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마라.

부모가 힘들게 살면, 자식은 일찍 철이 든다.
‘사춘기가 없이 지나간다’는 아이들은 대개 그런 환경에서 자란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가 너무 힘들고 괴로워하며 인생을 어떻게든 견뎌나가는 걸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나까지 엄마아빠를 힘들게 하면 안 되겠구나.”
“내가 꼭 저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줘야지.”

투정부리고 떼 쓸 여유같은 건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애초부터 없다.
어린 아이에겐 세상 전부인 ‘부모라는 세상’이 천둥번개가 치고 쓰나미가 일어나 끝없이 위태위태하면, 아이들은 편하게 누워 투정이나 부릴 생각은 감히 꿈꾸지도 못한다.

이런 척박한 환경을 대물림하는 부모들을 탓하거나 비난할 건 아니다.
누구나 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몇이나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장악하고서 아이를 낳을까.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애초에 준비가 다 된 후에 일어나는 중요한 일 따위,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아이를 낳는 일은 누군가를 적어도 성인이 될때까지는 일정 강도 이상의 울타리를 만들어 보호해줘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일이지만, 그게 완벽한 준비 이후에나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엄청난 비밀을 하나 누설하자면, 부모가 자식이 자라기도 전에 자식을 망쳐버리는 일은 사실 여유롭지 못한 현실보다는 전혀 수습하지 않고 살아왔던 부모의 망가진 정신세계 때문에 벌어지는 경우가 절대다수다.

그럼, 충분히 준비하고 아이를 가지지 않은 대다수의 부모들을 비난할 것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반대로 자식들을 비난하거나, 자식들이 그런 상황에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걸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부모가 사는 게 힘들면, 그건 냉정하게 말해서 부모 각자가 살아온 그들의 삶인건데, 자식들은 그런 부모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부모는 자식을 키우고, 자식은 그런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부모가 괴로우면, 자식은 자신 때문에 부모가 괴롭다고 느낀다고 쉽게 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나 또한 가족에 대한 애착과 엄마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에 유독 컸던 탓에, 성인이 되고 나서도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죄책감이 마음을 짓누르곤 했다.
그런 죄책감을 덜어내는 모든 변화나 행동이 전부 다 비겁한 자기합리화고 배신이라고 철썩같이 확신했던 시기가 꽤 길었다.

하지만, 아주 오랜시간 곱씹고 곱씹으면서 조금씩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내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었다.
주위 많은 사람들이 부모가 되고, 나 또한 내가 모르던 나의 모습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며 나와 타인의 마음 속 서사들을 끝없이 공부해가면서 알게 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누구나 다, 자기 손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간다.

엄마 아빠가, 어릴 때부터 엄마아빠 생각, 엄마아빠 걱정을 자주 하던 내게 해준 이야기가 있었다.

“느그 태어나서 한 3,4년동안 한창 이쁠 때 엄마 아빠 행복하게 해준것만으로 느그는 엄마아빠한테 평생 해줄 효도는 다한기다. 나머지 시간은 엄마 아빠 생각하지 말고 느그 행복하게 살면 그게 엄마아빠한테는 최고 효도다. 항상 느그 마음 가는대로 살아라. 엄마아빠 생각하지 말고.”

이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지만, 나는 그럼에도 죄책감이 있었다.
부채감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런 마음이. 미안함이.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황당하게도 엄마아빠의 그 말을 100% 믿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저, 자식 마음 편해라고 해주는 이야기일 뿐 어쩌면 거짓말 아닐까, 라는 궁예(?!)가 쓰는 관심법을 시전하기도 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한 데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결국 피해자였던 걸 하도 많이 목격한 탓도 있었다.
억울하고 자기만 희생하고 양보하고 참고 포기했다는 걸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는 너무 많은 사람들.
현실에서도 매체에서도 모두가 다 ‘나는 피해자’라면서 비명을 지르는 탓에, 나는 혹시라도 엄마 아빠가 언젠가 (누구나 다 가지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될까봐 두려웠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나도 이제 중년이 되어가는 지금 시점에서 본다면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어디 아픈 데 없이 건강해서 그저 고맙다’는 말을 달고 살고, 아빠는 그저 ‘어디 다치거나 감기 걸리지 않게, 밥 거르지 않게 잘 챙겨’라는 게 가장 관심사인 사람이다.

만약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듯이 우리 엄마아빠가 나에게 ‘널 키우느라 희생하고 젊음을 바쳤다’며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면, 그 때는 어땠을까.
아마 그랬어도, 지금의 내가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협박과 위협으로 상처 받고 피흘리는 사람들이 정말 셀 수도 없이 너무나 많다는 걸 나는 몸소 체험했다.
개인상담을 하고 사적인 관계로 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런 이야기는 주위에 산재해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살면서 절절하게 깨달은 사실은, ‘누구나 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인생을 선택하고 산다.’는 것이다.

누구나 매순간 그 상황에서 가장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선택을 하고 산다.
이 세상 많은 부모들에게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그들이 해야할 도리를 일정기간 다 하는 것은 자식이 죄스러워할 일이 아니다.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기꺼이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이야기다.
부모가 혹시 ‘널 키우느라 내 인생은 하나도 없었다’며 얼토당토 않은 위협을 하거든 죄책감을 느끼지는 마라.
그저 슬퍼해라.
깊게 오롯이 다 슬퍼하고,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삶을 조각하면 된다.

도저히 그렇게 마음을 먹을 수 없거들랑, 그럼에도 당신의 삶을 조각하는 데 집중해라.
그들에게 현실적으로라도 보답하고 도움을 주고 싶다면, 그들을 지키고 싶다면, 결국 당신이 해야할 일은 주저앉는 게 아니라 당신의 삶을 완벽하게 조각하는 일이니까.

결국, 부모가 피해자인듯이 하든 그렇게 행동하지 않든, 우리는 우리자신의 삶을 조각하는 데 집중하면 된다.
당신들이 희생했다는 말에 선을 긋든 긋지 못하든, 우리는 우리의 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하는 데 몰입하면 된다.
지나간 시간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라도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면 그리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죄책감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있다.
자식이 부모 슬하에서 보살핌을 받은 건, 절대 죄스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들도 그들 입장에서 가장 행복할 것 같은 선택을 했을 뿐.
사랑한다면, 그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힘을 기르고 그들을 지켜주면 된다.
죄책감은, 미안하지만 우리가 부모에게 가져야 할 감정은 아니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