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이용하고 싶은 자들
타인의 시간(혹은 시간적 자유)을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이용하고 싶어하는 존재는
세상에 수없이 많다.
국가,
사회,
문화,
지역,
회사,
학교,
그 외에도 다양한 무리집단과 모임들.
이들은
해결책을 찾았다.
인간의 자유롭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
‘그냥 누가 시키는대로 했으면’ 하는 마음.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게
실패로 판명날까 전전긍긍하는 두려움.
이걸 이용하는
탁월한 해결책을 발견해낸거다.
모든 집단은 개인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한다
그 집단을 이끄는 자들,
혹은 그 집단 자체는
늘 그 집단에 속하는 개인에게
매혹적인 제안을 한다.
니가 짊어져야했던 책임을,
대신 떠안아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내가 시키는대로 하면
그게 올바른 정답이야.
너 무엇이 올바른지 잘 모르겠잖아 사실.
봐, 니 주위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어.
너만 니멋대로,
정답을 알려주는데도 다른 오답을 선택하려고?
니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조롱거리가 될꺼야.
내가 제시한 대로 하면 돼.
책임은 내가 지는거야.
넌 그냥 내가 시키는대로 한 것밖에 없잖아.
니 부모,
니 친구,
니 동료,
니 주위 사람들 모두 다
올바른 결정을 했어.
너만 따르지 않겠다고?
판단의존의 달콤함
이게 바로
우리가 속한 집단, 조직, 사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판단을
그대로 따르게 되는
‘판단의존’이다.
이 판단의존은
굉장히 아늑하고 편안하다.
나와 같이 여기에 속해있는 사람들
모두가 다같이
그 집단 전체의 판단과
똑같은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하니까,
실패해도 다같이 실패한거고
이 무리 전체가 실패한거지
내가 실패한 게 아니다.
나만 XX인 게 아니라는거다.
내 책임도 아닌거고.
잘못 결정해서 실패할지도 모르는 책임이
나에게 올 위험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는거다.
게다가
내가 더 고민하고
노력하고
스스로를 단련해서
좋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나는
내가 속한 이 무리가 결정한 판단을 따라
그대로 똑같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무리에서 제시한 ‘올바른’ 길을
모두와 함께
걸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너무 든든하지 않나.
이쯤되면,
진짜 ‘개꿀’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올바른 길’의 의미
앞서 말했듯이,
집단은 개인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준다.
여기서 올바르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걸까.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알고 있다.
인간이 타인을 보고 ‘옳다’고 말할 때
그 말의 뜻은
자기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의미다.
내 맘에 든다,
나의 생각, 나의 삶을 지지해준다,
는 의미다.
이 심리적 메커니즘은
집단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냥 지한테 유리하면
그게 선이고
도덕이고
정답이다.
조직, 집단, 무리도
결국 인간이 모여 이룬 것 아닌가.
집단이 구성원에게 제시하는 ‘올바른’ 길은
당연하게도,
‘집단에게 유리하다’,
‘집단을 지지해준다’,
‘집단 입장에서 마음에 든다’,
‘집단을 부정하지 않는다’,
는 의미다.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
얼핏 들으면
결국 집단에게 이용 당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왜 사람들은
여기에 넘어가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스스로 결정해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위험을
너무나도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거에 쐐기를 박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애초에 자기가
삶에서 무얼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지못한
모든 인간은,
뼛 속부터 공허하다.
애초에 내가
어디를 향해 가야하는지 모르는데.
무얼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데.
집단에게 삶을 의탁하는 판단의존은,
그 공허함을 일단 멈춰준다.
원래 자신의 삶이 공허한 자일수록,
이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더이상 방황하고 헤매지 않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얼 좇아야 하는지,
어떤 걸 위해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제시해준다는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인간은
그들이 속한 사회, 집단, 무리에
기꺼이 자신의 자유와 결정권을
헌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