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는
정신분석학이나 대상관계이론 등의 책에서
참 많이 나오는 개념이다.
하지만 그 의미가 불명확하다.
내가 상담심리대학원에서 듣던 수업들마다,
심지어 똑같은 대상관계이론에 대한 수업들 간에도,
쓰는 교재에 따라 투사적 동일시의 개념은 조금씩 달랐다.
시험기간마다 사람들 각자 이해한 정의가 조금씩 다 달랐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책, 저 책 다르고 이 수업, 저 수업 다르다는건
충분하게 합의된 명료한 정의가 아직 정립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의미겠으나,
그럼에도 늘 기준이라는 건 필요하니
그것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해보고 넘어가려고 한다.
투사란 무엇인가.
투사(Projection)란,
도저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 감정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나의 감정이라 인정하기 어려운 걸
타인에게 던지고,
그 감정이 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짐작되겠지만,
이건 자각되지 않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다.
동일시, 투사적 동일시란 무엇인가.
동일시(Identification)란,
외부대상의 일부를 나의 내면으로 가져와 내 것으로 여기는 행위를 의미한다.
방어기제의 한 종류이자, 내면화의 한 형태다.
자연스럽게 투사적 동일시란,
위의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감정을 상대방에게 투사하고,
다시 그 투사된 감정이나 그를 느끼는 상대방을
동일시하는 방어기제다.
투사적 동일시 개념은 사실 좀 혼란스럽다.
이제 여기서 공부하는 입장에서도,
그냥 교양으로 책을 보거나 강연을 듣는 입장에서도,
혼동이 오기 시작한다.
투사는 사실 헷갈릴 부분이 없다.
원래 투사의 의미와 다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동일시는 다르다.
동일시는 내면화의 세가지 분류 중
가장 성숙하고 건강한 방어기제로 꼽힌다.
본받을만하거나 중요한 대상의 긍정적인 특성을
자신의 내면이나 정체성의 일부로 가져오는 걸
동일시라고 설명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투사적 동일시는,
그리 성숙한 방어기제로 평가되지도 않고,
긍정적인 것으로 설명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 동일시가 헷갈린다.
뭘 동일시한다는 말인가.
책마다, 사례마다 다 다르다.
투사적 동일시에서 동일시의 첫번째 의미
투사적 동일시에서의 ‘동일시’는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번째 의미를 살펴보면,
투사적 동일시에서의 동일시는
감정을 투사하는 나(이하 ‘투사자’)의 감정을
투사받은 상대방(이하 ‘피투사자’)이
투사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동일시를 말한다.
즉, 피투사자가 투사자 때문에 느끼는 투사된 감정을
투사자가 다시 내 것으로 동일시한다는 의미다.
이쯤되면 더 헷갈린다.
투사자라는 놈은, 도대체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가.
그냥 지 감정인데 지가 느끼면 되지.
이런 욕이 절로 나올 수도 있다.
이건 좀 이따 이야기해보고 일단 개념만 짚고 넘어가자.
동일시의 두번째 의미
동일시의 두번째 의미는,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걸 의미한다.
즉,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이 내 것이라고 여기고
경험하게 되는 내사(Introjection)와 유사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투사적 동일시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아무래도 첫번째 의미가 좀 더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투사적 동일시에서의 동일시는
이 피투사자의 내사를 ‘동일시’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므로 이 단어가 가지는 두번째 의미도
정확하게 이해해두는 것이 도움이 된다.
러프하게 정리하면,
부차적 의미라 볼 수 있는 두번째 의미는,
피투사자의 ‘내사(Introjection)’다.
투사적 동일시에서 ‘통제’의 의미
대상관계이론이나 정신분석 전문서적들을 보면,
투사적 동일시와 관련해서 이런 표현들이 나온다.
” ~ 투사한 후 그 감정을 통제하려 한다.”
” ~ 간접적으로 관리하려 한다.”
” ~ 조종하려 한다.”
뭐 이런 뉘앙스들의 표현들이 서술된다.
아니, 동일시면 동일시지 뭘 통제하고 조종한다는거야.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 ‘통제’에 대한 의미도 크게 두가지로 이해하면 된다.
첫번째 의미.
투사자가 감정을 투사한 후
그 감정을 느끼는 피투사자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정확히는, 투사된 감정에 대한 피투사자의 반응을
통제하려는 시도다.
이는 자기가 도저히 처리하지 못해서 뱉어버린 그 감정을
피투사자를 통해서라도 처리해내보려는 시도다.
두번째 의미.
투사자가 견디지 못하고 투사해버린 감정 그 자체를 피투사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통제하려는 시도다.
즉, 첫번째 의미는 피투사자의 감정에 대한 반응이,
두번째 의미는 투사한 감정 그 자체가,
‘통제의 대상’이 된다.
이걸 좀 구분해서 이해하고 있으면,
여러 서적에서 나오는 관리, 통제, 다루는 일, 을
이해하며 읽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첫번째든, 두번째든, 결국 통제의 취지는 똑같다.
자신이 못견디고 뱉어낸 감정을 타인이라는 완충지대를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통제하고 처리해내고 싶은거다.
간접적으로 다룬다는 개념의 구현
간접적이라는 건,
투사자가 직접이 아니라 피투사자를 통한다는 걸
의미하는 표현이다.
그러면 간접적으로 ‘다룬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구현되는가.
여러 서적의 여러 사례들을 보면,
대강 훑어도 딱 드는 생각이 일관성이 없다는거다.
나는 특히 초창기에 여러 책들을 보며
너무 ‘막 갖다붙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ㅋㅋ
물론 모르고 그리 함부로 생각했던 것도 있고,
꽤 공부하고 나서도 그런 느낌을 완전히 지울 순 없으나… ㅋㅋ
간접적으로 다루고 관리한다, 통제한다, 처리한다.
이런 류의 표현들은 두가지 형태로 삶에서 구현된다.
즉, 사례에서 두가지 양상으로 드러난다는 의미다.
첫번째 양상은,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을 경험하고 알아서 처리하는 모습을,
투사자는 그저 지켜본다.
이것만으로도 투사자는 어느 정도 자신이 그 감정을 간접적으로긴 하지만 처리하고 소화해낸다고 느낀다.
이게 바로 위에서 말한,
‘도대체 왜 이런 번잡한 짓을 하는지’에 대한 첫번째 대답이다.
애초에 투사자는 이 감정이 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조차 할 수 없지 않았나.
그에 비하면 단지 지켜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름 장족의 발전 아닌가.
두번째 양상은,
피투사자가 투사된 감정에 특정 행동이나 특정 반응으로 대응하도록
투사자가 피투사자를 유도하거나 조종함으로써,
자신이 못견디고 뱉어버린 그 감정을 ‘제대로 한 번’ 통제하고 처리해본다는 식.
이건 첫번째 양상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느낌이다.
대학원 교재에서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
자, 여기까지면 이제 투사적 동일시를 이해할 때,
혹은 관련 전문서적들을 볼 때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부족함이 없다는 건,
적힌 걸 이해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안 적혀있으나 궁금한 걸 해결하는 건 각자의 몫이다.
궁금하지 않나.
자기가 감당 못해서 그 감정을 남에게 던졌는데,
어떻게든 다시 처리하려는 예상밖의 용감함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분명 투사자는,
자신이 기대한 방향으로
피투사자가 그 감정에 반응하거나 행동하도록 하려는
무의식적인 동기를 가진다.
그렇다면 이 무의식적인 동기는 어디서 오는가.
그건 미해결된 감정이나 과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장기적으로 인간의 생존에 유리하다는 사실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지금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는,
무조건 어렵고 실패한 것들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오랜 진화과정에서 인간은
내가 아무리 도망쳐도 다시 마주해야 하는
여러 가지 미해결된 과제들에 죽임을 당해왔을 것이다.
삶은 다분히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인간은 실패한 과제로부터 어떻게든 도망가려는 동시에
미해결된 감정이나 문제에 다시 달려들어
제대로 통제하고 해결해보려는 타고난 성향을 지닌다.
그래서 내가 미처 어쩌지 못하고 타인에게 투사한 감정도
그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통제하고 처리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당신의 쿨한 팀장이 자꾸 서성이는 이유
자.
이렇게만 말하고 끝나면 기억에 오래 남지 않을 수 있으니,
흔히 일어나는 직장에서의 상황으로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지금 회사 A팀의 팀원이다.
팀에 사장에게 직접 보고해야 하는 중요 업무가 떨어졌다.
팀장은 평소에도 쿨한 성격의 소유자다.
사장보고 사안이 떨어지자,
팀장은 팀원인 나에게 와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좀 급한 일이긴 하나 뭐 별 거 아니니까,
그냥 우린 하라는대로 해서 보고하면되니,
괜히 긴장할 거 없단다.
묘하게 좀 상기된듯한 느낌도 언뜻언뜻 보이지만,
아무튼 마음 편하게 가지라니 마음 편하게 가지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근데 내가 보고서 쓰는데 자꾸 뒤에서,
팀장이 서성거리며 왔다갔다 한다.
초안을 보여줬더니 단어 하나를 두고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계속 고민을 거듭한다.
보고서가 20장인데.
보고를 언제까지는 해야 될 거 같다며,
자꾸 데드라인을 언급하며 얼마나 작성됐는지 확인한다.
뭘까.
팀장은 속으로 초조하지만 겉으로 아닌 척 한걸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닌 경우도 허다하게 많다.
팀장은 사실 진심으로 초조하고 불안하다.
사장 보고인데 갑작스럽게 생겨서 미처 준비도 못해서
걱정이 되고 보고갈 생각만 해도 두렵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나는 평소에도 팀원들이 담력도 쎄고 남자다워서
멋있다고, 나도 본받고 싶다고 칭송받는 담대한 팀장이다.
그런 내가 이런 급작스런 보고 하나로 덜덜 떨다니.
내가 초짜도 아니고 회사생활 20년의 베테랑인데.
그래서 자신의 속마음,
즉 불안함과 초조함, 두려움 따위의 감정들을
남에게 투사한다.
보고서를 작성 중인 담당팀원에게.
즉, 나에게 투사하는거다. 팀장이 자신의 감정을.
당신은 팀장이 자꾸 괜찮다 괜찮다 다독이고
너무 쫄지 마라 그러고, 떨지 말라 그러니까.
원래는 별 생각없다가 점점 초조해진다.
울지 마라 다독이니 더 눈물날 거 같은 아이가 된 기분이다.
여기서 지금 팀장은
자신이 소화하지 못하는 자기 불안을 팀원인 나에게 던진 뒤
내가 그 감정을 내것으로 여기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팀장은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그 불안함에
반응하는 당신의 대응이나 행동을 통제하려고 한다.
‘그 불안함에 너무 휩쓸리지마.
너무 그 감정에 압도되지 마.
별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팀장은 팀원인 나를 통해
자신이 못견디고 내게 투사한 감정을 간접적으로라도
통제하고 처리하려고 한다.
물론 팀장은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채 은연 중에 이런 식의 행동을 보이는거지 의도를 갖고 그러는 건 아니다.
자기도 자기가 그러는지 모르고, 왜 그러는지도 모른다.
이게 투사적 동일시가 실제로 구현되는 모습이다.
이런 일은 일상에서 비일비재하다.
투사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만약 눈에 보인다면 무슨 무선 와이파이 기기들이 수백개가 주위에 넘쳐나듯이 아주 장관일거다.
이것이,
우리가 정신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힘을 길러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기 위해서 타인을 은연 중에 이용하려는 존재니까.
이용당하느라 소중한 감정과 시간이 소진되면 안 되지 않나.
(이에 관한 레벨업은, X살법 Lv15를 통해 시작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