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하지 마라

샤먼킹

예전에 샤먼킹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타케이 히로유키 작가의 대표작으로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만화였다.
샤먼들이 등장해서 서로 전투를 하는 내용인데,
주인공인 아사쿠라 요우가 만화의 어느 지점에선가
한참 성장을 한 후 상대의 공격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열몇살이 채 되지 않던 당시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항상 힘을 막아내고 물리치고 되받아치고 공격하는
전투만화들을 사랑해왔던터라 ㅋㅋ
공격을 해도 죄다 흘려버리는 컨셉에
적잖이 당황하며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런 류의 아이디어들은 사실
다분히 불교적이다.
개인적인 흥미로 동국대에서 명상지도자과정을 들을 때,
대학 시절 불교철학 교양수업을 들었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불교에서는 굳이 저항하고 받아치지 않는다는 걸.
그저 흘려보낸다는 걸.
그들은 그저 알아차리고 오히려 마음을 내려놓은 채
그저 바라보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고요함을 얻고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사실 불교가 아니라도 오랜시간 검증되어온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세계 3대 영적지도자로 꼽히는 에크하르트 톨레도
종교는 없지만 ‘저항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걸 보면.
내 마음에도, 나의 상황에도,
우리는 굳이 저항할 필요가 없다.

순종하란 건 아니다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 순종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당연히 굴종적으로 굴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일에
에너지를 소진하며 우리 삶을 낭비할 이유는 없다.

피로감의 원천

피로감의 원천은,
받아들이기 힘들어서다.
우리가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용납하기 힘들어서다.

그러나 사실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 자체는
그리 피로감이 쌓이는 일이 아니다.
피로한 건,
저항하느라 버티느라 걱정하느라
힘을 쓰고 경계하고 긴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항하고 힘을 겨루는 대신,
그저 흘려보낼 수도 있다.
그저 계곡물이 온갖 바위모퉁이를 부드럽게 지나가듯.
바닷물이 그 어떤 기후변화에도 의연하듯.
우리가 종종 쓰는 표현처럼 ‘물 흐르듯’.

버틸 이유는 없다

우리는 대개 소신과 신념을 위해 ‘버티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굳이 버틸 이유는 없다.
그건 마치,
어린어이가
친척어른이 말을 시킬 때
대화하는 게 갑갑하고 싫어서
어떻게든 입을 꾹 닫고 아무말도 안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거나
가만히 째려보는 것과 비슷한 것인데,
이건 비단 사춘기 꼬마아이들에게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우리는 명절날
공부는 반에서 몇등이나 하냐,
대학 어디 다니냐,
취직 안 하냐,
결혼 안 하냐,
집은 샀냐,
애는 안 낳냐,
와 같은 질문을 친척어르신들이 던질 때
애써 웃어주며
적당히 둘러대곤 하는데,
사실 아이들의 입꾹닫은 이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ㅋㅋ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기서 ‘저항’하는 일은,
심히 무의미한 일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뺏기는 일이다.
물론 웃어넘기며 아무 감정적 소모가 없다면 괜찮지만,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긴 그렇다지만)
묘하게 나의 감정적 고요함에 잔물결이 일어난다 ㅋㅋ

경계를 세우고, 이해해줘라

자, 그럼 이런 숱한 문제들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라는거냐.
일단 인지적으로.
경계를 떠올려라.
우리의 통제영역이 어디까지인지 경계선을 다시 한 번 떠올려라.
그리고 통제영역 바깥이면 이해해줘라 ㅋㅋ

응..?!
뭘 이해해줘.
저 눈치없는 친척이 맨날 나한테
결혼 안하냐, 집장만 안 하냐, 애 안낳냐고 난리인데
내가 뭘 이해해줘 저런 사람을.

ㅋㅋ 아니다, 그래도 이해해줘라.
뭐 그만의 세계와 합당한 이유와 상식과 의무가 있겠지.
사실 우리에겐 그를 이해해주고 말고 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이해해줘라.
어차피 그건 그의 자유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 우리의 통제권을 되찾아오도록 한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든 우리의 자유고
그 누구도 감놔라 배놔라 할 수 없다는 걸
가슴에 콱 새겨라.
그러면 저항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은, 전적으로 우리꺼다.
우리가 판돈을 건 게 아닌데,
우리 돈으로 남과 저항하고 씨름할 이유가 있나.

(만약 여기까지 읽고, 현실은 판돈을 걸고 돈을 따고 잃는 게임이 아니라, 이 돈이 우리꺼지만 우리손에서 돈을 강탈해가려는 무자비한 자들과의 관계인 거 아니냐!! 라고 말한다면,
캬. 당신은 놀라운 통찰력의 소유자다.
당신이 깨달은 그게 바로, 세상이 좀 댕같은 이유다.
자, 이제 다시 하려던 이야기로 돌아가자.)

흘려보내고 반응을 지켜보자

근데 그렇게, 내 반응은 내 꺼라면서 상대방을 고려 안해버리면… 사이가 나빠질텐데 친척들하고?!!

그럼 계속 맞춰주든 저항하든 에너지 쓰며 살면 된다.
하지만 각자의 자유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눈치없는 친척 어르신들이
적어도 상대가 불편한 질문을 설령 본의아니게 던졌더라도
상대가 그에 대해 호의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아 내가 그의 불편함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잽싸게 물러선다.
그가 최소한의 배려심과 사고력을 갖춘 분이라면.

그런데 만약 그가 그렇게도 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이어가야할 관계인자 고민해봐야 한다.

혈연의 저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글을 마치자.
우리는 보통 혈연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혈연만큼 사람들이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게 하는 것도 없다 ㅋㅋ
나의 길지 않은 개인상담 경험 속에는
가족관계 문제로 상처받고 피흘리는 내담자의 비율이
절반이 넘었다.

언젠가 따로 글을 쓰겠지만,
혈연이라는 사실이
반드시 그 사람과 관계를 이어가야하는
신성불가침의 이유가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혈연관계인 사람이
무례하고 저급하고 속물적인 사람으로 당첨되느니,
차라리 가족이 없는 게 나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내 가족을 끔찍하게도 사랑하지만,
그들이 나와 가족이라는 건 그들과 끈끈해질 계기였지
그들과 내가 서로 평생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내 부모가 날 아끼고 보살펴주어 그들과 깊은 관계를 이어가는거지,
그냥 날 낳아줬다고 해서 그런 관계를 이어가는 게 아니란 이야기다.
형제자매도 매한가지다.
사는 내내 서로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고 받았기에 지금 우애가 좋은 것이지,
피가 섞인 게 솔까말 그냥 우연인거지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다만 여기서 우리는 저항하게 된다.
어차피 이 사람은 가족이고 나와 뗄 수 없는 사이니,
이렇게 하지 마라, 저렇게 살지 마라,
최소한 이건 해야지, 하면서.
그럴 필요 없다.
그건 상대의 자유다.
대신 이 관계를 이어갈지도, 내가 어찌 반응할지도
철저하게 나의 자유다.
그냥 내버려두고 흘려보내라.
각자의 자유를 존중하고.
저항하지 말자.

혈연관계야말로, 관계를 끊을 자유가 없어서
우리가 흘려보내지 못하고 저항하게 되는 강력한 관계다.
그런데 생각을 바꿔야 한다.
패륜? 뭔 패륜.
부모가 자식에게,
배우자가 서로,
형자자매가 서로,
그것만 유독 뭐 엄청난 것처럼 잡아놓은 건
그저 사회와 문화에서 그러기로 정한 약속일 뿐이다.
거기에 무슨 엄청난 영혼이 깃든 게 아니라고.

사회구성원이 그런 삼강오륜에 얽매이는 게 좋지.
지배하고 관리하는 입장에서야.
그런데 정작 왕족이었던 킬방원은
형제 다 쳐죽이고도 잘만 왕으로 살았는데,
일개 시민인 우리는 왜 거기에 아직까지 얽매여야 하나.

우리나라 민법이 5개의 ‘편’으로 구성되는데, 그 중 두 개가 친족편, 상속편인 이유가 뭘까.
가족 그게 그리 학교에서 가르치는만큼
영원불변하고 강력한 그런 게 아니다.

마치며

이제 우리는 안다.
저항하는 대신 흘려보내는 일이 퍽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케이스스터디도 했다.
무례하고 눈치 밥말아쳐먹은 친척어른 이야기도,
혈연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경계를 세우고 이해해주라는 이야기도.

이 정도만 알게 되었어도, 필요한 건 다 안 셈이다.
이제 우리는 시도해볼 수 있다.
마음도 몸과 같아서,
갑자기 250kg 스쿼트를 할 수 없듯이
늘 눈치보고 참던 사람이 갑자기 강해지는 건 불가능하다.
일상 속에는 다행히도 우리가 저항해야 할 크고작은 것들이 무수히 많으니,
1kg핑크덤벨부터 무게를 늘려가듯이,
하나씩 저항하는 대신 흘려보내는 일을 연습해보자.

삶이 아주, 쾌청해지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ㅋㅋ
꾸준함이 답이다.
원석을 내리쳐라,
신이 인사를 건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