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중요하다.
믿음의 힘은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을 초월하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1912년 국제육상경기연맹이 세계기록을 관리하기 시작한 이후, 육상 100m 달리기의 마의벽은 언제나 10초였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선수들이 10초 초반대까지 밀어붙였으나 인간이 100m를 10초 전에 주파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모두가 믿었다.
56년이 지난 후, 짐 하인즈 선수가 9초대로 100m를 주파하자 우후죽순 다른 선수들도 10초라는 마의 벽을 넘기 시작했다.
인간이 10초 안에 100m를 주파하는 게 가능하구나, 라고 기존의 믿음이 변화한 것이다.
심리학에서 유명한 실험이 있다.
두 학급으로 학생들을 균등한 성적분포로 나누어두고, A반 교사에게는 이 아이들이 우등반이라고, B반 교사에게는 이 아이들이 보충이 필요한 열등반 학생들이라고 일러준다.
시간이 흐른 후, 실제로 A반 아이들은 B반 아이들보다 유의미하게 높은 성적을 거둔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타인의 영향을 받는다.
어떤 집단에서 저 아이는 우수하다, 쟤는 웃긴 아이다, 쟤는 형편없는 아이다, 이러한 많은 구성원들의 믿음이 공고하면 실제로 그 사람은 똑같은 사람임에도 그 믿음의 영향을 받아 실제로 그런 사람으로 변해가기도 한다.
시크릿이라는 책에서는 마음 속으로 한치의 의심없이 믿으며 생생하게 그리면, 우주가 그 생생한 믿음을 현실에서 나타나게 도와준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모든 형태의 물질은 고유의 진동수를 가진다.
생각과 감정도 아직 인간이 관찰하지 못하는 어떤 형태의 에너지나 물질이라면, 무언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뭐 그런 양자역학이나 물리학적인 관점의 논의는 아니다.
믿음은 분명 강력하다.
우리가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으면 왠지 그대로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기만 할까.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수많은 위인들은 대개 주위 사람들이 믿은대로 그런 모습의 삶을 살았던걸까.
아니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절대 그게 가능할리 없다는 것을 오롯이 혼자의 믿음으로, 세상 모두의 반대와 상반된 믿음을 깨버리면서 무언가를 창조해낸걸까.
어쩌면 그렇게 세상 모두의 확신을 깨부숴버리고 나서, 뒤늦게 사람들이 ‘아, 저게 되는 일이었구나.’라고 사후적으로 위인들을 위대한 사람이라 믿기 시작한건 아닐까.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어떠한 현상을 판단하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 믿음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그 믿음에 영향을 받기로 결정했을 때다.
앞서 말한 것처럼 100m를 인간이 10초 안에 주파할 수 없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확신을 가질 때, 자기자신은 그와 반대되는 믿음을 가지고 혼신의 단련을 거듭했기에 10초라는 마의 벽을 뚫어버린 것이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믿음이 중요하긴 한데 나 자신의 믿음이 중요하다.
타인의 믿음은, 마치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 우리를 바꿔버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타인의 믿음은 우리의 믿음을 바꾸는 영향을 미쳐서, 결국 우리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타인의 믿음에 따라 우리의 믿음을 바꾸기로 결정하지 않으면, 타인의 믿음은 힘이 없다.
세상 모두의 믿음을 박살내고 생각지 못한 발견과 혁명과 진보를 이룩했던 모든 사람들은 타인의 믿음이 자신의 믿음을 일그러뜨리도록 허락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삶으로 돌아와서, 우리 또한 그러한 역학을 잘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결정해야 한다.
타인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을 변형시키고 바꾸고 누르고 펴도록 내버려둘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신념을 가슴 한가운데 지니고 내 믿음대로 내 삶을 조각해나갈 것인지.
세상이 피해자와 조각가로 나뉘는 이유는 그래서다.
아쉽게도,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자신을 가장 위하기 마련이어서 나를 위해 상대방이 행동하길 바라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내가 아닌 상대방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바라지도, 옳다고 여기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아무도 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기왕이면 나에게 득이 되고 내가 원하는대로, 날 위해 움직여주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타인이 우리에 대해 가지는 믿음은 무엇일까.
내 입장을 대변해주고 나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해주면, 우리는 그 주장이 옳고 그 사람이 현명하고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믿음이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기보다는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경향이 매우 강하다.
결국 우리에 대한 타인의 믿음이란, 지 맘에 들게 행동하고 지한테 유리하게 말하면 좋은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에 영향을 많이 미치게 허락할수록, 타인이 바라고 기대하는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아니면 남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자기자신이 별로라고 생각하거나.
예를 들어, 우리가 고1 학생이라고 해보자.
모든 사람들은 우리에게 공부를 하길 기대한다.
부모도,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학교 선생님도, 아는 모든 어른들도, 선후배들도 다.
근데 나는 공부를 못한다.
반에서 하위 10%다.
학교에서는 나같은 애들을 그저 그런 별 가치없는 학생 중 하나라고 여긴다.
모든 과목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옆집 아주머니도.
내 주위환경을 채우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큰 가능성도 없는 존재라 믿는다.
나도 그들의 믿음을 보며, 그들의 수없이 반복되는 나에 대한 태도를 보며 점점 그리 믿는다.
난 공부도 못하고 빡대가리라 크게 가망이 없구나…
난 공부가 하기 싫어진다.
난 어차피 패배자다.
공부를 더 안 한다.
그럼 더욱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날 더 한심하게 여긴다.
난 더더욱 내가 한심하다는 걸 강하게 믿게 된다.
여기서 공부하는 게 무슨 그들에게 유리한 입장을 대변하는 행동이냐,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들에게 당신이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그들에게 분명 유리하다.
여러분이 성적이 낮다고 깔보는 그들 대다수는, 그저 시키는대로 사회에서 제시하는대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냥 정해진대로 룰이라고 알려준대로만 산 사람들에게, 룰대로 하지 않는 모든 존재는 위협의 대상이다.
내가 혹시 너무 노예처럼 시키는대로 아무 생각없이 그들 손에 휘둘려서 살아온 건 아닌지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성적 부진아라는 정체성을 가진 채로 세상에 나온다.
10대를 그렇게 보내고 나면, 그 후 삶이 쉽사리 갑자기 확 나아지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주위 사람들이 믿은대로 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면, 나는 꼼짝없이 ‘피해자’다.
조각가는, 그들의 믿음이 왜 그런지에 대해 잘 이해하고 파악하되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것일 뿐 내 삶을 살아가는 나자신의 믿음이 그 믿음들에 의해 맹목적으로 변해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조각가는 그들의 믿음을 경청하되 과연 내 삶에 이 믿음을 참고해서 변화시킬만한 부분이 있는지 차분히 살펴보고 선별적으로 선택해서 참고할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을 보면, 유리병에 넣은 벼룩 이야기가 나온다.
벼룩은 뚜껑 닫힌 유리병에서 한동안 머리를 부딪히며 유리병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한동안 내버려두었다가 유리병 뚜껑을 열어도 벼룩은 영원히 그 유리병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을 본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것.
절대 남이 마음대로 휘두르도록 내어주어선 안 되는 것.
무언가를 믿기로 결심했다면, 내 눈으로 보고 내 피부로 겪고 더이상은 아무래도 신념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확신이 서지 않는 이상, 그 믿음을 유지해도 좋다.
세상이 틀렸다고 말하는 확신과 간섭에 신경쓰지 마라.
세상은 검증되지 않은 모든 것을 조롱하고,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은 모든 것을 비웃는다.
훗날 결과로 보여주면, 세상은 언제그랬냐는듯이 당신이 믿는 걸 믿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