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천만한 모험
잠드는 건,
굉장히 위험천만한 짓이다.
아주 오랫동안 그랬다.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시점은 한 20만년 전이겠지만,
대형 유인원이 출현한 시기는 800만년도 더 된 이야기니까.
잠시 그 오랜기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상상해보자.
인간은 잠을 자는 동안
언제든지 맹수나 다른 동물에 의해 물려죽을 수 있는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먹이를 구하지도, 새끼를 지켜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의 생존확률을 높여주는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잠을 잔다는 건 아주 골때리는 짓이었을 것이다.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꿀잠을 잤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진화과정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진화라는 것은,
오랜 세월 수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어떤 특성이 생존에 유리하지 않으면 그 특성이 사라져버리는 걸 의미한다.
기린의 목이 긴 이유에 대해,
진화적으로 먹이를 구하기 쉬워서, 체온조절을 위해 등등 여러 가설들이 있다.
뭐가 맞든 간에 한가지 확실한 건,
생존에 유리한 특성을 지닌 개체만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개체들은 살아남지 못해
오랜 시간이 흐르며 유리한 특성을 지닌 개체만이 자손을 남기고 살아남아
결국 그 특성을 가진 종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그럼 잠을 생각해보자.
잠을 자는 이 위험천만한 짓은,
진즉에 진화과정에서 사라졌어야 맞다.
잠든 동안 그 어떤 동물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의 공격을 막고 먹이를 구하고 자식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인간은 24시간 중에 8시간은 잔다.
90살까지 산다 치면, 30년은 잠든 채 보낸다.
인생 전체의 3분의1을 자버리는 것이다.
물론 인간만 그런 건 아니다.
해양동물들이 잠을 자는 건 우리가 자는 것보다 더 위험한 짓이다.
왜냐면, 물 속에서는 계속 헤엄을 쳐야 하니까.
그런데 얘네들도 진화과정에서 잠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뇌의 절반만 잠들고 나머지 절반은 깨어있는 상태로
좌우 뇌를 번갈아가며 교대로 잠을 잔다.
잠이 진화과정에서 사라지기는커녕,
저런 극단적인 상황에서조차
뇌가 반씩 자는 신박한 기술을 구사해서라도 어떻게든 잠을 자는 것이다.
…왜??
…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신체를 회복시키는 연금술
잠은, 신체를 회복시키는 연금술이다.
인류문명이 정말 놀라운 일들을 많이 해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의학계에서 해결하지 못한 미개척 영역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잠이 가져다주는 신체회복능력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서 그렇지,
사실 인체가 스스로 신체를 회복하는 힘은 경이로운 수준이고
그 근간에는 잠이 있다.
잠을 자는 동안 인간의 신체는 회복한다.
신체적 손상이나 이로 인한 질병위험이 감소한다.
잠이 뇌청소, 뇌노폐물 배출 등을 통해 알츠하이머 발병을 예방한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잠은 비단 뇌와 연관된 치매같은 병이 아니더라도,
우리 신체와 관련된 모든 회복체계를 가동시킨다.
각종 암질환이나 심장, 뇌혈관 질환 발병률이 떨어지고
고혈압, 고지혈증, 대사증후군, 당뇨 등
우리가 한번씩 들어보는 모든 병에 걸릴 확률이
비약적으로 낮아진다.
사실 저런 질병까지 가지 않아도,
당장 일상에서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고 상처가 날 때
우리는 그저 푹 자면 된다.
우리 몸의 면역시스템은
자는 동안 당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활기를 되찾아준다.
알지 않나.
자기안락사의 시대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는 살아있는 시간의 3분의1을 잠에 할애했다.
호랑이, 표범 등 온갖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숲과 초원에서 살던 시절부터.
잠들고 나면 당장에라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잠들어서 생기는 그 위험보다,
잠을 자지 않으면 지게 되는 위험이 더 치명적이었다는 의미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잠든다고 해서 맹수에게 목이 물려죽거나 내 자식이 잡아먹히는 일은 없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인간은,
오히려 초기인류보다 잠을 더욱 적게 잔다.
실제로 대부분의 선진국 사람들 중 3분의2는
하루 권장수면시간인 8시간을 채우지 못한다.
2020년 ‘사람인’에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직장인의 74%는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평균수면시간은 6시간에 불과하다.
그런데 부족해진 잠은,
은행대출처럼 온전히 상환하는 게 불가능하다.
즉, 하루 1시간을 부족하게 자면
1시간을 더 잔다고 회복되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실제로 단하루 1시간을 부족하게 자면,
나흘 정도의 회복기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문제는 습관적으로 늘 잠을 적게 자는 생활이다.
만성적으로 잠을 적게 자는 건,
곧 ‘자기안락사’와도 같다.
(이 표현은, 수면분야 권위자인 맷 워커의 표현이다.)
실제로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자는 시간이 부족할 때 면역계가 손상되고 혈당수치가 교란된다.
심혈관질환 발병률이 급증하고,
뇌졸중이나 뇌혈관질환 발병확률도 올라간다.
우리가 볼 때 그리 적지 않은 7시간 미만 자는 것만으로도,
암발병률이 두 배 이상 증가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호르몬 교란으로 비만이 심해진다는 것 또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잠을 적게 자는 만행을 습관적으로 지속하면,
충분한 신체회복이 불가능해지고,
결국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죽어간다.
(물론, 잠은 일회성으로 적게 자는 것만으로도
신체에 상당한 손상을 가져온다.)
그래서,
모든 세계기록을 죄다 다루는 기네스북에서도
‘잠 안자기’ 기록은 없다.
너무 위험천만하기 때문에.
잠은,
신체회복을 관장하는 요체다.
그리고 우리는,
잠이 일으키는 연금술을 잘 활용해서
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아 원하는 삶을 조각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신체회복을 위한 간단한 지침
그렇다면, 효과적인 신체회복을 위해
잠은 얼마나 자는 게 좋을까.
WHO나 미국수면재단, 영국 국민건강보험 등
각종 수면 관련 기관에서 권장하는 시간은 7~9시간이다.
평균적인 수면싸이클은 90분이고,
각 싸이클마다 비렘수면 대비 렘수면 비율 등
수면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기능이 싸이클마다 조금씩 다르다.
따라서, 하루에 가급적 5개의 수면싸이클을 가져가는 게 좋다.
잠드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8시간 정도가 적당하다.
그리고 가급적 잠깐이라도 낮잠을 자자.
오랜기간 과거 전통을 간직해온 원시부족들을 보면,
낮잠은 인간의 신체에 자연스러운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지역에는
씨에스타라는 낮잠시간이 공식적으로 존재한다.
그리스에서 시에스타 풍습이 사라진 영향에 관해 조사한 연구를 보면,
낮잠풍습이 사라진 후 직장인 기준 사망률이 약 60%나 증가했다.
여유가 되면 딴 짓 하지 말고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