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장애와 자유의 역설

결정장애로 메뉴 못고르는 우리

어린 시절, 친구들이 항상 고민하던 연애고민 중 하나는 바로 메뉴선정이었다.
주말에 데이트가 있다.
연인(혹은 썸녀)에게 물어본다.
뭐먹고 싶냐고.
그런데 자꾸 옆에서 여자선배나 여사친이 그러는거다.
‘야, 그거 좀 알아서 센스있게 예약해두거나 하면 좋잖아.’
???? 아니 뭘 먹을지 물어봐야 예약을 하지.
그거 물어보면 나도 뭘 먹을지 결정해야 되는데 부담 돼 ~
나더러 골라라고 하면 싫어 그거.

뭐 이런 류의 대화.
중국집 가서 뭐 먹을지 고민하느라 주방에 주문 안 들어가고 있는 상황을 보자면, 뭘 먹을지 고르는 게 쉽지 않은 사안 같기도 하다.
메뉴를 줄이면 오히려 불만이 느는 게 아니라 만족도가 증가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고르기 어렵다는거다.
경제학에서는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만족도도 증가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왜 그럴까.

결정장애가 있는 이유

인간은 기본적으로 위험을 싫어한다.
진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위험을 극도로 기피하는 사람들만이 몇세대고 살아남아, 지금 이 시대에 사는 후손을 남길 수 있었을테니.
위험이라는 건 굉장히 다양해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위험도 위험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위험을 극도로 싫어한다.
사람들이 왜 로또를 맨날 ‘자동’으로 살까.
분석해보니 자동이 더 확률이 높아서?
아니다.
내가 직접 손으로 고른 숫자가 자꾸 실패로 판명나는 게 싫어서다. 기분도 나쁘고.

우리는 우리가 아둔하고 멍청한 선택을 해서 실패를 하게 될 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기가 너무 너무 싫다.

자유가 싫은 이유

문제는 자유다.
자유는, 필연적으로 그런 실패의 위험들을, 그에 대한 모든 책임들을 내가 지게끔 만든다.
자유라는 게 기본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직접 모두 선택하는 것이지 타인이 나 대신 결정해주고 선택해주는 게 아니니까.

이쯤되면 자유라는 녀석이 싫을법도 하다.
자유가 고통스럽다는 철학자들의 말은 그래서 나온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냥, 내가 직접 무언가를 결정했다가 실패할 위험없이, 전문가나 선구자가 딱 그 길을 알려주면 그대로 가고 싶어한다.
아니면, 그냥 남들이 다들 하는대로 나도 똑같이 그대로 누구나 다 그렇게 사니까, 남들도 다 그러니까, 라는 허울 아래에서 남들 사는 그대로 살고 싶어한다.
그래야 혹시 이게 대실패로 끝나더라도, 내 책임이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가 그랬던거라며 나를 보호할 수 있을테니까.

결정장애와 판단의존

이게 바로 우리가 속한 집단, 조직, 사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판단을 그대로 따르게 되는 ‘판단의존’이다.
이 판단의존은 굉장히 아늑하고 편안하다.
나와 같이 여기에 속해있는 사람들 모두가 다같이 그 무리의 판단과 같은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하니까, 실패해도 다같이 실패한거고 이 무리 전체가 실패한거지 나라는 개인이 실패한 게 아니다.
나만 XX인 게 아니라는거다.
내 책임도 아닌거고.
잘못 결정해서 실패하게 되는 일의 책임이 나에게 올 위험이 애초에 차단되는거다.

게다가 내가 더 고민하고 노력하고 스스로를 단련해서 좋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나는 내가 속한 이 무리가 결정하고 판단한대로 그대로 똑같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진짜 ‘개꿀’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조각가와 피해자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그게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만 보장되면, 그걸로 우리 삶은 충분한걸까.
어쩌면 정말 중요한 결정이 그렇게 내가 아닌 외부의 선택에 의해 실패로 끝나버리고 나면, 우리는 억울함이나 원망을 가지는 건 아닐까.
그렇게 판단을 의존해버린 나 자신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아니라, 왜 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그렇게 날 위한 결정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결정으로 내려버렸냐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억울해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둘로 나뉜다.
자신의 삶을 원하는 모습으로 조각해나가는 ‘조각가’ 끝없이 외부로부터 휘둘리고 조종당하며 이용당하는 ‘피해자’.
우리가 피해자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스스로 삶을 결정하는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자유를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책임이 전적으로 내게 올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판단을 의존하기로 한 선택도, 스스로 무언가를 판단내리고 결정하는 선택만큼이나 큰 의미를 가지는 엄청난 선택이다.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무언가를 하는 결정보다 더 엄청난 결정이 되곤 한다.
내 삶의 결정권을 남에게 줘버리는 선택이, 과연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보다 덜 위험한 선택일지는 알 수 없다.

피해자로 살아가기로 선택한 대가

적어도 확실한 것은, 내 삶을 내가 선택하지 않는 대가는 혹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남들이 하는 선택, 내가 속한 집단이 하는 판단을 그저 따르게 되면,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무능하고 현명하지도 않고 우리보다 뛰어날 것도 하나 없는 멍청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대로, 그렇게 우리의 삶이 흘러가버릴수도 있게 된다.
다들 자신이 직접 책임지고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한 탓에, 시덥잖은 소수가 지들 마음대로 세상을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대신 우리는 ‘피해자’가 되어 살아가고 말이다.

스티브잡스가 했던 말을 끝으로 글을 마친다.
“Everything around you that you call life was made up by people that were no smarter than you.”
“(당신이 ‘세상’이라고 부르는) 당신 주위의 모든 것들, 즉 당신의 세상은, 실은 당신보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당신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조각해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