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분노가 암시하는 세가지 사실

나의 화는
몇가지를 스스로 드러내는데,
그 중 세가지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이야기해보자.

첫째, 경계의 착오

누군가 내게 상해를 입히거나
생명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의 거의 모든 화는
아직 명확히 확립되지 않은 경계선을
드러내는 표식이다.

삶은 원래 잔혹하다.
각자는 각자의 자유라 믿는 걸 행사할 뿐이다.
그 잔인하고 처연한 진실이
우리 앞에 드러나는 일은
드물지만 의외로 빈번하다.

감정이 생존을 위해 진화해왔다곤 하나,
전쟁터가 아닌 일상에서 우리에게 유익한 건
자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은 우리를 수렵시절로 돌려놓고
우리는 불필요한 소모와 제살깎아먹기를
자동으로 가동시키게 된다 ㅋㅋ

옳든 옳지 않든
그게 얼마나 잔인하든
그것과 무관하게
각자의 경계는 자기자신으로 한정되어있다.

둘째, 위협의 출현

화는,
그것이 내게 위협이 되었다는 증거다.

상대가 꼬마아이든,
젠틀한 지식인이든,
드라마 속 인물이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화가 났다는 것이고
그건 결국 무언가가
우리에게 명백하게 위협이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인간의 감정은
생존을 위해 진화해온 것이다.
내 생존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를 진정으로 화나게 하지는 않는다.

명심해라.
우리를 화나게 하는 모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내게 위협이 되는 것들이다.
위협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되면,
더이상 그것은 우리를 화나게 만들지 못한다.

셋째, 화를 내지 않는 두가지 경우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두 경우다.
애초에 나의 위상을 낮추고
철저하게 상대를 거스르지 않거나,
일상의 많은 것들이
내게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거나.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전자는 화를 ‘내지’ 않는 것에 그치지만
후자는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심리상담 현장에서
일관적으로 느껴온 건
사람들은 의외로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을
혼동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둘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나보다 타인이 너무나 중요해서
내면에서 화가 나냐 안 나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릴 때가 많다.
대신 화를 내냐 안 내냐가 늘 핵심이다.
이건 타인에게 드러나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인 채
내면에서 화가 나든 안 나든
일단 화를 내지 않고 친절하게 군다.
그리고 삶의 어느 순간엔가
무시해왔던 내면의 화가 터져나오면
그 때부터 엄한 일(?!)을 하기 시작한다 ㅋㅋ

이게 전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오랜시간 나를 잘 조각해서
충분히 강인하고 성숙해진 인간은
화가 잘 나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내게 위협이 될 일이 적기 때문이다.

조금 더 와닿는 이해를 위해,
니체의 인간관을 잠시 이야기해보자.
인간은,
낙타 -> 사자 -> 아이
가 되며 이상적인 인간이 되어간다고 했다.

묵묵히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군말 한마디 없이 짐을 나르는 낙타,
그저 내가 지금 기쁘고 즐거운 것에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몰입하며 사는 아이,

사자를 뺀 이 두가지 단계의 인간이
각각 화를 내지 않는 두 경우의 전자, 후자다.
낙타도, 아이도
화를 내지 않는다.

기회

화는,
기회다.
나를 이해하고 돌아볼 수 있는 기회.
오늘 우리가 나눈 세가지 이야기를
잘 기억해두었다가,
삶을 윤택하게 조각해나가는 데
유용하게 써먹어보자.
이런 게 하나 하나 쌓이면,
삶은 몰라보게 쾌적해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