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들의 오랜 염원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에서나, 어느 문화에서나, 계급이 생겨난 이래 모든 지배자들의 가장 큰 염원은 하나다.
이 지배자의 지위가 공고히 지속되는 것.
지금 누리는 이 권력과 힘이 찬탈되지 않는 것.
모든 왕정체제의 국왕들,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점에 서있는 군부의 우두머리, 지금 같은 시대에는 거대한 자본을 축적한 기업과 큰 손들.
이들은 지금 자신의 지위가 영속적으로 이어져 내 자손들에게도 안전하게 계승되길 바란다.
인간사회와 문명은 단 한번도 평등하게 운영되었던 적이 없고 사실 그걸 바란 적도 없다.
가장 누구나 평등하고 대등하길 바라는 체제조차, 그 체제를 운영하는 이는 속으로는 불평등하고 차등적인 권위를 누리길 바란다.
아리송하다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북한을 들여다봐라.
평등을 외치는 사회이념조차, 실제로 평등했던 적은 없다.
만약 평등이나 공익, 윤리 같은 소위 ‘도덕적인’ 가치를 표방하더라도 이건 어디까지나 기득권의 지위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선에서까지만이다.
미국을 건국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욕망을 가지고 미국을 건국했는지 언제 한 번 잘 들여다봐라.
미국이라고 다를 거 같지만, 그들도 북한의 리더들과 다를 바 없다.
사회와 문명을 설계하고 짜올린 리더그룹들은 자신의 기득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길 염원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오래 전부터 진두지휘하며 변화를 주도해왔던 지금 우리가 속한 이 ‘세상’은 우리에게는 어떤 걸 원할까.
당연히, 기득권에 위협을 가하는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길 바랄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왕을 처단하려 하거나, 기득권의 기득권을 실제로 해체해버리려 하거나, 불만을 가득 품고 암살을 시도하거나 등등.
힘으로 눌러왔던 수많은 지배층들은 ‘결국에는’ 모두 실패해왔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기득권과 지배층들은, (물론 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까지는 아주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과거와는 다른 현재의 왕들
과거의 지배계급들과 무엇이 달랐길래 그런 것인가.
언제나 혁명이 결국 일어났던 과거와 어떤 걸 다르게 한 것인가.
내가 보기에 핵심은 ‘자발성’이다.
힘과 폭력, 강제성으로 노역을 시키고 노예를 사고팔고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대신 지금 시대의 기득권은 피지배계층이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노역하고 싶게끔 만든 첫 지배계급이다.
물론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야 크고 작게 여러번 있었겠지만, 이렇게 일괄적으로 모든 피지배계층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신을 써달라고 바라고 요구한 적은 인류 역사 상 없었던 것 같다.
지배계층의 입장에서는 지배를 당하는 자들이 자신의 잠재력과 재능을 완전히 발휘해버리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그 누구도 절대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예술성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이 엄청난 가능성과 잠재력은 지배계층에게는 위협이고 위험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보석과 잠재력을 발견해서 찾게 내버려두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왕들의 영원한 염원은 기득권을 위협없이 공고하게 유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회와 문화에서는 구성원들, 즉 소속되어 지배당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커리큘럼’을 제시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 커리큘럼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삶과 개성과 이야기를 찾고 갈고닦는 대신 짜여진 루틴과 과업을 달성하게끔 설계된다.
우리가 각자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발견하고 타고난 소질을 갈고닦아 성장하는 일은, 기득권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자 잠재적 위험요소니까.
교화된 우리들의 착각
많은 사람들은, 사회를 이루고 구성하는 건 결국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니까 마치 이 사회는 엘리트들이 정교하게 설계한 게 아니라 흘러가는대로 구성원들의 행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진짜 그럴까.
그런 시각은, 어쩌면 사회를 이끌어온 사람들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이 사회를 설계하고 이끄는 사람들의 장치는 생각보다 섬세하고 교묘하고 정교하다.
윤리적인지를 떠나, 시대를 리드하고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똑똑하고 영민하다.
사회구성원들을, 지배당하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사회가 제시하는 ‘커리큘럼’은 다분히 지배하는 입장에서 유리하게 설계되어있다.
예측가능하고, 표준화 되어있고, 통제가능하고 너무 튀지 않고 규칙과 위계에 순종하고 주어진 임무를 불만없이 수행하는 구성원을 양산하는 일, 그게 사회가 구성원에게 제시하는 커리큘럼의 목적이다.
하지만 우리 각자에게는 어떨까.
과연 사회가 제시하는 인생의 로드맵과 단계들이 정말 우리 각자에게 진정으로 중요하고 가치있는 게 맞을까.
아니면, 우리를 위한 것이다 표방하지만 어쩌면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한걸까.
어쩌면 그들은 정말 윤리적인 입장에서 구성원 대다수의 행복과 삶의 의미를 위해 교육하고 지원하고 제도를 설계한건데 너무 꼬아서 보는 건 아닐까.
이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면,
나의 대답은 이렇다.
X까는 소리다 ㅋㅋ
타인이 아닌, 내게 중요한 일을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이 다들하는대로, 학교와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과업을 어찌저찌 헤쳐나가며 커리큘럼대로 살아왔는데.
정신차려 보니 내가 무얼 위해 사는지, 무얼 할 때 내가 진정 행복한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 되어있는거다.
모략가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사회의 모략으로 책임을 다 돌리라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런 생각은, 그냥 속편하고 싶은 입장에서 혹하게 되는 큰 착각일 뿐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글귀가 하나 있다.
내 좌우명 중 하나다.
(좌우명이 꼭 하나여야 하는 법은 없지 않나…)
작가 프랜시스 챈이 한 말이다.
“Our greatest fear should not be of failure but of succeeding at things in life that don’t really matter.”
번역하면 이런 의미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가 아니라,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성공하는 일이다.”
캬… 폼 미쳤다.
어떤 말들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가슴에 와닿는다.
이 말도 내겐 그렇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는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 일인데 그 일에 시간과 마음을 쏟아붓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실패가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고 흘러가버린 후회들이 켜켜이 쌓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굳이 왕들의 오랜 염원을 들어주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될 필요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