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달면 삼키고 쓰면 ‘투사’한다

투사

투사.
투사(Projection)란,
‘자신의 것이라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을 타인에게 전가해서 그 사람의 감정이라고 여기는 행동’
을 의미한다.
이건 마치 아기가 달콤한 건 삼키지만
쓰거나 맛없는 건 퉤, 하고 뱉어버리는 것과 유사하다.
내 안에 들어오기 거북한 건, 바깥으로 뱉어버리는거다.

투사를 이렇게 한 줄로 딱 정리하면. 사실 간단해보인다.
하지만 이 간단해보이는 단어 하나에도, 꽤나 그럴듯한 함의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은, 딱 말그대로 간단한 것만 생각해본다.
단순하게 내뱉는 것 그 자체 하나만 딱 보자.
이것만으로도 주위 세상과 타인을 이해하는 눈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니.

사람들은 늘 타인을 욕한다.

일상에서,
뒷담화나 험담이 없는 자리가 얼마나 있을까.
그 자리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투덜거림이나 당했음을 빙자한
비난과 조롱이 난무한다.

하지만 자신도 그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이러한 모습이 미성숙하고 최악이라며
누군가를 욕하는 그 사람도,
막상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똑같이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령,
친구 누구누구는 늘 자기 말만 맞다고 주장하고
남의 이야기는 경청도 하지 않고 무시한다며
실컷 욕을 하고 있는 A를 상상해보자.
그 A는 그런데 그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그렇게 한다.

….왜 그런걸까.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늘 나오는 진리의 단어가 있다.
내로남불.
내로남불이 판치는 시대에, 역시 그놈도 그런거 아니냐!
내로남불이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결과론적으로는 맞으나,
그 단어에 뉘앙스적으로 깔린 ‘악의’는 틀렸다.

늘 내가 주장하는 거지만,
인간은 의외로 의도해서 내로남불하는 게 어려운 존재다.
내로남불러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법학에서 말하는 ‘악의’, 즉 알고도 그러는 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투사의 힘이 여기서 드러난다.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트는,
초창기에 투사를 비롯한 방어들이 분열을 위해 태어난 것 같다, 는 말을 한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투사의 핵심 중 하나는, 무의식적이라는 데 있다.
투사를 한 사람은 자신이 투사한 걸 자각하지 못한다.

무슨 이야기냐면,
‘XYZ’라는 단점을 헐뜯고 남을 욕하는 사람이
자신도 똑같이 ‘XYZ’를 가지고 드러낼 때는.
그 사람은 자신의 XYZ를 자기 것이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안에 있던 걸 바깥으로 뱉어버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떠올려보라.
분명히 이러이러한 문제가 너무 과도한 거 같아서 조심스럽게 그것을 이야기했을 때,
상대방이 연인이었든 친구였든 동료였든 뭐라고 했었는지.
내가 뭘? 내가 언제? 왜 없는 말 지어내?
속에 열불이 터질 수도 있고
정말 우리가 잘못 본 걸수도 있지만,
핵심은 상대방의 저 반응이
알고도 잡아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저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상대방이 저렇게 반응할 때, 너무 진심인 거 같아서 의아할 때가 있지 않았나?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있을텐데.

세상에는 의외로 내로남불러들이 적다.
그는 그저
도저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 못나고 최악이라 느껴지는 것들을
자각하지 못한 채 남에게 투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반복된다.

세상에 난무하는 험담과 비난으로 다시 돌아와보자.
인간이 그렇게 ‘투사’라는 걸 하는 존재라면,
내 눈에 자꾸 보이는 짜증나는 무언가가
어쩌면 내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봐야 한다.

이쯤 오면 이제,
우리는 짜증이 나고 불쾌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그렇게 혐오하고 최악이라 여기는 그것이,
그래서 그런 모습만 보이면 짜증이 치미는 나에게,
그게 실은 투사한 내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다니.
역시 이론은 현실과 안 맞구나, 돌팔이네 프로이트 XX.

ㅋㅋ 뭐 이상할 거 없다, 자연스러운 반응이니까.
그건 그저 당신이 내로남불러가 아니라는 증거다.
내 것이 아니라 확신하니,
그걸 가진 누군가를 욕하고 미워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건 내로남불러들과 다르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만 돌팔이인 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MBTI의 심리적 유형 구분의 모태를 확립한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자꾸 누군가가 싫고 거슬린다면 그건 사실 우리가 억압하고 부정하는 우리자신의 면모를 그에게서 보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억압된 인간의 모습을 그림자(Shadow)라고 칭했다.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개성화(individuation)는,
‘이 그림자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을
필수적인 과정으로 한다고 말했다.
이거 이거, 프로이트고 융이고 돌팔이들이 많았네…

그들이 돌팔이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보면,
인간은 자기가 투사한 것들이 자꾸 삶에서 보이는 양상을 띠게 된다.

내가 날 알아야 하는 이유

어쩌면 우리의 세계관이,
우리가 소화하지 못한 감정이 투사되어 윤색된 걸지도 모른다는 성찰을 우리는 해야 한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비판할 때,
그것이 어쩌면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아, 물론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비판적 사고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비판보다 순응이 개인의 삶을 망치는 시대니까.

그러나 이 비판과 의심이,
그저 내 투사로 인해 내가 용인하지 못하는 내모습을 투영해서 보는 건 아닌지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파악해야만,
그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칼 융이 말한 개성화는,
우리가 최고의 우리자신을 조각해
원하는 삶을 공허감 없이 쾌청하게 누리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어다.
그의 말처럼,
그러려면 일단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는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