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일랜드’를 보면, 인류는 환경오염으로 지금 우리처럼 지구에서 흙을 밟고 살지 못한다.
인류가 과학기술로 외부환경과 격리시킨 인공공간 안에서 모든 신체컨디션과 성장, 질병 등을 완벽하게 모니터링하고 체크하는 최첨단 기술환경 하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오염되지 않은 천상의 섬 ‘아일랜드’가 존재한다.
인공공간이 아닌 옛 선조들처럼 자연에 존재하는 청정구역인 그 곳에 가서 살기를 누구나 소망한다.
복권당첨을 해서 당첨이 되면, 그 사람은 그 천상의 섬, 자연에 남은 마지막 유토피아라고도 할 수 있는 아일랜드에 가서 살 수 있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스포다.(읽기 싫으면 이문단 패스.)
사실 이들에게 알려준 세계관은 가짜다.
사람들은 자신과 완벽하게 똑같은 복제인간을 배양해 기를만큼 기술이 발전했고, 자신의 복제인간을 가짜 세계관 하에 그 인공공간에서 살게 하며 관리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사고가 나거나 질병에 걸려서 장기를 대체해야 하거나 노화 등으로 필요해지면 그 복제인간을 복권당첨시켜서 가져다 부품재료로 쓰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어머 미래에는 저런 잔혹한 세상이 올까?’ 라고 생각한다면 약간의 오해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애당초 과거에도 지금도 세상은 똑같았다.
저 영화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유일한 차이는, 기술이 아직 그만큼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사회와 문화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나 똑같았고 똑같을 것이다.
내가 ‘X같은 세상’이라고 (집필 중인) 책제목에 상스러운 단어를 넣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은 잘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몇살이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삶의 결정적 순간이나 큰 변화가 찾아오는 어떤 상황에서 진실은 드러난다.
내가 나의 진실을 처음 목도한 건 30대가 되고나서였다.
그 전의 나는 다행히도 운이 좋았고 진실을 경험할 일이 없었다.
없었다기보다는,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아둔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직장생활을 하던 나는, 아빠가 쓰러지신 다음날 회사에 있는 팀장에게 아마 관둘거 같다고 사직을 예고했다.
아빠랑 같은 나이였던 팀장은, 내게 아빠 입장에서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회사에 계속 남았고, 아빠가 투병으로 접어드는 그 힘겨운 순간에 그의 곁에 있지 못했다.
일하는 주중에는 근무지역에 있고, 주말마다 고향에 내려갔다.
매주말을 내려가길 몇달이 지나자 아빠는 버럭 화를 냈다.
내 생활이 그렇게 자신을 병문안 오고 안타까워하는 걸로 가득 채워지는 게 미안하고 슬펐던 모양이다.
자, 여기서 문제는 무엇일까.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일까.
내가 계속 생계를 유지하는 한, 신체적 자유가 없다는 데 있다.
내가 내 몸뚱아리를 쓰러져버린 아빠 곁에 두고 있을 자유가 없다는 데 있다.
그 자유를 다시 얻으려면, 나는 내 생계를 포기해야 하고 결국 내 생계는 내 스스로 유지하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지워야만 한다.
애초부터 인간이 자신의 몸뚱아리를 자신이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둘 수 있는 ‘신체적 자유’는 아주 극소수에게만 주어져온 특권이다.
그리고 그 불편하지만 다같이 외면해온 그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삶의 국면들이 존재한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내 부모나 아이가 아픈 그 누구에게라도 가서 물어봐라.
그들은 병원비를 내고 내 생계와 투병중인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미어지는 마음을 안고 일터로 나간다.
요양병원에서 일어나는 간병인들의 경악을 금치못할 비인간적인 행동들이 가끔 뉴스에 나온다.
어린이집 보육원에서 애들이 시끄러우니 낮잠시간에 재우려고 수면제를 야쿠르트에 타고 CCTV가 있는데도 애를 때리고 상처내는 일은 모두가 언론보도를 통해 목격한 현실이다.
이 상황이 닥쳤을 때, 그 부모의 자식이나 그 아이들의 부모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시간을 팔아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99.99%의 사람들은 전부 저 상황에서 신체적 자유가 없다는 걸 절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외롭게 시간을 보내도, 마음처럼 곁에 있어주지 못한다.
신체적 자유가 제한당한 채 살아가니까.
사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즉, 가족이 아픈 상황이 아니라 당장 우리가 아파도 직장에서 내 건강을 위해 눈치 안 보고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기도 어렵다.
수술비도 감당이 쉽지 않거니와, 시간을 직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치료를 위해 쓰는 걸 직장은 좋아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건, 같은 처지인 직장동료들도 눈치를 준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선 다음에 써보자.)
이게 영화와 그리 다른 상황일까 과연.
영화 ‘아일랜드’가 그렇게나 미래에 대한 상상이고 그저 흥미로운 상상일까.
다시 말하지만, 영화 속 상황과 지금 우리 상황의 유일한 차이는 기술진보수준 밖에 없다.
‘개연성이 높은’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23년 12월, 미국에서는 리프제니아라는 약이 승인되었다.
이 약제는 유전자치료제인데, 약값이 약 40억 정도다.
40만원도 아니고 40억이다.
앞으로 수많은 유전자치료제들이 점점 유전자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아질 것이다.
혈우병치료제도인 햄제닉스도 40억을 넘는 고가에 판매되고, 어린이척수근위축증 치료제 또한 20억이 넘는다.
가족이 그런 병에 걸려도 지금 동시대를 사는 압도적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약으로 치료를 할 수가 없다.
다라프림 사태에 대해 들어본 적 있을지 모르겠다.
2015년 튜링제약 대표 마틴 슈크렐리는 에이즈 치료제인 다라프림의 가격을 5500% 인상시켰다.
에이즈 환자들은 그 약값으로만 연간 3억을 써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는 실제로 이 일로 청문회까지 불려나갔지만, 싫으면 안 사면 되지 않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아직도 영화 ‘아일랜드’는 허구 속 이야기이고 지금 우리의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이야기일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화 속 상황과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의 유일한 차이는 기술수준 밖에 없다.
인류가 지금 모습으로 진화하기 전 지구도 여전히 약육강식의 세계였고 인류가 지구의 최상위 지배자가 된 지금도 그 원리는 여전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표면적인 현상과 상황들에 가려진 그 안의 진짜 모습을 잘 이해하고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세상이 X같다고 하니, 어쩌면 혹자는 이걸 세상을 비판하고 사회를 비난하고 상황탓으로 돌리는 데 요긴한 방패막이로 쓰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아, 역시 세상이 잘못됐네. 라고 불평불만을 쏟고 싶어질지 모르겠다.
뭐, 불평불만을 뱉는 건 자유다.
하지만 언제나 말하듯이, 우리의 통제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자꾸 탓하고 바꾸려고 하는 일은 ‘삽질’이 될 공산이 매우 크다.
슬프고 잔혹한 일이지만, 윤리와 도덕을 자꾸 들이대고 당위를 잣대로 세상을 비난하는 일은 결국 우리의 삶을 갉아먹는 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이 이런 상태인 원인이 우리가 아니라 우리 바깥에 있다고 할지언정, 그걸 해결해나가는 방안이 우리 바깥에서 올 수는 없다.
우리 바깥에 있는 거의 모든 존재들은 우리의 통제영역 밖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이 올바르고 그른지를 함께 논의하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현명하게, 완벽하게 조각해나갈지에 대한 일이다.
그 일은, 명백히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내에서 찾아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세상 탓을 하지 마라.
그 분노와 슬픔을 잘 정제해서, 최고의 우리 자신을 조각해나가는 데 활용할 연료로 쓰는 기개와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오늘 하루도 완벽하게 조각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