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되는 것에 대한 진화적 공포

얼마 안 됐다

인간이
주위 사람들의 비위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부족의 우두머리 눈밖에 나도,
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게된 건,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류가 출현한 이래
거의 모든 시간동안,
개인은 절대
자기가 속한 부족의 룰이나
기득권층의 심기를 거슬러선 안 됐다.

부족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행동하면
결말은 뻔했다.
어디 짱박혀서 자다가
산짐승을 만나 물려 죽거나,
어디 잘못된 곳에 빠져서
못나와서 굶어 죽거나.
이래나 저래나 혼자 살아남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부족장이나 부족원들의 미움을 사면,
부족에서 쫓겨나 죽게 되는 게
너무나 자명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모양이다

지금 이 시대에 생존해있는
우리들의 조상 중에,
쿨하게 부족장 말을 어기고
혼자 산딸기 따러 무리에서 벗어났거나
남이 날 싫어하든 말든
개무시했던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던 애들은
자손을 못 남겨서
우리 조상이 되지 못한 채,
어느 시기엔가 결국엔
죽어 사라졌을테니까.

진화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남 눈치를 보고
남이 날 보고 뭐라고 하는지에
극도로 예민한 건,
사실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죄다 그런 애들만 살아남아
자손을 낳고 길러온 기간이
어마무시하게 길고,
우리는 그런 애들의 후손이니까.

진화는 더디다

진화는 매우 더디고,
큼직한 단위로 일어난다.
빠르고 디테일한 인간문명의 발전과
현대사회 환경을 정확히 반영할만큼
신속하고 섬세하지는 못하다는 의미다.

인간은
잉여에너지를 어떻게든 지방으로 축적해
늘 도사리는 굶어죽을 위험에
대처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지만,
지금 모든 병의 근원이 비만인 걸 보면
진화가 실제로 디테일한 환경변화에 잘 적응하기에는
너무 많이 더디다는걸 알 수 있다.

소속안정감을 느끼는 일의 대가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무리나 집단에
어떻게든 붙어있으려고 하다보면,
그 집단의 지배를 받게 된다.
내 생각이 그들과 달라도
그들과 생각이 같은 척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고,
내게 더 큰 기쁨을 주는 일이 있지만
그 일 대신 집단이 내게 강요하는 일을 하고,
내 마음이 원하는 행동 대신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고 바라는 행동을 하며
살게 된다.

어느 순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결정되고,
나의 자존감은
타인의 기분에 따라 뒤바뀌고,
나의 존재가치는
타인의 평판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사는 존재를
‘노예’라고 부른다.
계급제도가 사라진 지금,
실제로는 여전히 계급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이제 더이상 과거처럼
목이 잘리거나 굶어죽고
맞아 죽게 되진 않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고,
다른 누군가는
타인이 원하는대로 복종하고
그들의 눈치를 보며
내 자유를 헌납한 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