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니 남편)이 얼마나 어머님을 아끼는데, 니가 안 오고 배길 수 있나 보자.”
오늘 엄마는, 큰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아빠가 할머니를 모시는 큰아빠 큰엄마가 하는 식당일을 돕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빠는 엄마에게 직접적으로 식당일을 도우라 요청하진 않았지만, 엄마만 희생해주면 모두가 만족스러운 상황이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빠도, 할머니도, 큰아빠도, 큰엄마도, 엄마의 희생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나 미안함을 굳이 느끼지는 않았다.
아빠는 속정이 많고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가족일에 있어서는 자기처럼 언제나 엄마에게 양보와 희생을 바랐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당하는 사람은, 타인들의 눈에도 얼마든지 희생해라고 요구해도 되는 사람처럼 보이는 법이다.
그렇게 엄마는 바보같이 10년을 넘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남의 식당일을 돈도 받지 않고 매일같이 해주다가, 오늘 급기야 그런 모욕을 당한 것이다.
엄마는 힘들었다.
매일 같이 새벽부터 버스를 두번이나 갈아타고 그 힘들다는 식당 일을 하러 시골까지 들어가는 게.
큰엄마는 머리가 나쁘고 아둔한 사람이어서, 식당은 만년 적자였다.
주방일이든 홀을 보는 일이든 같이 일을 해도 엄마가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다보니, 엄마가 지친다는 이야기가 큰엄마의 불안과 걱정을 일으켰으리라.
그렇게 엄마는 남편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희생한 10년의 대가로 그런 모욕을 당했다.
큰아빠는 집안의 장손이라는 이유로 문중의 모든 재산을 이미 다 혼자 물려받은 상황이었다.
그는 폐인이었다.
큰엄마가 자기 몰래 도장을 훔쳐 온갖 빚을 낸 걸 알게된 사건이 있은 후, 그는 마치 자신이 세상 모든 보상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듯한 태도로 거의 3,40년을 매일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하며 생계활동은 하지 않은 채 지냈다.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큰아빠가 가진 재산으로 술도 사주고 여자가 나오는 술집도 데려가주는 것에 군침이 질질 흐르는 동네 청년들이 큰아빠 주위에 득실득실거렸다.
큰아빠는 점점 바다 앞에 있던 땅도 팔고 자그마한 건물도 팔고 논도 팔고 물려받은 집안의 거의 모든 걸 팔아치우고 있었지만, 여전히 재산은 많았으니 걱정은 없었다.
매일같이 술에 취해 사는 큰아빠는, 사람들이 자신 주위에 항상 많은 게 자신의 인덕이 아닌가 하는 상당히 흥미로운 생각에 젖어 살고 있었다.
온갖 감투를 썼다.
있는대로 물려받은 재산을 동네 사람들에게 다 뿌리면서, 이런저런 자리에 앉았다.
그는 행복했다.
자신의 감춰져있던 인덕과 영향력, 큰 그릇이 세상에서 드디어 인정을 받는 것만 같았다.
현실은, 거의 매년 적자인 식당의 늘어가는 빚을 물려받은 재산으로 메우고 거의 365일 내내 술에 절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술값을 대주며 떠받들어지는 쓰레기들의 쩐주, 뭐 그런거였지만.
이 짧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피해자’로 살아가는 일의 위험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누가 피해자일까?
엄마? 엄마를 바라보는 아들?
물론 그 두 사람이 가장 큰 피해자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모두가 피해자다.
저 이야기에서 자신이 희생했기 때문에, 자신은 보상받아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을까?
없다.
참고 견디며 애써 못본 척하고 그러면서 억울한, 즉 내가 희생하고 있다고 조금이라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은 시기가 다를 뿐 언젠가 결국 피해자가 된다.
저 이야기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피해자다.
자신이 ‘희생’이라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자신의 모든 행동은 결국 그 사람을 피해자로 만드는 일이다.
저 이야기에서 자신이 희생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
그러면 모든 사람은 피해자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우리는 하나 발견할 수 있다.
“희생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희생을 숭고한 단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희생은 반드시 피해자를 양산한다.
앞서 이야기한 문장을 찬찬히 읽어보라.
‘자신이’라는 주어가 붙어있다.
남이 누군가의 행동이나 삶을 보고 ‘희생’이라고 느끼든 연민을 하든 말든 그건 아무 쓰잘데기 없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다르다.
우리가 우리자신이 ‘희생’한다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결국 억울함과 슬픔과 분노와 당위를 낳는다.
좋은 마음으로 희생하다가도 상대의 태도나 내 심경의 변화로 억울해진다.
슬퍼지거나 화가 나기도 한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하는데 최소한 다른 사람은, 상대방은, 이렇게는 하는 게 ‘옳지.’라는 당위가 아주 강력한 힘으로 마음을 지배한다.
온전히 상대방을 위한 진심만으로 누군가에게 베푸는 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희생’이라고 생각할 상상을 잘 하지 못한다.
그건 자신의 삶이 가지는 가치이자 의미이니까.
옆에서 사람들이 희생정신이 대단하다며 자신들의 관점에서 평가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좋은 마음만 가지고 자발적으로 희생한다고 생각을 하던 누군가는, 먼훗날 억울함에 오랜시간을 아파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희생하지 마라.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지 마라.
우리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의 희생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가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삶에서 공허를 걷어내고 우리가 인생을 후회없이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최고의 나를 조각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하고, 그걸 발견하기 위해서는 살아남아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결국 ‘피해자’가 되길 거부한다는 이야기다.
피해자가 되지 말자.
주위를 둘러보면,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우리는 누구나 억울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억울하더라도, 우리는 이제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하루를 조각하고, 자유를 되찾고, 최고의 우리자신을 조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하지 말자.
피해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분명, 삶을 완벽하게 조각할 수 있다.
오늘 하루도 완벽하게 조각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