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자해지’는 착각이다

결자해지

맺을 결(結), 놈 자(者), 풀 해(解), 어조사 지(之).

일을 저지른 놈이 사고친 건 수습해야 한다는 말이다.

좋은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이 저 말처럼 그렇게 굴러간다면,
‘세상이 지옥같다’는 말을 굳이 내뱉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자성어는 사자성어일 뿐.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는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이걸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한다.

잔혹한 삶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는 사자성어 대신,
진실을 이야기해보자.

사는 게 힘들다.
아무리 노력해도 생각처럼 잘 되지 않고,
기대할만한 미래가 보이지 않고,
하루하루 겨우 견디긴 하지만 고통의 연속이다.

그래, 세상이 문제다.
이 세상은 불공평하고 더럽고
윤리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못해서 그렇다.

그러면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은,
세상이 다시 아름답고 윤리적이고 공평해져서 해결되어야 할 일이다.
내 탓이 아니니까.

… 정말 그럴까?

세상은 애초부터 공평하지 않다.
그리고 세상이 공평해야 한다는 건,
우리들의 간절한 희망일 뿐,
실제 세상은 전혀 그런 거에 관심이 없다.
단 한 번도 세상은 그런 적이 없었다.

그리고 위의 결론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백번 양보해서 이 모든 나의 고통이 철저하게 세상 탓이라고 해보자.
그렇다고 해도 저 결론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맞는 말 절반은 ‘세상이 지옥같아서 내 삶이 이리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틀린 말 절반은 ‘이 고통의 원인인 세상이 올바르게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틀렸다는 게,
세상이 더이상 그러지 않도록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야, 너무 좋지.
세상이 그렇게 올바르게 된다면, 정말 너무 좋지.
그래서 우리 각자의 힘겨움과 고통이 해소된다면, 너무 좋지 진짜.

근데 그게 되냐고.
우리가 힘겨우니 세상은 속히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라,
라고 외치면 세상이 우리 뜻대로 변할까.
그럴 일은 없다.
세상은 우리의 뜻대로 움직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녀석이 아니다.

내가 힘겨운 게 지옥같은 세상 때문이라 한들,
원인을 제공한 세상이 이 힘겨움을 해소해주는
‘결자해지’는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해결은 누가해야 할까

해결은 우리가 해야 한다.
그게 바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다.

아니, 왜?
내 잘못이 아니잖아?
내 탓이 아닌데 왜 내가 그걸 해결해야 해?

이 XX같은 생각을 뜯어고쳐야 한다.
비난을 하는 게 아니다.
그냥 우리는 모두 당한거다.
학교에서 그리 가르치니까.
그래야 옳은 것이니 우리에겐 책임이 없다고 가르치니까.

하지만 우리의 삶은 오롯이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잘못이 0.1도 없다한들 내 삶의 중심에 선 주인은 우리다.

학폭

이미 오래전부터 불거져왔지만 여전히 쉽게 해결되지 않는 학폭문제는
요즘도 항상 거론되는 문제다.
유명해진 연예인이 과거 학폭문제로 나락가는 일은,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익숙한 광경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학폭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얼마나 개같은 경우인가.
물리적인 힘에 짓눌려 나의 존엄이 짓밟히는 일은
그 어떤 시대,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긴다.
여기에 학폭 당하는 사람의 잘못이 뭐 얼마나 있을까.
십중팔구 학폭가해자의 잘못이다.

그런데 여기서, 결자해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 고상한 사자성어에 따르면,
이 학폭 문제가 해결되려면 학폭가해자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태어나 피해자에게 무릎꿇고 싹싹 빌며 사과하고 죄를 뉘우쳐 더이상 폭행을 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그러면 너무 좋지!
그런데 그 숱한 학폭문제의 결말을 인터넷으로 한 번 찾아봐라.
그런 일이 벌어지냐고.
그런 일이 안 일어난다는 걸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세상 모두가 안다.

이 때 피해자는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피해로 심신이 피폐해진다.
하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새 사람이 되어 죄를 뉘우치고 저 악행을 멈춰야지.’ 라고만 생각한다면,
그 피해자의 삶은 그 버러지같은 가해자 때문에 계속 흔들리고 허물어진다.

분통이 터지더라도, 결국 선량한 피해자 본인이 힘을 내어 자신의 삶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신고를 하든, 고소를 하든,
학교를 옮기거나 무단결석을 해서라도 가해자를 피하든,
아니면 이악물고 MMA체육관에 가서 그 새끼를 죽여버릴 수 있을 때까지 힘을 기르든,
무언가 움직임이 있어야만 한다.

억울할 수 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그 고생을 해야 하나.
가뜩이나 이미 너무 고통스럽고 상처투성이에 피흘리는 중인데.
하지만 내 삶을 위해 일어서서 움직여야 한다.
여지껏 살아온 이 답답하고 공허한 삶, 후회와 불안으로 뒤범벅이 된 삶의 굴레를 끊어내고,
될 수 있는 최고의 내가 되어 청량한 정신으로 기쁨과 희열이 가득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학창시절에 그런 일이 내게 벌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영영 나의 일은 아닐거라 장담하지 마라.
장소가 학교가 아니고 벌어지는 일이 폭행이 아닐 뿐,
힘에 의해 강제로 짓밟히거나 유린당하는 일은
살다보면 부지불식 간에 인생에 불쑥 찾아오니까.

그 때 가장 우리에게 중요한 건,
‘결자해지’는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