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들이닥치는 고통을 철저히 이용해먹는 세가지 방법

삶은, 불확실하다.

몇 번을 써도
저 말에는 먼지 쌓이지 않는 것 같다.
인생이라는 여행에는,
지도나 내비게이션 같은 것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통신장애가 있어서
결국 언젠가 어디선가 우리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불확실한 결과가 그저 잠시 발목을 삐는 것이라면
그래도 웃음짓고 툭툭 털고 넘어갈만한데.
반드시 그런 가벼운 불확실함만이 우리를 찾아오진 않는다.

가끔은 눈 앞이 하얘지고

코에서 피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아득하게 극심한
고통이나 어려움이 우리를 집어삼키려 달려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인간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과연 그게 선택인지, 사실은 아직도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일에 ‘선택’이라는 단어를 쓰는 걸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극단적인 고통이 휘몰아치고 내 살점을 도려낸다고 느낄 때
인간은 철저히 무너지거나, 철저히 강인해진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중간지대라는 건 없다.
마치 내가 가진 전재산과 내 팔한짝을 판돈으로 건 도박사처럼,
삶에 미친듯이 들이닥친 극단적인 고통과 시련은
인간을 갈림길 앞에서 선택하게 만든다.

결국, 인간은 이 선택의 기로에서 둘로 나뉘어버린다.

어디서 그 차이는 오는 것일까

왜 비슷한 극도로 고통스러운 상처를 통해
누군가는 철저히 무너지고 누군가는 철저히 다시 태어나는가.
말도 안 되는 무게와 속도의 파괴로 인해
모든 것이 다 와르르 무너져 내려버린 후에
왜 어떤 인간은 다시 뼈와 살을 채워 재탄생하고,
어떤 인간은 마치 한 줌의 재가 된 것처럼 무너진 채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되는가.

나는 격투기를 즐겨본다.
UFC 헤비급 챔피언 다니엘 코미어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 중 한 명이지만,
그는 어린시절 심하게 학교폭력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극심한 고통과 상처를 통해
왜 누군가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되기도 하는가.
거의 모든 사람에겐 영원한 후유증이 남지 않기도 버거운 일일텐데.
어떻게 누군가는 그 트라우마를 통해 더욱 강인한 존재가 되는걸까.

모든 인간이 그럴 수 있다면 우리 각자의 삶은
어쩌면 니체의 말처럼 시련과 역경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고고한 존재가 기꺼이 되려고 할 지도 모를 일일텐데.

내가 변하겠다는 위대한 결단을 내리는 일

삶이라는 게 자기가 불확실하다는 핑계로
이유도 없이 우리를 공격하고 찢어갈기려 들면,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에 피와 멍이 가득해지면,
인간은 생각한다.

분하고 억울하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늘을 믿는다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난 잘못한 게 없는데, 난 늘 좋은 마음을 가지고 노력했는데.

이런 마음이 나의 낮과 밤을 가득 채우고
하염없이 짜내고 짜내도 멎지 않는 눈물을 만드는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일으켜세워 변하겠다 다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결코 내가 변하겠다는 결심을
차마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는 결국에 우리 스스로가 변하는 길을 택해야만 한다.
야속하고 분통이 터지지만, 그래야만 한다.
삶을 변화시키고 나와 내 소중한 이를 지키는 존재로
나를 새롭게 조각해나가고 싶다면 반드시.

학우에게 심하게 폭력을 당하던 코미어가 지구 최강이 된 데는
이게 분명 어렵고 두렵지만 그가 해낸 첫번째 걸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

미 하원의원이자 작가였던 레스 브라운은,
자신이 살면서 가장 쉬웠던 일이 백만달러를 버는 일이었다고 했다.
반면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이 백만달러를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게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극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에 빠지면,
우리는 도저히 이 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다는 강렬한 확신에
사로잡히게 된다.
도무지 이 절망스러운 곳에서는
신이 나였더라도 결코 힘을 내지 못했으리라는 강한 확신이
우리의 마음을 새카맣게 물들인다.

태어날 때부터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야 했던 헬렌 켈러는
완전한 동물의 상태인 갓난아기때부터 그런 지경이었다.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희망과 가능성이 있었을까.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나에게는,
참으로 다행히도 그런 정도까지의 불행이나 시련이
닥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을거라 짐작되지만.
각자의 고통은 각자에게만 그 명료한 무게가 드러나는 법이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고통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반드시 지녀야 하는 생명줄은,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틈새를 인정하는 일이다.
둑이 터져나올 수 있도록, 아주 작은 구멍이 생길만한 균열이
생길 수 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모든 기적은,
그 아주 작은 틈새와 균열에서 시작되니까.
하지만 그 아주 작은 먼지한톨도 안 되어보이는 가능성은,
우리가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열리지 않는다.

그저 내리쳐야 한다. 당장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내가 가슴에 담고 사는 나의 한마디는,
‘내리치라는 말’이다.
내리쳐야 한다.
그렇게 세심하게 잘 조준해서, 많은 걸 생각해가며 내리칠 필요 없다.
우리에겐 그런 게 필요한 게 아니다.
그냥, 그저 내리치는 일이다.
그저 팔과 몸에 힘을 주고, 그냥 내리쳐라.
원석을 내리치다 보면, 언젠가 그 안에 깃들어있던 신이
조금씩 우리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때가 올 것이다.

절대 금방 그리 되진 않는다.
우리는 그저, 그 경쾌한 소리와
내 손가락과 팔과 어깨를 타고 온 몸으로 전해지는
약간은 아프지만 약간은 시원한 타격감을
가끔은 흥미롭게, 가끔은 포근하게 느끼며.
그저 힘이 닿는 데까지 내리치고 또 내리치는 일이다.

그것만이,
우리의 조각이 완성되도록 해줄 수 있다.
꾸준히, 늘, 한결같이 내리치면
결국 그 투박하고 거친 돌땡이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던 신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꾸준히 오래 내리칠 수 있다면, 분명 벌어질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다.
그렇다면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