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대부분의 경우, 자기자신을 이해하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물론 그건 자기자신을 이해하는 일이 결코 타인을 이래하는 일보다 쉽지는 않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에게,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 과연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일이다.
다만, 우리가 삶에서 아주 소중하고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실현가능성을 떠나서 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때는 나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 못지 않게(어쩌면 더 많이) 타인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해진다.
그래서 이 글은 ‘집단관계’ 카테고리가 아닌 ‘개인관계’ 카테고리에 넣었다.
지금 이미 그럴지도 모르고,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올 것이다.
그 때, 이 글을 읽기로 한 오늘의 선택은 분명 당신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어릴 때부터 내면에 자리잡아가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관계상이 존재한다.
이 관계상들은 각 개인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던 누군가와의 관계상도, 나와 서로 피터지게 다투고 공격하던 누군가와의 관계상도, 서로 무관심하게 지내는 누군가와의 관계상도, 많은 관계상들은 우리 무의식에 천천히 자리잡는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재연된다.
이 관계상들은 각자의 마음에 자리잡은 채로, 현실 속에서 생기고 사라지는 무수히 많은 관계에서 다시 재현된다.
그래서 상담현장에서 내담자의 어릴 적 중요했던 사람과의 관계, 대개는 가장 중요하기 마련인 가족들과의 관계를 자세히 확인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관계상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정말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는 상대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침묵을 지키는 일은, 누군가에겐 평소에는 날 아끼고 사랑하던 부모가 내게 내리는 일종의 처벌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침묵은, 누군가에게는 언제나 힘겹고 고통의 연속이었던 내 아버지가 자식인 나를 그런 참혹한 현실에서 지키기 위한 사랑과 보살핌이었을 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당신 앞에서 침묵을 지킨다면, 그게 무엇인지 잘 헤아리기 위해 당신은 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관계상을 헤아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관계상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 그의 중요한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가늠해볼 수 있다.
그의 이야기와 생각, 삶의 스타일을 보고 짐작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정보가 없더라도, 만약 당신이 그 사람과 마주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신과의 관계에서도 그의 내면에 자리잡은 관계상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반드시 재연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그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그의 내면에 자리한 그의 관계상을 이해함으로써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관계상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걸까.
마음 깊이 느끼고 겪었던 관계가 마음에 자리 잡고 나면 어떤 특정한 형태의 관계이미지가 내면에 새겨진다.
그 관계상은 크게 ‘나’와 ‘상대방’, 그리고 둘 사이의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관계의 두 주체인 ‘나’와 ‘상대방’은 이 관계와 관련해서 어떠한 감정을 지닌다.
이 감정은 크게 ‘욕망’과 ‘두려움’, 두 가지로 크게 나뉠 수 있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 두 주체가 관계 앞에서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받는 감정은 욕망보다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욕망보다 우리를 더욱 강하게 휘두르기 때문이다.
이는 다분히 진화적으로 유리한 경향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바라는 것을 향하라는 말은 하지만, 바라는 걸 이겨내고 두려움에 매진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내면에 자리하는 관계상에서 ‘나’와 ‘상대방’, 두 주체의 내면에 근본적으로 자리하는 욕망이 존재한다.
그 욕망은 대개 무의식 깊숙이 자리잡고 있고,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거나 직접적으로 발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욕망은 그 사람이 살면서 말하고 행동하고 반응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 된다.
두려움은 이 욕망에서 파생된다.
근원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내면의 욕망은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비례해서 두려움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관계상에서 두 주체인 ‘나’와 ‘상대방’이 각각 지니고 있는 욕망과 두려움은 각 주체의 행동을 이끌어낸다.
물론 대다수의 경우, 욕망과 두려움 중 더욱 강력하게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소는 두려움이다.
정리하면, 관계상은 두 주체와 각 주체가 가지는 욕망과 두려움, 그리고 그로 인해 발현되는 각 주체의 행동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누군가의 관계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타인의 행동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내면에 있는 관계상을 짐작해보아야 한다.
이 짐작에 정답은 없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는 특정 관계의 반복양상에 주목한다.
과거의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와 지금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 지금 이 자리에서의 관계 등에서 반복되는 양상들을 비교대조하면서 좀 더 정교하게 짐작을 해나간다.
가령, 그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일부 행동이나 말을 보고 대화를 하는 대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아예 끊어버리는 행동을 보였는데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의 내면에는 그러한 관계상이 존재할 것이다.
마음은 상대방을 사랑하지만, 내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행동이나 말을 하는 상대방에게 대화를 할 수 없는, 혹은 해도 소용없는 관계상 말이다.
대화를 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으나 비난과 상처만 돌아오게 될 것이 두렵거나 혹은 아무리 수차례 설득과 대화를 해도 어차피 소용없는 결과에 느끼게 될 무기력감이 두려울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 대화와 협의는 선택지가 아닌, 그래서 그저 일부 행동이 기대에서 크게 벗어나면 끊어내버리는 것이 최선인 관계상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
조금 복잡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내면에 자리잡은 관계상은 실제 현재에서 크든 작든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고 이를 짐작함으로써 관계 속에서의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면, 상대방이 맺어온 중요한 관계에 대해 많이 살펴보고 들어라.
(물론 지금의 마음에 대해 경청하고 공감하는 건 기본이다.)
그렇게 한다면, 누구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