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대장장이 휴

  • 숨쉬고 눈을 깜빡일 때의 편안함, 존재방식에 대해

    숨쉬고 눈을 깜빡일 때의 편안함, 존재방식에 대해

    나는,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한다.
    집을 나서기도 전부터
    조금씩 체력이 쓰이기 시작하는 건
    우리의 존재방식 때문이다.

    끊임없이 바깥을 두리번거리는
    감정과 사고의 오물거림.

    늘 내 앞,옆,뒤,
    심지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존재들을 의식하느라
    도무지 편안히 숨돌릴 틈이 없는
    우리의 마음.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고,
    세상 그 어느 곳으로도 드나들며
    쉼없이 내가 그들에게 받아들여질지
    혹시 거부당하는 건 아닐지 고뇌하는
    우리의 영혼.

    이러한 사실들 때문에,
    우리의 존재방식은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위태롭다.

    언제까지 늘 주위를 살피며
    노심초사하는 일이 지속될까.

    언제가 되면,
    그러한 것들로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워질까.
    … 그런 날이
    죽기 전에 오기는 할까.

    나의 결론들은 이렇다.

    1. 가만히 기다리면,
    아마 70이 되고 90이 되어도
    그런 날은 오지 않는 것 같다.
    … 잔혹한 일이다.

    2. 이해해야 할 것들을 이해하고
    찬찬히 되짚는 일을 지속하면,
    분명 존재하는 방식은 바뀐다.
    즉, 자유로워지는 날은, 온다.

    3. 어려운 점은,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과,
    그걸 받아들이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해력, IQ, 학습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살아가는 매순간,
    주인공인 당신이
    마치 혼자 여행 중인 여행가처럼
    쾌활하고 청량감 넘치는 상태로
    존재하는 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기쁨이고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다.

    눈을 깜빡이고
    숨을 내쉬는 모든 순간,
    충분히 편안하고 이완되어라.

    잘 몰랐겠지만,
    그래도 된다.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에 대한 것은
    Lv14~Lv16에서,
    존재하는 이상적인 방식에 대한 것은 Lv17에서
    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감상할 수 있다.)

  • 삶에 들이닥치는 고통을 철저히 이용해먹는 세가지 방법

    삶에 들이닥치는 고통을 철저히 이용해먹는 세가지 방법

    삶은, 불확실하다.

    몇 번을 써도
    저 말에는 먼지 쌓이지 않는 것 같다.
    인생이라는 여행에는,
    지도나 내비게이션 같은 것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통신장애가 있어서
    결국 언젠가 어디선가 우리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불확실한 결과가 그저 잠시 발목을 삐는 것이라면
    그래도 웃음짓고 툭툭 털고 넘어갈만한데.
    반드시 그런 가벼운 불확실함만이 우리를 찾아오진 않는다.

    가끔은 눈 앞이 하얘지고

    코에서 피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아득하게 극심한
    고통이나 어려움이 우리를 집어삼키려 달려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인간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과연 그게 선택인지, 사실은 아직도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일에 ‘선택’이라는 단어를 쓰는 걸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극단적인 고통이 휘몰아치고 내 살점을 도려낸다고 느낄 때
    인간은 철저히 무너지거나, 철저히 강인해진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중간지대라는 건 없다.
    마치 내가 가진 전재산과 내 팔한짝을 판돈으로 건 도박사처럼,
    삶에 미친듯이 들이닥친 극단적인 고통과 시련은
    인간을 갈림길 앞에서 선택하게 만든다.

    결국, 인간은 이 선택의 기로에서 둘로 나뉘어버린다.

    어디서 그 차이는 오는 것일까

    왜 비슷한 극도로 고통스러운 상처를 통해
    누군가는 철저히 무너지고 누군가는 철저히 다시 태어나는가.
    말도 안 되는 무게와 속도의 파괴로 인해
    모든 것이 다 와르르 무너져 내려버린 후에
    왜 어떤 인간은 다시 뼈와 살을 채워 재탄생하고,
    어떤 인간은 마치 한 줌의 재가 된 것처럼 무너진 채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되는가.

    나는 격투기를 즐겨본다.
    UFC 헤비급 챔피언 다니엘 코미어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 중 한 명이지만,
    그는 어린시절 심하게 학교폭력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극심한 고통과 상처를 통해
    왜 누군가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되기도 하는가.
    거의 모든 사람에겐 영원한 후유증이 남지 않기도 버거운 일일텐데.
    어떻게 누군가는 그 트라우마를 통해 더욱 강인한 존재가 되는걸까.

    모든 인간이 그럴 수 있다면 우리 각자의 삶은
    어쩌면 니체의 말처럼 시련과 역경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고고한 존재가 기꺼이 되려고 할 지도 모를 일일텐데.

    내가 변하겠다는 위대한 결단을 내리는 일

    삶이라는 게 자기가 불확실하다는 핑계로
    이유도 없이 우리를 공격하고 찢어갈기려 들면,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에 피와 멍이 가득해지면,
    인간은 생각한다.

    분하고 억울하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늘을 믿는다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난 잘못한 게 없는데, 난 늘 좋은 마음을 가지고 노력했는데.

    이런 마음이 나의 낮과 밤을 가득 채우고
    하염없이 짜내고 짜내도 멎지 않는 눈물을 만드는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일으켜세워 변하겠다 다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결코 내가 변하겠다는 결심을
    차마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는 결국에 우리 스스로가 변하는 길을 택해야만 한다.
    야속하고 분통이 터지지만, 그래야만 한다.
    삶을 변화시키고 나와 내 소중한 이를 지키는 존재로
    나를 새롭게 조각해나가고 싶다면 반드시.

    학우에게 심하게 폭력을 당하던 코미어가 지구 최강이 된 데는
    이게 분명 어렵고 두렵지만 그가 해낸 첫번째 걸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

    미 하원의원이자 작가였던 레스 브라운은,
    자신이 살면서 가장 쉬웠던 일이 백만달러를 버는 일이었다고 했다.
    반면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이 백만달러를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게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극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에 빠지면,
    우리는 도저히 이 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다는 강렬한 확신에
    사로잡히게 된다.
    도무지 이 절망스러운 곳에서는
    신이 나였더라도 결코 힘을 내지 못했으리라는 강한 확신이
    우리의 마음을 새카맣게 물들인다.

    태어날 때부터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야 했던 헬렌 켈러는
    완전한 동물의 상태인 갓난아기때부터 그런 지경이었다.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희망과 가능성이 있었을까.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나에게는,
    참으로 다행히도 그런 정도까지의 불행이나 시련이
    닥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을거라 짐작되지만.
    각자의 고통은 각자에게만 그 명료한 무게가 드러나는 법이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고통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반드시 지녀야 하는 생명줄은,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틈새를 인정하는 일이다.
    둑이 터져나올 수 있도록, 아주 작은 구멍이 생길만한 균열이
    생길 수 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모든 기적은,
    그 아주 작은 틈새와 균열에서 시작되니까.
    하지만 그 아주 작은 먼지한톨도 안 되어보이는 가능성은,
    우리가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열리지 않는다.

    그저 내리쳐야 한다. 당장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내가 가슴에 담고 사는 나의 한마디는,
    ‘내리치라는 말’이다.
    내리쳐야 한다.
    그렇게 세심하게 잘 조준해서, 많은 걸 생각해가며 내리칠 필요 없다.
    우리에겐 그런 게 필요한 게 아니다.
    그냥, 그저 내리치는 일이다.
    그저 팔과 몸에 힘을 주고, 그냥 내리쳐라.
    원석을 내리치다 보면, 언젠가 그 안에 깃들어있던 신이
    조금씩 우리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때가 올 것이다.

    절대 금방 그리 되진 않는다.
    우리는 그저, 그 경쾌한 소리와
    내 손가락과 팔과 어깨를 타고 온 몸으로 전해지는
    약간은 아프지만 약간은 시원한 타격감을
    가끔은 흥미롭게, 가끔은 포근하게 느끼며.
    그저 힘이 닿는 데까지 내리치고 또 내리치는 일이다.

    그것만이,
    우리의 조각이 완성되도록 해줄 수 있다.
    꾸준히, 늘, 한결같이 내리치면
    결국 그 투박하고 거친 돌땡이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던 신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꾸준히 오래 내리칠 수 있다면, 분명 벌어질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다.
    그렇다면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 글쓰기의 3단계

    글쓰기의 3단계

    과거에 한 번 창작의 3단계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이제 글을 쓰는 일에 대해 살펴보자.

    글을 쓰는 일 또한
    모든 창작이 그렇듯이 3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1단계 : 집필

    1단계는 다시 세 가지 소단계로 나뉜다.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집필 = 휘갈겨쓰기 -> 시놉시스 -> 초고&1차 퇴고

    휘갈겨쓰기

    무언가 내 감정의 요동침에 기반해
    휘갈겨쓰고 싶은 것을 써내려가는 걸 말한다.
    말 그대로
    내 영혼, 마음, 생각, 감정에서 터져나오는 것들을
    일필휘지로 휘갈겨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의 내면에 깃든 예술성과 잠재력, 정체성과 개성이
    있는 그대로 쏟아져나와 담긴다.

    시놉시스

    시놉시스 작성은
    글 전체의 흐름을 그려내는 과정이다.
    여기서 흐름이란,
    다분히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기승전결을 의미한다.

    우선 곡을 쓸 때처럼,
    글의 목적과 이유만 딱 방향을 정한 채,
    전체적인 감정의 강도가 어떤 흐름으로 흘러갈지를
    먼저 실선으로 자유롭게 그려본다.
    연필을 딱 종이에 찍고서,
    떼지 않고 하나의 선으로 주욱 그리고 끝낸다.

    그러고 나서는, 세로줄로 구간을 나눈다.
    구간을 나누는 방식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작가들이 이론을 성립해두었다.
    찾아보기 구찮으면
    3막 구성으로 가도 좋다.
    서론, 본론, 결론, 이렇게.
    기승전결, 이렇게 4막 구성으로 가도 좋겠다.
    ‘하몬 써클’처럼 8막 구성으로 가도 좋다.

    이제는,
    각 구간에 생각하고 있는 단어나 글감을 붙여본다.
    단어라는 건
    결국 각 구간을 하나의 시퀀스로 볼 때, 그 시퀀스의 주제다.
    이에 더해, 글 전체에서 그 구간이 차지하는 단계다.
    소제목으로 봐도 무방하다.
    글감이란, 말 그대로 주제 전달에 쓰이는 소재다.
    (브런치 글감 관련 글 링크)

    이 정도면 글 전체의 개략적인 뼈대가 갖춰진 것이다.
    여기까지가 시놉시스다.

    초고&1차퇴고

    시놉시스 작성이 끝나면,
    이걸 참고하며 초고를 쓴다.
    시놉에 적힌 감정선의 흐름과 구성에 맞게,
    그에 해당하는 주제와 글감을 고려해서
    글을 써내려가는 걸 의미한다.

    그 다음 1차 퇴고를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1차 퇴고는 초고를 다 쓰고 난 즉시 바로 한다는거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초고를 휘갈기며 뿜어져나오던
    감정선과 영적인 결, 에너지의 여운이 다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걸 간직한 채 글을 다듬는 것이
    그 나름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퇴고이니만큼,
    어느 정도 큰 흐름 차원에서의 다듬는 일이 가능해지므로
    글은 분명히 한결 정갈해질 수 있을 것이다.
    1차 퇴고에서 가장 중요한 건,
    불필요하고 집중도를 해치는 부분들을 삭제하는 일이다.

    2단계 : 퇴고

    진짜 퇴고의 본체는 2차 퇴고다.
    퇴고는 이제 말 그대로 내가 잉태해낸 원석,
    즉 간단한 1차 퇴고가 끝난 초고를
    깎고 다듬고 조각해나가는 일이다.
    헤밍웨이가 모든 초고는 shit이라고 했듯이,
    초고는 그 자체의 매력과 에너지가 분명 있음에도
    분명 아직 예술작품으로 완성되진 못한 상태다.
    이 날 것의 원석을,
    진정한 예술작품으로 완성시켜나가는 일이
    글쓰기에서는 바로 이 퇴고다.

    퇴고는
    초고를 작성한 후 일정시간이 지난 후에 하는 게 좋다.
    나는 보통 하루 뒤에 하는 편이다.
    만약 그날 당장 2차 퇴고를 해야한다면,
    1차 퇴고와 2차 퇴고 사이에 여백을 둬야 한다.
    그 사이에 낮잠을 자거나 다른 일을 하는 등.
    머리를 비워낸 후 다시 테이스팅을 할 수 있도록
    중간에 어떤 일정을 끼워두는 편이다.

    3단계 : 공개

    공개 단계에서는,
    퇴고가 끝난 글을 세상에 공개한다.
    나의 경우에는,
    일단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퇴고를 마친 나의 글을 공개하고 있다.

    이 단계를 거치고 나면,
    사실상 이제 글은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물론 요즘이야 쉽게 삭제도 하고 수정도 하고,
    번복도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일단 공개를 하고 나면,
    원칙적으로 그 글은 나의 손을 떠나게 된다.
    그걸 이미 읽어버린 사람들과,
    고이 자신의 폰이나 pc에 간직한 사람들과,
    마음에 나의 문장이나 단어 하나를 기억한 사람들.

    그들에게 나의 글은 더이상 쉽게 수정하고 삭제할
    그런 류의 무언가가 아니다.
    이제 그 글은 그 글자체로서 하나의 존재가 된다.

    공개를 할 때는,
    여러 가지 형태로 공개를 할 수 있다.
    가령, 긴 글을 좀 더 간명하게 축약해서
    짧은 글로 요약해서 SNS나 커뮤니티에 공개할 수 있다.

    특정 일부분을 발췌해서
    이 부분이 와닿을거라 짐작되는 사람들에게
    그 부분만을 제시할 수도 있다.

    글 이외의 시각적인 요소를 더해 공개할수도 있을 것이다.
    글을 뼈대로 아예 영상이나 웹툰을 제작하는 일이,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은 시대가 아닌가.
    꼭 거창하지 않더라도,
    나의 글에 맞는 점 하나, 모형 하나, 붓질 하나도
    충분히 좋은 공개방식이 될 수 있다.

    용기있게 공개하되,
    나의 작품이니 다른 방식으로 글을 공개해도 된다는 걸
    잘 이해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가,
    글쓰기의 3단계다.

  • 창작의 3단계

    창작의 3단계

    창작활동의 3단계

    이건 다분히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 영상제작, 작곡 따위를
    좀 더 내 호흡에 맞게 잘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즉 내가 그냥 적어두고 읽으려고 써놓은 글을
    일부 공개하는 것임을 밝힌다.

    창작활동은 여러 단계를 거치고,
    생각보다 많은 프로세스가 요구되므로
    정리가 좀 필요하다.

    내가 창작하기 좋아하는 가장 대표적인 세가지.
    글, 영상, 음악.
    그렇다면 이 세가지 예술작품들은
    어떤 프로세스로 만드는 게 나에게 적당한가.

    창작활동은 총 3단계를 거치며 이루어진다.

    1단계는 잉태,
    2단계는 조각,
    3단계는 공개.

    1단계 : 잉태

    잉태(孕胎)란 무엇인가.
    원래 아이를 가지는 걸 잉태라고 한다.
    다만, 내 아이와도 같은
    내 안의 깊은 무언가를 가지는 것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잉태다.

    가장 원천 그대로의 날 것,
    내 타고난 예술성의 근원을
    에너지형태 그대로 담아내는 걸 말한다.

    ‘조각’하기 전에 그 조각의 재료가 되는
    원석을 만들어내는 걸 말한다.

    그 원석은,
    그 고유의 질감과 패턴,
    경도,
    색깔과 밝기,
    모양,
    분위기,
    느낌,
    그 원석만의 결을 가진다.

    이 원석을 세상에 구현해내는 것.
    이것이 바로 1단계, ‘잉태’다.

    2단계 : 조각

    말 그대로
    원석에 깃든 천사, 신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해
    망치로 내리치고 깎아내서
    예술작품을 완성시켜내는 것을 말한다.
    순수한 원석 상태인 예술성 그 자체를
    하나의 최종적인 예술작품으로 조각해내는 것.
    이것이 바로 2단계, ‘조각’이다.

    3단계 : 공개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일이
    물거품이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세상에 선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작품을 세상에 드러내는 건,
    상상 이상의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수많은 천재성과 예술성을 가진 자들은,
    미처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이 단계에서 주저앉아버렸다.

    설령 지금 당장, 내가 있는 이 시대에
    내가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끝없이 보여주고
    드러내고
    당당하게 외치고
    깃발을 꽂아 널리 알리는 것.
    이것이 바로 3단계, ‘공개’다.

    모든 창작활동은
    이 3단계를 거쳐서 완성된다.
    개인적인 경험 상으로는,
    이렇게 내 호흡과 페이스에 맞는 과정을 정리해두면
    여러 창작활동을 할 때 굉장히 유용하다.

  • 투사적 동일시의 명확한 의미

    투사적 동일시의 명확한 의미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는
    정신분석학이나 대상관계이론 등의 책에서
    참 많이 나오는 개념이다.
    하지만 그 의미가 불명확하다.
    내가 상담심리대학원에서 듣던 수업들마다,
    심지어 똑같은 대상관계이론에 대한 수업들 간에도,
    쓰는 교재에 따라 투사적 동일시의 개념은 조금씩 달랐다.
    시험기간마다 사람들 각자 이해한 정의가 조금씩 다 달랐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책, 저 책 다르고 이 수업, 저 수업 다르다는건
    충분하게 합의된 명료한 정의가 아직 정립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의미겠으나,
    그럼에도 늘 기준이라는 건 필요하니
    그것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해보고 넘어가려고 한다.

    투사란 무엇인가.

    투사(Projection)란,
    도저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 감정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나의 감정이라 인정하기 어려운 걸
    타인에게 던지고,
    그 감정이 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짐작되겠지만,
    이건 자각되지 않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다.

    동일시, 투사적 동일시란 무엇인가.

    동일시(Identification)란,
    외부대상의 일부를 나의 내면으로 가져와 내 것으로 여기는 행위를 의미한다.
    방어기제의 한 종류이자, 내면화의 한 형태다.

    자연스럽게 투사적 동일시란,
    위의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감정을 상대방에게 투사하고,
    다시 그 투사된 감정이나 그를 느끼는 상대방을
    동일시하는 방어기제다.

    투사적 동일시 개념은 사실 좀 혼란스럽다.

    이제 여기서 공부하는 입장에서도,
    그냥 교양으로 책을 보거나 강연을 듣는 입장에서도,
    혼동이 오기 시작한다.
    투사는 사실 헷갈릴 부분이 없다.
    원래 투사의 의미와 다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동일시는 다르다.
    동일시는 내면화의 세가지 분류 중
    가장 성숙하고 건강한 방어기제로 꼽힌다.
    본받을만하거나 중요한 대상의 긍정적인 특성을
    자신의 내면이나 정체성의 일부로 가져오는 걸
    동일시라고 설명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투사적 동일시는,
    그리 성숙한 방어기제로 평가되지도 않고,
    긍정적인 것으로 설명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 동일시가 헷갈린다.
    뭘 동일시한다는 말인가.
    책마다, 사례마다 다 다르다.

    투사적 동일시에서 동일시의 첫번째 의미

    투사적 동일시에서의 ‘동일시’는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번째 의미를 살펴보면,
    투사적 동일시에서의 동일시는
    감정을 투사하는 나(이하 ‘투사자’)의 감정을
    투사받은 상대방(이하 ‘피투사자’)이
    투사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동일시를 말한다.
    즉, 피투사자가 투사자 때문에 느끼는 투사된 감정을
    투사자가 다시 내 것으로 동일시한다는 의미다.

    이쯤되면 더 헷갈린다.
    투사자라는 놈은, 도대체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가.
    그냥 지 감정인데 지가 느끼면 되지.
    이런 욕이 절로 나올 수도 있다.
    이건 좀 이따 이야기해보고 일단 개념만 짚고 넘어가자.

    동일시의 두번째 의미

    동일시의 두번째 의미는,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걸 의미한다.
    즉,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이 내 것이라고 여기고
    경험하게 되는 내사(Introjection)와 유사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투사적 동일시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아무래도 첫번째 의미가 좀 더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투사적 동일시에서의 동일시는
    이 피투사자의 내사를 ‘동일시’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므로 이 단어가 가지는 두번째 의미도
    정확하게 이해해두는 것이 도움이 된다.

    러프하게 정리하면,
    부차적 의미라 볼 수 있는 두번째 의미는,
    피투사자의 ‘내사(Introjection)’다.

    투사적 동일시에서 ‘통제’의 의미

    대상관계이론이나 정신분석 전문서적들을 보면,
    투사적 동일시와 관련해서 이런 표현들이 나온다.

    ” ~ 투사한 후 그 감정을 통제하려 한다.”
    ” ~ 간접적으로 관리하려 한다.”
    ” ~ 조종하려 한다.”

    뭐 이런 뉘앙스들의 표현들이 서술된다.
    아니, 동일시면 동일시지 뭘 통제하고 조종한다는거야.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 ‘통제’에 대한 의미도 크게 두가지로 이해하면 된다.

    첫번째 의미.
    투사자가 감정을 투사한 후
    그 감정을 느끼는 피투사자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정확히는, 투사된 감정에 대한 피투사자의 반응을
    통제하려는 시도다.
    이는 자기가 도저히 처리하지 못해서 뱉어버린 그 감정을
    피투사자를 통해서라도 처리해내보려는 시도다.

    두번째 의미.
    투사자가 견디지 못하고 투사해버린 감정 그 자체를 피투사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통제하려는 시도다.

    즉, 첫번째 의미는 피투사자의 감정에 대한 반응이,
    두번째 의미는 투사한 감정 그 자체가,
    ‘통제의 대상’이 된다.

    이걸 좀 구분해서 이해하고 있으면,
    여러 서적에서 나오는 관리, 통제, 다루는 일, 을
    이해하며 읽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첫번째든, 두번째든, 결국 통제의 취지는 똑같다.
    자신이 못견디고 뱉어낸 감정을 타인이라는 완충지대를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통제하고 처리해내고 싶은거다.

    간접적으로 다룬다는 개념의 구현

    간접적이라는 건,
    투사자가 직접이 아니라 피투사자를 통한다는 걸
    의미하는 표현이다.
    그러면 간접적으로 ‘다룬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구현되는가.

    여러 서적의 여러 사례들을 보면,
    대강 훑어도 딱 드는 생각이 일관성이 없다는거다.
    나는 특히 초창기에 여러 책들을 보며
    너무 ‘막 갖다붙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ㅋㅋ
    물론 모르고 그리 함부로 생각했던 것도 있고,
    꽤 공부하고 나서도 그런 느낌을 완전히 지울 순 없으나… ㅋㅋ

    간접적으로 다루고 관리한다, 통제한다, 처리한다.
    이런 류의 표현들은 두가지 형태로 삶에서 구현된다.
    즉, 사례에서 두가지 양상으로 드러난다는 의미다.

    첫번째 양상은,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을 경험하고 알아서 처리하는 모습을,
    투사자는 그저 지켜본다.

    이것만으로도 투사자는 어느 정도 자신이 그 감정을 간접적으로긴 하지만 처리하고 소화해낸다고 느낀다.
    이게 바로 위에서 말한,
    ‘도대체 왜 이런 번잡한 짓을 하는지’에 대한 첫번째 대답이다.
    애초에 투사자는 이 감정이 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조차 할 수 없지 않았나.
    그에 비하면 단지 지켜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름 장족의 발전 아닌가.

    두번째 양상은,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에 특정 행동이나 특정 반응으로 대응하도록
    투사자가 피투사자를 유도하거나 조종함으로써,
    자신이 못견디고 뱉어버린 그 감정을 ‘제대로 한 번’ 통제하고 처리해본다는 식.
    이건 첫번째 양상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느낌이다.

    대학원 교재에서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

    자, 여기까지면 이제 투사적 동일시를 이해할 때,
    혹은 관련 전문서적들을 볼 때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부족함이 없다는 건,
    적힌 걸 이해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안 적혀있으나 궁금한 걸 해결하는 건 각자의 몫이다.

    궁금하지 않나.
    자기가 감당 못해서 그 감정을 남에게 던졌는데,
    어떻게든 다시 처리하려는 예상밖의 용감함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분명 투사자는,
    자신이 기대한 방향으로
    피투사자가 그 감정에 반응하거나 행동하도록 하려는
    무의식적인 동기를 가진다.

    그렇다면 이 무의식적인 동기는 어디서 오는가.
    그건 미해결된 감정이나 과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장기적으로 인간의 생존에 유리하다는 사실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지금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는,
    무조건 어렵고 실패한 것들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오랜 진화과정에서 인간은
    내가 아무리 도망쳐도 다시 마주해야 하는
    여러 가지 미해결된 과제들에 죽임을 당해왔을 것이다.
    삶은 다분히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인간은 실패한 과제로부터 어떻게든 도망가려는 동시에
    미해결된 감정이나 문제에 다시 달려들어
    제대로 통제하고 해결해보려는 타고난 성향을 지닌다.
    그래서 내가 미처 어쩌지 못하고 타인에게 투사한 감정도
    그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통제하고 처리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당신의 쿨한 팀장이 자꾸 서성이는 이유

    자.
    이렇게만 말하고 끝나면 기억에 오래 남지 않을 수 있으니,
    흔히 일어나는 직장에서의 상황으로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지금 회사 A팀의 팀원이다.
    팀에 사장에게 직접 보고해야 하는 중요 업무가 떨어졌다.
    팀장은 평소에도 쿨한 성격의 소유자다.
    사장보고 사안이 떨어지자,
    팀장은 팀원인 나에게 와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좀 급한 일이긴 하나 뭐 별 거 아니니까,
    그냥 우린 하라는대로 해서 보고하면되니,
    괜히 긴장할 거 없단다.
    묘하게 좀 상기된듯한 느낌도 언뜻언뜻 보이지만,
    아무튼 마음 편하게 가지라니 마음 편하게 가지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근데 내가 보고서 쓰는데 자꾸 뒤에서,
    팀장이 서성거리며 왔다갔다 한다.
    초안을 보여줬더니 단어 하나를 두고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계속 고민을 거듭한다.
    보고서가 20장인데.
    보고를 언제까지는 해야 될 거 같다며,
    자꾸 데드라인을 언급하며 얼마나 작성됐는지 확인한다.

    뭘까.
    팀장은 속으로 초조하지만 겉으로 아닌 척 한걸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닌 경우도 허다하게 많다.

    팀장은 사실 진심으로 초조하고 불안하다.
    사장 보고인데 갑작스럽게 생겨서 미처 준비도 못해서
    걱정이 되고 보고갈 생각만 해도 두렵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나는 평소에도 팀원들이 담력도 쎄고 남자다워서
    멋있다고, 나도 본받고 싶다고 칭송받는 담대한 팀장이다.
    그런 내가 이런 급작스런 보고 하나로 덜덜 떨다니.
    내가 초짜도 아니고 회사생활 20년의 베테랑인데.

    그래서 자신의 속마음,
    즉 불안함과 초조함, 두려움 따위의 감정들을
    남에게 투사한다.
    보고서를 작성 중인 담당팀원에게.
    즉, 나에게 투사하는거다. 팀장이 자신의 감정을.

    당신은 팀장이 자꾸 괜찮다 괜찮다 다독이고
    너무 쫄지 마라 그러고, 떨지 말라 그러니까.
    원래는 별 생각없다가 점점 초조해진다.
    울지 마라 다독이니 더 눈물날 거 같은 아이가 된 기분이다.

    여기서 지금 팀장은
    자신이 소화하지 못하는 자기 불안을 팀원인 나에게 던진 뒤
    내가 그 감정을 내것으로 여기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팀장은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그 불안함에
    반응하는 당신의 대응이나 행동을 통제하려고 한다.
    ‘그 불안함에 너무 휩쓸리지마.
    너무 그 감정에 압도되지 마.
    별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팀장은 팀원인 나를 통해
    자신이 못견디고 내게 투사한 감정을 간접적으로라도
    통제하고 처리하려고 한다.
    물론 팀장은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채 은연 중에 이런 식의 행동을 보이는거지 의도를 갖고 그러는 건 아니다.
    자기도 자기가 그러는지 모르고, 왜 그러는지도 모른다.

    이게 투사적 동일시가 실제로 구현되는 모습이다.
    이런 일은 일상에서 비일비재하다.
    투사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만약 눈에 보인다면 무슨 무선 와이파이 기기들이 수백개가 주위에 넘쳐나듯이 아주 장관일거다.

    이것이,
    우리가 정신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힘을 길러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기 위해서 타인을 은연 중에 이용하려는 존재니까.
    이용당하느라 소중한 감정과 시간이 소진되면 안 되지 않나.
    (이에 관한 레벨업은, X살법 Lv15를 통해 시작하면 된다.)

  • 인간은, 달면 삼키고 쓰면 ‘투사’한다

    인간은, 달면 삼키고 쓰면 ‘투사’한다

    투사

    투사.
    투사(Projection)란,
    ‘자신의 것이라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을 타인에게 전가해서 그 사람의 감정이라고 여기는 행동’
    을 의미한다.
    이건 마치 아기가 달콤한 건 삼키지만
    쓰거나 맛없는 건 퉤, 하고 뱉어버리는 것과 유사하다.
    내 안에 들어오기 거북한 건, 바깥으로 뱉어버리는거다.

    투사를 이렇게 한 줄로 딱 정리하면. 사실 간단해보인다.
    하지만 이 간단해보이는 단어 하나에도, 꽤나 그럴듯한 함의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은, 딱 말그대로 간단한 것만 생각해본다.
    단순하게 내뱉는 것 그 자체 하나만 딱 보자.
    이것만으로도 주위 세상과 타인을 이해하는 눈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니.

    사람들은 늘 타인을 욕한다.

    일상에서,
    뒷담화나 험담이 없는 자리가 얼마나 있을까.
    그 자리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투덜거림이나 당했음을 빙자한
    비난과 조롱이 난무한다.

    하지만 자신도 그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이러한 모습이 미성숙하고 최악이라며
    누군가를 욕하는 그 사람도,
    막상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똑같이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령,
    친구 누구누구는 늘 자기 말만 맞다고 주장하고
    남의 이야기는 경청도 하지 않고 무시한다며
    실컷 욕을 하고 있는 A를 상상해보자.
    그 A는 그런데 그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그렇게 한다.

    ….왜 그런걸까.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늘 나오는 진리의 단어가 있다.
    내로남불.
    내로남불이 판치는 시대에, 역시 그놈도 그런거 아니냐!
    내로남불이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결과론적으로는 맞으나,
    그 단어에 뉘앙스적으로 깔린 ‘악의’는 틀렸다.

    늘 내가 주장하는 거지만,
    인간은 의외로 의도해서 내로남불하는 게 어려운 존재다.
    내로남불러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법학에서 말하는 ‘악의’, 즉 알고도 그러는 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투사의 힘이 여기서 드러난다.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트는,
    초창기에 투사를 비롯한 방어들이 분열을 위해 태어난 것 같다, 는 말을 한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투사의 핵심 중 하나는, 무의식적이라는 데 있다.
    투사를 한 사람은 자신이 투사한 걸 자각하지 못한다.

    무슨 이야기냐면,
    ‘XYZ’라는 단점을 헐뜯고 남을 욕하는 사람이
    자신도 똑같이 ‘XYZ’를 가지고 드러낼 때는.
    그 사람은 자신의 XYZ를 자기 것이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안에 있던 걸 바깥으로 뱉어버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떠올려보라.
    분명히 이러이러한 문제가 너무 과도한 거 같아서 조심스럽게 그것을 이야기했을 때,
    상대방이 연인이었든 친구였든 동료였든 뭐라고 했었는지.
    내가 뭘? 내가 언제? 왜 없는 말 지어내?
    속에 열불이 터질 수도 있고
    정말 우리가 잘못 본 걸수도 있지만,
    핵심은 상대방의 저 반응이
    알고도 잡아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저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상대방이 저렇게 반응할 때, 너무 진심인 거 같아서 의아할 때가 있지 않았나?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있을텐데.

    세상에는 의외로 내로남불러들이 적다.
    그는 그저
    도저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 못나고 최악이라 느껴지는 것들을
    자각하지 못한 채 남에게 투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반복된다.

    세상에 난무하는 험담과 비난으로 다시 돌아와보자.
    인간이 그렇게 ‘투사’라는 걸 하는 존재라면,
    내 눈에 자꾸 보이는 짜증나는 무언가가
    어쩌면 내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봐야 한다.

    이쯤 오면 이제,
    우리는 짜증이 나고 불쾌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그렇게 혐오하고 최악이라 여기는 그것이,
    그래서 그런 모습만 보이면 짜증이 치미는 나에게,
    그게 실은 투사한 내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다니.
    역시 이론은 현실과 안 맞구나, 돌팔이네 프로이트 XX.

    ㅋㅋ 뭐 이상할 거 없다, 자연스러운 반응이니까.
    그건 그저 당신이 내로남불러가 아니라는 증거다.
    내 것이 아니라 확신하니,
    그걸 가진 누군가를 욕하고 미워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건 내로남불러들과 다르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만 돌팔이인 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MBTI의 심리적 유형 구분의 모태를 확립한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자꾸 누군가가 싫고 거슬린다면 그건 사실 우리가 억압하고 부정하는 우리자신의 면모를 그에게서 보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억압된 인간의 모습을 그림자(Shadow)라고 칭했다.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개성화(individuation)는,
    ‘이 그림자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을
    필수적인 과정으로 한다고 말했다.
    이거 이거, 프로이트고 융이고 돌팔이들이 많았네…

    그들이 돌팔이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보면,
    인간은 자기가 투사한 것들이 자꾸 삶에서 보이는 양상을 띠게 된다.

    내가 날 알아야 하는 이유

    어쩌면 우리의 세계관이,
    우리가 소화하지 못한 감정이 투사되어 윤색된 걸지도 모른다는 성찰을 우리는 해야 한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비판할 때,
    그것이 어쩌면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아, 물론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비판적 사고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비판보다 순응이 개인의 삶을 망치는 시대니까.

    그러나 이 비판과 의심이,
    그저 내 투사로 인해 내가 용인하지 못하는 내모습을 투영해서 보는 건 아닌지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파악해야만,
    그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칼 융이 말한 개성화는,
    우리가 최고의 우리자신을 조각해
    원하는 삶을 공허감 없이 쾌청하게 누리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어다.
    그의 말처럼,
    그러려면 일단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는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본다.

  • 하루 중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세가지

    하루 중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세가지

    하루 중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신중히 골라야 한다.

    아침에 일어난다.
    알람에 습격당해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지만,
    이내 다시 잠들고 싶은 욕구가 날 에워싼다.
    그렇게 다시 잠들고 깨기를 몇번이나 했을까.
    일어나서 어거지로 양치하러 들어가 폰을 본다.
    카톡도 보고, 주식창도 보고, 유튜브도 보고.

    이게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하루의 시작이다.
    절대 안 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해라 말아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원칙은 있다.
    그리고 그 원칙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필요는 있다.

    사실,
    하루 중 무얼 먼저 하는지는
    생각보다 너무 중요해서
    정말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무얼 먼저 하는지는, 잠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잠과 가까운 게 뭐 어쨌다고.
    잠은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의 요체다.
    잠은 위대한 수준의 회복을 이끄는 핵심이자,
    하루의 중심이다.
    이 말은 곧, 잠이 인간 삶의 중심이라는 걸 의미한다.
    잠은 잠든 동안 인간을 회복시키고,
    깨어있는 시간의 전체적인 질을 결정한다.
    (X살법 Lv1과 Lv2의 핵심내용이 바로 이거다.)

    그리고 이러한 놀라운 잠에 가까울수록,
    인간은 훨씬 더 예리하고 깊고 고요한 상태에 머문다.
    무엇을 하든 가장 진정성있게 할 수 있는 상태.
    우리가 삶을 조각하는 데 중심이 될 시간.
    그게 바로 잠에서 깬 후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하루를 조각할 때는 세가지를 먼저 해야 한다.

    자, 그러면 하루를 조각할 때 우리는
    무얼 먼저 해야 하는가.
    지금부터 이야기할 세가지를 기준 삼아
    그 기준에 맞는 일들을 먼저 하면 된다.

    1. 창작하는 활동

    우선 창작하는 활동을 하루 중 가장 먼저 하자.
    인간은 하루종일, 즉 사는 내내
    외부자극에 노출되어 산다.
    그러다보니 무언가를 배우든, 그것에 대응하든,
    아니면 그저 바라보든 늘 외부에 눈이 가있다.
    하지만 창작은 외부로 향한 창을 닫고,
    내 내면을 향해 나의 마음을 쏟아보는 시간이다.
    창의성이란, 내 안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예술성이란, 내면에 깃든 나만의 보석같은거니까.

    창작은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학습하고 저장하는 일이 아니다.
    내 안의 것을 세상밖으로 꺼내고 인출하는 일이다.

    저장하는 일이 아니라, 인출하는 일을 해야 한다.
    하루 중 가장 먼저.
    인간은 잠들어있을 때 낮동안 받아들인 걸 저장할지 걸러내고,
    장기기억과 연합시켜 재구성하는 일을 한다.
    장기기억을 가장 잘 활성화시킬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잠든 시간이나 그 근처시간이다.

    그러니 외부에 눈을 돌리는 활동은 뒤로 미루고,
    가장 먼저 내면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자.
    저장하는 활동보다 인출하는 활동이
    하루 중 먼저 실천되어야 한다.

    2. 혼자하는 활동

    혼자하는 일을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하는 일보다
    먼저 해야 한다.
    이 또한 하루를 조각할 때 꼭 지켜야할 원칙이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 외부로 향하는 에너지와 정신을
    내면으로 향하게 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에 더해서,
    인간은 타인과 함께일 때 자연스럽게 같이 움직이는 리듬과 속도에 따라가게 된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각자만의 페이스가 있다.
    그 페이스를 유지할 때 인간은 가장 충분한 몰입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인간은 끊임없이 남에게 비춰질 나를 생각한다.
    남을 의식한다는 의미다.
    함께 하면, 이런 일에 지속적으로 에너지가 새어나간다.

    그래서 깊은 몰입을 경험하는 건
    필연적으로 혼자일 때가 된다.
    내면의 예술성을 영감과 직관력을 이용해 발휘해내는 일은
    주로 혼자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하루 중 좀 더 내 에너지가 충분히 충전되어있을 때,
    우리는 더 깊은 몰입이 가능한 활동을 해야 한다.
    그러니 혼자하는 활동은 함께하는 활동보다 먼저다.

    3. 자발적으로 하는 활동

    하루를 조각하면서 우리가 하는 활동들은,
    해야 해서 하는 의무들도 포함하기 마련이다.
    학생이 학교에 가고 직장인이 회사에 가는 건,
    어쩔 수 없이 해야 해서 하는 의무일 뿐이다.
    반면, 우리가 누가 시키지 않고 대가를 받지 않아도
    시간만 나면 그저 좋아서 하는 일들이 있다.
    삶에 의미있다 여겨져서 기꺼이 하는 일들이 있다.

    자발적으로 하는 활동을 하루 중 먼저 해야 한다.
    자발적으로 하는 활동들은 내 삶에 의미있는 일들이다.
    만약 그 자발적인 활동들이 너무 자기파괴적이면 어떡하냐,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 글에선 그건 다루지 않는다.
    충분한 고민과 레벨업을 거칠수록,
    자발적으로 하는 모든 일들은 내 삶에 깊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가장 직관이 날카롭고 영감이 넘칠 때
    그러한 일들을 해야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의무 상 해야 하는 일들은 미루자.

    사실 이건,
    일종의 시간영토전쟁 게릴라 전술의 방침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갈텐데,
    간단히만 설명하면
    인간은 자신의 시간을 두고 타인들과 경쟁한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고,
    나는 이걸 ‘시간영토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일을 우리의 에너지가 넘치는 시간에 두고
    밀도있게 그 시간을 충실히 보낸다.
    그리고 남을 위해 무언가를 의무적으로 하는 일들은
    좀 더 우리가 덜 예리한 시간에 배치하는 방식을 취한다.
    (X살법 Lv10에서 자세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가장 직관이 날카로울 때
    우리 자신에게 더 의미있는 걸 하자는 뜻이다.
    학생이 학교 수업시간에 가장 충만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건,
    학교와 세상 입장에선 흐뭇한 일이지만
    그 학생에겐 전혀 흐뭇할 일이 아니다.
    인간은 철저하게 자신이 스스로 자율적으로 선택한 일을
    가장 에너지 넘치고 생기넘치는 시간에 해야 한다.

    그러니 자발적인 활동을 하루 중 가장 먼저 해라.

  • 차단이 필요한 시대

    차단이 필요한 시대

    아무리 생각해도 차단이 필요한 시대다.

    은둔 청년이 5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대서특필하고, 전문가들이 앞다투어 걱정을 한다.

    인간이 친구없이 외롭게 지내면,
    빨리 늙고 빨리 병들고 우울하고 뭐 그렇단다.
    무수히 많은 논문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리 생각해도 차단이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늘 불안에 떠는 삶

    어떤가.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00이는 나중에 커서 어떤 삶을 살고 싶어요?”
    라고 물었을 때 그리 답했던가.
    “저는 나중에 커서 불안에 떠는 삶을 살고 싶어요!”

    아침에 오늘 하루가 설레서 가슴이 뛰는 눈빛을 한 사람을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기억이 나는가.
    가슴 뛰는 일은 이제 없다.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감우성이 괜히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출근길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는,
    세상 모두가 이미 조금 지치고 피곤하다.
    약이 든 주사라도 맞듯이
    허겁지겁 유튜브나 게임을 먹어치우지만,
    그런다고 삶에 깊게 밴 공허함이 숨겨지진 않는다.

    사무실에 앉은 번듯한 직장인도,
    미래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취준생도,
    은퇴하고 노후를 그리는 중년들도,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어린 아이들도,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들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도,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나는 아이들도,
    왠지 모르게 지친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 여자주인공이 말한다.
    이유도 잘 모르겠는데, 왜이리 답답하고 힘든지 모르겠다고.
    … 불안해서 그렇다.

    인간은 소외되고 혼자 버려지는 걸 두려워한다.

    무엇이 그리 불안하고 두려울까.
    명백하다.
    그건 바로, 사람들에게서 내가 소외되어 버려지는 것.
    나만 혼자 덩그러니 고독사하게 될까봐 두려운거다.
    그러니 늘 불안하다.
    남들의 눈에 들어야 한다.
    최소한 밉보이지 않아야 한다.
    저사람이 날 싫어하거나 탐탁치 않게 생각하면 어쩌지.
    뒤에서 날 욕하고 비웃으며 조롱하면 어쩌지.
    사람들과 날 모함하고 비난하며 손가락질하면 어쩌지.

    내 상사가 내가 부적응자라는듯이 나무라면,
    그 불안은 커다란 천둥번개가 되어 날 내리찍는다.
    친구들이 입을 모아 날 비난하고 욕하면,
    난 누구에게도 수용받지 못하는 별종이 된 것 같다.
    동료들이, 가족들이, 선생님이 날 손가락질하면대체
    난 정말 그들의 말처럼 쓸모없는 짐덩어리가 아닌가 싶다.

    그러면 그들은 날 거부하고 쳐내고 내다버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게 너무 두렵고 걱정된다.

    그러니 여전히 그렇게 이용당할 수밖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남들의 시선에 매달리지만,
    이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를 꼽는다면 단연 우리나라다.
    그리고 여기서 나고자란 우리는,
    지구별에서도 유독 더 불안에 떨고 남눈치를 본다.
    남들에게 찍히고 거부당하고 버림받을까봐.
    그렇게 혼자가 될까봐.

    그리고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적당히 똑똑하고 악랄한 수많은 사람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당신의 그 불안함을 이용한다.
    그러니 인간은, 늘 이용당할 수밖에 없다.

    자유로워지면 고통은 사라진다.

    그럼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뭘 어쩌긴.
    내가 글 맨 앞에 써놨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차단이 필요한 시대다.

    아니, 가뜩이나 혼자 소외되고 차단당할까봐
    이렇게 고통받는데 차단을 해라니.

    그러니 차단해야 하는거다.
    50만명이 은둔하는 시대라고?
    그 청년들이 왜 은둔하는거라고 생각하는건가.
    말도 안 되는 인구가 취직해서 사회활동을 시작하지 않는다고?
    왜 그런다고 생각하는가.
    늘 남눈치를 보고 남들에게 비웃음 사는 XX같은 사람으로 비쳐질까봐
    일상이 항상 불안하고 전전긍긍하다고?
    왜 당신이 그걸 불안해한다고 생각하는가.
    혼자 버려질까봐? 소외될까봐?
    왜 혼자가 되면 그리 낭떠러지 바닥끝으로 추락할거라 생각하는가.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정말 많은 걸 이야기해야하지만,
    한마디로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고통받는 건, 자유롭지 못해서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자유로워지면 자연스레 저 고통들은 사라진다.

    자유는, 혼자여도 괜찮아야 내게 온다.

    자유로워지려면,
    가장 먼저 우리가 혼자여도 괜찮아야 한다는 걸 이해해야만 한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람들이 죄다 그러겠노라 할 때,
    시큰둥한 표정으로 난 안 그럴래,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아니, 그러면 큰일난다고?
    학교에서, 집에서, 친구들이, 사회가, 직장에서
    당신에게 그렇게 가르친거겠지.

    … XX,
    큰 일 안 난다.
    이게 큰 일 안 난다는 것에 대해
    혼자 오랜시간 고민하다가
    ‘진짜 그렇구나’ 라고 이해한 것만으로
    끔찍한 심리적 고통들이 다 사라졌다는 내담자도 있었다.

    책에도 써두었지만,
    우리는 진즉에 혼자여도 괜찮았다.
    속은거다.
    혼자가 되면, 진짜 당신 인생은 나락이라고.
    끝장이라고.
    진짜 큰일 난거라고.

    혼자여도 괜찮다. 미안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차단이 필요한 시대다.
    쇼펜하우어 말처럼,
    관계는 최소한으로 남겨야 오히려 삶이 고요하고 행복해진다.
    차단해라.
    세상에 당신 혼자만 덩그러니 넘겨놓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도 된다.
    어떻게 시작해나가면 될 지는,
    내가 찬찬히 여기에 계속 써나갈 생각이니 걱정마라.

  • 사소한 일에 자꾸 화가 나는 우리의 비밀

    사소한 일에 자꾸 화가 나는 우리의 비밀

    사소한 일들에 치이는 ‘인간적인’ 우리

    자기자신이 결정한 길을 걷는 사람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자신의 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하고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하는 데 여념이 없는 사람은 조각하는 일에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는 모든 일에 관심이 없다.

    예를 들면, 스팸전화나 연예인 가십거리, 온갖 사람들의 뒷담화, 지하철에서 날 치고 지나가는 취객같은 거 말이다.
    스팸전화에 화를 내는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자기자신의 삶에 몰입해 최고의 나를 그리며 조각하는 삶에 그런 무가치한 것들이 개입될 여유는 없다.
    자꾸 길을 가다 마주치는 도를 아십니까가 머리에 맴돌고 보일 때마다 화가 치민다면,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운전을 하다보면, 정말 위험하게 사고가 날 정도로 과격하게 끼어드는 차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 사실은, 생명에 지장을 주는 큰 사고가 날 수 있었으니 놀라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끼기도 하니 두려움과 놀라움이 확 일어날 뿐, 아니면 그 뿐이다.
    계속 그 운전자가 싫고 분노가 머리와 몸을 맴도는 건, 그 때부터는 상대방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자신의 문제다.

    인간은 애초에 불완전한 존재다.
    경지에 오른 성인이 아닌 이상, 인간은 누구나 연약하고 쉽게 영향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 속의 모든 타인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길 간절히 바란다!
    이를 종합해보면,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일들에 휘청거리고 오락가락하는 건 짐짓 자연스러운 ‘인간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소한 일에 더이상 휘둘리지 않는 비밀

    물론 인간적인 모습이 맞다 ㅋㅋ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삶과 우리자신을 조각하기 위해서는, 그런 류의 인간적인 모습은 뜯어고쳐야 한다.
    적절한 단련을 통해, 우리는 누구나 충분히 일상 속 외부자극의 노예가 되어 사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로, 운전을 하다가 옆차가 끼어들 때 화가 주체못할 정도로 치미는 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문제이고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인간의 유약함을 보여주는 한가지 간단한 이야기를 해보자.
    하얀코끼리를 지금부터 절대 생각하지 말라고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
    학생들은 하얀코끼리를 절대 마음 속 한 켠에서 1초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모든 학생들의 머릿 속에서 하얀코끼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이건 심리학 실험이기도 하지만, 불교적인 화두이기도, 철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국대에서 스님 출신(?!)의 교수님에게 명상지도자과정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거의 제일 먼저 배운 것은, 명상할 때 수련자들이 잡념이 떠올라 힘들어하면 잡념을 떨치려는 행동을 하지않도록 가이드해주라는 것이었다.
    명상을 수련하는 고승들은 이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명상을 할 때 잡념이 떠오르면 그 잡념을 이제 안 떠올려야지, 하고 아무리 아득바득 용을 써봤자 그 잡념은 계속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잡념이 떠오르는구나, 하고 다시 되돌아가면 된다.

    가령, 호흡 명상 중이었다면(가장 먼저 배우는 게 대개 호흡명상이다.) 의식을 호흡에 다시 가져간다.
    그저 그러고 있다보면 찬찬히 잡념은 사라진다.
    하얀코끼리를 떠올리지 않는 방법은, 하얀코끼리를 절대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는 게 아니다.
    애초에 집중하던 것으로 다시 마음을 가져오면 그게 최선의 방책인 것이다.
    이건 내 의견이 아니라, 오랜 시간 선수행을 유지해온 고승들의 이야기다.
    (물론 내 경험 상으로도 효과적인 건 확실하다.)

    비밀을 알아도 우리가 사소한 일에 여전히 치이며 사는 근본적인 이유

    자, 이제 다시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오자.
    자꾸 옆차가 운전 중에 위험하게 끼어들고 스팸전화를 중요한 전화인 줄 알고 회의 중에 나와서 받고 이러면 그 누구라도 마구 화가 난다.
    하지만 이 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원래 내 마음이 향하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면 충분히 그런 사소한 자극들에 휘둘리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저 그런 내 하루를 조각하는 데 무의미한 것들은 ‘읭?’하고서 다시 돌아오면 되는 거니까, 쉽네?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단 우리의 과거를 한 번 잘 돌이켜보자.
    내 인생에 전혀 중요치도 않고 의미도 없는 일상 속 많은 자극들에, 우리가 가볍게 힐끗하고 다시 평온한 상태로 돌아와지던가.
    그렇지 않다.
    쉽지 않다, 정도가 아니라, 매우 어렵다.
    어지간해선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시 돌아올 곳이 없기 때문이다.
    명상에서 수련하는 스님들이 그러하듯이, 호흡에 의식을 두다가 잡념에 휘말리면 다시 알아차리고 호흡으로 의식이 돌아오도록 하는 일이 안 된다고.

    애초에 마음을 둘 곳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인생에서 내 영혼과 시간을 쏟아부을만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부터 우리의 삶이 외부의 자극과 타인의 기대, 역할에 대한 의무감, 두려움, 보상 등으로 외부에 의해 짜여진대로 흘러왔다면?
    혹시 그런 삶을 사는 누군가가 세상에 만약 존재한다면, 그에게 돌아올 곳은 없다.
    근데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우리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99.9%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처음부터 외부의 자극에 의해 벌어진 상황을 따라 흘러온 삶인데, 사소하다고 해서 외부자극에 의해 발생한 상황에 의해 요동치지 않을 재간은 없다.
    살던대로 살게 되는거다.
    나를 건드리는 모든 자극에 신경초처럼 잔뜩 움츠리며 신경곤두세우는 걸 반복하면서.

    결국 우리가 운전할 때 옆차가 끼어들 때 화가 잔뜩 나서 운전 내내 감정이 요동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자신이 결정한 길을 걷는 삶을 살고 있지 않아서다.
    명상과 매한가지다.
    하얀코끼리를 머리에서 지우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애초에 내가 발디디고 서서 걸어갈 나만의 인생이 필요하다.
    내가 결정한 내 삶의 여정이, 최고의 나를 조각하기 위한 나만의 도전과 과제가 필요하다.
    이게 바로, 우리가 ‘돌아올 곳’이다.
    무의미하고 사소한 수백가지 자극이 우리를 건드려도 힐끗 쳐다보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올 때 그 돌아올 곳 말이다.

    돌아올 곳이 없고 애초에 마음을 쏟고 있는 나의 삶이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온갖 사소한 일들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인데.
    그래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우리자신이 지니는 삶의 의미와 내면의 잠재력, 가능성, 우리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이 무르익을수록, 점점 더 완벽하게 자유로운 일상을 살게 될 테니까.

  • 공허함의 비밀

    공허함의 비밀

    우리 모두는 공허하다

    공허하다.
    아침부터 기를 쓰고 잠을 떨쳐내고 무거운 어깨를 끌고 학교에 가는 학생들도, 회사에 가는 직장인들도, 아이를 챙겨 학교 보내는 부모도, 이젠 침침해져버린 눈을 애써 비비며 많이도 흘러가버린 내 일생을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상에는 공허함이 깃들어있다.

    나와 사랑하는 내 가족의 건강문제, 생계문제, 안전하게 노후를 보내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해결해야 하는 금전적인 안전망 확보의 문제, 사람들과의 관계문제, 가끔 발생하는 타인과의 갈등, 온갖 문제들이 산재해 우리는 쉴틈없이 바쁘다.
    그리고 그 분주한 일상 속에서 잠시 스스로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는 순간들이 한번씩 찾아온다.
    ‘뭘 위해 이렇게 열심히 바삐 지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무얼 위해 어떨 때는 참고, 버티고 숨기고 애써 힘내며 숨가쁘게 해보려는거지?’

    공허감이 밀려온다.
    태어나기로 내가 결정하지는 않았던 삶, 무얼 위한 삶을 살아볼 지 고민하고 생각할 틈이 없었던 우리 모두는 사실 공허하다.
    스스로 방향을 결정하지 못한 채, 해류에 휩쓸려 지금까지 떠내려왔기 때문이다.
    그 여정이 길었든 짧았든 해류의 방향이 남쪽이었든 동쪽이었든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정신없이 우리 모두는 사실 공허하다.

    공허함을 흩날려버리는 방법

    그래서, 내가 발견(발견이라 쓰고 결정이라 읽는다 ㅋㅋ)한 내 삶의 열망은,

    “‘삶에서 공허함을 흩날려버리고 최고의 나를 조각하는 사람들’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발견’하고 나면.
    최고의 나 자신을 조각하는 일이 완벽하게 실현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삶에서 공허함을 걷어낸 상태로 인생을 채워나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는 내 삶이 왜 지금 이어지고 있는지, 내가 무얼 위해 하루하루를 사는지 알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항해는, 즐겁고 가슴 벅차고 설레고 기대되는 모험이다.
    표류하던 과거의 부유와는 전혀 다른 질감의 여정이다.

    그 전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게 있다

    하지만 삶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는 절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자유를 속박당하는 상태가 아니라, 끝없이 압박당하고 세뇌당하고 통제당하고 지배당하며 휘둘리는 상태다.
    처음부터 우리는 짜여진 판 위에 세워졌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깨닫고 그걸 하나씩 극복해나가는 일, 신체적 정신적 자유를 조금씩 되찾아가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를 조종하고 지배하는 수많은 압력과 위협을 다 이겨내고 온전히 자유로워지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무얼 원하는지, 우리 내면에 깃들어있던 숨겨진 잠재력과 예술성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것을 발견하고 나서 삶의 방향을 스스로 발견하고 나면, 그 때부터는 비로소 공허감이 삶에서 사라진다.
    당장에 우리가 열렬히 바라는 무언가가 삶에 실현되어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의 삶에서 공허감은 사라진 상태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러한 수준까지 스스로를 조각해낸 사람들과 공허하지 않은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함께 웃고 놀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을 같은 걸 만드는 일이다.)

    공허함의 비밀

    공허함은, 막연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분명 해소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한다.
    물론 공허함을 걷어내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 절대 녹록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허감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누구나 삶에서 걷어낼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
    그리고 최고의 우리자신이 조각되지 않더라도,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몰입하는 순간부터 이미 삶에서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것.

    건투를 빈다.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