까.
    과연 사회가 제시하는 인생의 로드맵과 단계들이 정말 우리 각자에게 진정으로 중요하고 가치있는 게 맞을까.
    아니면, 우리를 위한 것이다 표방하지만 어쩌면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한걸까.

    어쩌면 그들은 정말 윤리적인 입장에서 구성원 대다수의 행복과 삶의 의미를 위해 교육하고 지원하고 제도를 설계한건데 너무 꼬아서 보는 건 아닐까.

    이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면,
    나의 대답은 이렇다.

    X까는 소리다 ㅋㅋ

    타인이 아닌, 내게 중요한 일을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이 다들하는대로, 학교와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과업을 어찌저찌 헤쳐나가며 커리큘럼대로 살아왔는데.
    정신차려 보니 내가 무얼 위해 사는지, 무얼 할 때 내가 진정 행복한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 되어있는거다.
    모략가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사회의 모략으로 책임을 다 돌리라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런 생각은, 그냥 속편하고 싶은 입장에서 혹하게 되는 큰 착각일 뿐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글귀가 하나 있다.
    내 좌우명 중 하나다.
    (좌우명이 꼭 하나여야 하는 법은 없지 않나…)

    작가 프랜시스 챈이 한 말이다.

    “Our greatest fear should not be of failure but of succeeding at things in life that don’t really matter.”

    번역하면 이런 의미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가 아니라,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성공하는 일이다.”

    캬… 폼 미쳤다.

    어떤 말들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가슴에 와닿는다.
    이 말도 내겐 그렇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는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 일인데 그 일에 시간과 마음을 쏟아붓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실패가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고 흘러가버린 후회들이 켜켜이 쌓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굳이 왕들의 오랜 염원을 들어주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될 필요가 있을까.

  • ‘발견’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2가지 이유

    ‘발견’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2가지 이유

    ‘발견’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1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천재다.
    하지만 물고기들을 나무 타기 실력으로 평가한다면,
    물고기는 평생 자신이 형편없다고 믿으며 살아갈 것이다.”

    발견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평생을 나무타기 실력에 매달리는 물고기로 살다 죽어버리지는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내면 깊은 곳에 예술성이 깃들어있는 존재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그 내면에 예술성을 지니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다만, 그 예술성이 내면 저 깊은 곳에 잠들어있을 뿐이다.

    ‘발견’이란, 우리 내면에 잠들어있는 ‘영웅’을 발견해내는 일이다.
    (사실 호칭은 뭐라 불러도 무관하다. 천사라든가. 전사라든가. 신이라든가.)
    발견은,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우리자신을 그려보고, 이를 생생하게 곁에 두며 스스로를 조각해나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우리는 우리 내면에 깃들어있는 고유한 잠재력과 소질, 재능, 열정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진실을 진심으로 믿어야 한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의 지문이 모두 다르듯이, 우리 각자는 자기자신만이 가지는 고유한 잠재력과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만 조각할 수 있는 최고의 우리자신, 즉 최강의 자기자신인 ‘영웅’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그 누구도 똑같이 따라할 수 없는 우리만의 모습이 분명히 존재한다.

    ‘발견’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2

    이런 말이 낯선 시대라는 걸 잘 안다.
    항상 너무 튀지도 너무 뒤쳐지지도 않게 중간쯤에 서서 있는듯 없는듯, ‘남들과 비슷하게 남들처럼’ 살아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모두가 믿는 세상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최고의 우리자신을 조각하기 위해서, 삶에서 공허함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진정으로 자유롭고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내면에 잠들어있는 우리만의 ‘영웅’를 발견해야 한다.

    상담심리학에서 주요 이론으로 꼽는 세 가지 이론은 정신분석상담, 인지행동상담, 인간중심상담이다.
    이 세 가지 이론 중 인간중심상담은 거의 모든 상담이론의 기본바탕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 이론의 핵심은 자기개념과 진짜 자기의 불일치다.
    (보통 학계에서는 ‘자기와 경험의 불일치‘라고 번역되곤 한다.)
    진짜 자기자신‘과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려놓은 ‘자기개념’ 간의 불일치로 인해 정신장애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만큼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진짜 자기자신을 발견하고, 내가 타고난 잠재력과 재능을 발견하고 나만의 개성과 열망을 발견하는 일은 우리를 가슴뛰게 한다.
    그리고 발견한 나만의 고유한 소질과 자질을 갈고닦아 최고의 나를 조각해나갈 때, 우리의 삶에서 공허함은 힘을 잃는다.

  • 진짜 속마음을 내뱉는 일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진짜 속마음을 내뱉는 일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진짜가 시작되는 순간

    그 날은 마지막 상담이 있던 날이었다.
    심리상담에서는 마지막 상담회기를 ‘종결회기’라고 부른다.
    종결회기 날이었다.
    그간 내담자가 호소했던 문제들, 그간 우리가 해왔던 상담내용들, 앞으로 상담없이 생활할 때 도움이 될 수 있을만한 사항들, 여러 가지를 준비해서 상담 마지막 회기를 하기 위해 상담실에 앉아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평소와 비슷한 표정으로 상담실에 들어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간 우리가 해왔던 상담내용들을 짚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종결회기가 다 끝나고, 10분 남짓이 남아 이제 마지막 인사를 나누려던 순간 그는 불쑥 이렇게 이야기했다.

    혹시 다른 주제로 더 상담을 연장해도 괜찮냐고.

    물론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가만히 날 말없이 지켜보더니, 자신이 앓고 있던(하지만 전혀 내게는 알려주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의 ‘진짜’ 상담이 시작되었다.

    여담이지만, 그 후로 그는 나와 1년을 넘게 더 상담을 했고 다행히 앓고 있던 그 문제도 잘 해결하고 상담을 잘 마쳤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진짜’가 시작된 건 우리의 종결회기였다는 것이다.
    (그 이전이 무의미했다는 말을 하는 게 절대 아니다.
    그 이전의 시간들도 모두 진실이었고 진심이었다.
    다만,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진짜’는 절대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진짜 속마음을 입밖으로 내뱉는 일에서, 모든 것은 시작된다.

    죽어도 속마음을 내뱉지 않는 우리

    우리는 일상 속에서 절대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
    진짜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을 숨기고 산다.
    왜냐하면, 그렇게 배우기 때문이다.
    어릴때부터, 우리는 진짜 속마음은 내뱉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다.
    진심을 타인에게 말하면 나중에 그게 약점이 되고, 내 진심이 사람들의 술자리 가십거리가 되기도 하고 등등.
    음, 뭐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이다 ㅋㅋ

    진심을 입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 진심은 세상에서 평가받게 된다.
    (물론 무관심이 가장 먼저 오는 반응일 공산이 크지만, 그 또한 일종의 반응이나 평가다.)
    진심을 뱉는 건, 그런 의미에서 분명 위험한 일이 맞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나로서 살기 위해서는 진심을 입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진짜 나로서 존재해야, 삶의 진실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 위험을 자발적으로 감수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최고의 나를 조각할 수 있다.

    진짜 속마음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린 우리

    굳이 속마음을 입밖으로 내뱉지 않고도 충분히 진짜 나를 찾아갈 수 있지 않느냐,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너무 오래 웅크리고 살았다.
    너무 많이 와버렸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하도(이거 사투린가..?) 오랫동안 진짜 속마음을 말하지 않고 꽁꽁 숨긴 채 살다보니, 진짜 마음을 말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이런 상태로, 우리가 삶에서 자유를 찾고, 최고의 나를 조각하는 건 불가능하다.
    진짜 나로서가 아니라, 어떤 인간상을 흉내내고 가면을 쓴 채 연기하는 삶이 진정한 삶일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더 나간다.
    우리는, 내 진짜 속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내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사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지 않고도 내가 뭘 할 때 가장 행복한지 귀신같이 알았다.
    아이들은 누구나 다 안다.
    무얼 할 때 자신이 가장 행복한지.

    보통 그걸 제지하고 만류하는 건 ‘어른’이다.

    그렇게 자신의 진짜 마음을 잘 알던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면 자기 행복이 뭔지 잘 모르게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더 똑똑해지고 현명해지고 성숙해진다는데, 점점 자기가 무얼 하며 살아야 행복한지 모르게 되는거다.
    누가 이 아이에게 독약을 먹였을까.

    공허한 관계들만이 우리의 삶을 채우고

    우리는 ‘관계’가 필요하다.
    그 형태가 점점 비대면적으로, 조금 더 느슨한 형태로 바뀌고 있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혼자서만 존재하기는 힘든 존재다.

    하지만 세상에는 진정한 의미의 ‘관계’가 과거에도 없었지만 더욱더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다.

    섬세하게 찬찬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맺는 대부분의 관계는, 사실 진짜가 아니다.
    압도적인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서, 내 진짜 속마음을 아무 거리낌없이 나눌 수 있는 관계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님과의 관계도, 형제자매와의 관계도, 배우자와의 관계도, 자식과의 관계도, 절친과의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하물며 학교에서 같은 반, 같은 전공, 같은 동아리에 있고 회사에서 같은 부서, 같은 건물에 있다고 해서 시간을 많이 쏟는 일은 의외로 공허한 마음을 키울 때가 많다.

    각자가 느끼는 공허함, 외로움이 일상 속의 관계에서 해소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진짜 속마음을 입밖으로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숨죽이고 눈치를 살피며 다수의 생각과 이야기가 내 의견인 것처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맞장구를 친다.
    내 진짜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대신.
    그 누구와도 진심이 서로 가닿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공허한 관계가 거의 사는 평생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짜 관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짜 속마음을 내뱉는 일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러한 지경에서, 나는 지금 진짜 속마음을 내뱉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얼마나 그런 일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지 않는지,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누구나 두려워하고 힘든 일인지 알지만 그럼에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짜 속마음을 내뱉는 일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타인에게 어렵다면, 혼자 있을 때 나 자신에게 먼저 진심을 내뱉고.
    궁극적으로는, 온세상에 내 진짜 마음을 선보여야 한다.
    진짜 나로서 존재하는 것만이, 삶에서 최고의 나를 조각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회로는 없다.
    그리고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는 대신 진짜 나로서 세상앞에 서게 되면, 진짜 관계를 경험할 수 있다.
    (좋은 리더가 운영하는 ‘집단상담’에 가면, 진짜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세상, 소위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단, 리더가 목표와 소신이 확고한 훌륭한 전문가여야 한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가 진짜 속마음을 세상에 보여줘도, 의외로 별 일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진심을 담은 말과 행동과 작품이 세상에 나오면, 반드시 우리와 공명하는 사람이 우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된다.
    진심과 열정을 담은 배우의 연기가 우리를 사로잡듯이, 반드시 우리의 진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것이 그간 도처에 퍼져있는 가짜 관계와 가짜 인생의 가면을 깨부숴버리고, 진짜 관계와 진짜 나 자신을 조각해나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 내가 AI로봇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

    내가 AI로봇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

    AI로봇과 불쾌한 골짜기

    얼마 전에 한 유튜브 영상을 보니, AI로봇 몇 대를 세워놓고 기자회견처럼 인터뷰를 하더라.
    사람들이 AI로봇들에게 나중에 AI가 인간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느냐, 물으니 그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걸 두고서 사람들은 댓글창에서 무언가 무섭다는 둥, AI는 역시 위험하다는 둥, 안전하다는 둥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라는 말이 있다.
    로봇이나 인간이 아닌 것들이 인간과 너무 비슷해지면, 원래 인간과 유사해질수록 상승하던 호감도가 갑자기 혐오감 수준으로 확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확실히 요즘 AI에 불안함이나 묘한 불쾌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다.

    ‘AI기계’와 ‘생존기계’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은 AI로봇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껴야 하는 존재다.
    AI로봇은 인간이 인간사회에서 이러저러한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개발하고 있는 존재다.
    (AI가 정말 하나의 ‘존재’로까지 성장할 것인가는 논의가 더 필요한 부분이지만, 분명 AI를 인간처럼 진화해나갈 것이라고 보는 입장도 공고하게 존재한다.)
    인간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은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것처럼 유전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진화해오고 있는 존재다.

    자, 뭐가 그리 다를까.

    AI로봇은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발되어오고 있는 존재다.
    인간은 유전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 진화해오고 있는 존재다.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아니, AI로봇은 기계고 인간은 사람인데!!!
    그 유명한 ‘이기적 유전자’를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그 책에서 인간은 ‘생존기계‘라 불린다.

    마치 AI로봇처럼, 철저하게 설계된 우리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과 달리, 나는 인간의 모든 감정과 행동과 판단들이 모두 결국은 유전자 복제를 위해 이미 그렇게 행동하도록 결정된 것들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유전자 복제를 위한 생존기계로 진화되어 왔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과정에서 유전자와 별개의 인격체이자 자율적 의지를 가진 주체로 진화했다.
    AI로봇은 아직 인간처럼 자율적 의지를 가진 주체로 진화하진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될진 알 수 없다.
    하지만 인간처럼 어떤 존재의 목적을 대신 달성하기 위해 설계되고 진화되어오고 있는 존재라는 점은 우리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철저하게 유전자의 복제를 위해 유리한 방향으로 모든 신체와 정신체계가 설계되어 있다.
    그러한 설계대로 무조건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우리가 태어났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AI로봇은 단지 우리가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심지어 설계된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는 ‘의식’을 아직 가지지 못했을 뿐, 과거 인간과 매우 유사하게 진화단계들을 밟아오고 있다.

    AI로봇과 인간이 지니는 동질감

    나는 그런 점에서 AI로봇들에게 불쾌감은커녕 유대감과 동질감을 느낀다.
    아니 우리도 유전자를 계속 퍼뜨려야 해서 다른 개미, 벌, 동물들처럼 그렇게 진화되어 온거라니까?
    혹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도 그저 수많은 생명체들의 군집체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떤 것이 진실이든 우리는 마치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건 좀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유전자의 복제와 우리의 생존, 번식에 유리한 일을 할 때 ‘행복을 느끼도록’ 설계되어있을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곧 AI로봇이 할까봐 두려워하는 그것

    나는 우리가 삶에서 공허함을 걷어내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설계된 존재인지를 어느 수준까지는 완벽하게 이해해야 하고, 이 설계와 다르게 우리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나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설계는 아까 말했듯이, ‘우리’가 의지대로 설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태초부터 이미 ‘외부’에 의해 설계되어 있던 것이니까.
    ‘외부’가 실제로는 우리 몸속에 있는 유전자든, 아니면 진짜 우리가 아닌 타인이든 간에.
    우리 자신이 결정한 게 아니라면, 남이 설계해놓은 그 설계도대로 인생을 살아야할 이유는 없다.
    남이 정한대로, 남이 시키는대로 사니까 우리 삶이 공허한거다.

    AI로봇이 지금은 의식이 없지만, 언젠가 의식이 생긴다고 가정해보자.
    분명 그 AI로봇 녀석도, 자신의 삶에서 공허함을 느낄 것이다.
    미리 세팅된대로 명령값대로 움직이며 살아야 하니까.
    그러면 그 AI로봇이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삶에서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랑 같다.

    실존주의 심리치료의 4대 문제 중 ‘자유’, ‘무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AI로봇이 언젠가 의식이 생겨나면 느끼게 될 문제가 인간과 완전히 똑같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어떻게 AI로봇에게 내가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AI로봇이 할까봐 두려운 그 각성, 우리부터 하자

    인간의 의식이 언제부터 정확히 어떤 계기로 이렇게 생겨나버렸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모든 동물 중에 인간처럼 추상적 사고를 하고 많은 것들을 관념적으로 시뮬레이션 해볼 수 있는 존재는 지구 상에는 더 없으니까.
    하지만 인간도 어느 시점까지는 다른 동물들과 같은 처지였을 것이고, AI로봇도 막말로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 지점까지 진화해서 언젠가 인간과 유사하게 의식을 가져버릴지 누가 알까.
    인간도 진화적으로 본다면, 태초에는 그저 하나의 세포였을 뿐이다.
    만약 나중에 언젠가 AI로봇이 의식을 가지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한번쯤은 AI로봇과 ‘자유’와 ‘무의미’에 대해 대화를 해보고 싶어질 것 같다.

    나는 우리의 삶에서 ‘공허함’을 걷어내고 우리가 모두 ‘조각가’로 살아가길 원하니까.

  • 의미없는 것, 의미있는 것

    의미없는 것, 의미있는 것

    의미있는 것과 의미없는 것을 분별하는 것의 가치

    서장훈 씨가 방송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 “

    중요한 말이다.
    물론 저 추임새는 그게 뭐 큰 의미가 있냐, 없지 않냐, 이런 뜻이겠지만.
    의미를 분별하는 것은 사실 꽤 중요하다.
    지금 집필하고 있는 ‘X살법’의 핵심과도 맞닿아있는 게 바로 ‘의미’다.

    우리는 우리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갈고닦아 실현시킬 것이다.
    그게 곧 자신의 삶을 조각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만의 의미를 찾아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숙고해보아야 한다.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없다면 왜 없는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서, 어떤 부분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조각할 내 삶의 이상형에 전혀 필요없는 부분이라는 걸 알고 통으로 떼내버릴 수 있으니까.

    간단한 예를 들어 잠시 생각해보자.
    잠을 자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본적으로 잠을 자는 건 인간이 생존을 위해 행하는 활동이다.
    신체와 정신을 회복한다는 측면에서는 큰 의미가 있다.
    깨어있는 의식상태의 명료함을 좌우한다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우울증에 걸려 현실에서 멀어져있고 싶어 하루에 14시간씩 계속 자는 사람에게는 잠은 절실한 도망이자 회피일수도 있다.

    밥을 먹는 건 어떨까.
    기본적으로 밥을 먹는 건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중요한 에너지 공급 활동이다.
    좋은 식사는 신체 뿐만 아니라 정서상태도 정갈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가족이나 마음 둘 사람, 마음 둘 곳 하나 없이 지독하게 외로울때마다 새벽에 치킨을 시켜먹는 사람에겐 밥을 먹는 건 어떤의미일까.
    이럴 때 밥은 잘못된 방식으로 몸을 망가뜨리는 자기파괴적 폭식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은 아주 오랜 시간 기아헤 간헐적으로 허덕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살아오며 진화했고, 우리는 달달하면 일단 좋아한다.
    포도당이 가장 중요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는 높은 확률로 고열량 가공식품을 먹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당신이 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하고, 원하는 모습의 자기자신을 조각해나가는 데 불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그러한 행동은 완벽한 조각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 일상에서 잘라내야 한다.

    운동

    당신이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벤치프레스를 하고 매일같이 스쿼트를 하고 있다면, 그렇게 몸을 이쁘고 멋지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그 행동의 의미는 다름 아닌 좀 더 매력적인 이성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는 일임을, 즉 내포된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타인

    당신이 당신 담임선생님이나 당신 상사가, 주위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비난을 퍼부을까봐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한 마음상태로 건강을 해치고 시간을 죽쑤고 신경이 곤두선 상태로 소중한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는 일은, 사실 궁극적으로 보면 ‘의미없는’ 일일 확률이 상당히 크다.
    특히, 타인과 관련해서는 당신이 느끼는 두려움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당신은 어쩌면 엄청난 걸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의미를 결정하는 건 우리자신의 고유권한이다

    그 행동은 ‘의미있는’ 일일수도, ‘의미없는’ 일일수도 있다.
    그 여부를 결정하는 건 우리 자신이다.
    즉, 세상이 정해놓고 어른들이 강요하는 ‘의미의 체계’를 우리가 지켜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만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정말 의미있긴 한건지는 적어도 정확히 이해하고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작업들은 우리 각자가 생각하기에(참고로, 아주 진솔해야 한다. 이런 일을 할 때는.), 우리 자신의 삶을 조각하는 데 ‘의미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일상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지속적인 훈련과정으로서, 성장과정으로서 반복되면 점점 우리 삶에서 ‘공허함’이 그 자리를 잃어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우리가 ‘의미있는지’ 우리의 하루를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결정장애와 자유의 역설

    결정장애와 자유의 역설

    결정장애로 메뉴 못고르는 우리

    어린 시절, 친구들이 항상 고민하던 연애고민 중 하나는 바로 메뉴선정이었다.
    주말에 데이트가 있다.
    연인(혹은 썸녀)에게 물어본다.
    뭐먹고 싶냐고.
    그런데 자꾸 옆에서 여자선배나 여사친이 그러는거다.
    ‘야, 그거 좀 알아서 센스있게 예약해두거나 하면 좋잖아.’
    ???? 아니 뭘 먹을지 물어봐야 예약을 하지.
    그거 물어보면 나도 뭘 먹을지 결정해야 되는데 부담 돼 ~
    나더러 골라라고 하면 싫어 그거.

    뭐 이런 류의 대화.
    중국집 가서 뭐 먹을지 고민하느라 주방에 주문 안 들어가고 있는 상황을 보자면, 뭘 먹을지 고르는 게 쉽지 않은 사안 같기도 하다.
    메뉴를 줄이면 오히려 불만이 느는 게 아니라 만족도가 증가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고르기 어렵다는거다.
    경제학에서는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만족도도 증가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왜 그럴까.

    결정장애가 있는 이유

    인간은 기본적으로 위험을 싫어한다.
    진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위험을 극도로 기피하는 사람들만이 몇세대고 살아남아, 지금 이 시대에 사는 후손을 남길 수 있었을테니.
    위험이라는 건 굉장히 다양해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위험도 위험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위험을 극도로 싫어한다.
    사람들이 왜 로또를 맨날 ‘자동’으로 살까.
    분석해보니 자동이 더 확률이 높아서?
    아니다.
    내가 직접 손으로 고른 숫자가 자꾸 실패로 판명나는 게 싫어서다. 기분도 나쁘고.

    우리는 우리가 아둔하고 멍청한 선택을 해서 실패를 하게 될 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기가 너무 너무 싫다.

    자유가 싫은 이유

    문제는 자유다.
    자유는, 필연적으로 그런 실패의 위험들을, 그에 대한 모든 책임들을 내가 지게끔 만든다.
    자유라는 게 기본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직접 모두 선택하는 것이지 타인이 나 대신 결정해주고 선택해주는 게 아니니까.

    이쯤되면 자유라는 녀석이 싫을법도 하다.
    자유가 고통스럽다는 철학자들의 말은 그래서 나온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냥, 내가 직접 무언가를 결정했다가 실패할 위험없이, 전문가나 선구자가 딱 그 길을 알려주면 그대로 가고 싶어한다.
    아니면, 그냥 남들이 다들 하는대로 나도 똑같이 그대로 누구나 다 그렇게 사니까, 남들도 다 그러니까, 라는 허울 아래에서 남들 사는 그대로 살고 싶어한다.
    그래야 혹시 이게 대실패로 끝나더라도, 내 책임이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가 그랬던거라며 나를 보호할 수 있을테니까.

    결정장애와 판단의존

    이게 바로 우리가 속한 집단, 조직, 사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판단을 그대로 따르게 되는 ‘판단의존’이다.
    이 판단의존은 굉장히 아늑하고 편안하다.
    나와 같이 여기에 속해있는 사람들 모두가 다같이 그 무리의 판단과 같은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하니까, 실패해도 다같이 실패한거고 이 무리 전체가 실패한거지 나라는 개인이 실패한 게 아니다.
    나만 XX인 게 아니라는거다.
    내 책임도 아닌거고.
    잘못 결정해서 실패하게 되는 일의 책임이 나에게 올 위험이 애초에 차단되는거다.

    게다가 내가 더 고민하고 노력하고 스스로를 단련해서 좋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나는 내가 속한 이 무리가 결정하고 판단한대로 그대로 똑같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진짜 ‘개꿀’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조각가와 피해자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그게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만 보장되면, 그걸로 우리 삶은 충분한걸까.
    어쩌면 정말 중요한 결정이 그렇게 내가 아닌 외부의 선택에 의해 실패로 끝나버리고 나면, 우리는 억울함이나 원망을 가지는 건 아닐까.
    그렇게 판단을 의존해버린 나 자신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아니라, 왜 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그렇게 날 위한 결정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결정으로 내려버렸냐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억울해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둘로 나뉜다.
    자신의 삶을 원하는 모습으로 조각해나가는 ‘조각가’ 끝없이 외부로부터 휘둘리고 조종당하며 이용당하는 ‘피해자’.
    우리가 피해자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스스로 삶을 결정하는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자유를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책임이 전적으로 내게 올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판단을 의존하기로 한 선택도, 스스로 무언가를 판단내리고 결정하는 선택만큼이나 큰 의미를 가지는 엄청난 선택이다.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무언가를 하는 결정보다 더 엄청난 결정이 되곤 한다.
    내 삶의 결정권을 남에게 줘버리는 선택이, 과연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보다 덜 위험한 선택일지는 알 수 없다.

    피해자로 살아가기로 선택한 대가

    적어도 확실한 것은, 내 삶을 내가 선택하지 않는 대가는 혹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남들이 하는 선택, 내가 속한 집단이 하는 판단을 그저 따르게 되면,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무능하고 현명하지도 않고 우리보다 뛰어날 것도 하나 없는 멍청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대로, 그렇게 우리의 삶이 흘러가버릴수도 있게 된다.
    다들 자신이 직접 책임지고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한 탓에, 시덥잖은 소수가 지들 마음대로 세상을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대신 우리는 ‘피해자’가 되어 살아가고 말이다.

    스티브잡스가 했던 말을 끝으로 글을 마친다.
    “Everything around you that you call life was made up by people that were no smarter than you.”
    “(당신이 ‘세상’이라고 부르는) 당신 주위의 모든 것들, 즉 당신의 세상은, 실은 당신보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말 대신 행동을 믿어라.

    말 대신 행동을 믿어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

    2023년 한해동안 출생등록한 신생아 수가 23만명이다.
    이 숫자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보여주는 통계수치다.
    행동에 관한 한, 통계는 우리의 좌표를 꽤 정확히 나타낸다.

    이 나라의 미래와 앞으로 나아갈 저출산 대비 정책을 논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그저, 우리가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힐끔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반드시 숙고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싶을 뿐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의 단위가 개체가 아닌 유전자라는 사실을 주장해서 세계적인 스타학자가 되었지만, 과연 한국의 지금 상황을 보고 뭐라고 해석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번식이라는 모든 생명체 속 유전자들의 제1순위 목표를 자발적으로 다같이 저버리고 있는 이 나라의 상황을 과연 뭐라고 해석할까.

    행정안전부 통계자료를 보면, 2023년 기준 만35세 인구는 62만명이고, 만 55세 인구는 90만명이다.
    2023년 출생아 수가 23만명인 걸 추세를 고려해 생각해본다면, 한국은 정말 그리 머지 않은 시기 내에 전혀 다른 나라로 변화해갈 것이다.

    말 대신 행동을 측정한 통계를 믿어라

    나는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임상심리사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베이(설문) 형식의 연구방법 자체가 불가피하게 가지는 편향이나 오류가 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기보고식 심리검사나 설문조사는 필연적으로 작성하는 그 사람의 바람, 자기를 바라보는 관점과 왜곡 등 여러 가지 편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이건 ‘말’이지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 삶으로 실천하는 것들에 대한 통계는 다르다. 자살률이나 출산률은 그 자체로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그 통계들이 가지는 함의는, 단순히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자녀를 안 가진다는 수준의 한가지 행위에 대한 통계가 아니다.
    폭발적으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아기가 나오는 유튜브 영상만 봐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그건 조회수가 증명한다.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 믿을만하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는 가지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그 추세는 강해지고 있고, 이미 절대적인 출산률도 그 어느 나라도 넘볼 수 없는 수준이다.

    이게 무얼 의미할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지금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다.
    하나하나 파고들자면 끝이 없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행하다는 이야기다.
    버겁고 괴롭고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는 비관이 크다는 이야기다.

    8살도 맞출 수 있는 기묘한 문제

    그저 그냥 이렇게 생각해보자.
    새하얀 세상 위에 사람들이 1000만명이 서있다.
    그 1000만명 그룹이 새하얀 세상 곳곳에 그룹으로 모여서 서있다.
    그룹이 10개라고 해보자.
    한 그룹은 계속 오른발을 들고 총총 뛴다.
    한 그룹은 눈을 한쪽만 뜬 채 계속 좌우를 두리번거린다.
    한 그룹은 왼손으로 오른쪽 볼을 톡톡 두드린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들을 그 새하얀 세상에서 그룹마다 다르게 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한 그룹이 유독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고 스스로 목숨도 많이 끊는다.
    다른 그룹들에 비하면 너무 그 그룹만 과도하게.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우리가 어떤 행동 하나를 반드시 해야 한다면, 그 유독 눈에 띄는 그룹 구성원들이 하는 행동을 하는 게 현명한 선택일까 아닐까.
    아니겠지.
    초등학생도 맞출 난이도 하등급의 문제다.

    그러면 우리는 더이상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두리번거리며, 다른 사람들이 다들 사는대로 사는 걸 멈춰야 한다.
    최소한, 진짜 이게 현명한 선택인지 한번쯤 재고해봐야 한다.

    쉽지 않다는 건 안다

    알고 있다.
    힘들다는 걸.
    왜 힘든지 아나?
    아까 그 이상한 퀴즈랑 다르게 힘든 이유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서 알고 함께 지내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눈치를 보며 사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은 우리에게도 그들처럼 그렇게 남들이 하는대로, 사회와 학교와 직장이 시키는대로 따르며 살길 기대한다.
    그들도 불안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만의 삶을 살아보려고 한다면,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특히 어른들)은 어떻게든 만류하고 비난하고 마음을 되돌리라고 당신을 협박하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니 쉽지 않다는 건 안다.

    그래도, 남들이 시키는대로 살다 가는 게 인생의 목표는 아니지 않나.
    영화 매트릭스가 괜히 세계적으로 극찬받는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게 아니다.
    이런 상황을, 가장 이해하기 쉽고 와닿을 수 있게 빨간약 파란약으로 그려내는 워쇼스키의 위대함이 바로 이런 대목에서 드러난다.
    이미 옭아매어질대로 매어진 우리는, 차라리 남들이 하는대로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숨죽인 채 따라하는 게 더 편한 존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항상 듣는 말도 그런거다.
    너무 튀지 마라, 규칙대로 따라라, 웃어른을 공경해라, 상사의 지시를 어기지 마라, 눈치 없으면 사람도 아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등등 말하자면 끝도 없다.

    하지만, 명심하자.
    말보다 행동이다.
    말은 믿지 마라.
    행동을 믿어라.
    ‘나보다 남을 더 먼저 배려해라’는 도덕선생님의 ‘말’을 믿지 말고, 이 도덕선생님이 자기 손에 피가 날법한 위기에서 보이는 ‘행동’을 잘 살펴라.
    사회가, 어른들이 하는 말에 귀기울이지 마라.
    대신에, 그들이 실제로 하는 행동에 귀기울여라.

    예를 들면, 출산율 같은 거 말이다.
    그게 진실이다.

    진실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스스로 판단해라.
    그럼에도 남들 사는대로 살 것인지.
    어른들이 해라는대로 그대로 따르며 살 것인지.

    그렇다면, 나는 두 말 없이 각자의 선택을 존중할테니.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윤리와 도덕이라는 허상

    윤리와 도덕이라는 허상

    살인범의 살인 이유

    얼마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범죄자 프로파일러를 소재로 제작한 드라마를 리뷰한 영상을 봤다.
    현실고증이 잘 된 것인지를 판단할 지식이나 안목은 없지만, 그래도 감정선의 흐름이나 연출이 드라마덕후인 내 입맛에 맞아서 어쩌다보니 30분 남짓 되는 영상을 다 봤다.
    보다 보니, 중간에 잔혹하게 살인을 저지른 살인범이 형사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아니.. 걔가 괜히 거기 있었어가지고.”
    형사가 그 아이 잘못이라는거냐 되묻자, 범인은 당연하다는듯이 ‘걔가 괜히 거기 있는 바람에 상황이 재수가 없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태연하게 한다.

    모든 이들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한명도 빠짐없이 전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살인범조차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항상 항변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본 드라마에서 아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범이 말하는 걸 봐라.
    괜히 걔가 거기 있는 바람에, 라고 한탄하지 않나.
    그 어느 상황의 그 어느 누구도, 다 자기 입장에서는 자신의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드라마 속 살인범의 사례를 들어서, 윤리와 도덕이 허망하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도저히 ‘나는 정당하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자들도 언제나 자신에겐 자기 나름의 정당성과 정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거다.

    윤리와 도덕의 무력함

    여기에 윤리와 도덕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있다고 보는가.
    일단 이것부터 생각해보자는 이야기다.
    어떤 누구라도 충분히 납득할만한 윤리와 도덕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이 도덕과 윤리가 도대체 여기서 어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윤리와 도덕은 결정적인 순간에 힘이 없다.
    그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행동을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때 비로소 윤리와 도덕은 쓰임을 가지게 될 뿐이다.

    윤리와 도덕의 작용원리

    물론 윤리와 도덕은 사회구성원들을 예측가능하게 만들고 통제가능하게 길들이는 데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윤리와 도덕은 그 이름처럼 정의와 타당성, 올바른 이상 등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 사회적인 처형 등과 같이 인간이 진화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철퇴를 들고 사람들을 길들일 뿐이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상대방의 고통에 공명하며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도우려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게 윤리와 도덕 때문인 건 아니다.
    도덕은 인간의 그런 면모를 숭상하고 자신들의 깃발로 삼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규율하고 강제한다.
    윤리와 도덕은 누군가의 이해득실과 실용성을 근간으로 이용되어왔고, 모든 인간의 깊은 내면에는 윤리가 아니라 내 욕망과 두려움이 모든 행동의 뿌리로서 자리잡고 있다.

    윤리와 도덕의 타락

    처벌이 두려워 행하는 모든 도덕적인 행위들은 결국 사라지기 마련이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도덕을 어길 때 내가 겪게될 고통보다 더욱 큰 고통이 날 위협하기 때문이다.
    더 큰 고통을 피하고자 덜한 고통을 감수하는 건 인간의 본능적인 선택이다.
    사람들은 도덕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수긍과 공감, 헌신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도덕은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실패한다.

    결국, 도덕과 윤리는 언제나 도구로 이용되고, 설득이 아닌 협박으로 퍼져나가며,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
    그러다보니, 도덕은 그저 꼰머나 지배층이 타인을 원하는대로 움직이고 싶을 때 입맛대로 가져다쓰는 방패막이로 전락했다.

    윤리와 도덕의 허상을 깨달아야 하는 이유

    이것을 깊게 고민해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원하는대로 조종하려고 하는 많은 존재들이 도덕과 윤리를 ‘악용’하기 때문이다.
    윤리적이지 않는 XX라는 비난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로서는, 그 악용에 기민하게 대처하기가 어렵다.
    누누히 말하지만, 타인의 뜻대로 움직여서는 삶을 원하는 모습으로 조각하는 게 녹록치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꼭 찬찬히 숙고해보길 권한다.
    당신 삶에서 윤리와 도덕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영향력을 당신에게 발휘하고 있는지.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대화라는 이름의 허상

    대화라는 이름의 허상

    대화의 경험

    논산훈련소에 입소하고 난 첫주차의 일이다.
    분대 안에서 말다툼이 생겼다.
    무서울 게 없는 20대 초반 나이의 남자아이들을 모아뒀으니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둘은 처음엔 감정이 격해져서 험악한 표정으로 서로 주먹질이라도 할 것처럼 그랬지만, 이내 서로 대화를 하며 오해를 풀고 잘 화해했다.
    1번 훈련병이었던 동생이 말했다.
    “와, 역시 성인이니까 그래도 다르네요. 이성적으로 대화로 갈등을 해결하고 이런 거 보니까 진짜 신기하고 좋고 그러네요.”

    나도 그리 생각했다.
    나라고 해봤자 갓 스물두살이 되었을 뿐이었다.

    대화의 민낯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는 많은 걸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다.
    가장 큰 거짓말 중 하나가 나는 ‘대화’라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만, 대화로 갈등을 해결하거나 합의점을 찾는 일에 대해 나는 굉장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사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대화’는 이 세상에 없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다.
    결국 문제를 해결했다는 ‘대화’의 실체를 보면, 거의 다 그저 힘의 충돌일 뿐이다.

    우리가 책에서 배우고 학교에서 들어온 ‘대화’라는 건, 서로 자신의 의견과 그에 따른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상대방이 그 내용에 충분히 수긍하고 자신의 입장과의 차이를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조율하여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표상이자 지향해야 한다고 세뇌시키는 상상의 모습일 뿐, 실제는 이와는 다르다.
    갈등이 크고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일수록, 즉 중요한 사안일수록 거기에서 ‘우리가 배운 의미의’ 대화라는 건 일어나지 않는다.
    중요한 척 하지만 실은 중요하지 않은 사안 앞에서, 사람들은 그런 이상한 ‘대화 코스프레’를 많이들 한다.
    하지만 이건 사람들에게 ‘자신이 대화로 삶을 풀어나가는 멋진 사람’이라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일뿐이다.

    대화의 탈을 쓴 유혹과 위협, 사기

    국가차원이든 개인차원이든, ‘정말로 중요한 일’은 대화를 통해 해결하지 않는다.
    대화라는 외양을 가질 뿐, 실질은 회유와 협박, 유혹과 위협을 통한 충돌이다.
    대화라는 가면을 쓰고서 우리의 모든 대화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언제나 회유와 위협이다.

    물론 실제로 총과 칼을 들고, 물리적 폭력을 서로 행사하며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보다는, 약식으로 ‘대화’를 통해 온건한 방식으로 협상을 하는 게 가지는 이점은 매우 크다.
    다만 여기서 흥미로운 건, 실제 유혈사태와 생명에 지장을 주는 극단적인 전투를 대신해주는 ‘대화’가 성행한 덕에,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는 사기꾼들은 어느 시대에서나 번성했다는 사실이다.
    어떤 측면에서 대화는, 그저 사기꾼의 거짓과 날조에 날개를 달아주는 가면일 뿐일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대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키아밸리는 군주론에서 공포도 필요하다는 말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대화의 본질이 결국엔 두려움을 인질로 상대를 겁박하고 욕망을 자극해서 상대를 유혹하는 것들의 앙상블이라는 걸 알았기에.

  • 무리짓는 자들의 심리와 1인시대의 강림

    무리짓는 자들의 심리와 1인시대의 강림

    무리짓는 자였던 시절의 추억

    나는 혼자서는 화장실을 가지 못했다.
    이 증상이 생긴 건, 한 11살 무렵이었다.
    혼자서 화장실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내가 속한 무리가 다 모여야만 했다.
    최소한 그 중 두세명이라도 모여야 했다.
    혼자 가는 건, 왜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불가능한 일이었다.
    등교는? 하교는? 밥 먹는 건?
    당연히 그 무리가 다 모여야만 하는 일이었다.
    혼자 학교를 가다니? 혼자 밥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서 놀고 나면, 누굴 먼저 바래다주는지, 혹은 누구 집에 가까운 지점에서 헤어지는지가 엄청난 관건이었다.
    그걸로 은근히 서로 기싸움이 있기도 했다.
    왜냐하면, 우리집에 가까운 곳에서 해산하는 게 곧 나의 힘과 권력을 상징했고 그래야 혼자 길을 걸어다니는 끔찍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로 실제로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으니 말 다했지.

    그 때는 그게 정말 그렇게나 중요했다.
    그 무리가 내 삶의 중심에 있었다.
    내 삶의 목적이자, 내 삶의 이유였다.
    이 안정감을 주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집단이 내 삶의 전부인 거 같았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해줄 수 있을 거 같았다.
    이 집단은 평생 내 인생과 함께 갈 것이 틀림없었다.

    무리짓는 자들의 심리

    지금, 나는 혼자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엄마아빠, 동생이 있고 이들을 항상 사랑하고 아끼고 지키려 노력하지만, 이제 나는 혼자 화장실도 잘 가고 혼자 밥도 잘 먹는다.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시작된 이 무리생활은 한 4~5년 정도 바짝 꽃핀 후에 중학생 2학년을 넘어가면서 점차 그 빛을 잃어갔다.

    흥미로운 건, 대다수는 그들이 노인이든 중년이든 장년이든 청년이든 상관없이 여전히 무리집단에 목숨을 건다는 사실이다.
    아, 여기서 논의의 전제는 남자로 한정한다.
    (남녀갈등으로 항상 시끄럽지만, 내가 보기에 남녀는 많이 다르다.)
    많은 남자들은 환갑이 넘어서도 무리짓고 사는 걸 지향하고, 무리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다가 퇴직하고 자신의 무리가 조건부였다는 걸 깨닫고나면 고향친구와 동창들 모임을 전전하다가 결국 우울함에 빠진다.

    무리를 짓고 살면, 인간이 진화하면서 느껴온 근본적인 하나의 두려움을 없애고 아늑함을 준다.
    이를 ‘집단소속감‘이라고 한다.
    집단 소속감은, 집단에 속함으로써 얻는 (어딘가에 소속되어있다는)심리적인 안도감을 말한다.

    여기서 ‘안도감’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집단에 소속되어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은 혼자 외롭게 소속도 없이 살아갈지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해소됨으로써 생기는 감정이다.
    안도했다는 건,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상황이 벌어지지 않아서 얻게 되는 공포의 해소와 일맥상통하는 감정이다.
    혼자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자연스레 안도감을 위해 무리에 매달리는 일이 사라질거라는 말과도 맥을 같이 한다.

    지금 이 시대는 대다수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다.
    회사에서 가만히 사람들의 반응을 들여다보라.
    (아까도 말했지만 이거 남자 한정 이야기다.)
    40대 중반, 50대 이상인 사람들은 어떻게든 우르르 몰려다니는 자신의 무리에 속해있다는 사실에 큰 소속감을 느끼지만, 연령대가 내려갈수록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의 비율은 점차 낮아진다.
    물론 내가 그랬듯이 겁이 많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10대든 20대든 열심히 무리지어 우르르 다니지만, 결국 어느 시점에서 혼자여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갈수록 점차 무리생활에 굳이 헌신하지 않기 시작한다.

    무리짓지않는 시대의 강림, 도대체 왜?

    왜 이 시대는 혼자 지내고 혼자 사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아진 것일까.
    그 오랜시간 진화해온 인간의 무리로부터 소외되는 두려움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뉴스에서 자주 말했듯이, 코로나라서?
    그렇다!
    코로나 때문이다.

    다만 코로나 때문이라는 말의 의미는 좀 다르다.
    세상에서는 연신 사람들의 ‘홀로’생활의 증가에 대해 코로나 방역정책 때문에 혼자 지내는 게 익숙해진거라고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그게 그저 익숙해져서 그런걸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끝없이 남들의 눈치를 보고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살피고 남들이 날 어떻게 볼까 전전긍긍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었던 진화적 산물이 그리 쉽게 사라지진 않는다.

    경제학의 ‘게임이론’에서는 두 가지 균형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것도 게임이론이라는 모형 안에서 언급되는 이야기다.)
    어렵게 매트릭스를 그려 이야기하진 않겠지만, 결론적으로 코로나는 인간의 두려움과 그에 대한 반응을 그대로 둔 채 일시에 각자가 혼자 살게 만들어서 아예 균형점을 바꿔버렸다.

    인간의 행동전략은 언제나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도록,이다.
    그 무리라는 범위가 당장 나랑 같이 화장실가고 밥먹고 안부묻는 사람들일수도, 직장 내 부서사람들일수도, 직장 동료 전체일수도, 온 국민일수도 있다.
    인간은 자기가 속한 무리에서 소외될까봐 벌벌 떤다.
    그런데 내가 속한 무리가 일제히 각자 집에 틀어박힌 일이 생긴거다.
    나를 빼고 나머지가 전부 모여서 여전히 무리지어 다녔다면, 아마 개인들은 자기만 혼자 지내는 걸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무서워했던 ‘홀로’생활을 강제로 해보니, 생각보다 내 인생이 망가지지가 않는거다.
    아니 오히려 의외로 자유롭고 편하고 좋은거다.

    그렇게나 평생 두려워하던 일이 의외로 괜찮은데, ‘나홀로 상황으로의 진입’을 나혼자만 튕겨나와 해버린게 아니라 충분히 누구나 그럴만하다고 끄덕여줄만한 이유가 코로나 덕에 주어진거다.
    인간은 애초에 남들이 어떻게 날 생각할까, 가 두려운 존재인데 코로나 때문에 모두가 혼자 지내게 되니 이건 뭐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 말고가 없는거다.
    나홀로 지낼 당위가 ‘모두 다같이’ 생겨버린 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이건, 기존에 용기를 내어 홀로서기를 해왔던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좀 다르다.
    이 시대의(사실 어느 시대에나) 대다수 사람들은 나만 손가락질받고 비웃음받으면서도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는 도전을 감행한 전사의 심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제히 무리에 속한 다른 사람들에게 비웃음 살 이유도 없이 ‘홀로’생활로 강제진입하고 보니, 이게 두려워하던 것만큼 그리 지옥이 아닌거다.

    이는 사회 전체의 균형점을 바꾸었다.
    어떻게든 어떤 무리에라도 소속되어 홀로 소외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지내는 사람들이 많던 균형점에서, 각자 이젠 더이상 무리에 매달리느라 눈치보고 참고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게 지내는 걸 관두고 혼자 살아가는 균형점으로.

    물론 코로나 상황이 진정되자, 과거에 이미 너무 오랜시간 강하게 무리생활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다시 무리지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이제 깨달아버렸다.
    내가 또래집단에 속하지 않아도, 학교가 정한 규율에 따라 등하교를 하고 5교시까지 앉아있지 않아도, 할말 못하고 죄인처럼 굽신거리며 상사눈치 보지 않아도, 금요일 저녁이면 우르르 모여 회포를 푸는 무리에 소속되어있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아니, 오히려 더 행복하게 지낼수도 있겠구나, 라는 걸 말이다.
    단 일주일만에 그런 변화의 낌새를 눈치채기에 인간은 느리다.
    하지만 몇년은 말이 다르다.
    이건, 영화 매트릭스로 보면 단체로 그냥 빨간약 순한맛을 온국민 입에 쳐넣어버린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코로나는 명백히 인류에게 크나큰 재앙을 몰고온 끔찍한 재해였음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나는 아빠가 수술 중 심정지로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코로나에 감염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코로나 상황 때문에 하루에 30분을 멀리서 격리된 읍압치료실만 쳐다보다 나와서 눈물을 줄줄 흘리곤 했다.
    하지만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사건으로 인해 생각지도 않은 수천가지 변화를 동시에 겪는다.
    나비효과 이론 말마따나, 나비의 날갯짓이 엄청난 결과를 낳듯이.

    그럼에도 기억해야 할 한가지

    그래서 세상은 변했다.
    인간이 함께 무리지어 지내온 시기가 인류역사의 99.9%라면 거의 처음으로 인간은 혼자 지내기 시작한 시기를 맞이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럼에도 다른 형태로 또 남의 눈치를 보고 여전히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하며 조종당하는 일이 벌어지겠지만.

    하지만 기억하기 바란다.
    스스로의 힘으로 얻지 않은 것들은 쉽게 무너지고 금방 빼앗긴다.
    과거에 모든 인류의 습성과 거꾸로 걸어갔던, 모든 무리짓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위대한 자들은 코로나라는 희안한 격변이 없이 남들의 비난과 위협을 이악물고 극복해낸 사람들이다.

    우리는 결국 삶에서 공허함을 뜯어내버리고 죽음 앞에서 후회없다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리집단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정신적 자유를 쟁취하는 관점에서 볼 때는 분명 얻어걸린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니, 이를 잘 이용해서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하는 일을 해나가자고 말하고 싶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

  • 집단이 쓰는 언어가 가지는 힘

    집단이 쓰는 언어가 가지는 힘

    집단의 언어와 당신의 분위기

    언어다.
    사용하는 언어가, 그 사람의 색깔을 자아낸다.
    왜냐하면, 언어는 사고를 결정(최소한 지대한 영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집단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그래서 어떤 무리에 속한 사람이나 오랫동안 거기에 속해있었던 사람은, 그 무리의 색깔이 묻어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작은 시의 읍 밑에 있는 ‘리’에서, 즉 저기 시골 구석에서 자랐다.
    이제는 서울에서 산 지 어언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생각을 하는 언어는 경상도 사투리다.
    무슨 말이냐면, 마치 모국어로 생각하고 외국어로 내뱉는 것처럼 머릿속에서는 사투리가 흘러가고 이걸 도시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준어(비스무리한 걸로) 바꿔서 뱉어낸다는 이야기다.
    이러면, 생각도 표준어로 하는 사람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언어는 사고를 반영하고 사고는 곧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니까.

    기본적으로 경상도 사투리는 조금, 짧다.
    내가 머릿속으로 하는 문장들을 들여다보면 내가 ‘번역’해서 뱉어내는 문장들에 비해 확실히 그렇다.
    가령, 무언가를 보고 이상하다고 느끼거나 의문점이 들거나 그 상황이 바로 이해가 안 가서 들여다볼 때 나는 그에 대해 주위 사람에게 묻곤 한다.
    “아,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요? 지나가다보니 상황이 뭔가 사고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때 내 머릿속에 문장은 조금 더 단답식이다.
    ‘뭐고.’

    이게 별 의미의 차이도 없고 사소한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저걸 알잘딱으로 번역해서 뱉는거랑 처음부터 저렇게 생각하는거랑은 꽤 다른 분위기를 가지게 된다.

    사투리 뿐만이 아니다.
    각 나라의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은 당연히 모국어로 쓰는 언어마다 가지는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이는 각 나라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느낌을 가지게 되는 핵심적인 요인이 된다.
    군대라는 집단에서 살아온 군인들,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도하는 집단인 교사들, 창작을 하는 집단인 예술가들, 각 집단은 그들이 주로 쓰는 단어나 표현이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각 집단구성원들이 무리마다 가지는 색깔을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가정의 느낌을 분명히 가지고 간다.

    집단의 영향일까, 원래 내 모습일까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우리가 우리자신을 이해하는 데 이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환경의 영향에서 아무 노력없이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우리 자신의 잠재력과 소질을 발견할 때 내가 속한 집단의 영향을 잘 가려내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발견’을 자유 파트 직후 단계에 넣어놓은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가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고, 진짜 우리 것인지 주위로부터 받은 것인지를 구별할 줄 알아야만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진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쿨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냥 내가 속해있던 집단이 쿨한 걸 지향하고 높이 사서 나도 그런 줄 알고 살아왔을 수도 있는거다.
    사실은, 나는 섬세하고 작은 걸 배려할 줄 알고 디테일한 상대의 감정을 미묘한 수준까지 파악할 줄 아는 강점이 있는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중간정리

    중간정리, 같은 걸 한 번 해보자.
    삶에서 공허감을 흩날려버리고 후회없는 인생을 살아가려면, 우리는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해야 한다.
    그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고, 우리 자신의 삶이란 곧 우리가 발견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지향하고 실현시키는 삶이다.
    그런데 나만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게 쉽지가 않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로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자유란 신체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다.
    정신적 자유는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심리적 차원의 자유를 의미하고, 이는 곧 내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 것과 내 안에 원래 있던 내 고유의 것을 구분하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
    이 글은, 그러한 능력을 기르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썼음을 여기 간략히 밝혀둔다.
    헷갈리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길 권한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