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들에 치이는 ‘인간적인’ 우리
자기자신이 결정한 길을 걷는 사람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자신의 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하고 최고의 자기자신을 조각하는 데 여념이 없는 사람은 조각하는 일에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는 모든 일에 관심이 없다.
예를 들면, 스팸전화나 연예인 가십거리, 온갖 사람들의 뒷담화, 지하철에서 날 치고 지나가는 취객같은 거 말이다.
스팸전화에 화를 내는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자기자신의 삶에 몰입해 최고의 나를 그리며 조각하는 삶에 그런 무가치한 것들이 개입될 여유는 없다.
자꾸 길을 가다 마주치는 도를 아십니까가 머리에 맴돌고 보일 때마다 화가 치민다면,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운전을 하다보면, 정말 위험하게 사고가 날 정도로 과격하게 끼어드는 차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 사실은, 생명에 지장을 주는 큰 사고가 날 수 있었으니 놀라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끼기도 하니 두려움과 놀라움이 확 일어날 뿐, 아니면 그 뿐이다.
계속 그 운전자가 싫고 분노가 머리와 몸을 맴도는 건, 그 때부터는 상대방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자신의 문제다.
인간은 애초에 불완전한 존재다.
경지에 오른 성인이 아닌 이상, 인간은 누구나 연약하고 쉽게 영향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 속의 모든 타인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길 간절히 바란다!
이를 종합해보면,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일들에 휘청거리고 오락가락하는 건 짐짓 자연스러운 ‘인간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소한 일에 더이상 휘둘리지 않는 비밀
물론 인간적인 모습이 맞다 ㅋㅋ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삶과 우리자신을 조각하기 위해서는, 그런 류의 인간적인 모습은 뜯어고쳐야 한다.
적절한 단련을 통해, 우리는 누구나 충분히 일상 속 외부자극의 노예가 되어 사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로, 운전을 하다가 옆차가 끼어들 때 화가 주체못할 정도로 치미는 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문제이고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인간의 유약함을 보여주는 한가지 간단한 이야기를 해보자.
하얀코끼리를 지금부터 절대 생각하지 말라고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
학생들은 하얀코끼리를 절대 마음 속 한 켠에서 1초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모든 학생들의 머릿 속에서 하얀코끼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이건 심리학 실험이기도 하지만, 불교적인 화두이기도, 철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국대에서 스님 출신(?!)의 교수님에게 명상지도자과정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거의 제일 먼저 배운 것은, 명상할 때 수련자들이 잡념이 떠올라 힘들어하면 잡념을 떨치려는 행동을 하지않도록 가이드해주라는 것이었다.
명상을 수련하는 고승들은 이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명상을 할 때 잡념이 떠오르면 그 잡념을 이제 안 떠올려야지, 하고 아무리 아득바득 용을 써봤자 그 잡념은 계속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잡념이 떠오르는구나, 하고 다시 되돌아가면 된다.
가령, 호흡 명상 중이었다면(가장 먼저 배우는 게 대개 호흡명상이다.) 의식을 호흡에 다시 가져간다.
그저 그러고 있다보면 찬찬히 잡념은 사라진다.
하얀코끼리를 떠올리지 않는 방법은, 하얀코끼리를 절대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는 게 아니다.
애초에 집중하던 것으로 다시 마음을 가져오면 그게 최선의 방책인 것이다.
이건 내 의견이 아니라, 오랜 시간 선수행을 유지해온 고승들의 이야기다.
(물론 내 경험 상으로도 효과적인 건 확실하다.)
비밀을 알아도 우리가 사소한 일에 여전히 치이며 사는 근본적인 이유
자, 이제 다시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오자.
자꾸 옆차가 운전 중에 위험하게 끼어들고 스팸전화를 중요한 전화인 줄 알고 회의 중에 나와서 받고 이러면 그 누구라도 마구 화가 난다.
하지만 이 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원래 내 마음이 향하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면 충분히 그런 사소한 자극들에 휘둘리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저 그런 내 하루를 조각하는 데 무의미한 것들은 ‘읭?’하고서 다시 돌아오면 되는 거니까, 쉽네?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단 우리의 과거를 한 번 잘 돌이켜보자.
내 인생에 전혀 중요치도 않고 의미도 없는 일상 속 많은 자극들에, 우리가 가볍게 힐끗하고 다시 평온한 상태로 돌아와지던가.
그렇지 않다.
쉽지 않다, 정도가 아니라, 매우 어렵다.
어지간해선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시 돌아올 곳이 없기 때문이다.
명상에서 수련하는 스님들이 그러하듯이, 호흡에 의식을 두다가 잡념에 휘말리면 다시 알아차리고 호흡으로 의식이 돌아오도록 하는 일이 안 된다고.
애초에 마음을 둘 곳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인생에서 내 영혼과 시간을 쏟아부을만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부터 우리의 삶이 외부의 자극과 타인의 기대, 역할에 대한 의무감, 두려움, 보상 등으로 외부에 의해 짜여진대로 흘러왔다면?
혹시 그런 삶을 사는 누군가가 세상에 만약 존재한다면, 그에게 돌아올 곳은 없다.
근데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우리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99.9%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처음부터 외부의 자극에 의해 벌어진 상황을 따라 흘러온 삶인데, 사소하다고 해서 외부자극에 의해 발생한 상황에 의해 요동치지 않을 재간은 없다.
살던대로 살게 되는거다.
나를 건드리는 모든 자극에 신경초처럼 잔뜩 움츠리며 신경곤두세우는 걸 반복하면서.
결국 우리가 운전할 때 옆차가 끼어들 때 화가 잔뜩 나서 운전 내내 감정이 요동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자신이 결정한 길을 걷는 삶을 살고 있지 않아서다.
명상과 매한가지다.
하얀코끼리를 머리에서 지우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애초에 내가 발디디고 서서 걸어갈 나만의 인생이 필요하다.
내가 결정한 내 삶의 여정이, 최고의 나를 조각하기 위한 나만의 도전과 과제가 필요하다.
이게 바로, 우리가 ‘돌아올 곳’이다.
무의미하고 사소한 수백가지 자극이 우리를 건드려도 힐끗 쳐다보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올 때 그 돌아올 곳 말이다.
돌아올 곳이 없고 애초에 마음을 쏟고 있는 나의 삶이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온갖 사소한 일들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인데.
그래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우리자신이 지니는 삶의 의미와 내면의 잠재력, 가능성, 우리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이 무르익을수록, 점점 더 완벽하게 자유로운 일상을 살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